광란의 학살자 나치의 그 악랄한 살인 만행
원제 : 르완다 학살보다 빠른 *나치 학살, "100일 동안 147만 명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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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의 뜻과 의미

나치(Nazi)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줄임말로, 1920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존재했던 극우 정당.
'나치(Nazi) '라는 단어는 '국가사회주의'의 독일어 표현인 'Nationalsozialismus'에서 유래됨.
나치즘( Nazism) 은 파시즘과 인종주의를 결합한 전체주의 사상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중심으로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 소수 민족을 박해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음.
2. 나치의 핵심 이념
인종주의: 아리안 민족을 가장 우월한 인종으로 여기고, 다른 민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
특히 유대인을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극심한 반유대주의를 조장.
전체주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국가의 통제 아래 두었음.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국가의 모든 부분를 통일하고 개인은 국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
군국주의: 전쟁과 폭력을 미화하고 군사력 강화를 추구했음.
독일의 영토 확장을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음.
반공주의: 공산주의를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탄압.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반공 정책을 추진.
3. 나치의 조직과 몰락
나치(Nazi)는 아돌프 히틀러를 총통으로 하는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
당원들은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를 장악.
나치의 주요 조직
SS (슈츠슈타펠): 나치의 핵심 조직, 히틀러의 경호 및 비밀 경찰 역할을 담당. 유대인 학살 등 각종 만행 자행.
SA (슈투름아프타일룽): 나치의 준군사 조직, 거리 시위와 폭력을 통해 나치의 세력을 확장.
히틀러 유겐트: 청소년들을 나치즘 사상으로 세뇌하기 위한 조직.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몰락. 히틀러는 자살했고,
나치 지도부는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처벌받았음..........................................................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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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다룬 글(연재 105, 106)을 본 독자 한 분이
이메일로 질문을 하나 보내주셨다.
짧게 줄이자면,
'게토 유대인 가운데 도망쳐 살아남은 사람들은 없을까.
있다면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라는 물음이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도 탈주 생존자가 어느 정도였는지 제대로 알긴 어렵다고들 말한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최근작(Blood and Ruins, 2021)에서 관련 내용을 보자.
독일이 점령한 유럽에서 검거를 피하거나
게토와 수용소 생활을 모면한 유대인이 얼마나 되는지 추정한 수치들은
4만 명에서 8만 명으로 격차가 아주 크다.
그런 유대인의 압도적 다수는 지리적 조건이 가장 유리한 동유럽에 집중돼 있었다.
1942년 약 300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한 폴란드 총독부에서는,
비록 검증할 수 없는 수치이긴 하지만,
최대 5만 명의 유대인이 루블린과 라돔 주변의 숲으로 달아난 것으로 추정된다
- 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책과 함께, 2024, 11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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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_Ghetto :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가리킴.
게토라는 명칭은 1516년경 베네치아에서 처음 등장. 어원은 미상.
홀로코스트_ Holocaust : 홀로코스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 및 협력자들에 의해
유대인을 포함한 600만 명을 체계적으로 탄압하고 학살한 사건을 의미.
홀로코스트는 유럽에서 발생했으며,
유대인뿐만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들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음. SinEun *******************************************************************************************************************************
게토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나치 독일은 '도망은 곧 사형'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붙잡히면 곧바로 처형됐다.
도망자가 안전한 곳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뿌리 깊은 반유대 정서를 지닌 동유럽 농민들은 유대인 도망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밀고를 해 보상금을 챙기려들곤 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도망자들은 사람 발길이 드문 숲지대, 또는 늪지대에 몸을 감췄다.
시골 출신이라면 모를까,
도시에서 살았던 유대인에게 숲이나 늪에서의 거친 자연 생활은 힘겹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게토 탈주자들, 추적자에 쫓기다
무엇보다 식량을 구하기 어려웠다.
원주민들의 식량을 훔치거나 물물교환으로 어렵사리 먹거리를 마련했다.
유대교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치'는 접어둬야 했다.
또한 추적자들의 눈길을 피하느라 늘 긴장 속에 지냈다.
추적자는 많았다.
독일군과 경찰은 물론, 폴란드의 친독 부역집단인 '감색경찰'(Granatowa),
그리고 소련인들 가운데 전향자(부역자)로 꾸린 '동방부대'가 유대인 도망자를 붙잡으러 다녔다.
감색경찰과 동방부대원들은 독일인들조차 고개를 돌릴 만큼 잔인하게 유대인을 다뤘다.
추적자는 이들 말고도 또 있었다.
반유대 정서가 강했던 우크라이나인들도 유대인에게 위협적이었다.
오버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두 독재자(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 분석한 책
(The Dicatators, 2004)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점령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은 우크라이나 민족도 '유대-볼셰비즘'의 희생자라며 반유대주의 선전을 펼쳤다.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민병(民兵)으로서 유대인을 검거하고 처형하며 나치 독일을 위해 일했다.
유대인을 당국에 넘기면 보상을 받았다.
소련(우크라이나)의 유대인이 숲으로 피신하여 (항독) 유격대에 합류했을 때도
비유대인들로부터 때때로 죽음의 영접을 받았다
-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2008, 818쪽 -
반유대정서가 강했던 폴란드․우크라이나․소련의 항독 파르티잔((partisan, 빨치산, 유격대)들도
유대인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역사학자 오버리는
유대인 도망자 4명 가운데 1명은 비유대인 파르티잔의 손에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붙잡힌 여성 유대인들은 심지어 성폭행을 당한 뒤 죽었다.
그 살벌했던 시절의 유럽 땅에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부르기 십상이었다.
게토에서 도망쳐 어렵사리 파르티잔에 들어갔던 한 유대인은
가톨릭 신자로 변신해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예전에 감옥에 있을 때 가톨릭 기도문과 의례를 몸에 익혀둔 덕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어려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유대인은 잘라 말했다.
"나는 유대인일 수가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들이 나를 죽였을 것이다”
- 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1146쪽 -
나치 박해를 피해 게토에서 달아난 유대인들의 생존 확률은 극히 낮았다.
역사학자 오버리는 10명 가운데 한두 명을 뺀 나머지 대부분은 반유대적 폭력
또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을 걸로 추정한다.
유대인들에겐 그야말로 고난의 시절이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들이
21세기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아랍 난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친독파 유대인 평의회장도 아우슈비츠로
나치 독일이 동유럽 독일 점령지(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일대에 만든
1000개의 게토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기고 가장 늦게 문을 닫은 곳이 우치 게토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5개월 뒤인 1940년 2월
폴란드 지도 한복판에 자리 잡은 우치 빈민가에 게토를 세웠다.
철조망과 나무 울타리로 에워싼 넓이 4km²의 좁은 구역에 20만 명 넘는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됐다.
바르샤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게토였다.
우치 게토 주민들도 수용소로의 이송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1942년 1월부터 9월 사이에 적어도 7만 5,000명이 헤움노 절멸수용소로 옮겨져 죽었다.
우치에서 50km쯤 떨어진 헤움노에선
1941년 12월부터 이동식 가스 자동차가 학살수단으로 쓰였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유대인들에게 '독일에서 노동자로 일하러간다'고 속여
한 번에 50~70명씩 밀폐된 트럭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 다음 트럭 안으로 연결된 파이프로 일산화탄소 가스를 불어넣어 질식사시켰다
이보다 한 단계 진화한 살해방식이
샤워실처럼 꾸민 건물 안에서 이뤄지는 치클론 B 독가스 살포다.
1944년 6월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총사령관은 "게토를 깨끗이 청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드디어 우치 게토 '종말의 날'이 다가왔다.
8월4일, '게토가 공장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집단 이송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처형된다”는 경고와 함께였다.
다른 곳으로 게토와 공장을 옮긴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6만 8400명의 우치 유대인들을 태운 열차들이 멈춘 곳은 독일 땅도, 공장도 아니었다.
'죽음의 땅'인 아우슈비츠였다.
우치 게토를 떠나는 맨 마지막 열차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대인 가운데는
유대인평의회 의장 하임 룸코프스키와 그의 가족도 들어있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고아원 원장을 지냈던 룸코프스키는 친독(親獨) 부역자였다.
식량 배급표를 미끼로 게토 주민들에게 군수물자를 만드는 장시간의 노예 노동을 강요했다.
자신의 얼굴 초상을 박아 넣은 우표와 화폐를 찍어내고, 주민들이 '총독'이라 불러주길 바랐다.
주민들의 눈에 비친 그는 변절자이자 나치 전쟁범죄의 공범자였다.
'게토 총독'처럼 으스댔던 그가
정작 막판에 아우슈비츠로 떠나는 화물열차에 강제로 태워졌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밤과 안개처럼 사라진 사람들
19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시체제로 들어가자,
나치 정권은 이른바 '패배주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전쟁 사흘 째 되던 날(9월3일)
나치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와 그의 오른팔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독일은 결국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란 투로 불만을 나타내는 독일인들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붙잡힌 자들은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점령 아래 놓인 유럽 시민들도 입에 재갈을 물렸다.
폴란드 침공 2년3개월 뒤인 1941년 12월7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 최고사령관 빌헬름 카이텔(패전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이 서명해 내놓은 법령도 그러했다.
'밤과 안개'(Nacht und Nebel) 로 알려진 그 법령은 유럽 전역의 독일군 점령지에 적용됐다.
붙잡힌 사람들이 어디론가 '밤과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고 붙은 이름이다
(1956년 프랑스의 알랭 레네 감독이 만든 다큐 '밤과 안개'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고전적 명작으로 꼽힌다.
레네는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여인과 일본 남성과의 사랑을 담은
1959년도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감독이기도 하다).
수용소는 히틀러가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였다.
눈엣가시라 여겨진 사람들은 나치 비밀경찰(게슈타포)에게 영장도 없이 붙잡혀 수용소로 사라졌다.
전쟁이 터지기 전 수감자는 세 부류였다.
첫째는 정치범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여호와의 증인, 나치에 비판적인 성직자와 언론인,
그리고 부패 또는 권력남용 등으로 숙청된 나치당원과 돌격대원 등이었다.
둘째는 강도나 동성애 등 이른바 '반사회적인 범죄자',
셋째는 유대인들이었다.
1939년 전쟁이 터진 뒤부터는 수감자가 달라졌다.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군 전쟁포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요원 등이 수용소에 갇혔다.
물론 유대인 수감자가 절대 다수였다
-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223쪽 참조 -
가스실 갖춘 6개 '죽음의 수용소'
1942년 1월20일 베를린 서쪽 포츠담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반제 호숫가의 나치 친위대 별장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을 논의한 악명 높은
이른바 '반제 회의' 뒤 학살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나치는 '학살'이란 용어보다는 덜 직설적인 '최종해결'이란 용어를 즐겨 썼다.
실제로 나치 히틀러 집단의 지도자들은 유대인 정책을 둘러싼 공적 논의를
(나중에라도 조사가 있을 경우 빠져나갈 꼼수에서였을까)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언어로 흐리곤 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중요한 사실은
반제 회의를 기점으로 폴란드에 '죽음의 수용소'들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독일의 지배 아래 놓인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은
그 무렵 세워진 6개 수용소(헤움노,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루블린, 아우슈비츠-베르키나우)의
가스실로 보내졌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이 6개 수용소를 가리켜 Vernichtungslager라 일컫는다.
우리말로는 '집단학살 수용소' 또는 '절멸 수용소'다.
1942년 들어 건설을 서둘렀던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이 세 개의 절멸수용소가
겨우 몇 달 안에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건설속도를 높이기 위해 검은 옷을 입은 소련군 전쟁포로들과
인근 지역의 게토 유대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인 집단학살기계'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학살수용소의 구조는 모두 비슷했다.
홀로코스트와 관련한 선구적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버몬트대, 1926-2007)의 글을 보자.
경비병력이 거주하는 막사 한 동,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이 점호를 받는 마당,
탈의실,
'수도관'이라고 칭해지던 S자 모양의 보도,
가스실의 구조는 거의 똑같았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은 보도를 지나 가스실로 들어갔다.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은 중간 규모의 거실 크기였다.
가스실은 처음엔 3개를 넘지 않았다.
베우제츠에서 사용된 가스는 병에 들어 있었고,
내용물은 이산화탄소였으며, 부분적으로는 시안화수소였을 수도 있다.
소비부르에서는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 혼합가스를 가스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시체 소각실은 설치되지 않았다.
시체는 구덩이에서 태웠다
-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234-1235쪽 -

산업적 규모의 대량학살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사실은
이들 절멸수용소가 갈수록 산업적 규모의 대량학살을 위해 세워졌다는 점이다.
가스실과 화장터(매장 또는 소각 시설) 등을 갖추고 하루에 수만 명을 죽였다.
그곳에 실려간 유대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열차에서 내리는 즉시 몇 시간 안에 숨을 거두었다.
이들 수용소는 소나무 가지로 위장한 나무 망루와 철조망 울타리가 있었지만,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루블린)와는 달리 전기 울타리가 없었다.
이송자들을 곧바로 '처리'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루블린)는
처음엔 강제노동수용소로 운용되다가 나중에 가스실과 화장터가 들어섰다는 점에서
앞의 수용소들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아우슈비츠는 대규모 학살시설을 갖춘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이 높지만,
또 다른 주요 기능은 강제 노동이었다.
1백만 명 가까운 유대인이 목숨을 잃은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된 것은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제2수용소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
모두 6개의 대형 가스실들이 잇달아 들어선 뒤부터였다.
이들 6개 수용소의 공통점은
△오스트반(Ostbahn)이라 부르는 동유럽 간선 철도의 지선으로
화물열차로 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고
△인구 밀집 지역인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들이라 일반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고,
△대체로 숲이 우거진 지역이나 허허벌판에 자리 잡았다.
1942년부터 1944년 여름까지 2년 동안에 걸쳐
1000개의 게토에 흩어져 수용돼 있던 유대인들과
독일 점령 아래 놓였던 유럽 각지(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발칸반도 등)의 유대인들을
이들 수용소로 끌려갔다.
라울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나치가 벌인) 파괴과정의 가장 비밀스런 작전은 6개의 학살수용소에서 펼쳐졌다.
그 수용소들은 폴란드,
특히 독일에 병합된 지역과 부크강 사이에 위치했다.
3년 동안 수천 대의 기차가 300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기차는 돌아갔지만 승객들은 사라졌다.
학살수용소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아침에 희생자가 기차에서 내리면,
당일 밤에 그의 시체가 소각되고 옷가지는 포장되어 독일로 발송되었다.
그것은 치밀한 기획의 산물이었다.
(라울 힐베르크, 1221쪽).
1942년의 라인하르트 작전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나치가 집중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한 시기를 1942년으로 잡고 있다.
절멸수용소들이 그야말로 풀가동하던 해가 1942년이었다.
라울 힐베르크가 작성한 <홀로코스트 사망자의 연도별 분류> 자료를 보면
△1933-1940년 사이엔 10만 명 이하
△ 1941년 110만 명
△1942년 260만명
△1943년 60만 명
△1944년 60만 명
△1945년 10만 명 이상으로, 1942년이 가장 많았다(합계 510만 명, 라울 힐베르크, 1722쪽).
나치가 기획한 유대인 학살작전의 비밀 암호명 가운데 하나가
'라인하르트 작전'(Aktion Reinhard)이다.
이 작전은 1942년 3월에 시작되어 1943년 11월까지 21개월 동안 이어졌다.
작전명은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최측근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제국보안본부장 겸 체코 총독)의 이름에서 따왔다.
라인하르트 작전의 요점은
△폴란드 유대인을 말살한다는 원칙 아래
△폴란드에 처형시설을 갖춘 6개의 절멸수용소들을 세우고
△게토의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강제 이송해 독가스나 총살로 죽인다는 섬뜩한 내용이었다.
'프라하의 도살자'란 악명을 지닌 하이드리히는
오만함과 부주의로 제 목숨을 줄였다.
1942년 5월 27일 아침 체코 프라하의 집무실로 가려고
경호차도 없이 벤츠 오픈카를 타고 가다가 영국에서 훈련받은 체코 특공대원들의 습격을 받았다.
중상을 입은 그는 8일 뒤 프라하 병원에서 죽었다.
나치는 보복 겸 경고로 한 체코 마을 하나를 불태워버리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나치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철저한 보안 속에 펼쳐나갔기에
'집단학살 현황' 같은 도표나 기록은 없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전 무렵엔 전쟁범죄로 처벌받지 않으려고 관련 문서들을 일부러 파기 소각해버렸다.
한편으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중심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비쳐졌기에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동안 절멸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00일 동안 147만 명이 죽었다
이스라엘 연구자 레비 스톤(텔아비브대, 생물수학)은
통계와 숫자에 밝은 수학자로,
나치의 철도 운송 기록을 바탕으로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규모를 추산했다.
특히
그는 1942년 7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100일 동안
나치가 벌인 유대인 절멸작전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147만 명으로 본다.
현대전쟁사에서 벌어졌던 어떤 다른 대량 학살에 견주어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유달리 빠르게 폭력적인 성격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스톤의 글을 보자.
라인하르트 작전(1942~1943)은
홀로코스트 중 가장 큰 규모의 단일 학살 캠페인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철도 운송 기록에서 비롯된 데이터 세트를 사용해 살펴보니,
제2차 세계대전 6년 동안 사망한 유대인의 25%가 넘는 147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0일(약 3개월) 동안 나치에 의해 집중적으로 살해됐다.
라인하르트 작전은 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의 비율(99.9% 이상)과 희생자 숫자를 고려할 때
극단적으로 폭력적이었다.
(Lewi Stone, 'Quantifying the Holocaust: Hyperintense Kill Rates during the Nazi genocide',
Science Advances, 2019년 1월).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후투-투치족 사이의 내전이 터졌을 때
그해 4월부터 7월까지 약 100일 동안 80만 명이 학살당했다.
20세기 말에 일어난 끔찍한 인종청소였다.
스톤은 르완다 학살을 보기로 들면서,
나치의 학살 속도가 르완다 학살보다도 빠르게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서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스톤의 글을 더 보자.
라인하르트 작전은
1942년 죽음의 수용소 베우제츠,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의 건설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다른 기록들은 이 작전이 1941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간까지 합치면 약 17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
특히
1942년 8월과 9월 두 달 동안 매달 약 50만 명의 피해자가 생겼으며,
이들은 수용소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독가스로 죽거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기동학살대)의 총살로 죽었다.
이 3개월(92일) 동안의 데이터에 따르면
희생자 가운데 29만 명이 총살로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라인하르트 작전은
홀로코스트 안에서 가장 큰 살인 캠페인일 뿐만 아니라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Lewi Stone, 위 논문)
결론적으로,
스톤의 말은 유대인 절멸작전 중 100일 동안 죽은 '147만'이란 숫자는
'우리 인간의 정신이 공감하기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크고 이해하기 어려운 단일 숫자'라 했다.
그럼에도
나치는 수용소의 '처리 용량'이 작아 애를 태웠다.
1942년 6월에 세운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선
미처 태우지 못해 썩어가는 시체 더미들이 쌓여있는 가운데 새로운 유대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이에 따라 1942년 9월까지 기존의 수용소 안에서 가스실이 두 배 가량 증축되었다.
수용소의 크기에서나 학살 규모로 볼 때,
트레블링카는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컸다.
1942년 7월부터 1943년 8월까지 90만 명의 목숨을 트레블링카가 앗아갔다고 추정된다.
나치 친위대가 지옥문을 장식하는 데 신경을 쓴 듯한, 어쩌면 조롱하려는 의도가 담긴 듯한 모습은 흥미롭다.
트레블링카 가스실 건물 전면에 다윗의 별을 걸어놓았고,
입구에는 시너고그(유대교회당)에서 떼어온 커다란 커튼을 둘렀다.
그 커튼에 원래 적혀있던, '이것은 정의로운 자가 지나는 문이다'라는 구절이
곧 숨을 거두게 될 희생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22살 난 청년 리하르트 글라차르는 트레블링카에서
1942년 10월부터 1년 가까이 희생자들이 남긴 소지품을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
기적적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볼프강 벤츠(베를린기술종합대, 독일현대사)는 훗날 전범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그의 말을 이렇게 옮겼다.
작지만 엄청난 용량을 지닌 덫이 바로 트레블링카였다.
1942년 가을 폭 400m, 길이 600m의 공간에서 날마다 1만 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이발소'에서 머리를 삭발 당한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앙상한 뼈만 드러낸 남자들이 차례차례 호스 관처럼 생긴 좁다란 통로를 지나 가스실로 끌려갔다.
가시철조망을 두른 그 통로는
사나운 동물들을 서커스 원형경기장 안으로 몰고 갈 때 쓰는 출입문을 떠올리게 했다.
(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2, 154-155쪽).
유대인 처리 시설이 부족해지자,
1941년에 세워져 전쟁포로들을 가둬두던 루블린 지역의 마이다네크 강제노동수용소에도
1942년 9월과 10월 U자형 건물 안에 가스실 3개가 들어섰다.
그 무렵 나치는 루블린 일대의 유대인들을 모두 '해결'해버린다는 결정을 내렸고,
대규모 학살작전을 펼쳤다.
독일군 기동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
마이다네크로 끌려온 유대인들을 사살했던 것을 비롯해
동유럽 유대인 130만을 포함한 200만의 목숨을 총격으로 앗아간 전쟁범죄와 맞닿는다

▲ 1942년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에 막 도착한 유대인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위키미디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신조어 낳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는
나치 절멸수용소를 가리켜 '조립라인 방식으로 인간을 죽인, 전례가 없는 학살기관'이라 했다.
그 어느 전쟁사에서도
절멸수용소를 닮은 형태의 원형(原型)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힐베르크는 그 근거로,
절멸수용소가 전쟁포로나 수감자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했던 일반적인 수용소와
체계적인 학살 시설이 합해져서 태어난 혼합물이라는 점을 꼽았다
(라울 힐베르크, 1221쪽).
굳이 힐베르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치의 대량학살은 현대문명의 기술적 도움으로 가능했다.
치명적인 독가스, 길게 뻗은 파이프라인,
여러 구의 시신을 빠르게 태워 없애는 소각로 등은 19세기만 해도 없던 것들이다.
잘 짜인 조립 라인으로 이뤄진 홀로코스트는 산업적 규모의 학살이었다.
수용소를 운용하는 인력(나치 친위대 소속 지휘관과 감시병, 수감자들 가운데 뽑은 보조인력 등)은
'죽음의 수용소'의 작동이 멈추거나 삐꺽거리지 않고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학살 전문가 집단'이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731부대의 만행과 난징(南京) 학살을 비롯해
아시아에서 저질렀던 끔찍한 전쟁범죄와 더불어 인류문명사의 부끄러운 기록이다.
우리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고
부족국가든 민족국가든 하나의 정치조직을 이룬 이래로
끊임없이 벌여온 5000년 전쟁사에서
그처럼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경우는 없었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들을 기억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홀로코스트는 남의 일이 아닐 듯하다.
폴란드 유대인 출신의 법률가 라파엘 렘킨(미 듀크대, 1900-1959)은
집단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Genocide란 민족․종족을 뜻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행위를 뜻하는 라틴어 접미사 caedo의 합성어다).
램킨이 애를 쓴 덕분에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는
제노사이드협약(genocide convention,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1951년 발효).
이런 국제사회의 관심은
적어도 5000만에서 70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21세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의 이스라엘 전쟁범죄에서 보듯이,
"제노사이드협약은 문서로만 남았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강자의 주먹은 법보다 앞서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37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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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학살공장 그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
원제 : 하루에 1만 명 죽이고 불태운 아우슈비츠,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올해로 80년을 맞았다.
적어도 5000만 명에서 7000만 명쯤이 숨진 그 큰 전쟁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우리 한국인들로선 일제 강점기 시절에 벌어졌던
징병과 강제노동, 성노예 '위안부' 학대가 남긴 깊은 상흔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731부대의 세균전 실험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견주어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가 남긴 충격이 으뜸으로 꼽힌다.
유럽인들에게
'전쟁 중에 끔찍한 집단학살과 노예노동이 벌어졌던 곳이 어디냐'를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아우슈비츠'라고 말한다.
'죽음의 수용소' 또는 '절멸 수용소' 하면 아우슈비츠를 떠올린다.
그만큼 나치 전쟁범죄의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았다.
만주 하얼빈에 악마의 터를 잡았던 731 세균부대와 마찬가지로 인류전쟁사의 어두운 집단 기억을 지닌 곳이
아우슈비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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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용서와 화해를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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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유대인 출신인 장 아메리(1912-1978, 본명은 한스 마이어)는
나치 전쟁범죄에 관련된 깊이 있는 성찰로 이름을 남긴 작가다.
1943년 벨기에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게슈타포에게 붙잡힌 그는
고문을 받은 뒤 폴란드 아우슈비츠, 독일의 부헨발트, 베르겐-벨젠(<안네의 일기>로 이름이 알려진
소녀 안네 프랑크가 죽은 곳)을 거치며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른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아메르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워낙 악독했기에
'(나치의) 지나친 악의 부패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설명해주지 못 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것(나치의 전쟁범죄)은 어느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소련과 같은 독재정권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혁명 때처럼 불안에 떠는 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이른바 '문명국가'라 일컬어온) 독일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자연을 거역해서 무성생식(無性生殖)으로 생겨난 것 같았다.
(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필로소픽, 2022, 13-14쪽)
전쟁이 끝난 뒤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사람들을 아메리는 못 마땅하게 여겼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1938년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가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 자리를 잡았던,
<나와 너>로 잘 알려진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
프랑스 유대인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처럼
독일을 너그럽게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나치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를 모른다고 했다.
부버나 마르셀은 아우슈비츠 같은 지옥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곳 수감자들이 겪은 고통의 깊이를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장 아메리는
1978년 그의 작품 낭독회 때문에 머물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죽음은 흔히 말하는 '자살(Selbstmord)'이 아니라,
아메리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죽음(Freitod)'이었다.
아메리와 같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1919-1987)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87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집에서였다.
<이것이 인간인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비롯해,
레비는 수용소에 갇힌 한계 상황을 둘러싼 깊이 있고 진지한 생각들을 담은 저작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작가다.
앞의 아메리처럼 레비도 '용서'를 쉽게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이탈리아와 외국(독일)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파시즘)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나는 용서할 수 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270쪽)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한계상황 속에 갇힌 인간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놓고 긴 시간을 생각했을 아메리와 레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수용소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희미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범죄들이 날마다 벌어졌다.
수용소에서의 끔찍했던 체험이 아메리와 레비의 죽음을 앞당긴 단 하나의 이유는 아닐 테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줄곧 고통스런 기억(트라우마)로 남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탈출자 생기면 집단 처형으로 보복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져보자.
아우슈비츠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을까.
유대인 게토에 갇힌 이들이 탈출하는 것은 수용소에 견주어 그나마 틈이 있었다.
게토 밖으로 강제노역을 나갔다가 눈치 끝에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4만 명에서 8만 명쯤이 그렇게 게토를 벗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수용소는 달랐다.
전쟁 끝 무렵의 혼란을 틈타 도망친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선 수용소 탈출을 꿈꾸기 어려웠다.
수용소 주변은 이중으로 철조망이 둘러쳐졌고 고압의 전기가 흘렀다.
게다가 기관총과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이 망대 위에서 밤낮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1947년 교수형)가 독일 패전 뒤 폴란드 감옥에서
전범재판을 기다리며 남겼던 기록(Kommandant in Auschuwitz, 1963)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아우슈비츠에서 (탈출에) 성공한 예는 많지 않지만 탈출의 기회는 수없이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을 건 이상 탈출에 실패해서 죽음으로 끝날 것도 각오해야 했다.
탈출할 생각을 가로막아선 것은 보복과 (연고지에 남아있는) 가족·친지의 체포,
그리고 같은 고통을 나누어 가졌던 동료 수감자 10명 이상이 함께 '제거'된다는 것이었다.
(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 범우사, 2006, 158쪽)
탈출자가 붙잡히면
곧바로 수감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총살 또는 교수형으로 죽였다.
덩달아 동료 수감자들도 처형됐다.
그리고는 같은 수감자들이 연주하는 빠른 행진곡에 맞춰 이들 시신 주변을 다른 수감자들이 열을 지어 걷도록 시켰다.
탈출 의지를 꺾기 위한 음울한 공식 행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동료 수감자들이 집단 징벌을 받고
본보기로 탈출자 1명 당 적어도 10명이 처형당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탈출을 꿈꾸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탈출을 꾀하다가 경비병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일들은 가끔 일어났다.
총을 쏜 경비병에겐 포상휴가가 주어졌다.
수감자가 실제로 탈출을 꾀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옥 같은 삶을 스스로 끝내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일부러 철조망 쪽으로 다가가 감시병의 총격을 유도해 죽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포상휴가를 가고 싶은 경비병이
탈출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는 수감자를 겨냥해 일부러 총을 쏘았을 가능성이다.
이런 경우도 수용소 문서엔 '탈출 기도자 제거'로 기록됐다.
기차역에서 삶과 죽음 가른 멩겔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열차가 닿으면,
그곳 승강장에서 손에 흰 장갑을 낀 친위대 군의관들이 삶과 죽음을 갈랐다.
노인, 어린이, 임산부를 포함해 열차에서 내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 부적합' 판정을 받고
왼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왼쪽은 곧 가스실에서의 죽음을 뜻했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을 갈랐던 친위대 의사들 가운데 하나가 요제프 멩겔레였다.
그는 가학적인 쌍둥이 생체실험으로 '죽음의 천사'라는 악명을 얻었다.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복무하는 친위대 소속 의사는 20명이었다.
멩겔레는 그 20명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의 유대인 작가 퍼트리샤 포즈너는
멩겔레에 관한 행적을 좇다가 멩겔레의 외아들로부터
"아우슈비츠에 주임 약사가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 약사의 이름은 빅토르 카페시우스.
전범기업인 IG 파르벤의 자회사였던 제약회사 바이엘의 영업사원 출신이었다.
바이엘은 친위대 약사장교가 된 카페시우스와 손을 잡고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실험약들을 먹였다.
멩겔레와는 다른 종류의 생체실험이었고, 사망자들이 생겼다.
실험이 끝나면, '실험 완료. 피실험자 전원 사망. 신규 주문 곧 발주 예정'이란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친위대는 '인간 기니피그'들을 내주고 바이엘로부터 돈을 챙겼다.
이와 관련,
뒤늦게 서독 법정에 기소된 카페시우스는 1965년 9년형을 선고 받고 2년 반 뒤 사면으로 풀려났다.
작가 포즈너가
카페시우스에 관한 행적을 추적한 책(The Pharmacist of Auschwitz, 2017)에서
어떻게 나치 의사들이 아우슈비츠에서 기차에 실려온 사람들의 생사를 가르게 됐는지를 보자.
1943년 초까지는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의 지시에 따라
친위대 대원들이 승강장에 서서 기차에서 내리는 유대인들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의사들의 우두머리) 에두아르트 비르츠 박사(대위)는
새로 도착하는 수감자들의 선별작업을 직접 통제하길 원했다.
그는 아우슈비츠가 나치의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이므로,
의사들이 직접 실험대상을 선정할 수 있어야 하다고 주장했다.
1943년 봄 동부전선에서 훈장을 받은 32살의 요제프 멩겔레가 아우슈비츠로 합류하면서
비르츠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퍼트리샤 포즈너,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북트리거, 2020, 62-63쪽)
멩겔레는 1942년 러시아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뒤
철십자훈장과 함께 대위로 승진하면서 아우슈비츠로 옮겨갔다.
쌍둥이 연구에 빠져 있던 멩겔레로선
생체실험 대상자가 넘쳐나는 아우슈비츠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근무지였다.
멩겔레는 '꾀죄죄한 얼굴로 녹초가 된 채 무질서하게 밀려드는 수천 명의 수감자들 사이에서'
쌍둥이를 찾아내는 일을 따로 훈련을 받지 않은 친위대 대원에게 맡겨 둘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회스 수용소장은 결국 나치 의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943년 봄부터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가르는 선별작업에서 친위대원들은 손을 떼도록 했다.
수많은 신입 수감자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처음으로 마주한 나치 당원이 바로 멩겔레였다.
가끔은 휘파람으로 아리아를 불며
반짝이는 승마용 채찍으로 수감자 한 명 한 명에게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방향을 지시하는
이 친위대 장교의 모습은 많은 생존자들의 머릿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퍼트리샤 포즈너, 65쪽)
아우슈비츠 의사 20명이 모두 그 선별 작업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명령에 따라 하는 일이니까 하며 마지못해 나선 의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심리적 괴로움을 털어내려고 저녁마다 술을 퍼마셨다.
한 젊은 의사는 선별작업을 거부했다가 강등 당하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에서 혈액 샘플을 처리하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결국에는 약 5000명의 쌍둥이가 수감자들 사이에 '멩겔레의 동물원'이라 불리던 캠프 F의 14번 막사를 거쳐갔다.

수시로 옷 벗겨 모욕감 안겨
가스실 행을 가리키는 왼쪽이 아닌,
오른 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갖고 온 가방들을 다 빼앗기곤 발가벗어야 했다.
머리카락은 물론 몸의 털이란 털은 다 깎였다.
그 뒤로도 수감자들은 일상적으로 발가벗어야 하는 모욕을 겪었다.
이 검사, 의복 수색 등으로 수용소의 하루는 강압적으로 옷을 벗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수용소 노동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독가스실로 보내야 할지)를 가리는
'위원회'의 선별 심사를 받을 때도 발가벗어야 했다.
이탈리아 화학자로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전범기업 IG 파르벤 공장의 합성고무 '부나'를 만들었던
프리모 레비의 글을 보자.
맨발에 벌거벗은 인간은 온몸의 신경과 힘줄이 잘려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는 속수무책인 먹잇감이다.
비록 배급받은 게 더러운 옷이라 해도, 밑창이 나무로 된 형편없는 신발이라 해도,
의복이란 보잘 것 없지만 최소한의 방어다.
의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처럼 벌거벗고 느리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짓이겨질 수 있다고 느낀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37쪽)
수용소를 지키는 나치 친위대원들이 수감자의 옷을 벗도록 명령하는 것은
누가 지배자이고 누가 피지배자인가를 확인시키는 순간이기도 했다.
옷을 벗는 행위는 곧 복종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친위대원은
수감자들에게 '언제라도 나를 짓이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패배감과 모욕감을 안겨 주려는 의도가 담겼다.
오줌 누기도 쉽지 않았다
수감자들에게 무력감과 박탈감을 안겨주는 교묘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숟가락이었다.
나치는 수용소 신입자들에게 숟가락을 나눠주지 않았다.
개처럼 혀로 핥지 않고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수용소 안에서 숟가락 하나의 교환 가치는 빵 반개나 죽 1리터쯤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수용소 물정을 모르는 신입 수감자가 숟가락을 마련하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요구를 받곤 했다.
그렇다면 수용소 안에서 숟가락이 정말로 귀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수감자들에게 굴욕감을 안기려고 일부러 주지 않았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접수했을 때
그곳 생존자들은 창고 안에서 수만 개나 되는 숟가락들을 발견했다.
막 이송돼 온 사람들의 가방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 속에는 값 나가는 은수저들도 있었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플라스틱 숟가락들도 수천 개나 있었다.
수감자들이 겪은 또 다른 고통은 화장실을 자주 갈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방광이 약하거나 긴장감 때문에 자주 소변을 봐야 하는 수감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리현상조차도 자유롭게 해결하기 어려웠다.
카포나 경비대원은 너그럽지 않았다.
참다못한 이들은 옷을 입은 채로 소변을 봐야 했고, 그 때마다 비웃음을 샀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자존감마저 잃기 마련이었다.
여성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나눠준 반합(에나멜 금속으로 만든 우묵한 그릇)을 세 가지 용도로 썼다.
날마다 죽을 배급받는 데에,
빨래터처럼 물이 나오는 곳에서 몸을 씻는 데에,
그리고 화장실 가기 어려운 밤에 소변보는 데 썼다.
굳이 말하자면, 다목적 반합이었다.
수용소 여성들은 그런 반합을 바라볼 때마다 속이 상했고 자살 충동마저 느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금지된 문신 새겨
아우슈비츠에서 수감자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는 장치는 여럿 있었다.
몸에 새기는 문신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입고 있는 옷 가슴팍에 수감자 번호를 달았던 여러 수용소들과는 달리,
아우슈비츠에선 수감자 번호를 문신으로 갈음했다.
아우슈비츠 역에서 노동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먼저 머리를 깎고 소독과 목욕을 한 다음,
남자는 왼쪽 팔뚝의 바깥쪽에, 여자는 왼쪽 팔뚝 안쪽에 문신을 새겼다
(예외적으로, 국적이 독일인 수감자들은 문신을 새기지 않았다).
문신 작업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1분 이상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문신의 상징적 의미는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문신은 지워지지 않는 표식이다.
이곳에서 너희들은 결코 나갈 수 없다.
이것은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하는 낙인이다.
너희들은 바로 그런 것이 되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이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이름이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144쪽)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용 노동자'로 분류돼 팔에 문신을 새긴 사람 숫자가 40만 명에 이른다.
1944년 5월 헝가리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대거 이송되면서
문신 번호의 앞머리는 A로 시작했고 얼마 뒤엔 B로 시작했다.
집시들은 앞머리에 Z을 새겼다.
아무개라는 개인의 이름은 사라지고 번호로만 남았다.
한 마디로 익명의 인간이 됐다.
그러다 평균적으로 3개월쯤 뒤 건강을 잃고 죽으면 한줌 재로 바뀌고 수감자 기록부에 X로 처리됐다.
죽은 이를 기리는 최소한의 추모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아우슈비츠 관련 다큐를 보면
어린애들이 소매를 걷어 팔뚝에 새긴 문신을 보여주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1944년 9월까지 아우슈비츠에는 어린이 수감자가 없었다.
나치는 부모와 함께 역에서 내린 어린이들을 모두 가스실로 보내버렸다.
다큐 속 문신 아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거의 끝 무렵에 가족과 함께 수감돼 왔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들이다.
나치는 갓난아기까지 문신을 새겼다.
아기가 평생 지니고 갈 트라우마를 새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은 노란색, 카포는 초록색 삼각형
수용소 가운데 가스실을 갖춘 6개의 이른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헤움노,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루블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강제노동수용소의 기능도 했다.
유대인이 나치 학살의 주요 과녁이었기 때문에, 절멸수용소 수감자의 다수는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말고도
전쟁포로,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가톨릭교도, 장애인, 성소수자, 집시(신티족, 로마족)을 비롯한
여러 집단이 갇혀 있었다.
수용소 경비를 맡은 친위대 병사들은 수감자들을 쉽게 구분하려고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삼각형을 겉옷에 붙이도록 했다.
△유대인은 노란색 삼각형
△정치범(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등)은 빨간색 삼각형
△일반 범죄자는 녹색 삼각형
△집시(로마, 신티)를 비롯하여 이른바 '반사회주의자' 또는 '무능력자'는 검정색 삼각형
△여호와의 증인은 보라색 삼각형
△성소수자는 연자주색(핑크색) 삼각형을 달았다.
삼각형 안의 알파벳 문자는 국적을 나타냈다.
이를테면, P는 폴란드인, SU는 소련인, F는 프랑스인을 뜻했다.
정치범 수감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동성애자 등은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처럼 조직적인 학살의 대상은 아니었다.
특히 종교적 양심을 중요시하는 평화주의집단이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무실이나 식당처럼 상대적으로 노동 강도가 덜한 곳에 배치됐다.
나치는 수감자들 가운데 카포(kapo)라는 이름의 작업반장을 뽑아 통솔하게 했다.
일반 수감자들이 굶어도 카포들은 절대로 굶는 일이 없었다.
이들은 흔히 '초록'이라 불렸는데, 그들의 삼각형이 초록색이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출신의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이
일찍이 써내 화제를 모았던 책(Man's Search for Meaning, 1946년 초판)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수감자 중에서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다고 인정되면 카포로 뽑혔고,
기대했던 대로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즉시 쫓겨났다.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을 판단할 때에는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과 같은 정신의학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본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05, 26-27쪽)
독일인 수감자들이 카포 자리를 많이 차지했다.
정치범(사회주의자, 반체제 저항운동가)도 물론 있었지만,
대개는 강도·성폭력 등 강력범죄자 출신들이었다.
친위대원들의 입장에 보면, 일단 말이 통하기에 수감자 관리가 더 편했다.
카포들은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분풀이를 하듯 수감자들을 괴롭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도 그들의 잔인함에 질린 듯 이런 증언을 남겼다.
인간이 그런 야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다.
프랑스 유대인을 갈기갈기 찢고, 도끼로 죽이고, 목 졸라 죽이는 등
'초록'의 학대 방식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앤터니 비버, <제2차 세계대전>, 글항아리, 2017, 785쪽에서 재인용)

하루에 1만 명 학살 소각
아우슈비츠와 함께 '절멸 수용소'라 일컬어졌던 다른 5개 수용소
(헤움노,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루블린)의 가스실들은
1943년 말 무렵엔 문을 닫았다.
아우슈비츠는 1944년 후반부까지도 수감자를 받아들여 가스실 학살을 이어갔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닿았을 때 그곳엔 7000명의 병약자들이 남아 있었다.
헤움노는 1942년 문을 닫았다가 1944년에 잠깐 가스실을 재가동했고 15만 명쯤이 학살됐다.
4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베우제츠는 1942년 말에 문 닫았다.
최대 25만 명쯤이 학살당한 소비보르는 1943년 10월 수감자들의 봉기 뒤 폐쇄됐다.
트레블링카는 시신 처리 부담 때문에 중간 중간 멈추기도 했으나 꾸준히 가스실을 운용하다가
1943년 가을에 문 닫을 때까지 9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다.
희생자 숫자에선 수용소 가운데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많다.
1944년 들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은 아우슈비츠 혼자 맡았다.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상징적 존재로 기억되는 것은 학살 규모에서 가장 컸고,
가장 늦게까지 가스실을 운용했다는 점에서다.
100만 명 가까운 유대인을 포함해 110~15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규모 학살이 이뤄졌던 제2수용소(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소각로 실태는
너무 참혹해서 차마 글로 옮겨 놓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소각장 4개의 작업능력은 이론적으로 하루 4400명이었다.
그러나 고장이 잦아서 실제 처리능력은 거의 언제나 그보다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5월과 6월에 헝가리 유대인만 하루에 1만 명꼴로 학살했고,
그해 8월 하순에 우치의 유대인들이 도착하자 그때에도 하루에 1만 명씩 처리했다.
아우슈비츠의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사디스트로 알려진) 시신 처리 담당자는
길이 35m, 너비 7m, 깊이 2m의 구덩이를 8~9개 파놓았다.
그는 구덩이 바닥에 인간 지방이 쌓이면 양동이로 퍼 올려서 소각장 화덕에 부었다.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335쪽)
시신처리는 수감자들 가운데 체력이 좋은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맡았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특공대'가 되겠지만, 문맥상으론 '특수작업반'이 맞다).
1944년 8월의 경우 874명이 간단하게 '낮'과 '밤'이라 부른 2개조 작업조에서 교대로 일했다.
작업반원들은 말이 시신처리지 알고 보면 소름 끼치는 일을 했다.
시신의 입에서 금니를 뽑고
몸의 여러 구멍(항문, 귀, 코 등)에 숨겨 두었을지도 모를 보석이나 귀중품을 뒤졌다.
이런 끔찍한 과정을 거쳐 확보한 모든 물품은 염산 등으로 씻어냈다.
존더코만도들은
사실상 대량학살이라는 나치 전쟁범죄의 목격자였다.
나치는 '더러운 비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3개월 쯤 지난 뒤엔 그들을 죽이고 새 인력을 투입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12차례(일설에는 14차례)나 교체됐다고 알려진다.
베를린으로 보내진 '피 묻은 금'은 스위스 은행과의 '더러운 거래'로 세탁돼
나치의 전쟁자금으로 쓰였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https://n.news.naver.com/mnews/hotissue/article/002/0002378062?type=series&cid=1089890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미미하게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과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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