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와 한국전쟁_중공군 개입 1

원제 : 인천서 작두 탄 '전쟁의 신' 맥아더, 북진 헛발질 나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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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군사 경력의 최대 오점인 1950년 겨울 중공군 개입을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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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1·2차 공세

△ 중공군 공세에 밀린 맥아더의 대응 등 두 차례로 나눠 게재함.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이후 무리한 북진과 잘못된 판단으로 전세가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미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 경고와 실제 병력 이동을 과소평가해 방어 준비를 소홀히 했고, 

정보 왜곡과 오판이 이어졌습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으며, 

맥아더의 독단적 지휘와 한국전쟁 중인 현장 외면으로 위기를 한층 심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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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인천 상륙 성공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는 고대 그리스 영웅처럼 거침없는 운명을 향해 전진했다.”

 

 

 

 

 

6·25 전쟁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의 평가다.

맥아더가 한국에서 맞이한 영광-오욕의 전환점을 이 문장만큼 적확하게 표현한 글은 없었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맥아더의 운명도 격렬하고 극적인 속도로 파국을 향하여 치달았다.

 

목동(양치기)에서 왕이 된 후

신탁의 굴레(부친 살해+모친 결혼)를 벗지 못하고 운명의 절벽으로 떨어진 *오이디푸스처럼,

12개 과업 해결 후 질투에 사로잡힌 아내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헤라클레스 같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대접을 받던 맥아더는

인천 상륙 2개월 만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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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_Οἰδίπους (Oidípous / Oidipous)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캐릭터 중 하나로,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깊은 주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
고대 그리스 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극 작품에서 유명.
오이디푸스는 피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인간의 비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신화를 바탕으로
아래 의미를 갖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디푸스 콤플렉스라고도 함)라는 개념을 주창했음.
어린아이가 무의식적으로 이성 부모에게 애착을 느끼고, 동성 부모에게 경쟁심을 느낀다는 이론.

 

오이디푸스는 테베 고대 그리스 도시의 왕.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됨.

그의 아버지(라이오스 왕)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되어
이 운명을 피하려고 부모는 아기를 버리지만, 아이는 살아남아 다른 왕가에서 자라게 되고,
성장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길에서 한 남자를 죽이는데, 그가 바로 친아버지였다.
이후 나라(테베)를 구하고 왕이 되어, 자신을 낳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모른채 어머니와 결혼하는데
진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하며 방랑자처럼 떠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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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_Hēraklēs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영웅 중 하나.
최고신 제우스와 인간 여성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으로 
엄청난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로 유명한 영웅이며, ‘12가지 과업’이라는 
매우 어려운 임무들을 수행함 (예: 네메아의 사자 퇴치, 히드라 처치 등)
강인함이 상징성이지만 지극히 나약한 인간적인 고뇌도 가진 존재로 묘사됨.
죽은 뒤 신으로 승격되어 올림포스 신이 됨.

 

즉, 본문에서 오이디푸스와 헤라클레스를 인용 은유적 표현을 한 것은 조금은 격이 잘 맞진 않지만,
맥아더라는 한 인물이, 다면적 성격체의 상징성으로 회자되는바, 한 두가지를 빼면 나머진 부정적
이미지들인데, 그런 성정의 운명론적인 부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극동사령관, 유엔사령관으로써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진 자신의 나르시스즘을 극복하지 못한채 결말을 허무하게 맞는다는 의미임.
헤라클레스는 강한 힘(권력)의 상징성을 은유하고, 
오이디푸스는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종말을 상징성으로 은유하려 한 의도인 것 같음.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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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맥아더는 그야말로 ‘전쟁의 신’이었다.

적은 그가 예측한 그대로 움직였고, 전황은 그의 예언과 똑같이 전개됐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1950년 9월 28일(서울 수복)부터 갑자기 맥아더의 신기_神氣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신들린 것 같았던 맥아더의 선택은 다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별일 아닐 것”이라고 예측한 일들은 모두 ‘큰 사건’으로 이어졌고,

그가 “그럴 일 없다”고 했던 것들은 결국 전부 실제 사건으로 일어났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성공이 ‘신기’‘실력’이 아니라 그저 ‘행운’‘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던 맥아더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원산 상륙’ 실패부터다.

서해안의 인천에서 대성공을 거둔 맥아더는

동해안에서도 같은 식의 상륙작전을 성공시켜서

북한군을 뒤흔들고 적의 수도 평양을 양면 공략(서울에서 북진+원산에서 서진)하고자 했다.

차분한 육상 진격보다는 화려한 상륙을 통해 여론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맥아더다운 쇼맨십이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2차 상륙작전이 적절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 10군단의 인천 상륙과

미 8군의 낙동강선 돌파 이후

북한군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지리멸렬 북쪽으로 쫓기고 있었다.

해서 유엔군은 충분히 육상을 통해서도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맥아더의 고집 때문에

동부전선 10군단은 굳이 해상 경로를 따라 북진을 시도하게 됐다.

상륙군을 일단 서울에서 부산항으로 빼내 배에 태운 뒤,

다시 원산으로 싣고 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병력 운송보다 어려웠던 게 무기·장비·보급품 수송이다.

 

 

원산까지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그냥 서울에서 원산까지

추가령구조곡(서울~원산 골짜기)을 통해 곧바로 이동하는 게 훨씬 간편했다.

 

 

결국 육상 경로를 택한 국군 1군단은 10월 10일 원산에 입성했는데,

이때는 아직 미 10군단이 배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계속 상륙작전을 강행했고,

미 10군단원산항 기뢰 제거 작업에 열흘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다

10월 26일에야 국군이 이미 점령한 원산항에 전투도 없이 들어갔다(행정상륙).

 

 

당시 원산에 걸어 들어갔던 미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

“해병대 역사상 가장 긴장감 떨어지는 상륙이었다”고 겸연쩍어 했다.

이렇게 유엔군 주력이 바다 위를 떠다니며 결정적인 시간을 허비하느라

북한군 잔당을 궤멸시키지 못했고,

나중에 있을 중공군 개입에 제대로 대비하지도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서울 환도식(1950년 9월 29일)에서 맥아더가 관례상 어쩔 수 없이 모자를 벗었는데,

그때 비로소 맥아더가 신기하게도 인간적으로 보였다.

모자를 벗으니 너무 늙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 서울 수복 기념식 현장에 있던 영국 기자 레지널드 톰슨 -

 

 

 

 

 

 

 

 

1.  평양 10월 19일 : 압록강을 향한 질주

하지만 원산 상륙은 당시로선 작전 실패라기보단,

이기는 과정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전황은 여전히 유엔군에 유리했고,

맥아더의 군사적 권위에 감히 도전할 만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서부전선에선

월튼 워커 미8군(미군·국군·영연방군 등 연합)이 평양을 향해 순조롭게 북진 중이었고,

동쪽 에드워드 알몬드미 10군단원산에 늦게 가긴 했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산의 좌절’‘평양의 성공’으로 완벽하게 가려졌다.

 

 

10월 19일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기동력 뛰어난 미군 사단들과의 속도 경쟁에서 승리하며

평양 시내에 최초 입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것은

유엔군이나 미국 입장에선 ‘냉전 이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 수도를 점령’한 쾌거였다.

냉전 시작 이후 서방 국가들은

소련군이 수백만 병력과 수만 대의 전차로 파상 공세를 가해올까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냉전 이후 공산-자유진영 간 첫 대규모 전쟁인 한국전에서

적국 수도를 차지하는 군사적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 승리의 영광 또한 인천 상륙전과 서울 수복전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의 공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맥아더의 끝도 없는 건방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마지못해 칭찬 전문을 보냈다.

“장군의 지휘 아래 이뤄진 한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은

세계 평화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줬습니다”는 찬사를 인사치레성으로 해야만 했다.

 

 

 

 

1950년 10월 19일 미군 장교들이 평양에서 가장 먼저 평양 진입에 성공한 백선엽(가운데) 국군1사단장을 축하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전쟁은 끝자락이 어렴풋 보였다.

북한의 주요 도시 평양과 원산을 모두 점령했고

궤멸 직전 북한군은 산악지대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몇 차례만 진격을 거듭하면 머지않아 한반도 통일을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월 15일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나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인데 그해는 11월 23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

큰소리친 맥아더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 합동참모본부에선 속전속결보다 안전한 진격이 필요하다는 신중론도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동서 간격이 좁은 평양-원산선을 안전하게 확보하면서,

북한군 재편성이나 중국 개입 가능성을 지켜보자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워싱턴의 신중론을 일축하고 공세를 서둘렀다.

원래 전쟁의 최종 목표와 진행 속도는

최고사령관인 대통령과 대통령 위임을 받은 합참이 결정할 문제였음에도,

당시 맥아더는 전쟁의 본질에 해당하는 이런 내용까지 도맡아 결정하고 있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논문에서

워싱턴(NSC와 합참)이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한 채 결정을 유보하는 동안,

합참 승인을 받아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했던 맥아더가

역으로 전략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특정 지역만을 담당해야 할 일개 *전구사령관(theater commander)

나라 전체 운명이 걸린 전쟁의 성격 규정에까지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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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사령관_Theater Commander : 군사 용어로, 특정 전구_戰區,(Theater of operations)
                                                          즉 하나의 넓은 작전 지역에서 모든 군사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최고 책임자를 말함.

                      전구_ 戰區 _Theater : 전쟁이나 군사작전이 수행되는 광범위한 지역(구역) (예: 한반도, 중동 지역 등).
                      전구사령관 : 해당 지역에 배치된 육·해·공군 등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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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1기병사단 장병들이 1950년 10월 19일 태극기를 꽂고 평양 시내로 입성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

 

 

 

 

“평양을 점령한 미 1기병사단한국군 1사단

곧바로 평양을 벗어나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10월 23일 평양에 있던 미군 부대는

각종 문서를 수집하는 200명 규모의 부대(인디언헤드 TF)뿐이었다.”

 

- 앨런 밀레 ‘The War for Korea 1950-1951’ 중에서 -

 

 

 

 

결국 맥아더는 평양 점령 후 5일 만인 10월 24일

워커 8군(서부전선)과 알몬드 10군단(동부전선)

“최대한의 수단을 동원해 가장 빠른 속도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압록강을 향한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평양 북쪽에서 유엔군은 어떤 적을 맞이할 것인가.

지리멸렬하는 북한군? 아니면 혹시…

당시에도 미국 정부가 중공군 참전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이 한반도에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경고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국 정부로 부터 계속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는 미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 직접 외교 채널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제3국을 통해 메시지가 도착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공략하고 있던 9월 25일,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녜룽전(섭영진)은 주중 인도대사 K. M. 파니카르를 만나

“미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했다.

 

 

며칠 후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최고위 정보원으로부터 두 번째 경고가 나왔다.

중국 2인자인 총리 겸 외교장관 저우언라이(주은래)가 10월 2일 파니카르를 소환해

“한국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몰라도 미국이 선을 넘으면 분명히 중국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경고를 전달했다.

영연방인 인도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면

런던을 거쳐 워싱턴에 진의가 전달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 내각수상 김일성(왼쪽)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가 1958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11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 때로 추정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경고가 워싱턴에 도착하긴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통일(1949년) 이후 내부적 문제가 많은 중국 공산당이 미국과 전쟁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며

저우언라이의 경고를 ‘*블러핑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했다.

 

영국 해외정보국(MI6)으로도 비슷한 첩보가 들어갔다.

중국공산당 내부 인사로부터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한국에 4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정보가 확인됐지만,

미국 정부는 이 첩보의 신빙성을 낮게 봤다.

MI6의 ‘40만 명 투입’ 정보는 지금 보면 매우 정확한 내용이었지만,

당시는 터무니없는 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미국 정부는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된 10월 24일까지도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도 손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자체 정보 분석을 통해 중공군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1950년 여름 내내 중국 남부와 중부 지역에 있던 인민해방군이

계속 북부 지방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단순히 “국공내전 때 남하했던 부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

 

 

1950년 9월 맥아더 사령부는

만주에 있던 중공군 병력이 4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중국 베이징 정부 입장에선 이 대병력을 압록강 너머 한반도로 보내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10월 24일 워커의 8군은 북한 패잔병만 소탕하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거침없이 북진을 시작(추수감사절 공세)했다.

그러나 한반도 북부 적유령 산맥청천강 사이 산악지대

이미 20만 명 이상의 중공군이 몸을 숨긴 채, 똬리를 틀고 유엔군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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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핑_bluffing :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된 신호나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함.

                             원래는 카드 게임인 포커에서 많이 쓰이던 용어인데 지금은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됨.
                             실제보다 더 강해 보이거나 약해 보이게 행동해서 상대의 판단을 흔들거나 유리한 결과를 얻는 것.
                             허세, 페이크, 속임수 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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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맥아더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재앙이 터졌다.

거대한 중공군 병력이 눈 덮인 산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중공군은 마치 유령 군대(phantom force)와도 같았다.”

 

- 한국전쟁 종군 전사가 로이 애플먼의 ‘Disaster in Korea’ 중에서 -

 

 

 

 

 

 

 

 

2. 운산·온정 10월 25일 :  이상한 군대의 출현

추수감사절 공세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첫날인 10월 24일 8군 좌익인 미1군단(국군1사단+미24사단+영연방27여단)은

압록강 하류 방면으로 거침없는 진격을 거듭했다.

 

그러나 청천강(살수)을 넘어서면서부터 뭔가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국군1사단을 지휘하던 백선엽

“청천강을 넘자 왠지 불안한 적막감이 들었다”면서

“(청천강 이남에선) 패잔병과 피란민으로 북적이던 도로가 텅 비어 있고,

기온이 뚝 떨어져 하복을 입은 장병들이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가장 앞서 달려가던 백선엽 부대가 역시나 가장 먼저 적과 교전을 치렀다.

수풍댐을 목표로 북서진하던 국군1사단은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정체 불명의 대군’(백선엽의 표현)을 만났다.

산악지대에 포진하던 적의 매복에 걸려든 것인데, 당시엔 이게 중공군인지도 몰랐다.

 

 

교전 과정에서 국군 15연대가 붙잡은 ‘이상한 포로’를 심문하고서야,

유엔군을 막아선 적병은 북한군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뒤늦게 눈치챘다.

일본군 복무 시절 중국 군대와 접촉 경험이 많았던 백선엽은 포로를 직접 심문한 뒤

단박에 중공군임을 간파하고

직속상관인 미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에게 중공군 참전 사실을 보고했다.

밀번도 이를 8군사령관 워커와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지만,

맥아더는 별일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들은 객관적 사실을 외면하고

소수의 중공군 병력이 ‘지원병’ 형식으로 한반도에 들어왔을 뿐이라고 결론 냈다.

 

 

 

압록강 중류 초산 방면으로 정북진하던 8군 우익 국군2군단(국군 6·7·8사단)도

이 이상한 군대와 마주쳤다.

국군 1사단이 중공군과 조우한 10월 25일,

김종오국군 6사단운산 동쪽 온정에서 중공군과 대규모 교전을 치렀다.

백두대간 건너 미10군단 관할인 동부전선에선

10월 29일 중공군 포로가 16명이나 무더기로 잡히기도 했다.

 

 

이처럼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맥아더 사령부는 현실을 외면하고 ‘중공군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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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사실을 받아들이고

8군과 10군단의 방어를 평산-원산선에서 단단히 한 뒤 신중한 진격을 했더라면,

유엔군은 중공군 1차 공세(10월 말~11월 초)와 2차 공세(11월 말~12월 말)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북한에서 반격 기회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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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1사단이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붙잡은 중공군 124사단 소속 포로들의 모습. 미 해병대

 

 

 

 

 

 

 

 

“우린 10월 17일부터 한국군을 덮치기 위해 산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1950년 10월 25일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증언 -

 

 

 

 

당시

미군 지휘부가 꿩처럼 머리를 처박고 “우린 안전하다”고만 외쳤던 이유

‘맥아더가 바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도쿄 시절(1945~1951년) 맥아더는

참모진을 모조리 자신의 추종자들로만 채우고

그들이 형성한 ‘인의 장막’ 안에서 달콤한 보고와 아첨만 들으며 살았다.

 

 

맥아더의 성향을 가장 잘 알았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

수집된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고하기보다는,

맥아더가 좋아할 만한 내용만 취사선택해 첩보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웠기 때문에,

정보참모들 또한 맥아더 판단에 따라 “안 들어올 것”이라는 보고서만 계속 썼던 것이다.

 

맥아더가 내린 결론에 짜 맞추기 위해

윌로비의 정보부는 이상한 논리로 중공군 개입 불가 이유를 설명했다.

윌로비 “중공군이 개입하려면 전세가 결판나기 전에 먼저 했어야 했다”

“이미 북한군이 소멸하고 있는 지금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고 분석했다.

 

 

제대로 된 정보장교라면

적의 입장에서 적의 논리에 따라 적의 미래 행동을 유연하게 예측해야 했음에도,

윌로비는 자국의 논리와 상관의 가치관에 따라 적의 의도를 오판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당시 도쿄사령부 상황을 잘 알던

10군단 작전참모 잭 칠스 대령(지평리 전투 폴 프리먼 후임 23연대장)은

“맥아더 장군이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윌로비 또한 맥아더가 ‘원하는’ 정보만 생산했다”

“윌로비는 당시에 분명 감옥에 갔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공군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이미 유엔군과 어떻게 싸울지 다 생각해 놓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군과 미군의 △숙련도 △기동력 △무장 △장교 수준 등

종합적 전력 차이를 이미 완전히 분석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한 고리’인 국군을 향해 초반 공격을 집중해 국군 쪽 전선을 무너뜨린 다음,

그 무너진 틈으로 병력을 집중 투입해 미군 퇴로까지 단숨에 끊고

유엔군 군단 전체(나중엔 8군 전체)를 포위 섬멸하겠다는 작전계획의 구상이었다.

 

 

국군 위주 공략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것이

바로 10월 25일부터 11월 7일까지 이어진 중공군 1차 공세다.

중공군의 첫 공격을 받은 아군 부대가

바로 국군 1사단(운산)국군 6사단(온정)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비극은 국군을 구하러 들어온 미군 부대로도 이어졌다.

중공군의 급습을 받고 멈춰 선 국군 1사단을 구하러 온 미1기병사단

도리어 운산에서 1개 대대 전체(8기병연대 3대대)를 잃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적에게 포위당한 대대 병력을 도저히 구할 길이 없어

군단장이 사단장에게 ‘구출 포기 명령’(11월 3일)을 내렸을 정도로,

미군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적인 패배였다.

 

 

적중에 고립된 3대대 장병들은 개별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가 대대 병력 800여 명 중 600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를 따라 뉴기니, 레이테, 루손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미육군 정예 1기병사단

궤멸적 타격을 입고 청천강 이남으로 물러나 유엔군 전력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하고 말았다.

 

 

 

미 1기병사단 군종장교 에밀 카폰 대위가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해 후송하고 있다. 카폰 대위는 1950년 11월 초 중공군 1차 공세 때 북한 지역에서 고립돼 포로로 붙잡혔다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13년 카폰 대위에게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을 사후 추서했다. 미 육군

 

  

 

 

“적이 진격하면 우린 후퇴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우린 교란한다(敵駐我攪).

적이 피곤하면 우린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후퇴하면 우린 추격한다(敵退我追).”

 

- 마오쩌둥이 강조한 유격전법인 ‘16자 전법’ -

 

 

 

 

3. 적유령산맥 11월 7일 : 적이 사라졌다

이 정도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면,

잠시 고삐를 놓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처음부터 찬찬히 돌이켜보는 게 사리에 맞다.

다행히도 워커는 그렇게 했다.

워커는 8군 전병력을 다시 청천강선으로 물리고 추가 보급과 병력 충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1기병사단 패배 이후인 11월 4일 워싱턴에 보낸 서신에서

“중공군은 보급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입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여전히 현실을 외면했다.

 

 

그사이

중공군은 청천강의 유엔군 쪽으로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청천강 이북 쪽에서도 중공군의 공세 강도가 점점 약해졌다.

그러다 11월 7일에 이르러서는 중공군이 전선에서 싹 모습을 감추는 상황이 벌어졌다.

 

왜, 어디로 사라진걸까?

적이 갑자기 실종된 이유를 정확히 분석한 뒤 행동에 나서야 했지만,

맥아더는 이번에도 객관적 정보를 따르지 않고 자기 편의에 따라 중공군 실종 사건을 해석했다.

 

 

중국이 북한을 구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나선 게 아니라

압록강 이남에 완충지대를 만들 목적으로 제한적으로만 개입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압록강이 얼어붙기 전(당시 CIA 예상으로 11월 24일~12월 10일 결빙)

공세를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배 원인도 찾지 못한 채,

적의 정확한 규모도 모르는 상태로,

유엔군은 오로지 맥아더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 또다시 위험한 공세에 나서야 했다.

 

 

중공군에게 한번 호되게 당한 워커는 이번엔 신중했다.

2차대전 유럽 전선 조지 패튼의 휘하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단장으로 불리던 ‘불독’ 워커였지만,

이번 공격은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1차 공세(추수감사절 공세)보다 병력을 보강하고

좌익(미1군단)우익(국군2군단)외에 중앙에도 1개 군단(미9군단)을 추가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보급을 위해 공격 개시일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11월 24일이 공세 재개일로 결정됐다.

 

 

여전히 맥아더와 워커는 중공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11월 17일 주한미대사 존 무초와의 만남에서 중공군 병력을 3만 명 수준으로 예상했고,

8군 정보참모는 11월 21일 중공군 규모를 6만 명으로 추정했다.

2차 공세 시작일인 11월 24일 윌로비“최소 4만에서 최대 7만1,000명 수준”이라고 추산했다.

 

그러나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실제 중공군 병력은 3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23일 추수감사절 존 쿨터 미군 9군단장군우리에서 병사들에게 추수감사절 만찬을 배식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총공세 전날인 11월 23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병사들은 이번 공격만 성공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날 밤 8군 장병들은

후방에서 공중 수송된 훈제 칠면조에 크랜베리 소스를 곁들여 먹었고

△칵테일 새우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올리브

△파인애플

△견과류

△과일 케이크

△과일 칵테일로 이뤄진(한 호주 병사의 기록에 남은 메뉴) 성대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8군 전체에 희망이 가득한 날이었지만

‘불독’ 워커는 남들이 맡지 못한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워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이었지만,

당시 8군 군수참모(G-4) 앨버트 스테빈스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워커가 맥아더에 의해 강요된 이 총공세를 매우 주저했다고 한다.

 

그는(워커) 마지못해 총공격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좌측 공략을 맡은 1군단장 밀번에게는

“중공군이 출현하면 곧바로 병력을 뒤로 물리라”는 당부를 남겼다.

또 부대의 진격 한계선을 미리 설정해 두고

이 한계선을 넘어서 북진할 경우에는 자기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워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 유엔군에 진짜 지옥이 찾아왔다.

 

 

 

1950년 11월 미 8군 소속 병사들이 청천강 방어선에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유엔군의 거대한 포위 압박이 결정적인 결실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 유엔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되찾고 통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엔군은 즉각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 1950년 11월 24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코뮈니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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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뮈니케_communiqué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성명서나 발표문을 뜻하는 말.
                                         어원은 프랑스어 communiqué로, “알리다, 전달하다”라는 의미에서 온말로서 
                                         정부, 기업, 단체 등이 어떤 결정이나 입장을 공식적으로 외부에 알릴 때 사용하는 문서.
                                         예를 들면 정상회담 후 공동 발표문, 기업의 중요한 공지, 국제기구의 공식 입장 발표.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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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천강 11월 24일 : 생지옥의 시작

1950년 11월 24일 10시 마지막 공세가 시작됐다.

지상군 총병력 24만 명으로 구성된 워커 8군은

세 갈래(좌: 미1군단, 중: 미9군단, 우: 한국군2군단)로 나눠 압록강을 향해 달렸다.

 

그날 아침은 추웠지만,

낮에는 영상 14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날이 풀렸다고 한다.

전 세계 언론의 눈이 공세 출발점 청천강으로 쏠린 순간을 맥아더가 놓칠 리 없었다.

맥아더는 이날 도쿄에서 여러 명의 기자를 대동하고 날아와서

신안주에 있던 8군 전방지휘소를 방문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이번 공격이 성공한다면,

유엔군 장병들을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집으로 돌려보낼(Home by Christmas)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이 두 번째 총공격에 ‘크리스마스 공세’라는 별칭을 붙였다.

 

 

상황은 한 달 전 ‘추수감사절 공세’와 똑같이 돌아갔다.

공격 첫날 왼쪽의 밀번 1군단,

가운데 쿨터 9군단이 압록강 방면으로 순조로운 진격을 거듭했다.

몇 시간 만에 최대 24㎞까지 북진한 부대도 있었다.

중공군은 진짜로 한반도 땅에서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 달 전처럼 이번에도 8군 오른쪽을 담당하던 한국군 쪽에서 일이 터졌다.

산악지대로 북상 중이던 국군2군단 소속 7·8사단이 공세 이틀째인 11월 25일

평안남도 덕천 근처 금성호 일대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적은 정확히 7사단(8연대)과 8사단(10연대) 경계 지점에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부으며

국군 병력을 몇 시간 만에 절반으로 찢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미 11월 26일 아침에는

국군2군단 전체가 혼란에 빠질 정도로 전황이 빠르게 악화됐다.

이번에도 한국군을 먼저 공격하고

그 틈 사이로 들어와 미군을 포위하는 중공군 전술이 성공을 거뒀다.

 

 

전선 오른쪽 한국군 군단이 이미 전투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맥아더와 워커는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패배 소식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지만,

워커는 이를 8군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한국군 작전 지역 내 국소적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묘향산 북쪽 희천으로 접근하던 미 2사단이 공격을 받은 구장동 전투(11월 25~28일),

튀르키예 여단이 중공군과 첫 번째로 맞붙은 와원 전투(11월 27~30일)를 치르며

비로소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공세 당시

맥아더 사령부중공군 병력을 4만~7만 명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실제 워커 8군 쪽 서부전선에만 18개 사단 23만 명을 배치했고,

동부전선 미 10군단 쪽에 배치된 15만 명(12개 사단)을 합치면

총 38만 대군을 운용하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가

자기들 편한 쪽으로만 첩보를 왜곡 해석하다가

결국 ‘범죄 수준의 예측 실패’를 저지르고 만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장면이다.

워커가 아무리 날고 기는 명장이라 하더라도

예상보다 최대 10배나 많은 적병을 돌발적으로 만났으니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1951년 미공군 B-29 폭격기북한 지역을 전략 폭격하고 있다. 미 공군

 

 




“20세기 미군의 최대 실수는

맥아더가 군대를 압록강까지 몰아붙인 결정적 이유였다.

중공군은 높은 언덕을 점령해 미군이 후퇴할 수 있는 길을 모두 봉쇄하고,

미군이 올라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결국

워커청천강을 포기하고 병력을 물려야 했다.

8군 전체에는 평양-원산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로부터

적의 공세를 버티며 뒤로 물러나는 철수 작전은 공격보다 훨씬 난도가 높고,

때에 따라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당시 미 8군의 비극도 철수 작전 도중에 발생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8군의 진격과 후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퇴로에 미리 병력을 매복해 두고 있었다.

퇴각 도중 중공군 포위망에 제대로 걸린 부대8군의 가운데를 떠받치던

미2사단(현재 주한미군 주력)이었다.

 

 

당시

2사단은 군우리(개천)에 포진 중이었는데,

군우리에서 평양 방면으로 가려면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첫째는 청천강을 따라 신안주까지 서진했다가

신안주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어 숙천으로 남하하는 서쪽길이었다.

이 길은 멀리 돌아야 했지만 평야지대여서 이동이 쉬웠고

신안주-평양 간 대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군우리에서 곧장 순천으로 남하해 평양으로 직행하는 동쪽길이었지만,

도로가 좁고 산악지대여서 적의 기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당시 2사단장 로런스 카이저 소장은 동쪽길을 선택했다.

상부에서는 서쪽길을 이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서쪽길은 1군단 병력이 이용하느라 교통 정체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직선로를 택한 것이다.

 

 

동쪽길 일부가 중공군 병력에 선점됐다는 전초부대가 보고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사단 병력으로 뚫고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카이저의 치명적 착각이었다.

동쪽길을 감싼 양쪽 산악지대에는 중공군 1개 사단 병력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유엔군 병력이 남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이어진 군우리 철수전에서

미 2사단은 계곡 양쪽 중공군에게 집요한 공격을 당했다.

당시 미군 보병사단의 정원1만8,000명이었으나

2사단은 이 전투 후 병력이 1만 명까지 급감했다.

이 사단에서만 5,000명 가까운 사상자(4,940명)가 발생했고,

사단 전투력은 1개 연대전투단(1개 보병연대+포병·공병 등 소규모 부대) 수준으로 추락했다.

 

 

당시 미 언론은 2사단의 참패를

‘인디언 태형’(북아메리카 원주민이 두 줄로 서서 생포된 적을 가격했던 형벌)이라고 묘사했는데,

‘인디언 헤드’라는 별명을 가졌던 2사단이

오히려 적에게 인디언 형벌을 당하는 기막힌 치욕을 맛본 것이다.

 

 

 

 

미8군 병력이 좁은 도로를 이용해 평양 방면으로 철수 중인 장면. 1950년 11월 말 경으로 추정된다. 피란민들은 도로를 이용하지 못해 길 옆 논을 따라 대피 중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후퇴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사단장(카이저 소장)도 함께 걸었다.

사단장은 ‘누가 여기 책임자인가, 자넨 누군가’라며 질문을 거듭했지만,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체처럼 보이는 물체를 사단장이 발로 걷어차자,

그 시체가 갑자기 ‘이 개자식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사단장은 ‘미안하네, 친구’라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 역사가 클레이 블레어가 묘사한 미2사단의 군우리 철수 혼란상 -

 

 

 

 

투스타(소장 : 별두개)가 일개 병사에게 상스러운 욕을 먹고 있는 사이,

백두대간 동쪽에서도 비극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원산에 상륙한 뒤 장진호까지 북상한 미해병1사단

11월 27일 최대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포위돼 기습을 당했다.

미군은 자칫 2개 사단이 동시에 몰살당할 수 있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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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글(이 포스팅 글 후미에 아래와 같은 제목으로 '부록'을 담) 

“상관 닦달보단 부하 목숨이 먼저”… 해병 사단장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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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전쟁을 쉽게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자칫하다간 패장으로 역사에 남게 생겼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서부전선 8군사령관 워커동부전선 10군단장 알몬드를 동시에 호출했다.

이때가 11월 28일이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맥아더 자신이 한국으로 가서 작전회의를 소집한 게 아니라,

한창 바쁜 두 야전사령관을 굳이 바다 건너 도쿄 사령부까지 호출했다.

 

시시각각 전선이 붕괴하던 위급한 순간,

워커알몬드맥아더를 만나러 왕복 8시간 비행을 하며 장시간 자리를 비워야 했다.

공세가 시작될때는 특파원들 까지 무더기 끌고서(자기과시 대외 선전용으로)

그렇게나 자주 한반도를 찾아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던 맥아더였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 순간엔 필요한 현장 방문을 외면하고 편한 도쿄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 ‘현장 지휘 때문에 바쁘다’

군통수권자(트루먼)를 지구 반 바퀴 돌아 남태평양 외딴섬까지 불렀던(10월 15일 웨이크섬 회담) 맥아더가

자기 부하를 소집한 긴급하고 중요한 회의에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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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가장 나쁜 특성 중 하나인 ‘유아독존’‘내로남불’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장 적나라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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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독존 _唯我獨尊 :  세상에서 자기만 잘났다고 뽐내는 태도, 불교에서 온 말.
                                   [불교]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자신이 이 세상의 최고가 될 것을 예견했다고 전해지는 유래가 있음.
                                             원어_原語 : 천상천하 유아독존_天上天下唯我獨尊


내로남불 _Romance 남不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비속어적 표현을 축약해서 국한영 언어로 조합된 말.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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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공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⑦’
-심호섭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첫 본격적인 대결: 중공군 2차공세와 미군의

 ‘가장 긴 퇴각’에 대한 작전적 차원의 분석과 평가를 중심으로’

-Bill Mossman ‘Ebb and Flow’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Roy Appleman ‘Disaster in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 맥아더의 행적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 회고록
-백선엽 ‘군과 나’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
-H. 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맥아더와 한국전쟁_중공군 개입 2

원제 : 리지웨이 등판 후 맥아더 ‘계륵’ 전락… 노병은 그렇게 서서히 사라졌다

 

 

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유엔군사령관매슈 리지웨이(왼쪽) 미8군사령관1951년 4월 초 강원 양양 지역을 순시하고 있다. 중간에 보이는 인물은 맥아더 사령부 참모장인 도일 히키 소장이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우린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We face an entirely new war).

본 사령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지금 상황은 본 사령부의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다.”

 

 

 

 

1950년 11월 28일 새벽.

미국 펜타곤에서 밤을 새우던 당직 대령 존 비시라인

더글러스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서 날아온 긴급 전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불과 4일 전 크리스마스 공세(Home by Christmas Offensive)를 시작하며

“금방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맥아더가

갑자기 “전쟁을 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직 장교가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사태였다.

그래서 대령은

육군 작전·행정 참모부장(참모차장 바로 아래)매슈 리지웨이 중장을 긴급 호출했다.

이때가 오전 4시 15분이다.

 

 

맥아더 전문 내용을 들은 리지웨이 역시 육군 선에서 대응할 문제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이건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해야 할 사안이었다.

리지웨이는 곧바로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호출했고,

콜린스가 다시 오마 브래들리 합동참모의장을 통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트루먼은 그날 즉시

워싱턴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를 모두 불러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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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트루먼,

부통령 앨번 바클리,

국무장관 딘 애치슨,

국방장관 조지 마셜, 합참 구성원(의장+3군참모총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월터 베델 스미스,

대통령 특별보좌관 애브럴 해리먼이 모였다.

재무장관 존 스나이더까지 소환된 긴급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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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왜 갑자기 맥아더가 이런 불길한 보고를 보낸 거지?

NSC는 충격과 혼란에 사로잡혔다.

 

맥아더는 한 달 반 전(10월 15일)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지상 최대의 살육전을 안겨줄 것”이라고 자신했고,

4일 전엔 중공군 숫자가 많아봐야 7만 명일 거라며

“크리스마스 전에 병사들을 집에 돌려보낼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워커 휘하 병력이 24만 명인데,

어떻게 7만 명 중공군을 상대하며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까지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바로 나흘 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 끝내겠다는 그 말,

진짜 맥아더가 한 말이 맞습니까? 그

게 맞다면 그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았던 건가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던 겁니까?”

 

- 11월 28일 NCS에서 부통령 바클리가 던진 질문 -

 

  

 

 

워커맥아더1950년 10월 20일 평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5. 도쿄 11월 28일 : 미몽 탈출

애석하게도 워싱턴에선 부통령의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국방장관이나 합참이 가장 당황했던 대목

맥아더가 돌연

“전구사령관(맥아더)의 능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전 세계적 상황”으로 이 전쟁을 규정했다는 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겠다고 자신했던 맥아더

갑자기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깡그리 부정하고 워싱턴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었다.

이제 트루먼, 마셜, 합참이 이 전쟁을 직접 챙겨야만 했다.

 

 

펜타곤이

‘한반도 철수 방안’까지 고려(당시 리지웨이가 육군참모차장과 논의)할 정도로

워싱턴 전체가 충격에 휩싸인 그때,

맥아더는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과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도쿄사령부로 불러

대책을 추궁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책임을 대통령에게 떠넘길 정도로 혼이 나간 반면,

두 야전사령관 워커알몬드는 맥아더만큼 충격을 받진 않았다.

서부전선 워커는 후퇴하는 병력을 추슬러 평양 사수를 할 수 있겠다고 답했고,

항상 지략보다 용기가 앞섰던 동부전선 알몬드는

그 상황에서도 북쪽과 서쪽으로 더 진격할 수 있다고 배포 있게 말했다.

 

 

바쁜 야전사령관들을 급하게 불러 놓고도,

맥아더는 얘기를 듣기만 했을 뿐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워커에겐 “가능하면 평양을 사수하되 상황에 따라 포기하게”라며 하나 마나 한 지시를 내렸고,

공격하겠다는 알몬드에겐 “함흥-흥남 라인을 지키고 있게”라고 충고하는 정도에 그쳤다.

 

 

9년 전(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에도 그랬던 것처럼,

평화 시엔 큰소리를 치다가

막상 위기에 처하면 결정을 회피한 채 움츠리는 맥아더의 버릇이 이번에도 여전히 반복됐다.

 

 

 

 

 

“그때 거기서 맥아더를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 해리 트루먼이 1950년 11월 말을 돌이키며 남긴 회고 -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싱턴에선 벌집 쑤신 듯 북새통이 벌어지고,

두 부하 사령관(워커·알몬드)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사이,

맥아더는 난리가 난 한국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도쿄에 앉아 ‘면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맥아더)는 주요 언론과의 연쇄 인터뷰를 통해

"트루먼 행정부가 유럽에만 신경을 쓰고 아시아는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터진 것"이라며

워싱턴을 겨냥했다.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유엔이나 다른 곳에서 중공군 공격에 대한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면서

정보 실패 책임을 본국 정부에 떠넘겼다.

 

그리고

“국경 지대에 대한 공중 정찰도 허용되지 않았다”면서

“군사 전쟁 역사상 이렇게 많은 핸디캡을 안고 싸운 경우는 없었다”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변명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미국 역사상 1950년 7~11월의 맥아더처럼

지역사령관이 본국 정부 의견을 외면하고 마음대로 전략 방향까지 결정한 예는 없었고,

그렇게나 자주 대통령과 합참의 지시를 무시하고도

자리를 보존했던 군사 지휘관은 맥아더가 유일했다.

즉, ‘미군 역사상 이렇게 폭넓은 재량권을 쥐고 싸운 장군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사실에 부합한다라는 의미이다.

 

 

맥아더가 하도 *적반하장격으로 나오니

군 후배들 사이에서도 맥아더의 오만함을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12월 초 리지웨이 합참이 맥아더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호이트 반덴버그(웨스트포인트 후배) 공군참모총장에게

“합참은 명령을 어기는 어떤 사령관이라도 해임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그때부터 5개월을 더 맥아더를 지켜보다가

1951년 4월 중순에야 해임 명령을 내렸다,

 

 

그 이유에 대해 트루먼은

“전투에 졌다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의 체면을 무시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의 체면을 지켜 줘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트루먼은 “내 부하는 내가 지켜야 했다”고도 말했다.

개인적으론 매우 성마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트루먼이었지만,

맥아더의 즉각적 해임이 국가에 가져올 충격파를 감안해

개인적 모욕을 잠시 감내하는 *선공후사 대범함을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가

당시 한반도 상황을 얼마나 오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가 하나 있다.

 

맥아더는 1950년 12월까지도

한반도에 파병된 중공군 사령관을 린뱌오(林彪·임표)로 알고 있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중공군 제1의 명장이긴 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해 실제론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였는데,

맥아더는 적 총사령관이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정보 수집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까지도 여전히 중공군 총병력을 20만 명(실제 30만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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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 _賊反荷杖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도리어 나무람을 이르는 말.

 

선공후사 _先公後私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일은 나중에 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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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후 평양 동쪽을 지나는 길이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밤하늘을 밝혔고 수많은 피란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군 보급소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워커 사령관이 보급 물자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불더미로 들어가 옷 한 개라도 건지려 했고,

미군이 위협사격을 하며 쫓아내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 당시 국군1사단장 백선엽이 목격한 평양 철수 -

 

 

 

 

 

1950년 12월 3일 북한의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을 맨발로 건너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6. 평양 12월 3일 : 한_恨 많은 대동강

“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12월 3일은 워커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었다.

한 젊은 장교가 평양의 8군사령관 지휘차량으로 다가가 사령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워커가 서른여섯에 낳은 늦둥이(당시 기준) 외아들 샘 워커(25) 대위였다.

 

샘은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해

당시 24사단 중대장으로 대동강 철교 경비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아버지 생일 축하를 위에 잠시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워커가 교통사고로 순직하기 불과 20일 전이다.

이때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건네는 마지막 생일 축하가 될 거라곤 당시로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워커는 사실 생일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날 워커는

“4일 오전 8시를 기해 모든 유엔군 병력은 평양에서 철수하라”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와의 도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11월 29일 오후,

워커는 청천강 쪽 전선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졌던 중공군은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 중이었고,

중공군 출몰 지점에선 아군의 패퇴 소식만 전해졌다.

지금 속도대로 계속 밀린다면

평양에 방어선을 친다 한들 측면이 뚫려서 곧바로 포위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결국

“평양을 사수하겠다”는 말을 맥아더에게 남기고 왔던 워커는 생각을 바꿔 평양 포기를 결심했다.

맥아더에게 평양 철수 승인을 요청하는 보고를 보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평양 철수는 워커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1950년 12월 4일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의 부서진 다리를 넘어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맥스 데스포어는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유엔군 패퇴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어,

12월 3일부터 민간인의 피란 행렬이 시작됐다.

 

당시 미군은

평양과 그 주변에서 남하하려던 피란민을 30만 명 정도로 추정했는데,

대동강을 지나는 다리들이 속속 끊어져 일부 피란민들은 물살을 헤치고 직접 강을 건너거나

부서진 철교 위를 위험하게 걸어 남쪽으로 대피했다.

 

 

당시 평양에 있었던 백선엽

“대동강에 가설된 *부교까지 폭파돼

피란민들이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다 차디찬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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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_浮橋 : 다리를 받치는 기둥이 없이 배나 뗏목 따위를 여러 개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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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는

땅을 조금씩 내주며 순차적으로 후퇴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속한 퇴각을 결정했다.

청천강에서 물러난 뒤

평안남도 남부지방이나 황해도에서 방어선을 치지 않고,

곧바로 서울 북방 임진강까지 250㎞를 한 번에 물러난 것이다.

 

워커의 이 신속한 총퇴각은 한국전쟁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 결정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렇게 포기한 평양과 개성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한반도 통일은 이때의 평양 철수와 함께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 돼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중공군 보급 능력(1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움)을 감안할 때,

만약 당시 워커가 지형을 이용해 평양 인근에서 견고한 방어선을 유지했더라면,

중공군 공세를 한두 번 격퇴하고 다시 북진을 시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아쉬움은 모두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오히려

△워커의 공격 지향적인 평소 스타일

△일선부대 상황을 세세하게 챙겼던 지휘 철학

△전장의 지형을 중시했던 철저한 준비성 등을 감안한다면,

당시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다 조망할 수 있었던 워커의 선택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급사한 워커가 남긴 회고록이 없어 당시 어떤 생각으로 후퇴 결정을 내렸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가까웠던 8군 군수참모(G-4) 앨버트 스테빈스 대령의 증언을 참조하면

‘8군 병력을 지키기 위해’ 이런 대대적인 퇴각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전한 후방에서 장기간 전력 보강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반격조차 시도할 수 없을 정도로 8군의 상태가 엉망이었다는 얘기다.

 

 

오히려 워커가 명백하게 잘못한 부분은

1차 공격(10월 추수감사절 공세) 당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퇴한 국군 2군단을

2차 공격(11월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도 똑같이 우익에 단독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국군1사단을 미 1군단에 배속했던 것처럼,

국군2군단 예하 3개 사단을 분산시켰다면 미군이 국군을 지원하면서 중공군 공세를 버텼을 수도 있다.

 

 

 

 

 

“맥아더 장군과 워커의 후임자를 누구로 앉힐지 논의한 적이 있었다.

워커는 항상 위험한 전투 현장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맥아더는 리지웨이를 원했다.

나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 당시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의 회고 -

 

 

 

 

 

월튼 워커 장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커는 몇 가지 아쉬운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순직 직전 의도치 않게 한국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도저히 맥아더를 믿을 수 없었던 트루먼합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를 한국에 보내 직접 전선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워싱턴이 한반도 포기까지도 고려하고 있던 순간에

워커는 육군참모총장을 향해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12월 4일 콜린스를 만난 워커

“지금 병력만으로도 서울에서 충분히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고,

잠시 서울을 잃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뒤 재반격할 수 있다”

자신감을 보였다.

 

 

콜린스는 ‘상황이 나쁘긴 했지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고,

8군의 저항 의지를 합참과 대통령에게 소상히 전달했다.

 

이 덕분에

미국 정부는 철수 대신 항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합참의장 브래들리 “콜린스의 보고를 듣고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는데,

그 햇살은 실은 워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부하들의 사기를 고무하기는커녕 워커의 방어 계획에 재를 뿌리고 있었다.

12월 초 맥아더는

본국 정부에 “대만군을 끌어들이자”거나 “만주 폭격을 허가해 달라”며 확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또 도쿄를 방문한 콜린스를 만나선

“본국 정부가 추가 병력을 지원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맥아더가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계속한 이유

‘워싱턴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진 것’이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요구를 모두 물리치자,

맥아더는 이를 ‘패배주의’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맥아더가 큰소리를 칠수록 그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맥아더가 한반도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워싱턴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맥아더를 대신해 콜린스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보내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인천에서 시작된 맥아더 신화는 여기저기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월튼 워커는 거칠고 좁은 한국의 빙판길에서 지프 속도를 한없이 높였다.

12월 23일 워커는 운전병, 부관, 경호원과 함께 지프를 타고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국군 무기 운반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지프 앞으로 뛰어들었고,

워커의 차는 충돌을 피하다 전복됐다.

워커는 즉사했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1950년 12월 15일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타흐신 야즈즈 튀르키예 1여단장(당시 준장)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워커는 이 사진을 찍은 뒤 8일 후 사고로 사망했다. 미 육군(위키미디어 커먼스)

 

 

 

 

 

 

 

7. 서울 12월 23일 : 한 영웅의 죽음

미8군사령관 워커가 1950년 12월 23일 사망했다.

워커

서울 북방에 주둔하던 미24사단영국27여단을 방문해 수훈 장병들을 표창할 예정이었다.

그 길에 아들 샘(24사단 중대장)을 만나 크리스마스 휴일을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워커의 지프는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기 양주군 도봉리(현재 서울 도봉역 인근)에서

국군 6사단 화물차와 충돌해 길 밖으로 이탈했다.

워커는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근처 24사단 야전치료소로 이송됐으나,

군의관이 10시 50분 워커의 사망을 확인했다.

 

 

워커의 죽음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미 당시 맥아더의 행보를 보면 한반도를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그 즈음 맥아더가 워싱턴에 보낸 보고를 보면 철수(evacuation)라는 말이 자주 보였다.

대만군 또는 미군 부대를 추가로 지원하지 않을 거면,

미군 병력을 모두 일본으로 빼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1950년 12월의 한국전쟁은 워커 혼자 끌고 가는 양상이었고,

워커가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 철수 작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악전고투하던 워커마저 갑자기 사망하자 유엔군은 완벽한 지휘부 공백 상태에 빠졌다.

워커의 급사로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8군사령관직을 대행했다.

밀번은 온화하지만 소극적이었고, 리더십 있는 장군도 아니어서,

위기에 빠진 대군을 오래 지휘하게 둘 수는 없었다.

워싱턴이 빨리 워커 후임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한국 국민이나 미국 정부에 정말 다행이었던 점은

명장 워커의 후임이 또 다른 명장 리지웨이였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유럽 전선에서 사단장과 군단장을 지낸 뒤

펜타곤에서 요직(육군참모부장)을 꿰찬 리지웨이

당시 미국이 전쟁 지역 야전사령관으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인재였다.

리지웨이는 워커 사망 소식을 들은 뒤

인사 명령을 받고 곧바로 극동으로 날아와 12월 26일 도쿄를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리지웨이를 만난 맥아더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8군은 자네 소관일세”라며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게”라고 당부했다.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패색이 짙어진 단계에 이르자,

그제서야 인심을 쓰는척 맥아더는 리지웨이 야전사령관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리지웨이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슈 리지웨이가 한 일은

전쟁을 하는 데 최고사령관(맥아더)이 필수불가결한 인물이 아니란 점을 입증한 것이다.

리지웨이가 적과 싸우는 동안 맥아더는 워싱턴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 윌리엄 맨체스터의 전기 ‘맥아더’ 중에서 -

 

 

 

 

 

8. 에필로그 : 거인(맥아더)의 마지막

리지웨이의 등장(1950년 12월 26일)은

3년의 6·25 전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리지웨이 부임 이후 맥아더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맥아더가 떠넘긴 책임을 모두 등에 진 리지웨이는

후퇴(1·4후퇴)와 반격 작전(1951년 1~4월)을 보란 듯이 훌륭하게 해냈다.

 

리지웨이는 유엔군과 국군에 ‘공격정신’을 강조하며

북위 37도선까지 물러났던 전선을 3개월 만에 다시 38도선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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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의 의지가 없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4차공세(1951년 2월)와 춘계공세(4·5월)를 버티지 못하고

한반도 전역을 공산군 손에 내줬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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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의 가장 큰 공은

‘맥아더 없이도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의 공세 계획을 그저 승인해 주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리지웨이의 성공이 쌓이면서

인천의 환상에서 벗어난 미국 정부도

더 이상 맥아더에게 휘둘리지 않고 한반도 문제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좁아진 입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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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성명을 준비 중인 휴전 제의를 자기가 먼저 나서 선수를 치거나(1951년 3월)

△야당 지도자와 내통해 트루먼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1951년 4월)하는 등 불충을 거듭하다가,

결국 4월 11일 해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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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52년 군복무를 마칩니다.

제가 육사 연병장에서 선서했던 그날부터 세상은 참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희망도 꿈도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당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던 군가의 후렴구를 아직 기억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가사죠.

그 군가의 노병처럼 저 역시 군 경력을 마무리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께서 알려주신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했던 한 군인으로서 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1951년 4월 19일 맥아더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

 

 

 

해리 트루먼에게 해임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더글러스 맥아더가 1951년 4월 시카고 솔저필드 경기장에 모인 5만 명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여덟 번의 연재에 걸쳐 맥아더의 생애, 한국전쟁과 관련한 공과를 살펴보았다.

 

이제

맥아더에 관한 다섯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이 인물에 관한 논의를 정리해 보려 한다.

 

첫 번째 질문은 ‘과연 맥아더는 위대한 장군이었나’라는 의문.

한국전쟁에서 그는 ‘명장’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이기심과 공명심 때문에 전쟁 전체를 말아먹은 ‘졸장’에 불과했을까?

 

어디를 더 유심히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다르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인천 상륙’만 끊어서 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한 명장이 존재하기 어렵고,

그야말로 하늘이 대한민국을 위해 특별히 내린 ‘신의 장수’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 10월과 11월 중공군 개입 과정에서

맥아더는

방심, 오만, 불충, 확증편향 등

자신의 나쁜 측면을 모조리 드러내며 전쟁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인천의 성공이 맥아더의 눈을 완전히 가려 버렸고,

맥아더 때문에 거의 전쟁을 질 뻔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결국

6·25 한국전쟁에 대한 맥아더의 종합적 평가는

‘아집 때문에 졸장으로 전락한 명장’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질문. 맥아더는 북진 과정에서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의 강력한 권한에 수반되어야 할 마땅한 책임마저 외면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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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성공하고 북한으로 진격하는 사이

세 차례 정도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①적에 대한 정찰과 대비를 소홀히 했고

②예상보다 강력한 적의 침공 원인을 상관(대통령과 합참)과 부하(워커) 탓으로 돌렸으며

③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언론플레이로 시간만 끌다가 결정적인 골든타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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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달라진 맥아더의 말

 

 

 

 

 

세 번째 질문.

중국의 대규모 개입(중공군 30만 명 파병)을 예상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1차적으로 외국 정부와 그 수뇌부의 의도(마오쩌둥의 강력한 전쟁 개입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책임은 워싱턴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외교라인(국무장관 애치슨), 정보당국(CIA)의 책임이 가장 컸고

드러난 자료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펜타곤(국방장관과 합참)도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다.

이 모든 문제에서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저우언라이인도 외교관을 통해 미국 정부로 명백한 경고를 전달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중공군 개입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워싱턴 정부의 가장 뼈아픈 실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맥아더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1941년 12월에도 일본군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맥아더는

1950년 10월에도 자신의 나쁜 버릇인 ‘확증편향’을 반복하며,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군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상정조차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보참모들도 맥아더 구미에 맞는 첩보보고서만 생산하게 됐다.

 

그리고

관할 구역 내 적(중공군)의 동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맥아더 사령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결국 트루먼의 워싱턴 정부에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저항 의지와

*순망치한(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이 위협)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치·외교적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는 적의 위협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중에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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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망치한_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에 있는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하나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기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북한을 완전 정복하게 되면 중국은 그에 따라 위협적인 면이라는 의미로 피력한 말.

곧, 그렇게 되면 당장 중국이 그냥 두고볼 수 없다는 의미로 중국의 전쟁 개입 의도 입장을 말한 것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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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0년 9월 29일 '수도 환도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일등무공훈장 수여증을 전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네 번째 질문.

맥아더에게 한국은 무엇이었나?

그가 이승만에게 했던 다짐,

“캘리포니아를 보호하듯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전쟁을 그저 하나의 도구로써 이용한 것뿐이었을까?

 

 

맥아더 전문가이상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을 인용하면

“맥아더는 자기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군인이었을 뿐”이고

“한국인이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좋게 해석하는 것은

맥아더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맥아더는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애치슨 선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고,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결정에도 동의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내내 자신의 기본적인 임무는 한반도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소련의 남하로부터 일본 열도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대만군 참전

△원자폭탄 사용

△만주 폭격을 주장하며 줄기차게 확전을 시도했던 것도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군사적 성과를 향후 미 대선으로 이어가려는 정치적 의도였다고 보는 게 더 옳다.

 

여러모로

맥아더의 덕을 많이 본 일본인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고 해도,

한국이 맥아더의 과오까지 애써 외면하며 그의 공만 높이 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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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선언_Acheson Line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발표한 연설로,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을 설명한 것.
                     딘 애치슨_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

미국의 방위선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포함한다고 밝힘
하지만 한국과 대만은 방위선에서 제외된 듯한 표현을 사용

이 선언은 이후 한국 전쟁과 관련해 자주 언급됨. 
일부에서는 이 발언이 북한에게 “미국이 한국을 적극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되어 
한국전쟁 발발에 빌미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함.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 범위를 제시한 발언이며, 

                        한국이 명확히 포함되지 않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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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

맥아더 퇴장(해임)은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맥아더가 리지웨이 부임 이후에도 계속 한반도 작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한국전쟁의 얼굴마담’으로 남아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대만군을 끌어들이고

만주를 폭격하고 중국에 원자탄을 사용했더라면,

한반도 통일이라는 염원을 과연 달성할 수 있었을까?

 

 

이 대답에는 ‘그렇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당시 참전을 결정한 마오쩌둥(모택동)의 결기는 대단했다.

 

워싱턴 정부나 도쿄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 본토를 통일(1949년)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중국공산당이

내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전쟁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마오쩌둥은 “100대의 주먹을 맞지 않으려면 한 대를 먼저 때려야 한다”는 논리로

미국과의 전쟁을 감수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탄을 얻어맞고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중공군 파병을 결정했다.

 

맥아더 말대로 만약 확전을 도모 했다하고 한다면

중국공산당이 수백만 병력을 한반도에 쏟아붓고,

소련이 지상군을 투입하는 ‘세계대전’으로 비화했을 수도 있다.

 

당시는 이미 소련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이 제한전(특정 목표 달성을 위해 무력을 정해 둔 선까지만 투입)에서

전면전(국력을 무제한으로 투입)으로 확전 비화했다면

한반도에 원자폭탄이 사용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전쟁을 계속 주장하며,

책임지지 못할 얘기를 계속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 늦었지만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맥아더의, 맥아더에 의한, 맥아더를 위한 전쟁’이었던 한국전쟁

맥아더가 퇴장하고서야 비로소 장군 개인적 카리스마가 아닌

전쟁 지도부(대통령·합참)군사 지휘관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는 정상적인 전쟁으로 변화하게 됐다.

 

지독한 내로남불 병에 걸렸던 초췌한 노병은 결국 그렇게 사라졌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며.

 

 

 

참고 자료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공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⑦’
-심호섭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첫 본격적인 대결:

 중공군 2차공세와 미군의 ‘가장 긴 퇴각’에 대한 작전적 차원의 분석과 평가를 중심으로’
-Bill Mossman ‘Ebb and Flow’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Roy Appleman ‘Disaster in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맥아더의 행적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회고록

-백선엽 ‘군과 나’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
-H. 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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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창 anti092@hankookilbo.com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4071659000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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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_附錄

상관 닦달보단 부하 목숨이 먼저, 해병 사단장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1950년 11월 스미스 소장 : 중공군 개입 패퇴시 장진호 철수의 영웅

원본글 링크 :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040117580003764

 

 

 

6.25 전쟁 당시 미 해병1사단장(소장)이었던 올리버 스미스 해병 장군. 나중에 대장까지 진급한다.

 

 

 

 

“추위는 축축하고, 고통스러우며,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휘몰아쳤다.”

- 햄프턴 사이즈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 -

 

 

 

한기에 몸을 벌벌 떨며 텐트를 나가니 어제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분명 0도 근처에서 놀던 수은주는 밤사이 영하 23도로 고꾸라졌다.

전날까지 남아 있던 인디언 서머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진짜 겨울이 내려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려 꺼낸 철제컵이 손에 쩍 달라붙었다.

전투식량은 꽁꽁 얼어붙어 도저히 깰 수 없었다.

M1 카빈 소총은 발사되지 않았고, 헬리콥터도 뜨지 못했다.

 

 

극심한 추위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해병들은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추워서 그렇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이 집단쇼크 증상은

훗날 ‘Shook’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그나마

부상자의 상처마저 얼어붙어, 지혈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점이 추위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1950년 11월 11일,

함경남도 장진군의 인공호수엔 평년보다 혹독한 겨울이 더 빨리 찾아왔다.

바로 전날 케이크를 자르며 생일(1775년 11월 10일 창설)을 축하했던 미 해병대는

175년 만에 최악의 날씨를 맞이했다.

적을 만나기 전, 동장군과 죽느냐 사느냐라는 한판승부를 벌여야만 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악천후에서 치러야 했던 싸움.

장진호 전투는 기습적으로 찾아온 북극 한파와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6.25 전쟁 당시 겨울 전투를 하던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 해병1사단 병력. 미 해병대(위키미디어 커먼즈)

 

 

 

 

 

“음산한 땅에 분산된 연대와 대대들은 실오라기처럼 취약한 길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미8군은 이 끔찍한 봉우리들로부터 130km나 떨어져 있었다.

그(8군과 10군단) 사이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 ‘이런 전쟁’에 묘사된 장진호 전투 직전 -

 

 

배경: 미군은 왜 거기 있었나

 

장진호는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 남단쯤 되는 곳이다.

주변에 번성한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가까운 도시가 남동쪽 산길로 90㎞를 가야 닿는 함흥이다.

북쪽엔 2,000m 급 준령과 넓은 고원이 펼쳐지고,

서쪽 평안도 땅으로 가려면

굽이치는 좁은 길을 통해 한반도의 등뼈(낭림산맥)를 넘어야 한다.

 

 

두 달 전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수복한 미 해병1사단은 어쩌다 이 오지까지 떠밀려 왔을까.

이미 해병대 왼쪽에선 국군6사단이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10월 26일)하고,

오른쪽에선 미7사단한중 국경 혜산진을 향해 진군(11월 21일 점령) 중이었다.

전쟁이 다 끝날 것처럼 보이던 이때,

미군 최정예 사단은

점령할 도시나 마을조차 찾기 힘든 개마고원 황량한 땅을 터덜터덜 지나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1일)를 이해하는 것은

‘왜 그 겨울 미 해병대가 그 오지에 있었나’라는 궁금증을 푸는 데서 시작된다.

가장 결정적 순간,

가장 잘 싸우는 부대가,

가장 깊은 산중을 헤매는 이 괴상한 광경을 만든 두 사람의 명령권자가 있다.

바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미 10군단장(동부전선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이다.

 

 

 

맥아더알몬드가 달았던 ‘칠성’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며,

해병 2만5,000명의 목숨을 지켜야 했던 사람

바로 이글의 주인공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1사단장(당시 소장, 아래 사진)이다.

 

 

올리버 스미스의 이력. 

 

 

 

 

 

알몬드는 (전쟁 중에도) 퍼스트 클래스에서 살았다.

사령부엔 은제식기, 흰옷 입은 웨이터, 최고의 음식과 와인이 준비돼 있었다.

전용 트레일러엔 냉장고, 온수 샤워, 수세식 변기도 있었다.”

- 당시 장교들의 증언 -

 

 

 

 

 

 

조건 : 무모한 상관은 적보다 훨씬 더 무섭다

스미스의 직속상관은 알몬드였다.

그해 여름 낙동강 전투 때 맥아더월튼 워커 8군사령관 사이에서 농간을 부렸던

알몬드(당시 맥아더의 참모장)가 겨울엔 동부전선으로 와 스미스를 괴롭히고 있었다.

 

 

미국 전쟁역사가들은 대체로 알몬드

매우 거칠고,

심하게 공격적이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평가한다.

성과를 내려고 부하를 가혹하게 다그치는 것으로 악명 높았고,

항상 주변 사람 단점을 지적하면서 불화를 유발했다.

그에겐 “아무도 없는 사막에 두어도 분란을 일으킬 사람”(함께 일한 장교)이란 뒷말,

“미 육군 역사상 가장 공격적 리더”(전쟁사학자 스티븐 타페)란 평가가 따라 다녔다.

 

 

 

알몬드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흑인 부대 92사단을 지휘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마치는 듯했으나,

야심가 알몬드는 전후 맥아더의 극동사령부에 지원해 재도약을 모색했다.

맥아더 역시 알몬드의 충성심을 높이 사 그를 참모장으로 발탁했고,

인천상륙작전에서 별도 상륙부대(10군단)를 만들어 알몬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알몬드는 맥아더의 맹목적 추종자였고, 맥아더는 알몬드의 든든한 뒷배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밥 호프(가운데)가 1950년 10월 원산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을 위문하고 있다. 미 해병대는 이미 국군이 확보한 원산항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항구 주변 기뢰 제거 작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장시간 동해를 맴돌며 입항을 기다려야 했다. 미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5,000분의 1 확률이라던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한 맥아더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10월 초 38선을 넘은 김에 아예 전쟁을 끝내 버리고자 했다.

유엔군 병력을 크게 둘로 나눠 한반도 서쪽에 워커 8군, 동쪽에 알몬드 10군단을 각각 배치했다.

 

 

정공법보단 한 방을 선호했던 맥아더는

‘9월 인천’에 이어 ‘10월 원산’에서도 또 한 번의 상륙작전 차력쇼를 선보이려 했다.

북한군이 무너졌던 당시,

유엔군이 원산을 확보하려면 서울에서 추가령구조곡을 통해 육로로 밀고 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실리보다 화려함을 욕심낸 맥아더는 부대를 부산으로 보내,

힘들게 배에 태워 다시 상륙시키는 복잡한 전법을 택했다.

그사이 국군이 원산을 육로로 점령해 버리자 미 10군단의 전투 목표가 사라졌다.

10군단은 기뢰 제거 작업만 한 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원산항에 걸어서 입항했다.

미 해병1사단도 그 부대 중 하나였다.

 

 

       

 

 

 

맥아더는 10월 말

한반도의 가장 좁은 ‘목’(평양~원산)두 손(8군, 10군단)으로 틀어쥐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끝낼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평양에 입성한 8군을 신의주압록강 하류로 올리고,

함흥 일대를 장악한 10군단을 8군의 동쪽에서 북상시켜 압록강 상류를 장악하는 구상이다.

 

그중

미 해병1사단흥남에서 장진호까지 북상한 다음,

방향을 틀어 무평리(지금의 자강도 전천군)까지 서쪽으로 진격한 뒤,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임시수도 강계를 공략하는 초장거리 임무를 맡았다.

 

 

원래 해병대의 고유 임무는 상륙 후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해병대가 이렇게 내륙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건 이례적이면서도 위험한 작전이었다.

 

 

해병1사단은 이런 이유로 개마고원에 오게 됐다.

해안에서 멀어지며 장진호를 향해 가던 11월 초,

해병 정보참모들은 중공군의 움직임과 규모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계속 입수했다.

 

그러나

알몬드중공군 병력이 많지 않다는 맥아더 사령부 정보를 맹신했다.

알몬드는 중공군을 ‘세탁업자’(20세기 초 재미 중국인 다수가 세탁업 종사)라고 폄하하며

해병대에 무작정 전진을 강요했다.

 

 

맥아더와 알몬드는 틀려도 정말 단단히 틀렸다.

유독 추웠던 장진호 주변 산속엔, 알몬드가 얕보던 세탁업자 ‘12만 명’이 숨어 있었다.

미군을 기다리는 중공군 9병단(병단은 과거 국군의 야전군 규모)의 목표는

미군 최정예를 포위 섬멸해서 미 정치권과 여론에 충격을 주고,

미국 정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단숨에 꺾어버리는 것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를 위해,

9병단 12개 사단 중 8개 사단이 여러 겹의 덫을 치고 해병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8대 1의 싸움.

아직 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악의 날씨에, 적이 있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캄캄한 산속으로,

군단장 알몬드가 사단장 스미스의 등을 거칠게 떠밀고 있었다.

무모한 상관은 소름끼칠정도록 적보다 무서운 법이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미 육군

 

 

 

 

 

 

“해병1사단이 한국에서 처한 모든 도전에서, 스미스 장군은 언제나 감정을 통제했다.

그의 감정이 상식이나 이성을 압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 스미스의 부관 마틴 섹스턴 대위의 회고 -

 

 

 

 

각오 : 최고의 가치는 오직 부하의 생명

‘3중의 적’이 동시에 스미스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1)영하 30도 동장군

(2)몸을 숨긴 12만 명의 중공군

(3)적을 무시하고 스미스에게 ‘돌격’만 외치는 미국 장군(알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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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추위에서

△아군을 포위한 적을 물리치며

△상관이 가리키는 곳과 반대로

△병력을 보존해 무사히 탈출하는 ‘미션 임파서블’스미스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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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적이며 공격적인 알몬드와 비교해,

스미스는 모든 면에서 직속상관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었다.

스미스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UC 버클리)를 졸업한 뒤 석유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에 입사했다가,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해병 장교로 입대했다.

 

미국이 2차대전에 본격 참전하기 전부터 유럽(아이슬란드)에 배치된 해병대를 지휘했고,

2차대전 중 남태평양에 투입돼 일본군을 상대했다.

‘버클리 출신’이라는 이력처럼,

그의 리더십은 여느 해병대 장교의 거친 지휘 방식과 거리가 멀었다.

지적이고 부드러운 말투, 수준급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교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특히나 해병대 콴티코 기지 교관으로 있을 때

현대전의 여러 돌격 작전 효과를 수치로 분석한 뒤,

돌격은 그저 아군의 힘을 빼는 ‘가짜 영웅의 에너지 낭비’임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타페의 평가처럼, 스미스알몬드‘밤과 낮처럼’ 달랐다.

 

에드워드 알몬드(오른쪽) 소장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도중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위키미디어 커먼즈)

 

 

 

 

“해병대는 일부러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온갖 꾀를 부려서라도 부대를 나누는 것을 미루며,

부대가 약해지기 전 적이 모습을 드러내길 학수고대했다.”

- 당시 미해병1사단 작전참모 알파 바우저 대령 -

 

 

 

그러나 스미스는 유하기만 한 군인은 아니었다.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던 외유내강 리더였다.

특히나 해병대를 모르는 알몬드 같은 육군 장군이 내리는 명령에 저항했고,

인천에 상륙한 후 서울을 공략하는 과정(9월 하순)에서 이미 알몬드와 갈등을 빚었다.

알몬드는 스미스를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변명만 한다”며 폄하했고,

반대로 스미스는 알몬드를

예측할 수 없이 돌출행동만 일삼는 사람(loose cannon)’으로 평가했다.

 

 

두 사람은 장진호에서도 극과 극의 접근 방식을 택했다.

후방 군단본부에 있던 알몬드는 빨리 전진하라고 독촉했지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높게 봤던 스미스는 해병사단 진격 속도를

‘거의 명령 불복종에 가깝게’(참전용사 마틴 러스의 회고) 고의로 지연시켰다.

 

영국 전쟁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의 표현을 빌리면,

스미스는 ‘알몬드의 성급함 때문에 곧 해병대에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집중 운용하고자,

벌어진 연대 사이 간격을 최대한 좁혀 이동시켰다.

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함흥에서부터 장진호 사이 여러 곳의 보급 거점을 설치하고 각종 군수품을 쌓았다.

장진호의 거점 하갈우리(나중에 사단본부 설치)에는 공병 작업에 필요한 제재소를 세우고,

군수품 보급 및 부상자 이송을 위한 비행장까지 닦았다.

 

경비행기를 위한 간이 이착륙장이 아니라,

주력 수송기 C-47이 뜨고 내릴 수 있었던 정식 비행장(길이 870m, 폭 15m)이다.

 

비행장을 세워가며 전진했던 스미스의 고집스럽고 철저한 준비는

나중에 많은 부하들의 목숨을 살린다.

 

 

스미스는 해병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을 극도로 피했다.

불확실성이 보이면 나아가지 않았다.

장진호 근처에 도달해서는

이동 속도를 더 늦춰 하루 평균 1.5㎞(시간당 62.5m)만 가는 ‘거북이 진격’을 했다.

 

알몬드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육군 장성인 그가 해병대 장군을 해임하거나 군법회의에 넘길 순 없었다.

 

 

이렇게만 보면

스미스가 겁쟁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미스는 헬리콥터를 타고 추운 날씨에 최일선 순시를 강행했고,

11월 27일 밤 중공군 공격이 시작되자

다음 날 사단 지휘소를 하갈우리로 옮겨 전투 지역에 바짝 붙었다.

 

장진호 남단 마을인 하갈우리

호수 서쪽(해병5, 7연대)동쪽(육군 특임대)을 이어주는 요충지이면서도,

이미 중공군 수 개 사단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가장 위급한 때 사단장이 포위를 자초하며 최전방으로 옮겨 전투를 지휘한 것이다.

 

 

6·25 때 포병장교로 참전한 러셀 구겔러

“지휘관이 현장에 있다는 건 부대 사기를 높이고 무형의 전투력을 증대시킨다”

“스미스 장군이 해병대 구호인 겅호(gung-ho·깡이나 배짱을 의미) 정신을 몸소 실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루이스 풀러 미 해병 대령(해병1연대장). 그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은 전설적인 해병 장교로, 나중에 중장까지 승진한다. 미 해병대

 

 

 

 

 

 

“적군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제 발로 걸어와 우리를 포위하다니, 일이 간단해졌구만.”

- 장진호에서 포위당한 해병1연대장 루이스 풀러 대령의 반응 -

 

 

 

전투: 미군 2만 명 몰살 위기

 

11월 27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 사이,

웅크리던 중공군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중공군 8개 사단

△해병5·7연대가 배치된 최전방 유담리(장진호 서쪽)

△사단본부가 있던 하갈우리(장진호 남쪽)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덕동고개(장진호 남동쪽 산지)

△해병1연대가 있던 고토리(황초령 바로 북쪽)

△보급기지 진흥리(황초령의 남쪽)까지 거의 동시에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부대를 잇는 보급로도 대부분 끊겼다.

 

 

미군이 화력에선 우위였지만 병력 차가 최대 4배였다.

1개 사단으로 버틸 공격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유담리에서 진흥리까지 56㎞에 이르는 지역에 거대하고도 촘촘한 포위망을 쳐 두고 있었다.

맹렬한 추위와 높은 고도 탓에 철수 작전 난이도는 훨씬 더 높아졌다.

2차대전 때 주로 남태평양에서 활약하던 미 해병대에게 이렇게 추운 날씨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중공군의 포위 섬멸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고,

미 해병대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사단 병력 전멸 위기에 몰려 있었다.

 

 

 

 

 

 

 

 

 

도쿄 사무실에 앉아 전쟁을 낙관하던 맥아더도

전멸 직전 해병대의 상황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전투 개시 다음 날인 11월 28일 맥아더는 본국 합참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전쟁에 직면해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이제는 사령부의 통제와 힘을 벗어나는 상황을 맞이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자존심 강한 전쟁영웅이 한국전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앓는 소리’였다.

맥아더의 후퇴 지시를 받은 알몬드는 그제서야 해병1사단에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워낙 철저한 포위를 당한 탓에 공중보급 외엔 군단 차원에서 해줄 게 없었다.

오로지 스미스 휘하 부대와 해병항공대 지원만으로 겹겹의 포위를 뚫어야 했다.

해병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지만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후퇴는 진격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후퇴 작전 첫 단계는

가장 앞으로 나가 있던 유담리 해병 5·7연대를 하갈우리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덕동고개를 사수해야 했다.

1개 중대(해병7연대 F중대)가 이 생명줄을 지키고 있었다.

 

F중대 245명은 11월 28일 새벽부터 16시간 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냈다.

당시 공격에 가담한 중공군 병력은 3,000명 이상의 연대급으로 추정된다.

이후로도 F중대는 병력 증원을 받지 못하면서 12월 2일까지 4박 5일 동안 공격을 격퇴했다.

사상자가 중대 병력의 4분의 3에 달하는 최악의 상황임에도,

F중대는 덕동고개를 끝내 사수했다.

 

이 덕에

8,000명의 2개 연대 병력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F중대가 사살한 중공군만 1,000명이 넘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F중대에서만 미군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가 2명(중대장, 일병) 나왔다.

 

 

 

1950년 11월 말 또는 12월 초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설치된 미 해병대의 부상자 대기소 모습. 민가를 이용한 시설이다. 미 해병대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린 다른 방향으로 공격 중이오.”

- 후퇴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은 올리버 스미스의 반응 -

 

 

 

 

 

믿음 : 다쳐도 내 병사는 끝까지 데려간다

 

12월 4일 사단 본부로 후퇴한 해병5·7연대는

본부 병력과 합세해 12월 6일 하갈우리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이 철수 또한 쉽지 않았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를 거쳐 진흥리에 이르는 길은 깊은 계곡 지대에 있었고,

계곡 양쪽에 다수 중공군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해병1사단은 매복한 중공군과 고지전을 벌여가면서 후퇴해야 했다.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해 11일 흥남에 도착할 때까지

5박 6일 동안 134명해병대 전사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스미스는 ‘중장비를 모두 파괴하고 사단 병력을 수송기로 철수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해병대 역사상 그런 수치는 없었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싸우면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장비를 버리며 철수하면, 스미스의 계산으론 최소 2개 대대 병력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하갈우리에서 흥남까지 102㎞를 도보로 철수했다.

 

 

 

 

 

한국전쟁 당시 헬기를 통해 이송되는 미 해병대 부상자. 미 해병대

 

 

 

 

걸을 수 있는 경상자나 트럭에 태울 수 있는 부상자는 육로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몸을 가눌 수 없거나 응급수술을 요하는 중상자를 실어 나르는 게 문제였다.

스미스가 바득바득 우겨 가면서 세웠던 하갈우리 비행장이 비로소 큰 힘을 발휘했다.

헬리콥터와 경비행기로 옮길 수 있는 부상자는 하루에 6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공간이 넓은 C-47 수송기를 이용하면

10배 이상의 부상자를 흥남이나 일본으로 바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영하 20도땅속 50㎝까지 꽁꽁 언 동토를 파고 포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1월 27일 밤 전투가 시작된 후 30일까지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누적되고,

매일 100명 이상의 비전투 사상자(주로 동상)가 나왔다.

 

결국

스미스는 공사 진행률 40% 단계에서 비행장을 임시 가동하기로 했다.

12월 1일 오후 한 용감한 C-47 수송기 조종사가

아직 울퉁불퉁한 하갈우리 비행장에 가뿐하게 착륙하는 데 성공했고,

30분 후 24명의 부상자를 싣고 다시 떠올랐다.

 

 

스미스는 당시

“하갈우리 활주로가 뉴욕 라과디아 공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때부터 5일간 미군은 육군과 해병대 부상자 4,312명(꾀병 포함),

사망자 유해 137구를 수송기에 실어 날랐다.

 

스미스가

알몬드성마른 진격 명령을 꿋꿋이 버티며 비행장을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다.

 

 

 

부상자 이송은 ‘적을 죽이는 행위’와 직접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일선 부대 사기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해병대가 사상자 이송에 항공 전력을 동원한 것은

‘언제 어디서 죽거나 다쳐도, 끝까지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사단장의 확고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연히 지휘관과 일선 해병들 사이에 돈독한 신뢰감이 형성됐고,

사단장이 극한 상황에서 내리는 명령이 일선에서 철저히 지켜질 수 있었다.

 

 

미 해병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해병1사단의 인원 손실은 전사 561명, 부상 2,872명, 실종 182명총 3,615명(육군 별도)에 달했다.

그나마 스미스가 꼼꼼한 대비와 과감한 작전으로 훌륭하게 철수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스미스가 알몬드의 공격 명령에 동조해 병력을 무작정 밀어 올렸더라면

해병1사단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미 해병1사단 병력1950년 12월 9일 개마고원 입구인 황초령을 넘어 함흥 방향으로 철수하고 있다. 미 해병대

 

 

 

 

 

 

“미 해병대 역사에선 총 294번(현재는 297번)의 명예훈장 수훈이 있었다.

그중 42개가 한국전쟁, 그중에서도 14개가 장진호 전투에서 나왔다.”

- 미군 전사가 로이 애플먼 -

 

 

 

 

 

 

 

결론 : 한국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꾼 사단장

‘땅’의 관점에서 본다면, 장진호 전투의 승자는 중공군이다.

그러나 전체 전쟁의 관점에서 볼 때,

장진호 전투는 성공한 싸움을 넘어

군사상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박종상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평가받는다.

 

 

2차대전 최고의 후퇴작전인 *됭케르크 철수(1940년)에선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갔다.

이에 비해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가 4배에 이르는 적을 맞아 편제와 대형을 유지한 채,

적을 격퇴해 가면서 질서정연하게 후퇴한 작전이었다.

미 해병대도 공식 전쟁사(‘US Marines in the Korean War’)를 통해

해병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로 장진호를 기억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의 나비효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스미스의 빼어난 철수 작전은 일개 전투 수준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흐름을 바꿨다.

우선 미국의 전략군이라 할 수 있는 해병사단이 전력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다.

해병1사단중공군 9병단 병력 대부분을 잡아둔 동안

나머지 미10군단 병력은 무사히 흥남으로 철수했다.

 

 

해병1사단이 장진호에서 무너졌더라면 10군단 예하 사단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기적의 철수 작전’이라 불린 흥남철수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10군단부산거제 등으로 일단 물러났다가,

재정비를 거친 후 1951년부터 중동부 전선을 담당했다.

매슈 리지웨이가 주도한 역습에서 허리 역할을 맡았고,

수차례 중공군 공세를 격퇴하며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밀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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됭케르크_Dunkirk 철수작전 : Operation Dynamo라고 함.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벌어진 중요한 군사 작전으로, 공식 명칭은 다이나모 작전.
                이 작전의 핵심은 고립된 연합군 병력을 영국으로 탈출시키는 것이었음.

                영국은 군함뿐 아니라 민간 선박(어선, 요트 등)까지 동원.
                약 33만 명 이상의 병사를 구조하는 데 성공.
                많은 장비를 버리고 철수해야 했지만, 병력을 보존해 이후 전쟁 지속에 큰 역할을 함.

                참고 : 이 작전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더욱 유명해짐.

               

                시기: 1940년 5월 26일 ~ 6월 4일
                장소: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 됭케르크
                배경: 독일군이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하면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해안에 고립됨
               역사적 의미
                군사적으로는 후퇴였지만, 영국에서는 "기적적인 구출”로 평가됨
                이후 윈스턴 처칠의 연설과 함께 국민 사기를 크게 끌어올림
                간단히 말해, 패배 직전 상황에서 병력을 구해 전쟁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철수 작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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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함경남도 함흥에 조성된 해병대 장병 묘지에서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장진호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사단급 부대의 위업”

- 육군 준장 출신 전쟁역사가 S.L.A. 마셜 -

 

 

 

스미스의 장진호 철수는 그냥 후퇴가 아니라,

적과 맹렬히 싸우며 서서히 물러가는 ‘공세적 후퇴’였다.

 

미 해병대도 인명 손실이 컸지만 중공군 병력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중공군 사상자

최소 2만 명(중국 집계)에서 최대 6만 명(미국 집계)이다.

그나마 중국 집계엔 동상 등 비전투 손실 3만 명이 빠진 것이어서,

중공군 입장에선 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하려다가

사실상 1개 병단 전체가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중공군 9병단은 막심한 피해를 추스르느라 12월 31일 3차 공세엔 합류하지도 못했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6만 명을 보충해 겨우 전선에 돌아왔다.

 

만약 9병단이 미 해병대를 잡고 전력을 유지했더라면,

3차 공세 당시 유엔군은 37도선(평택~원주~삼척)보다 더 아래까지 쓸려 내려갔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더 뒤로 밀리면 아예 한국을 포기할 계획까지 세워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병1사단의 분전유엔군 전체를 패배 위기에서 구한 원동력이 됐다.

 

 

6·25 전쟁처럼 야전군 규모 이상이 맞붙은 대규모 전쟁에서,

이렇게 한 명의 사단장전체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례를 발견하기 어렵다.

 

미군 역사상 가장 자기애가 강했던 총사령관(맥아더)가장 무모했던 군단장(알몬드) 아래,

스미스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단장이 있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으로선 천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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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렇고 그런 장군이 해병사단을 지휘했더라면,

알몬드의 등쌀에 밀려 사단 전체가 전멸하는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고

미국은 전쟁을 거기서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6·25에서 여러 유엔군 사단장이 활약했지만,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단장 중 한 사람을 올리버 스미스로 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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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창 anti092@hankookilbo.com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040117580003764

 

 

 

 

참고 자료

장진호 전투 상황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⑦’
-한종수 김상훈 ‘미 해병대 이야기’
-로이 애플먼 ‘장진호 동쪽’
-T. R. 페렌바크 ‘이런 전쟁’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Bill Mossman ‘Ebb and Flow’
-Max Hastings ‘The Korean War’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Lynn Montross, Nicholas Canzona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Charles R. Smith(edited) ‘U.S. Marines in the Korean War’


스미스의 리더십 및 세부 일화
-마틴 러스 ‘브레이크 아웃’
-햄프턴 사이즈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
-러셀 구겔러 ‘한국전쟁에서의 소부대 전투기술’
-Clifton La Bree ‘The Gentle Warrior’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Robert A. Wells ‘Cold, Hard Truths: Leadership Lessons from Korea, 1950’
-Charles M. Province ‘General Walton H. Walker: The Man Who Saved Korea’
-Benis M. Frank ‘Oral History Transcript: General Oliver P. Smith’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약간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맥아더한국전쟁_인천, 그리고 서울 1

원제 : 인천 상륙에 7만 명 목숨 걸고... 맥아더, 사상 최대 도박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미 육군

 

 

 

 

 

 

 

“자네, 언제까지 그 참호 속에 있을 겐가?”

 

 

 

 

매캐한 포연 속 최전방에 최고사령관이 나타났다.

이곳은 영등포 동양맥주 공장 옆 야트막한 언덕.

여의도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북한군의 120㎜ 박격포탄이 수시로 내리 꽂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언덕을 오르던 미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참호 속 한국군 일등중사(하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맥아더가 보기에 일등중사 운명은 매우 위태로웠다.

맥아더는 저 일등중사의 목숨,

더 나아가 한국군 전체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 건너 서울 북쪽은 이미 전날 북한군 손에 떨어졌고,

폭격과 포격 여파로 도시 이곳저곳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개전 직전 10만 명에 달했던 한국군단 나흘 만에 2만5,0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한 파죽지세 북한군은 한강 *남안으로 *도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시흥전투사령부가 부랴부랴 낙오병을 재편성해 남안에 진을 쳤지만,

이렇게 얇은 방어선으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여기가 한국군 최전방인 동시 유일한 방어선이었다.

그러니까 김홍일 부대마저 뚫리면 한국은 끝이었다.

 

 

 

걱정스럽게,

그리고 한국군의 임전 태세가 어느 정도일지를 가늠해 보고자,

맥아더는 일등중사에게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돌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당시 맥아더의 통역을 담당했던

김종갑 대령(당시 시흥사령부 참모장·이후 중장 예편)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의 질문을 받은 일등중사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르는 법입니다.

상관의 철수 명령이 있던가, 아니면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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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안_南岸 : 남쪽 방향의 언덕. 여기서의 의미는 강남쪽  방향의 한강 이남 언덕을 뜻함.       : 남쪽 남 ,  : 언덕

도강_渡江 : 강을 건넘(도하_渡河와 같은 의미), 군대의 작전용어로는 '도하작전'이라고 함.  : 건널 도 , : 강 , 河: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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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앞좌석)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맥아더 뒤) 미8군사령관,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인 도일 히키 소장(운전석 뒤)이 1951년 4월 3일 강원 양양 지역을 순시하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① 영등포 6월 29일: ‘통찰’의 힘

 

답을 들은 맥아더는 일등중사 어깨를 두드리며 통역관 김종갑을 통해 약속했다.

“그에게 말해 주게. 내가 곧 도쿄로 돌아가 지원 병력을 보낼 테니, 안심하고 싸우라고.”

맥아더는 진짜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 일등중사도 틀림없이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이날은 1950년 6월 29일, 6·25 전쟁 다섯 번째 날이다.

당시 동양맥주 공장영등포역 바로 옆에 있었는데, 지금 영등포공원 자리다.

이곳엔 시흥전투사령부 산하 수도사단 8연대 3대대참호를 파고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군 기록을 보면

이날 맥아더는 맥주 공장 옆 언덕에 올라

약 20분(맥아더 회고록엔 1시간) 동안 강 건너편을 유심히 바라봤다고 한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 ‘회상(reminiscence)’에서

“한강에서 본 한국군은 이미 방어 능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서울에서 시작해 한반도 끝 부산까지, 공산군의 전차를 막아설 것이 전혀 없었다”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맥아더의 이 전선 시찰은

6·25 전쟁 초반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이미 1949년 철수했고,

한국군 자문을 위해 479명(장교 176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운영하고 있었다.

북한군을 막을 미군 전투 병력은 한반도에 없었고,

가장 가까운 일본에 맥아더 휘하 4개 사단이 있었다.

맥아더가 일등중사에게 약속한 이 ‘지원 병력’은 주일미군(미8군)을 말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한국군이 직접 싸우는 것을 봐야만

미 지상군 투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례적으로 최전방을 방문하는 위험을 무릅썼다.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이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연 미국 해공군으로만 충분할 것인가?

미군 지원을 받는 한국군이 북으로부터 밀려오는 전쟁 기계에 맞서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군 지상군이 전면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인가?

이걸 판단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가서 보는 것이었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맥아더의 한강 방문

미국 정부가 기존 방침을 뒤집고

한반도에 지상군을 전쟁 초기부터 신속하게 파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맥아더는 서울에서 도쿄로 돌아가자마자

“한국군 방어 능력이 사라져 미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전문을 본국에 타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리 트루먼 행정부“해·공군만으로 한국을 지원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맥아더 보고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6월 30일 1개 연대전투단(정규 보병연대+포병·방공포·공병 등 소규모 부대) 투입을 곧바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쟁 7일째 7월 1일 미군 선견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나중에 노획된 문서 등에 따르면

전쟁 직전 북한과 소련은 미군 전투병력 증원까지 최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고,

미군 투입 전에 이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적시에 최전선을 방문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미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면서,

북한의 속전속결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군은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해 경무장한 군대일 뿐,

기갑이나 공군 공격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한국군은 반격할 능력이 전혀 없다.

적이 계속 전진해 온다면 이 공화국은 심각한 몰락의 위기에 빠질 것이다.”

- 1950년 6월 29일 한강 시찰 후 맥아더가 기자에게 한 말 -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극도로 오만한 인간이었고 뼛속까지 정치군인이었으나,

군사적 천재성과 감각만큼은 ‘역대급’이라고 할 정도로 탁월했다.

 

천재성은 20분 짧은 시찰 동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6월 29일 한강 남쪽에서 서울 시내 쪽을 바라보던 동안,

맥아더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 스쳐갔다.

한국군이 한강 남안에서 버티는 동안 미군 2개 사단을 신속하게 증원해

서울 남쪽에 견고한 방어선을 펼쳐 전선을 고착한 다음,

상륙작전 훈련을 받은 미군 1개 사단(1기병사단)으로 서해안을 우회 상륙해

북한군 배후를 치는 반격이었다.

 

 

맥아더가 그때 이미 ‘인천’을 염두에 뒀는지,

아니면 ‘서울 근처’를 상륙지로 고려했는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두 달 반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현실화되는 대규모 반격 작전의 원형을

전쟁 5일 차에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맥아더가 돋보였던 점은 남들보다 훨씬 멀리까지 내다보는 통찰력이다.

모두들 ‘어떻게 이걸 막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하던 최악의 상황에서,

맥아더 혼자서만 몇 수 앞을 예측하고 언젠가 미래에 있을 ‘반격 작전’을 떠올린 것이다.

기약 없는 후퇴의 순간 난데없이 승리를 상상한 맥아더 특유의 낙관주의가 빛을 발했다.

 

 

맥아더에게 상륙작전은 매우 친숙한 역공법이다.

그가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결이 바로 이 상륙작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호주→뉴기니→필리핀 축선의 모든 섬을 점령하는 대신,

방어가 잘 된 섬을 피하고 준비 태세가 비교적 허술한 섬에 상륙하는

개구리 뛰기(leap frogging·섬 건너뛰기라고도 한다) 작전을 쓰며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

적의 배후를 단숨에 쳐 보급선을 끊은 뒤,

사기가 떨어지고 장비·물자가 부실한 적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게 맥아더의 장기였다.

대양에서 성공을 거둔 이 작전 개념을 대륙인 한반도에서 응용해 보려 했던 것이다.

 

 

머리를 스친 맥아더의 ‘한강 구상’은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가 상륙작전에 진심이었다는 점은 그의 이후 행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쿄로 돌아온 다음 맥아더는

참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상륙작전 검토를 지시했고,

7월 2일 맥아더 사령부는

‘블루하트(Blueheart)’라는 작전명으로 한반도 상륙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7월 22일 상륙작전 실행을 목표로 7월 4일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블루하트 작전을 그대로 끌고 가기엔 전황이 너무 빠르게 나빠졌다.

처음으로 투입된 미 지상군 부대인 24사단은 오산, 금강(지금의 세종), 대전에서 차례로 무너졌고,

미군과 한국군은 끝내 소백산맥 동쪽으로 밀려났다.

상륙은커녕, 뚫린 방어선을 메우기에도 병력이 모자랐다.

전선 고착 부대 중 하나였던 미24사단은 사단장(윌리엄 딘 소장)까지 포로로 잡히며 와해됐고,

상륙부대로 지정됐던 미1기병사단은 낙동강 방어에 투입됐다.

상륙을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라 블루하트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인천 상륙 후 서울 타격’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50년 7월 5일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24사단 소속 케네스 셰드릭(오른쪽) 일병이 경기 오산 인근에서 로켓 발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셰드릭 일병은 이 사진 촬영 수 초 후에 사망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인천 장악은 서울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이다.

낙동강에 몰린 북한군의 후방을 끊고, 병력 강화와 재보급을 막을 수 있다.

그때 월튼 워커의 8군이 앞으로 튀어나오면 된다.

인천 상륙 구상은 그 단순함, 우아함, 명료함에서 숨이 막힐 듯 훌륭했다.”

- 미국 전쟁사학자 스티븐 타페 -

 

 

 

② 도쿄 8월 23일: ‘웅변’의 가치

 

알고 보니 맥아더는 블루하트보다 훨씬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1950년 8월로 접어들며 낙동강 방어선에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야 했지만,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계속 염두에 두고 참모들에게 구체적 계획 수립을 독려했다.

새로운 상륙작전에 ‘크로마이트’(크롬철광)라는 이름을 붙이고,

오히려 상륙군 규모를 ‘사단급’에서 ‘군단급’(2개 사단 이상)으로 확대했다.

1기병사단 대신 상륙 전문 부대인 미해병대 1개 사단을 넣고,

후속 부대로 미육군 1개 사단을 상륙시키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상륙 후보지는

서해안에선 인천 군산 진남포(북한 남포시), 동해안에선 주문진이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상호에 따르면,

크로마이트 작전은 총 네 개의 시나리오로 구성돼 있었다.

100-A 계획군산에 상륙하는 작전이다.

 

미 상륙군단이 군산을 점령한 후 대전까지 동진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워커의 8군이 대구에서 출발해 추풍령을 넘어 대전에서 상륙군과 합류한다.

그러면 북한군을 한반도 남쪽에서 포위하고 격멸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다음 100-B 계획실제 역사로 구현된 인천 상륙이다.

미군 2개 사단이 인천으로 들어가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의 북한군 증원을 막는 사이(모루 역할),

망치 역할을 맡은 워커의 8군이 모루에 고착된 북한군을 내려치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100-C 계획은 인천 상륙 후 필요시 군산에 추가 상륙을 하는 것,

100-D 계획인천과 주문진을 통해 동서해안으로 동시 상륙을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100-C와 100-D는 인천 상륙의 보조 작전에 불과한 셈이어서,

결국 상륙 후보지는 인천 아니면 군산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당시 8군사령관 워커,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가 군산을 밀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어려웠던 7가지 이유

 

 

 

 

 

 

 

“상륙작전에서 피해야 할 환경을 모두 모아 리스트를 만든다면,

그게 바로 인천의 모습이 될 것이다.”

- 당시 상륙 계획에 참여한 어느 해군 장교의 촌평 -

 

 

 

 

 

 

 

맥아더가 인천으로 가려면 ‘전문가의 벽’부터 넘어야 했다.

2차 대전 내내 이골이 나도록 상륙작전을 반복했던 해군·해병대 장교들이 볼 때,

인천은 절대로 상륙작전만은 피해야 할 최악의 후보지였다.

 

인천항은

① 지형상 좁은 수로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수로가 포격 사정권에 들어오거나 기뢰로 방해받으면

    제아무리 최강 미해군이라도 손쉽게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다.

 

② 또 최대 9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공격군 입장에선 하루 2회 밀물이 들어왔을 때만 상륙이 가능하고

 

③ 방어군 입장에선

     인천항을 가로막은 천연 성벽 월미도(당시는 완전한 섬이었음)에서

     철벽 방어를 할 수 있었다.

 

④ 또한 당시 인천 해안에는

     높이 4m가 넘는 콘트리크 구조물(안벽)이 길게 깔려 있어

     상륙정이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⑤ 해안 바로 옆 인구 25만 명의 도심지가 이어지기 때문에 상륙 직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러야 했다.

 

⑥ 게다가 어렵게 인천을 차지하더라도

     최종 목표인 서울을 점령하려면

     한강에서 다시 한번 상륙작전과 유사한 도하작전을 해야 했다.

 

⑦ 마지막으로 9월 중순은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태풍이 빈발하는 시기여서,

     대규모 함대가 일본에서 출발해 한반도에 상륙하는 과정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맥아더는 상륙 전문가들의 반대 말고도

합동참모본부(당시 구성원은 합참의장+3군참모총장)의 회의적 시각도 함께 극복해야 했다.

우선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부터가 상륙작전 회의론자였다.

 

브래들리는 6·25 전쟁 발발 8개월 전인 1949년 10월

미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2차 대전 때와 같은) 대규모 상륙작전은 앞으로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압도적 핵무기와 가공할 공군력을 보유한 이상,

인명 피해가 큰 상륙작전을 굳이 시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전략폭격을 통한 공군 만능주의를 추구하던 공군참모총장 호이트 반덴버그도 같은 의견이었다.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은 상륙 자체엔 동의했지만

맥아더의 극동사령부(육군 위주)가 주도하는 작전에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맥아더의 직속 상관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인천 대신 군산에 상륙해야 병력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워싱턴 정책 결정자와 해군의 상륙작전 실무자가 모두 ‘인천’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튼 워커 장군의 군산상륙작전 계획

 

 

 

 

 

 

 

 

반면에

맥아더는 처음부터 인천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인천은 여러 가지 지형적 단점을 안고 있었지만,

일단 상륙에 성공하기만 하면 곧바로 서울을 노릴 수 있는 서해안 최고 요충지였다.

 

당시 북한은 서울을 헌법상 수도로 명시해 두고 있었고,

전쟁 중엔 낙동강 전선 공략을 위한 병력 집결지 및 장비 보급처로 서울을 활용하고 있었다.

서울을 단시간 안에 수복할 수 있다면,

유엔군은 북한에 정치적·심리적 타격과 군사적 손실을 동시에 가할 수 있었다.

 

 

남들은 다 안 된다고 했지만,

맥아더는 큰 승리를 위해선 하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국가적 자존심, 막대한 전비,

수만 명 유엔군 장병의 목숨을 담보로 내건 지상 최대의 도박이었다.

도박판으로 가려면 워싱턴의 상관들과 도쿄의 부하들을 동시에 설득해야 했다.

“인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반대 의견을 단숨에 반전시키기 위해,

맥아더는 화려한 뒤집기 쇼를 준비했다.

1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위치한 도쿄 중심가 다이이치(第一) 빌딩이 맥아더의 무대였다.

1950년 8월 23일이다.

 

 

 

“당시 우리는 맥아더가 부산 교두보를 지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지금 당장 부산이 위험한데,

상륙에 그렇게 많은 공을 들이는 게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천 상륙은 너무나도 위험한 기동이어서,

실패했을 때 한 나라의 재앙을 넘어 국제적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 당시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회고록 중에서 -

 

 

 

 

 

 

1950년 8월 21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가 상륙작전 회의를 위해 도쿄에 도착한 로턴 콜린스(왼쪽) 육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오른쪽) 해군참모총장의 팔짱을 낀 채 반가워하고 있다. 미 해군

 

 

 

 

 

미 합참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맥아더가 “9월 중순 인천에 군단급 병력을 상륙하겠다”고 계속 고집했지만,

합참이 볼 땐 성공 가능성이 낮은 도박임에 분명했다.

 

그렇다고

당시 미군 내 최고 전쟁영웅의 요구를 명령서 한 장으로 물리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육해공 지휘부를 현지에 보내 맥아더 얘기를 직접 듣고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해군참모총장 셔먼,

공군참모부장 이드월 에드워즈 중장 등 11개의 별이 워싱턴에서 도쿄로 날아갔다.

태평양사령관 아서 래드포드 제독(대장),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제독(중장),

7함대사령관 아서 스트러블 제독(중장),

극동공군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

8군사령관 워커 중장,

상륙전 전문가 제임스 도일 제독(소장) 등도 도쿄에 모였다.

2차 대전 이후 이렇게나 많은 별이 한 회의실에 모인 적은 없었다.

 

 

 

회의는 8월 23일 오후 5시 30분 시작됐다.

8명의 해군 장교가 각 분야에서 8분씩 브리핑을 이어갔다.

작전 개요, 상륙 환경, 피아 전력 비교, 위험 요소,

작전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 등을 상세히 평가했다.

역시나 인천에 대해선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특히 해군의 반대가 심했다.

썰물 때 뻘밭이 3㎞ 이상 펼쳐져 함정이 고립될 수 있는 바닷가,

상륙지 바로 옆에 시가지가 위치해 있어서

어디로 부터 어떤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해안에 함대를 밀어 넣고 싶어 하는 제독은 없었다.

 

해군은 조수의 간만의 차가 상대적으로 덜하고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포승면(평택)을 대체지로 꼽았다.

 

발언을 이어간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의 선택은 여전히 ‘군산’이었다.

2차 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양쪽 전선에서 맹활약했던 명장 콜린스도 상륙작전엔 일가견이 있었다.

6년 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선봉 7군단의 군단장이었던 콜린스는

인천이 상륙 지점으론 낙동강 방어선에서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출발하는 8군, 인천에 내린 상륙군단이 경기나 충청 어딘가에서 만나기 전에

북한군이 포위망을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

군산에 상륙하면 워커 8군과 상륙군단 사이 거리를 좁힐 수 있어,

모루(상륙군단)에 망치(8군)로 후려치는 시점을 훨씬 앞당길 수 있다.

서울 수복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인천 상륙보다 더 신속하게 북한군 잔당을 섬멸할 수 있는 상륙지가 바로 군산이었다.

 

 

당시 워커를 수행한 전용기 조종사 마이크 린치 대위의 회고에 따르면,

콜린스는 이 회의 직전 한국 전선을 시찰했을 때 워커와 상륙 후보지를 논의하면서

‘군산이 가장 적합하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본 상태였다.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달리로 만들어 본 맥아더의 초상화. 다면적 인간인 맥아더를 나타내기 위해 피카소의 입체파 화법으로 맥아더의 얼굴을 표현했다.

 

 

 

 

 

“군산 상륙은 위험이 적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가치도 적다.

거기를 때려봐야 적의 보급선이 끊기지 않을 것이다.”

- 육해공군 지휘부에 인천 상륙을 역설하는 맥아더 -

 

 

 

 

맥아더는 해군 장교들과 콜린스의 말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맥아더의 발언만 남겨두고 있었다.

모두가 맥아더를 지켜보고 있었다.

맥아더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느긋하게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쏟아지는 좌중의 시선을 좀 더 즐겼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판단한 순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는 화려한 언변을 무기로,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전설적 전쟁 영웅의 아우라를 방패 삼아,

맥아더의 ‘쇼타임’이 시작됐다.

 

 

그는 인천 상륙을 걱정하는 워싱턴과 해군의 지적은 이해가 가지만,

가장 효과적인 상륙 목표가 인천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군산이나 포승면에 상륙해선 북한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자신은 해군이 이번에도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작전 성공을 확신한다면서,

가장 반대가 심했던 해군 제독들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원맨쇼는 45분 동안 이어졌고,

처음에 나직하고 온화하던 맥아더의 목소리는 결론을 향해 갈수록 점점 웅변조로 커지고 있었다.

 

 

“서울을 장악함으로써 나는 적의 보급 체계를 완전히 마비시키려고 하오.

작전 당일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상륙작전을 현지에서 중단시키겠소이다.

그러면 잃게 되는 것은 내 평판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천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오.

인천은 성공할 것이고, 이 작전은 10만 명의 목숨을 구할 것이외다.”

맥아더의 발언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발언이 시작될 때처럼,

말이 끝나고서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맥아더의 역전승으로 끝난 게임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장교는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다”

“역사에 남을 일을 직접 목격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워커파일럿 린치 대위

“워커 장군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맥아더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혼자서 인천을 고집하던 맥아더가 결국 인천을 관철시킨 뒤집기 한판승이었다.

합참이 크로마이트 작전을 최종 승인한 것은 9월 8일이었지만,

이날 맥아더의 원맨쇼 이후 인천 이외 상륙지를 언급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결국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기로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두 번째) 유엔군사령관이 1950년 9월 15일 상륙지휘함 마운트 맥킨리호에서 인천상륙작전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맥아더 왼쪽에서 망원경으로 전방 상황을 확인하는 사람이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맥아더한국전쟁_인천, 그리고 서울 2

원제 : 인천에서 '전쟁의 신' 반열 오른 맥아더... 자만 못 참고 '벌거벗은 임금님' 되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참모, 휘하 사령관들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며 함께 웃고 있다. 왼쪽부터 제임스 도일 해군 소장(TF90 사령관), 에드윈 라이트 육군 준장(극동사령부 작전참모), 맥아더,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맥아더 참모장).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맥아더의 계획이 합참에 올라왔을 때 의구심을 품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상륙이 성공하는 순간까지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단순한 군사적 천재가 아니었다.

반대자까지 열광적으로 지지하게 만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당시 미 육군참모부장 매슈 리지웨이 중장 -

 

 

 

 

 

 

③ 인천 9월 15일: ‘도박’의 승리

상륙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천상륙작전은 260여 척의 함정을 이용해 7만5,000명의 상륙부대(미 10군단)를

한 지점에 단시간 밀어 넣어야 하는 초대형 고난도 군사작전이었다.

 

 

이런 대규모 상륙작전은

최소 수개월에서 최대 1년 이상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미군 매뉴얼상으로 이런 정도의 상륙작전을 하려면

160일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인천상륙작전

8월 12일 맥아더로부터 작전 수행 지시를 받고 9월 15일 실제 작전을 실시했다.

불과 34일 만에 합참과 해군 제독들을 설득하고,

1개 군단(10군단)을 완전히 새로 창설했으며,

이 대병력이 쓸 무기·장비·물자·선박을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

 

 

부족한 미군 병력을 채우기 위해

한국군 8,600여 명을 일본으로 데려와 긴급하게 훈련시킨 뒤

미7사단에 편제(카투사의 시초)했다.

그 와중에 인천 상륙을 숨기기 위해

진남포, 군산, 동해안에 상륙할 것처럼 기만작전을 벌이는 작업도 병행했다.

 

 

2차대전 때

최대 1,200만 명의 대병력을 굴리던 미군의 인사·정보·작전·군수 역량이 최대한으로 발휘되기도 했지만,

맥아더가 위로는 워싱턴을 설득하고

아래로는 참모들에게 신속한 계획 수립을 독려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2차대전에서도 맥아더가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맥아더의 창의성, 뚝심, 임기응변 능력 등의 장점이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면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희대의 천재가 노력과 준비성까지 갖추면

단시간 안에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었다.

상륙작전 준비의 마지막 순간,

맥아더는 ‘합참이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면 어쩌나’하는 조급한 마음에

해서는 안 될 큰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인천 상륙부터 서울 탈환까지.

 

 

 

 

 

 

“인천은 해군을 싫어하는 사악한 천재들이 만들어낸 도시였다.

항구였지만 안벽과 부두만 있고 해변이 없었다.

월미도는 수비대를 주둔하기에 적합했고, 이 섬 때문에 상륙 병력이 둘로 나뉘었다.

물살은 빠르고 거셌다.

더 큰 어려움은 최대 9m에 이르는 조수였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중에서 -

 

 

 

 

맥아더의 실수

합참을 철저히 무시하고 합참의장과 3군참모총장을 모두 적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상륙작전 장소를 숨기기 위해 적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동시에 아군 최고지휘부를 배제하고 혼란에 빠트리며 선을 한참이나 넘어 버렸다.

 

이것은 군의 지휘 체계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맥아더가 합참 구성원보다 계급이 높았고 군 경력도 선배였지만,

전구사령관으로서 합참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애초 합참이 ‘인천 상륙’에 반대하긴 했지만,

맥아더가 상륙 준비에서 본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합참 구성원들이 어쨌든 승리를 위해 맥아더를 믿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런 합참의 은공을 무시하고,

합참을 인천상륙작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세력으로만 간주했다.

 

 

합참이 상륙 작전의 구체적 계획을 보고하라고 여러 차례 도쿄사령부에 통보했음에도,

맥아더는 이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

상륙 당일(D-데이)인 9월 15일이 가까워지는데도 세부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다.

결정적인 잘못은 D-데이 당일까지도 합참을 고의적으로 속이려고 했다는 점이다.

 

 

작전 계획을 알려 달라는 합참 요구가 계속되자,

도쿄사령부는 불과 며칠 전에야

“고위 장교(senior officer)를 워싱턴에 직접 보내 작전 계획을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이때

맥아더는 작전 계획을 들고 워싱턴으로 가는 린 스미스 중령에게

최대한 천천히 펜타곤에 도착할 것을 주문했다.

합참이 세부 작전 계획을 보고 수정 명령을 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사보타주 전술을 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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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타쥐_Sabotage : 조직, 시스템, 장비, 또는 활동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를 의미(거의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행해짐)

                어원(프랑스어)

                                    흔히 나무 신발을 뜻하는 'sabot(사보)'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으며,

                                    과거 노동자들이 기계를 망가뜨리기 위해 신발을 던졌다는 이야기와 연결되기도 함.

                의미와 특징

                                   고의성 :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행함.

                                   은밀성 : 드러나지 않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음.

                                   피해 유발 : 생산성 저하, 시스템 오류, 경제적 손실 등 발생.

                다양한 유형

                                   산업 사보타쥐 : 공장, 회사 내부에서 기계나 작업을 방해.

                                                             (예) 장비 고의 파손, 작업 지연.

                                   정치적 사보타쥐 : 정부, 조직, 정책 등을 약화시키려는 행동.

                                   군사적 사보타쥐 : 전쟁 중 적의 시설이나 보급을 파괴.

                                   사이버 사보타쥐 : 해킹, 데이터 삭제, 시스템 장애 유발.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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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 구성원. 왼쪽부터 포레스트 셔먼 해군참모총장,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호이트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자서전 'War in Peacetime'.

 

 

 

 

 

 

 

스미스 중령이 펜타곤에 도착한 것은 상륙작전 개시 불과 8시간 전이었다.

합참 장군들은 맥아더가 보낸다던 ‘고위 장교’

참모장(소장)이나 작전부장(준장)이 아닌 ‘중령’이었다는 것에 놀랐지만,

일단 스미스를 향해 질문을 이어갔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오늘이 D-데이 아닌가”라며

“상륙시간(H-아워)은 언제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합참은 그제야 6시간 후 인천에서 상륙작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인지했다.

 

 

합참은 어쩔 수 없이 맥아더의 작전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인천 상륙이 대성공으로 끝났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징계나 문책을 하기도 어려웠다.

합참은 맥아더의 기만 작전을 흐지부지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합참의장과 3군참모총장 입장에서

맥아더의 ‘고의적 합참 배제’는 매우 모욕적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맥아더가 자존심이 강하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합참 구성원들은

맥아더가 국가안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일하는 ‘동료’일 것이란 점은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맥아더는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동료 장군들을 바보로 만들 수 있는 냉혈한이었던 것이다.

 

 

브래들리(합참의장),

콜린스(육군총장),

셔먼(해군총장),

반덴버그(공군총장)는 이 치욕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7개월 후 복수했다.

 

1951년 4월 트루먼이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해임하려고 했을 때,

합참 구성원 중 누구도 맥아더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저마다 2차대전 전쟁영웅이었던 합참 구성원들의 만장일치 해임 의견은 트루먼에게 큰 힘이 됐다.

 

 

 

 

“상륙 전날 밤, 지휘함 선실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두 시간 동안 맥아더는 욕실 가운을 입은 채 혼자서 토론하는 것처럼 독백을 했다.

인천 상륙과 자신의 2차대전 경험을 비교하며 인천 상륙의 장점과 단점을 세세하게 읊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군사적 실패로 기록될 수도 있다고 하다가,

그래도 이걸 하지 않으면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속 사람이 죽어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맥아더는 혼자 결론을 냈다.

인천 상륙은 정상적 판단이고, 위험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 클레이 블레어 'The Forgotten War' 중에서 발췌 -

 

 

 

 

 

 

1950년 9월 15일 미 5해병연대 A중대 3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가 사다리를 타고 인천항 안벽을 최선두에서 넘고 있다. 로페즈 중위는 저 사진이 촬영된 지 몇 분 후 전사했다. 미해군 역사유산사령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주사위는 던져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맥아더마저 극심한 부담감을 느꼈던 상륙 전야가 지나고,

1950년 9월 15일 D-데이 날이 밝았다.

 

미군 등 유엔군 소속 함정 19척이 야음을 타고 들어와

이미 인천 인근 바다에 포진해 있었다.

이 중 순양함 6척, 구축함 6척이 인천항 가까이 들어왔다.

덩치가 큰 순양함들은 해안에서 약 4㎞ 지점에서,

기동성이 좋은 구축함들은 바닷가 240m 지점에서 대기 중이었다.

 

 

상륙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월미도.

지금은 월미도가 간척사업 덕분에 인천역과 육지로 연결돼 있지만,

당시는 완전한 섬이었고 가느다란 방파제를 통해서만 인천 본토로 이어져 있었다.

 

월미도는 인천항을 외곽에서 거의 완벽하게 방어해 주는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무조건 월미도를 차지한 다음 인천 시가지 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전 밀물 두 시간 동안 월미도를 장악하고,

다음 썰물인 늦은 오후에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이중 상륙 작전’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작전의 성패는 월미도를 얼마나 빨리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미 미군은 상륙 이틀 전인 13일부터 월미도 북한군 기지를 맹폭했는데,

13일엔 해병대의 커세어 전투기가 월미도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고,

14일엔 해군기가 그 섬을 유린했다.

 

함포와 전투기를 통한 포격·폭격이 월미도에 집중되다 보니,

섬 지형이 달라져 조종사들이 목표 지점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월미도 작전에 참가한 해군 파일럿 에드워드 올브라이트 소위

“어제까지만 해도 풀과 관목으로 덮여 있던 곳이었는데,

오늘 가 보니 풀은 다 사라지고 나무 몇 그루만 남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오와급 전함 위스콘신호가 1952년 한국 해안에서 함포사격을 하고 있다. 미 해군

 

 

 

 

 

 

상륙 당일에도 함포사격은 월미도에 집중됐다.

마지막 포탄이 떨어진 시간이 오전 6시 29분.

거짓말처럼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진 4분이 지난 뒤,

오전 6시 33분 미해병1사단 선봉인 5해병연대 3대대가 월미도 녹색해안에 도착했다.

 

 

해병들은 긴장한 채로 상륙했지만 섬에선 큰 저항이 없었다.

함포 포격과 전투기 폭격 때문에 북한군 방어 병력이 아예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해병1사단 작전참모 알파 바우저 대령

“북한군은 포격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면서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아니면 충격을 받은 상태로 주변을 휘청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상황을 묘사했다.

 

 

 

상륙 1단계 월미도 제압 작전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첫 상륙 22분 후인 6시 55분 월미도 언덕에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제야 맥아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륙지휘함 마운트 매킨리호에서 월미도 쪽을 망원경으로 살펴보던 맥아더는

성조기 게양을 확인하자 “됐네, 이제 커피나 한 잔 하세”라며 부하들을 치하했다.

 

그 이후 작전은 잔당을 정리하는 수준이었고,

오전 8시에 이르러선 섬에서 북한군의 저항이 완전히 사라졌다.

 

유엔군은 1시간 27분 만에 인천 상륙 최대의 장애물 월미도를 손에 넣었다.

유엔군 측 전사자는 없었고 부상자만 17명이었다.

반면 북한군은 108명이 사살되고, 136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와 별도로

미군 불도저가 밀어버린 참호 안에서 150명 이상의 인민군이 매몰돼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월미도를 점령한 직후 정찰 작전을 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상륙 2단계는 초저녁 밀물을 타고 인천 본토로 들어가는 작전이었다.

월미도 점령 후 다시 바닷물이 들어오길 9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오후 5시 30분부터 1해병연대와 5해병연대의 인천 본토 상륙전이 시작됐다.

 

인천 시내 작전도 순조로웠다.

5해병연대는 오후 6시 45분쯤 일대에서 가장 높은 응봉산(지금의 자유공원)을 점령했고,

1해병연대는 밤 10시쯤

경인선 철도를 감시할 수 있는 117고지(현재 주안동 수봉산)를 차지했다.

 

 

인천 시가지 전투도 사실상 D-데이 당일 유엔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돌아갔다.

인천을 모두 점령하는 동안 유엔군의 인명피해는 사상 174명(사망 21명).

맥아더는 “미국 대도시에서 매일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적은 숫자”라고 촌평했다.

맥아더조차 이렇게나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맥아더의 개인기로

여기까지 끌고 온 인천상륙작전의 D-데이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해병대 선봉부대들이 속속 인천의 요충지를 점령하는 동안,

미 해군 함정들은 야간에도 환하게 불을 밝힌 채

후속부대와 장비를 계속 인천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날 밤 12시까지 총 1만3,000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륙했다.

날이 밝으면 곧 동진이 시작될 터였다.

이제 다음 목표는 서울이었다.

 

 

 

 

 

“북한 같은 전체주의의 문제점은 나쁜 소식이 지도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쁜 소식은 위로 올라갈 때마다 살균기에 넣은 것처럼 변해 버린다.

(상륙 징조가 있었음에도) 인민군은 경계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낙동강 방어선의 교착상태를 깨뜨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1950년 9월 17일 미 해병대 선두 병력이 인천에서 서울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미 해병대

 

 

 

 

 

 

④ 서울 9월 28일: ‘구국’의 영웅

 

서울 입구까지도 쾌속 행진이 이어졌다.

 

미 해병대

9월 16일 부평 일대까지 진출했고,

9월 17일엔 서울-인천 사이 최대 요충지 김포비행장을 점령했다.

9월 18일 5해병연대의 김포반도 점령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9월 19일엔 해병사단 수색중대를 중심으로 한 정예 정찰반

(여기서 연세대 언더우드 3세 원일한 박사가 통역장교로 활약)이 서울 함락 후 최초로 한강을 건넜다.

5해병연대 우측방 1해병연대도 영등포-노량진 방향으로 신속하게 진격했다.

9월 19일 소사(부천),

9월 20일 안양천을 거쳐,

9월 22일에 영등포를 장악하고,

9월 23일엔 노량진을 거쳐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까지 진출했다.

 

미해병1사단 후속으로 상륙한 미7사단(카투사 포함)은

안양과 수원으로 남하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7사단 예하 31연대가 9월 22일 수원비행장을 점령했다.

한미 연합군으로 구성된 유엔군 지상군 병력이 상륙 불과 일주일 만에

서쪽과 남쪽에서 서울을 에워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수도 서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1950년 9월 20일 미해병1사단과 함께 싸우는 한국 해병대 장병들이 김포비행장에서 한강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 육군

 

 

 

 

 

그러나

서울 서쪽(지금의 마포·서대문구)에서 뒤늦게 북한군의 치열한 저항이 시작됐다.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수색-신촌-광화문 방면으로 진격하던 미해병5연대와 한국해병1대대를

북한군 보병연대와 서울치안연대가 막아섰다.

이 병력이 인민군 방어군의 주력이었다.

 

한국 해병대가 9월 21일 두 시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모래내 104고지(현 서연중학교 뒷산)를 장악했고,

다음날 북한군의 역습이 있었지만 고지를 사수했다.

당시 미 해병대를 종군한 외국 기자들이

104고지 점령·사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봤기 때문에 한국 해병대의 역량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북한군이 촘촘한 방어선을 형성한 연희고지(연세대 인근)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이틀간 발목이 잡혔으나,

전투기와 포병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은 미해병대가

9월 24일 안산(296고지) 인근의 능선을 뚫어내면서

4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같은 날 노량진에서는 미해병1연대가 용산 쪽으로 도하를 시작했다.

 

 

 

 

 

 

“맥아더는 9월 25일까지 서울을 수복하기를 원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정확히 3개월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 조지프 굴든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중에서 -

 

 

 

 

 

1950년 9월 미 해병사단 소속 해병들이 서울 시내에서 인민군 소탕 작전을 하고 있다. 미 해군

 

 

 

 

서울 탈환의 최종 단계는 시가지 전투였다.

서울 도심 전투는 전쟁이 발발한 지 딱 3개월 되던 9월 25일 시작됐다.

이때는 뒤늦게 상륙한 미해병1사단 7해병연대도 서울 공격에 투입되어,

해병사단은 전쟁 후 처음으로 3개 연대를 완전 편성한 상태에서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다.

5해병연대는 연희고지를 출발해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방면으로 직진했고,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넌 1해병연대는 마포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7해병연대는 북악산을 거쳐 미아리고개 방면으로 진출하며 북한군 퇴로를 차단했다.

미7사단은 남산으로,

국군17연대는 왕십리로 전진하며 한미 연합군이 사실상 서울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시가지 전투 이틀째인 9월 26일까지

한미해병대와 양국 육군은 서울 도심 절반 정도를 장악한 상태였다.

아직도 골목 골목마다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던 그날 오후 2시 10분,

맥아더는 갑자기 서울을 탈환했다는 공식 성명(코뮈니케)을 발표했다.

 

“한국의 수도 서울이 다시 아군의 손에 들어왔다.

한국군17연대, 미7사단, 미해병1사단으로 구성된 유엔군은

서울을 완전히 포위하고 도시를 장악했다.”

 

그러나

실제론 맥아더 코뮈니케가 발표된 다음날인 9월 27일에도

서울 도심에서는 북한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놓고 맹렬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맥아더가 조급하게 승리 선언을 해 버린 것은

‘전쟁 3개월 만에 수도 탈환’이라는 최상의 홍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처럼

싸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대뜸 승리를 선언하는 것은

2차대전 때도 계속된 맥아더의 나쁜 버릇이었다.

 

1945년 2월과 3월 계속된 필리핀 마닐라 탈환전에서도

“적의 괴멸이 임박했다”고 성명을 발표했으나 실제 전투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부하들이 여전히 피를 흘리는 순간에도

자기 명예를 앞세우는 맥아더의 이기심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사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서울 탈환전에선 맥아더 성명 발표 이틀 만에 실제로 수도 수복이 성공했다는 점이다.

9월 27일 새벽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기는 했으나

이날 오후 늦게까지도 인근 부분 지역에서 전투가 간간이 이어졌다.

이날 밤 12시까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잔당 섬멸 작전이 계속됐고,

9월 28일 국군17연대가 왕십리 방향에서 서울 시내로 진입하며

15일에 걸친 인천-서울 전투가 최종적으로 완료됐다.

 

 

서울 수복 바로 다음날인 9월 29일

중앙청에선 수도 탈환 경축행사(환도식)가 열렸다.

대통령 이승만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돌아왔고,

맥아더도 행사 참석을 위해 도쿄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맥아더는 환도식 연설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유엔 깃발 아래서 싸우는 우리 군대가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선언하며,

이승만을 향해

“귀국 정부 소재지를 회복하고 각하께서 헌법상 책임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축하했다.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환도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연설에 앞서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다. 미 육군

 

 

 

 

 

 

 

 

 

“나 자신이나 한국 국민의 끝없는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 이승만의 환도식 연설 첫 구절 중에서 -

 

 

 

 

이때가 맥아더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모두가 망할 거라고 걱정하던 군사작전,

맥아더 혼자서만 성공 쪽에 운명을 걸었던 위험천만한 도박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잭팟을 터뜨렸다.

 

상륙 작전 역사에서도

인천상륙작전만큼 적은 피해로 신속하게 작전 목표를 달성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주요국 수도 탈환을 위해 펼쳤던 여러 상륙작전

(1944년 노르망디, 1944년 안치오, 1945년 필리핀 루손섬)과 비교해도

인천은 속도나 전과 측면에서 월등한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상륙 후 수도 탈환까지 13일이 걸렸다.

노르망디에서 파리까지 가는 데(훨씬 멀기는 했지만)는 두 달 반,

이탈리아 안치오 상륙이 로마 해방으로 이어지는 데는 4개월 이상이 소요됐다.

필리핀 루손 섬 상륙작전에선 수도 마닐라에서만 1개월 이상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맥아더가 10군단 병력 7만5,000명을 인천에 상륙시키지 않고 낙동강 전선에 증강 배치했더라면,

방어선을 훨씬 빨리 뚫고 더 효율적으로 북진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육군대학이 미군 전투 교범을 통해서 산출한 시나리오를 보면,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지 않고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 작전만 했더라면

서울 수복에 1개월 정도가 걸렸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군 사상자도 14만 명 정도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맥아더가 낙동강 전선에 적 주력을 고착시키고 상륙군을 돌려서 적의 뒤를 친 덕분에,

실제 역사에선 13일 만에 서울을 되찾고 유엔군 사상자도 8,000명 선에 머물렀다.

매우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역습이었던 셈이다.

 

 

맥아더를 인간적으로 싫어했던 당대 장군들도

훗날 인천상륙작전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맥아더에게 상관 대접도 못 받았던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인천은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 중 한 명이 인생의 절정을 찍은 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나중에 8군사령관을 할 때

맥아더의 공 가로채기에 여러 번 마음고생을 했던 리지웨이도 회고록에서

“대담한 작전 개념, 전문적인 작전 기획 역량, 용기와 과감성, 작전 시행 기술 측면에서

군사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극찬했다.

그나마 당시 합참의장 브래들리가 ‘실력’보다는 ‘행운’ 요소가 강했음을 강조하며

“역사상 가장 운이 좋았던 작전”이라고 살짝 비꼬듯이 떨떠름하게 칭찬한 기록이 남아 있다.

 

 

 

미 육군 장병들이 1950년 서울 전투에서 생포한 인민군 소년병들을 심문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울을 되찾은 맥아더의 다음 목표는 명백했다.

북한군 섬멸과 북진이었다.

누가 봐도 맥아더가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북한군은 낙동강 전투와 인천-서울 전투에서 대패하고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군을 신속하게 포위하고 잔당을 섬멸해야 할 이 중요한 시점에,

엉뚱하게도 맥아더는 동해안 원산으로 제2의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그냥 전력의 절대적 우위를 이용해 신속하게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면 그만이었던 상황에서,

또다시

고난도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려는 공명심이 발동한 것이다.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상륙군을 이동시키려면 긴 시간이 걸렸다.

또 원산행 상륙군(알몬드의 10군단)이 인천항을 우선적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육로로 북진해야 할 워커 8군이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당시 맥아더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도 되는 장군이었다.

인천 상륙으로 그는

‘공산주의 침략에서 자유세계를 구해낸 위대한 구세주’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대통령도, 합참도, 의회도, 전 국민이 칭송하는 전쟁 영웅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누구도 맥아더에게 반대 의견을 내거나 토를 달기 어려웠다.

인천 상륙 때와 달리, 이젠 맥아더를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밥 호프(가운데)가 1950년 10월 원산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을 위문하고 있다. 미 해병대는 이미 국군이 확보한 원산항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항구 주변 기뢰 제거 작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장시간 동해를 맴돌며 입항을 기다려야 했다. 미 해병대

 

 

 

“인천은 단순히 한국전쟁 균형을 바꾼 전투의 이름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 행정부와 맥아더 사이의 관계를 바꾼 대담한 군사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맥아더 개인의 승리였다.

그가 예측했던 것은 다 들어맞았다.”

- 미국 국제정치학자 존 스패니어 -

 

 

 

 

⑤ 남태평양 10월 15일: ‘몰락’의 전조

 

대통령 트루먼마저 맥아더 눈치를 봐야 했다.

역대 미 대통령 중에서 트루먼은 여론 반대를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은 우직하게 밀고 나갔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지만,

하필 1950년 11월 중간선거

(미 대통령 임기 중반 짝수 해에 하원 전체와 상원 1/3 선출)를 앞두고 있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국민 영웅 맥아더와 갈등을 노출하는 것은

선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에 이기려면 맥아더의 인기를 이용할 필요도 있었다.

이미 그때 맥아더 해임을 내심 고민하고 있었던 트루먼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백악관 참모들은

‘대통령과 유엔군사령관이 환한 얼굴로 악수 나누는 사진’이 선거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언론 홍보 목적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도 필요한 회의였다.

 

 

38선 이북으로 북진하기로 한 유엔군의 향후 전략

(한반도 완전 통일, 중·소의 참전 가능성 검토, 전후 계획 등)을 의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싫어했던 두 사람은 결국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다.

트루먼도 선거를 위해서 맥아더를 만나야 했고,

트루먼과 민주당을 뼛속부터 증오하던 맥아더도

대통령이 보자고 하는데 계속 만남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그 전엔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어디서 만날 것인가였다.

당시 도쿄에서 미 동부로 가려면 태평양에서 한두 번,

미 본토에서 한두 번 등 총 세 번 정도 중간 기착을 해야 했다.

나중에 1950년 12월 말 리지웨이

워커 사후 워싱턴에서 도쿄를 거쳐 한국으로 급파될 때를 기준으로 보면,

꼬박 사흘 정도가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유엔군 북진 상황을 계속 챙겨야 해서 그가 워싱턴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도쿄와 워싱턴 사이 어딘가 중간에서 만나야만 했다.

하와이 정도에서 보는 게 적당해 보였다.

도쿄에서 오기도 그리 멀지 않고,

과거 2차대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맥아더와 니미츠 등 태평양 지역 사령관들을 호놀룰루로 불러 일본 본토 진공 작전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백악관은 그래서 처음에 하와이를 회담 장소로 제안했다.

장소를 두고 잠시 밀고 당기기가 오가는 동안

백악관은 대통령이 남태평양 웨이크섬까지는 갈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맥아더사령부에선 ‘웨이크섬보다 멀리 갈 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웨이크섬은 하와이와 괌 사이에 있는 환초섬이다.

도쿄에서 직선 거리로 약 3,000㎞, 워싱턴에선 약 1만1,000㎞ 떨어져 있었다.

회의 장소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군통수권자와 휘하 사령관의 만남이 아니라,

마치 국력이 비슷한 두 나라 정상의 회담 장소를 정하는 것과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백악관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맥아더가 오라는 곳으로 트루먼이 가야 했다.

결국 트루먼은 워싱턴에서 출발해 세인트루이스, 샌프란시스코, 하와이에서 세 번 기착을 하면서

사흘 만에 웨이크섬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8시간 비행으로 한 번에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잔뜩 뿔이 나 있었다.

공화당 쪽에 선이 닿아 있던 그는

민주당 대통령의 ‘정치쇼’에 들러리를 서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맥아더가 열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그는 대통령과의 만남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도쿄에서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과 특파원들을 잔뜩 대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악관 대변인실에선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모든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을 것’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군통수권자와의 만남에서까지

자신에게 우호적인 언론을 이용하려고 했던 맥아더의 태도를 보면,

그가 분명 이 만남을 ‘상급자와의 회의’가 아니라

일종의 ‘정상회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을 무시하는 맥아더의 이런 태도는 이때부터 본격화했는데,

그해 11월 압록강 폭격(본국 보고 없이 교량 파괴 명령),

12월 만주 폭격 당위성 인터뷰(미국 정부의 ‘만주 공격 금지’ 비판),

이듬해 3월 야당 지도자와의 내통 사건(공화당 의원에게 정부 비판 서신 발송) 등의

항명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트루먼을 만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맥아더는 전선사령관이 정치적 행사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에 매우 구역질 난다는 반응이었다.”

- 맥아더와 같은 비행기에 탔던 주한 미대사 존 무초의 회고 -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

 

 

 

 

 

트루먼과 맥아더는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만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상회담에서 일부러 지각을 해 상대 정상을 초장부터 길들이는 것처럼,

트루먼-맥아더 만남에서도 누가 먼저 도착해 상대를 기다릴 것인가를 두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맥아더는 이미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전선 전략 회의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다리게 했던 ‘전과’가 있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만나러 사흘을 걸려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대통령이 장군을 기다리는 수모까지는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 전용기는 일부러 천천히 이동했고,

6시 30분 트루먼이 웨이크섬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맥아더가 활주로에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는 불과 30분 전에 섬에 착륙했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을 지켜봤던 워싱턴포스트 기자에 따르면,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대신 대뜸

“대통령 각하(Mr. President)!”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표정 관리를 했음에 분명하다.

웃으면서 “잘 지내셨소 장군, 여기서 보니 반갑구려”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트루먼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나중에 트루먼은 이 당시를 떠올리며

“군복 상의 단추도 채우지 않았고,

20년은 족히 썼을 법한 모자엔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맥아더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또 저술가 멀 밀러(트루먼 전기 작가)에게

“맥아더는 방금 전쟁터에서 온 것처럼 보이도록 모자를 매만지기 위해

상병 한 명을 모자 관리병으로 두고 있다”고 험담하기도 했다.

 

 

트루먼 앞에서 맥아더는 전쟁을 금방 끝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북한군의 저항은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 전에 끝날 것이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8군 병력을 일본으로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루먼을 수행한 합참의장 브래들리에겐

“극동에서 남는 1개 사단을 1월까지 유럽 전선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뻥뻥거렸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개입하겠다”고 했던 중국공산당 경고를,

맥아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날 만남에서 트루먼과 맥아더는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회의에서 다른 얘기를 다 하고 난 뒤 후반부에서야

트루먼이 “한 가지 더 질문이 있다”면서 중공군 참전 가능성을 물었을 뿐이다.

 

 

그러자

맥아더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렇게 답했다.

 

“제 생각엔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중공군은 만주에 30만의 병력이 있고,

그중 10만에서 12만5,000명이 압록강 근처에 있습니다.

그들의 보급 능력으로 볼 때 5만 명 이상을 한반도로 보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이 평양으로 내려온다면 사상 최대의 살육전(the 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얼마 후 미군은 운산, 군우리에서 역사에 기록될 만큼 참패를 당했고,

장진호에선 오히려 사상 최대 살육전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고 있다. 이 사진은 1958년 북한에서 발간된 기념 책자에 실린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인천의 승리가 가져온 또 하나의 결과는

맥아더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에 대한 맹신이 널리 퍼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맥아더의 상관들조차도

맥아더 결정에 반론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게 옳은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 당시 미 육군참모부장 매슈 리지웨이 중장 -

 

 

 

 

맥아더의 큰소리는 트루먼과 합참의 경계심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천재적인 군사전략가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개입하더라도 초전박살을 내겠다고 자신하고 있는데,

굳이 워싱턴이 맥아더의 분석을 의심해 별도로 치밀한 정보 검증을 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나라 정부의 ‘전쟁 의도’를 분석하는 것은

국무부, 합참, 중앙정보국(CIA)의 임무였기 때문에

중공군 대비 실패의 모든 책임이 맥아더에게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보 분석도 맥아더의 낙관적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인천 상륙 이후 맥아더에게 한반도 문제에서 전권을 위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맥아더의 당시 위상이 단순한 전구사령관이 아니라

극동의 군벌 내지는 총독에 가까운 위상이었다는 점에서,

워싱턴 입장에서 일부 불만은 있었을 것이지만

굳이 맥아더의 뜻을 거슬러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10월 15일 웨이크섬 회의가 끝난 직후,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맥아더의 예언은 착착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고,

10월 26일 국군6사단이 유엔군 최초로 압록강(초산)에 도달했다.

 

 

맥아더는 예하 전부대에 “한만 국경을 향해 전속력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끝이 신기루였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맥아더'전쟁의 신'처럼 보였다.

맥아더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이 전쟁을 이기고 공산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의 눈부신 *아우라가 여전히 맥아더를 휘감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도 그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검은 기운이 맥아더를 서서히 포위하고 있었지만,

승리에 취한 그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다면체 인간 맥아더의 12가지 특성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30315280001732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약간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최고의 재능, 최악의 마마보이… 맥아더, ‘위대한 명장’인가 ‘*용렬한 *졸장’인가

           이영창 2026. 2. 5. 04:32
 
 
 
 
 

편집자 註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2월 출고되는 첫 파트(상편)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기 전까지의 맥아더를 탐구하는 ‘맥아더 개론’입니다.

인간 맥아더를 설명할 수 있는 12가지 특징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달리로 만들어 본 맥아더의 초상화. 다면적 인간인 맥아더를 표현하기 위해 파블로 피카소*입체파 화법으로 맥아더의 얼굴을 나타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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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_肖像 : 그림 따위에 나타낸 사람의 얼굴과 모습.

                    여기서는 맥아더라는 인간의 정체성적 상징을 의미함.

용렬_庸劣 : 됨됨이가 변변하지 못하고 생각이 좀스럽다는 의미.

졸장_卒將 : 기개가 담대한 장군다운 면이 없이 졸장부같은 리더(장수)를 은유적으로 일컫음.

입체파_立體派 : 20세기 초기에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운동.

                          기존의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의 사용 등을 지양하고,

                          대상을 여러 방향에서 본 뒤에 부분 부분의 모양을 분석하고

                          그 구조를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다시 구성하여 새로운 미를 나타내려 추구하였던 회화파.

                          피카소_Picasso, 브라크_Braque, G.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후의 회화, 조각, 디자인, 건축 따위에 많은 영향을 끼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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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는 역설적인 인간이었다.

고상하며 비열하고, 오만하면서 수줍고,

가장 좋은 인간인 동시 가장 나쁜 인간이며, 매우 우스꽝스럽고 매우 숭고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전기

‘아메리칸 시저’(윌리엄 맨체스터 저)는 이렇게 시작한다.

 

맥아더는 극과 극을 오간 인간이었다.

후대 평가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당대 맥아더와 직접 얼굴을 맞댔던 이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맥아더를 오랫동안 통찰력 있게 바라본 이들의 평가는 거의 일치한다.

맥아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

 

실제 맥아더를 만난 사람들의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백인백상(百人百想)이다.

100명이 만났다면, 그 100명이 느낀 생각이 다 제각각이었다.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만났는지,

그를 가까이서 봤는지 멀리서 목격했는지에 따라 맥아더에 대한 경험담은 천차만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휘하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던

호주 장군 토머스 블레이미(호주군 첫 원수였던 전쟁영웅)의 평가를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입체적 인간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블레이미는 이렇게 단언했다.

 

 

“맥아더에 대해 당신이 들은 최고의 말과 최악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맥아더는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이자 최고로 논쟁적인 장군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 장군”(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이란 찬사,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라는 악평,

“멍청한 개자식”(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라는 욕설이 모두 공존하고,

이 모든 평가가 다 사실에 근거한다.

 

심지어 한 사람이 최고-최악 평가를 동시에 했던 경우도 있다.

오랜 기간 맥아더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대통령)는 맥아더를 두고

“최고의 지성인”이라고도 했다가 “어떻게 저런 바보가 장군이 됐는지 궁금하다”고 혹평했다.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

 

 

 

 

 

*호오(好惡 : 좋고 나쁨)가 나뉘는 역사적 인물은 많지만,

맥아더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함께 존재하기 어려워 보이는 ‘양극단 자질’

맥아더라는 한 인간 안에서 동시에 구현됐기 때문일 것이다.

 

맥아더는 언제나 똑같이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했음에도,

워낙 다면적이었던 그의 ‘프리즘 같은 성격’은 보는 이마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맥아더라는 인간을 선악이나 흑백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보다는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여러 특성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모아 병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맥아더가 직접 남긴 기록

△맥아더의 생애를 평가한 대표 전기

△당시 미군 기록

△당대와 후대의 언론 기사와 인터뷰 등을 종합해, 맥아더의 12개 범주로 분류해 보았다.

 

 

 

 

맥아더의 6·25 활약을 살피기 전 그의 성격을 먼저 파악하는 이유가 있다.

맥아더는 그의 동갑내기 라이벌 조지 마셜처럼 ‘시스템’을 통해 일하는 합리적 리더가 아니라,

지성·직감·권위 등 개인적 요소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은(적어도 전쟁 초반부는) 미국 역사가 스탠리 웨인트라웁의 책 이름처럼

‘맥아더의 전쟁(MacArthur’s War)'이었다.

 

 

6·25 전쟁 초반 유엔군 측에 있었던 모든 공과가 사실 맥아더와 관련이 있다.

미군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알아채지 못한 것맥아더 사령부의 정보 판단 실수 때문이었고,

미국 정부가 그렇게 한반도에 빨리 미 전투부대를 파병할 수 있었던 것도

맥아더의 신속한 지상군 투입 요청 덕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사실상 맥아더의 개인기로 달성한 전공이고,

유엔군이 중공군 개입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적을 얕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 하는 맥아더의 나쁜 버릇 때문이었다.

 

그래서 6·25 전쟁을 제대로 알려면 맥아더란 인간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육사 생도 시절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트루먼 도서관

 

 
 
 
 
 

“용감한 자 중에 가장 용감한 자(Le Brave des braves)”

(맥아더 부하들이 라이터에 새겨준 문구. 나폴레옹이 미셸 네 원수에게 붙인 별명이다.)

 

 

 

 

 

군대경력 : 명예와 오만이 누적된 48년

‘12면체 인간’ 맥아더가 가진 다채로운 특성을 파악하려면,

48년(1903~1951년)에 걸친 그의 긴 군경력을 짧게나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북전쟁 영웅인 군인 아버지,

부유한 면화 중개상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때부터 ‘거의 모든 에이스 카드를 쥐고’(미 전사가 리처드 프랭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육군 주둔지를 따라 다니며 군대에 익숙했던 맥아더는

19세 때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로 진학했다.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한 아더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7년 소령 맥아더는 대령(임시 전시계급)으로 승진해

유럽 파병을 위해 신설된 무지개사단(전국 주방위군을 모은 부대)의 참모장에 취임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며 1918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 전쟁에서만 수훈십자장 2개, 은성훈장 7개를 받았다.

전쟁 후엔 다시 소령 계급으로 복귀해야 했으나,

육사 교장(준장 보직)으로 발탁되면서 계속 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

 

 

군의 엘리트로 떠오른 맥아더가 다시 빛을 발한 시기는

1930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소장→대장)하면서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아버지(1912년 뇌졸중 급사)가 끝내 오르지 못한 자리였기 때문에,

맥아더 본인과 어머니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진급이었다.

 

후버(공화당)와 루스벨트(민주당) 두 대통령을 모시며 5년 가까이 참모총장으로 재임한 맥아더는

이 시기 워싱턴 보수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동시,

민주당 진보 정권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참모총장 재직 시 맥아더는 1932년 대공황 당시 추가 수당(보너스)을 달라며

수도 워싱턴에 모인 1차대전 참전용사(보너스 아미)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오명을 얻었고,

대공황으로 인한 예산 삭감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결국 1935년엔 필리핀 자치정부(1946년 정식 독립 예정) 대통령 마누엘 케손의 군사고문으로 전보되며,

사실상 ‘뒷방’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계급은 다시 소장으로 내려왔고, 1937년엔 현역에서 물러나며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변방 필리핀에서 군경력을 마무리하는 듯했던 맥아더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41년 미국과 일본 사이 긴장이 고조됐고,

루스벨트는 그해 7월 필리핀 지역 방어를 위해 맥아더를 다시 현역으로 소환한 뒤

미 극동육군사령관에 임명(소장 복귀 하루 만에 중장 진급)했다.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일본군 기습을 받고 필리핀을 내준 뒤 호주까지 후퇴했으나,

치열한 전투를 통해 뉴기니섬을 확보한 뒤 이를 발판으로 필리핀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1945년 9월

도쿄만에 정박된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은 장본인이 바로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연합군최고사령관(연합국 11개국 대표)과

미국 극동군사령관(극동 지역 미 육해군 통합사령부)을 겸임하며 일본을 직접 통치했다.

 

 

일본 통치기 맥아더는 ‘푸른 눈의 쇼군’으로 불릴 만큼 일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인생이 네 번째로 빛나던 시기다.

일본제국 전쟁범죄자 처단(극동군사재판)을 주도했고, 민주주의 제도 도입, 시장경제 개혁,

평화헌법(전쟁 포기) 도입 등 일본 재설계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

 

 

1950년 6월

만 70세 맥아더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일본에서 마무리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열도 바다 건너에서 불의의 전쟁이 발발했고,

한반도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병력이 바로 맥아더 손 안에 있었다.

군생활 48년 차를 맞이한 노장군은 이제 인생에서 다섯 번째로 마지막 빛을 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이력

 
 
 

“그에게는 항상 군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너무나 유능하고 확신에 차 있고,

재능이 넘쳐, 직업적인 기능과 책임의 한계 속에 한정돼 있기 어려웠다.”

-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



 

 

 

 

 

 

제1면 *낭중지추 : 남을 찌르는 송곳

맥아더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점을 부인하는 평론가는 찾기 어렵다.

군인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자질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갖춘 특별한 인재였다.

일단 문무를 겸비했다.

웨스트포인트 야구팀 대표로 활약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뛰어났고,

타고난 분석력과 꾸준한 독서를 통해 빼어난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다.

특히나 역사와 법률에 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말년에 5,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그를 만난 이들이 한결같이 놀라워했던 것은 비상한 기억력이다.

47년 전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옛날에 함께 봤던 복싱 경기에서 어떤 펀치가 오갔는지를 정확히 기억했다.

12년 만에 만난 지인과는 과거 얘기를 나누다가 끊어졌던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를 재개했다.

40년 전에 우연히 들었던 일본 해안 조류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해 참모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전선 가장 앞에서 부하들을 직접 이끈 용장이었다.

1차대전 프랑스 전선에선 철모도 쓰지 않고 개인화기도 없이 승마용 채찍 하나만 든 채

기관총탄이 쏟아지는 참호를 가로질러 돌격부대 선봉에 서곤 했다.

그 용기는 나이가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6·25 전쟁 발발 후 첫 한국 시찰에 나선 1950년 6월 29일,

북한군 전투기가 전용기 주변을 날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고,

활주로에서 아직 전투기가 불타고 있던 수원비행장에 착륙을 강행했으며,

이미 함락된 서울 방향으로 북상해 한강 남안 최전방 진지에서 장시간 강 북쪽을 직접 시찰했다.

나중엔 비무장 수송기에 탑승해 압록강 근처를 날며 중공군 진영 위를 직접 정찰했다.

군생활을 통틀어 맥아더가 받은 훈장은 모두 22개로 미국 역사상 최다인데,

그저 그런 군인이었다면 절대 달성할 수 없었을 진기록이다.

 

 

낭중지추_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됨을 이르는 말

                                  : 주머니 , : 송곳  

 

제1차대전 참전 시기의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준장. 미국립문서기록관리

 

 

 

“저 사람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야.

저 양반 전사만 하지 않으면 출세 좀 할 거야.

자기가 영생을 누릴 줄 아는 모양이지.

우리처럼 철모 쓰는 일이 없어. 참호전에서도 저 모자 그대로라고.”

- 1차대전 때 맥아더를 멀리서 마주친 대위의 말 -

 

 

 

 

 

 

그럼에도 맥아더는

모든 영역에서 고루 완벽한 ‘정육각형 인재’는 결코 아니었다.

지성, 용기, 직관, 판단력, 리더십에서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지만,

주변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인화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공평무사한 태도로 부하들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했고,

동료 장군들의 능력을 얕보고 무시했다.

그래서 항상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었다.

 

군사작가 마크 페리

“맥아더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력자를 공격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존 퍼싱이 아끼는 조지 마셜을 일부러 좌천시키고

퍼싱이 싫어하는 페이턴 마치를 일부러 밀어주는 바람에,

결국 퍼싱은 맥아더의 적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1차대전 유럽 파병 미군 사령관인 퍼싱은

6성장군(대원수) 자리까지 오른 미 육군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결국 맥아더는 극도로 낮은 인화력 때문에 꼭지점 한쪽이 푹 꺼져

유독 예각이 도드라져 보이는 ‘뾰족한 육각형’ 인재에 머물렀다.

그래서 맥아더 사례에서 낭중지추

‘워낙 다재다능해서 언제 어디서도 그 재능이 특출나게 도드라졌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성정이 둥글지 못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어느 조직에서도 파열음을 내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갈등 유발자’로서의 특성도 설명해 준다.

 

 

성정_性情 : 사람의 성품(성질)과 마음씨

 

 

맥아더의 모친 핑키 맥아더. 미 공영방송 PB

 

 

 

 

 

“맥아더의 어머니는 진정한 *헬리콥터맘이었다.

헬리콥터라는 장치가 발명되기 수십 년 전부터 그랬다.”

- 맥아더 전기 작가 제임스 엘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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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맘_Helicopter Mom : 자녀 주변을 헬리콥터처럼 맴돌며

                                                   과도하게 간섭하고 통제하는 부모를 뜻하는 은유적 표현.

핵심 의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 확인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두기보다 대신 해결해줌

학업, 인간관계, 진로까지 세세하게 개입함

예를 들어보면

숙제나 과제를 부모가 대신 챙기거나 수정해줌

친구 문제에 직접 개입해서 해결하려 함

성인이 된 자녀의 선택까지 강하게 통제하는 것 등이 있음.

왜 문제로 보일까?

                           이런 양육 방식은 아이가

                           자율성책임감을 배우기 어렵고

                           실패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놓칠 수 있어서 비판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음.

[참고] 헬리콥터 맘 은 보통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지만,
                           그만큼 자녀를 걱정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애정적인 표현이라는 점도

                           함께 거론되기도 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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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면 마마보이 : 거인을 지배한 치맛바람

 

맥아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모친인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애칭 ‘핑키’)는 요즘 식으로 보자면 지독한 헬리콥터맘이었다.

자녀의 머리 위를 끊임없이 뱅뱅 맴돌며 모든 일에 간섭하는 극성 엄마였다.

 

아들의 육사 합격을 위해 시아버지 지인이 연방 하원의원으로 있는 지역으로

주소를 옮겼고(미 사관학교 지원엔 연방의원 추천서 필요),

하원의원 추천 경쟁 시험 준비를 위해 밀워키 학교 교장(감독관 중 한 사람)을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핑키는 맥아더가 성인이 되어서도 통제를 멈추지 않았다.

맥아더가 육사에 합격하자 아들 기숙사 건물이 바라보이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아들 방 불빛이 언제 꺼지는지 매일 감시했다.

 

나중에 아들이 장교로 임관한 후 아들 상관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남편(육군 중장 예편)과의 인연을 일깨우거나,

자기 아들이 군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췄는지를 강조했다.

 

 

맥아더가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치맛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1차대전 기간 중 핑키는 전쟁부 장관 뉴턴 베이커,

유럽 파병군 총사령관 퍼싱에게 청탁 편지 폭탄을 퍼부어 댔다.

아들을 대령에서 준장으로 속히 승진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맥아더는 청탁 없이도 충분히 진급할 만큼 전공이 넘쳐 났기 때문에 준장이 될 수 있었다.

 

 

전쟁 후 퍼싱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자

핑키는 다시 편지를 보내 아들의 소장 승진을 요청했다.

퍼싱이 핑키의 줄기찬 요청에 두 손을 들었는지,

청탁과 상관없이 맥아더가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실제로 퍼싱의 참모총장 임기 말에 맥아더는 두 번째 별을 달았다.

 

사적으론 맥아더에게 연인(맥아더의 첫 부인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을 빼앗겼던 ‘연적’ 퍼싱은

공적으론 맥아더를 승진시키며 대인의 풍모를 보였다.

 

이와 달리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맥아더는 퍼싱이 아끼는 수제자(마셜)에게 인사로 물을 먹이거나

퍼싱이 가장 싫어하는 퇴역장군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등 쓸데없이 퍼싱을 자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유럽 파병 미군총사령관 존 퍼싱 장군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수훈십자장을 수여하고 있다. 미 육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

제1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2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3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 -

 

 

 

 

아들 상관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승진을 요구할 정도였으니,

핑키가 아들 연애 문제를 통제하려고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착실한 아들이 딱 한 번 어머니 뜻을 거스른 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맥아더의 첫 결혼이다.

 

 

핑키는 아들이 배필로 선택한 브룩스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혼녀 브룩스는 워싱턴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브룩스는 홀아비(퍼싱), 기혼남(영국 제독), 총각(미군 대령)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퍼싱의 안주인 행세를 하며 ‘미시즈 퍼싱’이 될 것 같았으나,

결국 1922년 퍼싱(62세) 대신 젊은 장군 맥아더(42세)를 택했다.

 

 

핑키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아들 부부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어머니 축복을 받지 못했던 맥아더의 첫 결혼은 7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혼 후에 모자는 화해했다.

 

 

1930년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되자,

핑키는 아들을 따라 총장 공관(알링턴 국립묘지 옆 포트 마이어)에 입주했다.

1935년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지명됐을 때도,

83세 핑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을 따라 마닐라로 이사했다.

그리고 도착 5주 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맥아더가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은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위대한 장군의 생애를 살피면서 굳이 그 어머니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맥아더를 조롱하거나 폄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맥아더의 이중적 성격이 바로 어머니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맨체스터의 묘사를 보면 맥아더의 성격은 핑키의 복사판이었다.

맨체스터는

“온화하면서 모질고, 성마르면서 감성적이고, 매력적이면서 감정적이었다”

핑키의 성품을 기록했다.

핑키는 아들에게 복합적인 성격만 물려준 게 아니었다.

 

현대의 심리학 연구들을 참조하면

맥아더의 여러 성격적 결함은 어머니의 끊임없는 간섭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부모의 지나친 통제를 받는 자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대인 관계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비판에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실패의 책임을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맥아더의 성격적 특성들과 거의 일치하는 증상이다.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아서 맥아더(맥아더 부친)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단 그의 아들 더글러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 미 육군 법무감을 지낸 에녹 크라우더 소장 -

 

 

 

 

 

 

 

제3면 유아독존 : 통제받지 않은 제왕

복잡한 인간 맥아더의 성격을 감싼 열두 개 면 중에서도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그의 드높은 자존감이다.

출신·능력·성과·평판 등을 보면

그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로버트 E. 리(남군 명장) 이후 최고의 육사 졸업 점수, 38세 장성 진급,

30대 육사 교장, 역대 두 번째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취임(최연소 레너드 우드) 등

육군의 온갖 기록을 독차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자신과 자존이 지나쳐 오만과 자만의 영역으로 너무나 깊게 들어가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성향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발현되었는지,

육사 시절 동기 생도 중 한 사람은 “맥아더는 여덟 살 때부터 오만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의 자만은 화법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맥아더는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화법을 *일리이즘_Illeism이라고 하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스스로를 ‘카이사르’라고 적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맥아더의 이 버릇은 이미 30대 때 시작됐다.

오랫동안 부관으로 맥아더를 보좌한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참조하면,

맥아더가 자신을 일컫는 방식은 이랬다.

 

 

참모총장 시절 의사당을 다녀온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보더니

“맥아더가 그 상원의원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지”라며

마치 남 얘기를 하듯 스스로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패션이다.

그는 애초 육군의 복장 규정 따위는 지킬 생각이 없었다.

1차대전 참전 당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참호전에서도 절대 철모를 쓰는 일이 없었고,

총 대신 채찍 하나만 들고 최전선을 누볐다.

보급 외투 대신 화려한 모피 코트를 입었고,

그 모피 코트 위에 어머니가 직접 짜 준 대형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철모 대신 찌그러진 군모를 썼고, 허벅지가 잔뜩 부푼 승마바지를 입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복장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날씨가 추울 때 그는 보급 외투를 입지 않고 모피 코트를 입고 어머니가 짜 준 목도리를 둘렀다. 맥아더기념관

 

 

 

 

“맥아더가 연극무대에 섰더라면

존 배리모어(초기 할리우드 최고 배우)는 그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 인천상륙작전에 관여한 미 해군 제독 제임스 도일 -

 

 

 

맥아더를 보통 ‘원수(5성장군)'라는 계급으로 부르는데,

그는 미국과 필리핀 양국에서 원수 계급을 받은 특이한 이력을 자랑한다.

미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된 것은 1944년,

필리핀군 원수(Field Marshal)가 된 것은 1936년으로 오히려 필리핀 쪽이 8년 빠르다.

 

 

미군 현역 소장의 신분(1937년 1차 예편)으로 필리핀 장군 계급을 받은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맥아더에게 자국군 계급을 수여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당시 참모장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맥아더가 케손에게 먼저 원수직을 요청했다고 한다.

필리핀 원수로 임명될 때 스스로 모자를 디자인했는데,

이게 바로 맥아더가 계속 쓰고 다녔던 그 화려한 금테 군모다.

 

 

맥아더의 못 말리는 허영심을 보여주는 ‘필리핀 원수’ 일화는

훗날 아이젠하워를 통해 알려졌다.

이것 말고도 아이젠하워가 꽤나 많은 맥아더의 치부를 공개한 것을 보면,

맥아더는 가까운 부하들 사이에서 별로 인망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맥아더는 자만에 눈이 멀어,

정무감각이 남달랐던 아이젠하워의 충언을 여러 차례 무시하다가 곤경에 빠지곤 했다.

 

참모총장 재직 시 보너스 아미 사건에서 맥아더는

“몸소 나서지 마시라”는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하고

현장에서 참전 용사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다 뒤집어 썼다.

 

 

나중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재직할 때는

“워싱턴으로 가서 정부·의회 사람들을 만나 자금과 무기를 받아 오셔야 한다”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했다.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 부탁이란 걸 할 줄 몰랐던 맥아더는

결국 필리핀에서 일본군 기습에 밀려 호주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발발 후엔 필리핀 대신 워싱턴 근무를 자원했고,

맥아더 그늘을 벗어난 뒤부터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며 쾌속 승진 끝에

1944년 맥아더와 같은 계급(원수)까지 올랐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맥아더는 종군기자들을 상대로 철저한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전쟁 중 언론 기사를 통제하거나 종군기자의 동선에 간섭한 것은 다른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맥아더 사령부의 언론 통제는 작전상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로 맥아더 개인의 이익에 따라 이뤄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종군기자들은 모든 전투에 다 따라갈 수 없으니

사령부가 내는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맥아더 공보참모들은 사실을 조작해

‘맥아더가 현장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한 것처럼 보이도록’ 문장을 다듬었다.

 

 

 

 

 

승마바지를 입은 더글러스 맥아더. 1930년대초 육군참모총장 시절의 사진으로 보인다. 허벅지 쪽이 펑퍼짐한 조드퍼스(Jodhpurs) 스타일의 승마바지를 입고 잔뜩 멋을 부린 모습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는 대부분

‘장군이 적보다 한 수 앞선 지략으로 적의 의표를 찔러 승리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젠하워가 총사령관이었던 유럽 전선에선

오마 브래들리, 조지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등 다양한 장군들의 활약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전선에선 오직 맥아더 혼자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라도 언론이 자신의 부하 장군을 조명하면,

그 장군에겐 맥아더의 철저한 견제가 뒤따랐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무찌른 로버트 아이첼버거 소장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를 불러 “자네를 당장 대령으로 강등시켜 집으로 보낼 수 있다”고 협박했다.

 

 

이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자기 외의 그 누구도 전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리처드 로베르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아서 슐레진저

이를 두고 “맥아더는 전쟁의 환상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가 평시에도 자신과 관련한 비판 보도를 원천적으로 막았던 사례가 있다.

일본 패망 후

맥아더의 연합군 사령부가 1945년 9월 19일 포고한 10개 항의 언론 규정(press code) 중에는

‘연합군 주둔에 관한 치명적인 비판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일본에선 ‘연합군’‘맥아더’와 동의어였기 때문에,

이것은 맥아더 체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대통령의 가벼운 지적도 맥아더는 참지 못했다.

1944년 7월 일본 본토 공략을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태평양 전선 고위 지휘관을 모두 하와이로 소집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루스벨트가 맥아더에게 “뉴기니에서 미군 피해가 너무 많았던 것 아니오”라고 말하자,

맥아더는 곧장 대통령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누가 그런 정보를 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누구든 그는 대통령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이 말을 할 때

맥아더는 강조의 의미로 손가락을 펴 대통령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행동까지 했다고 한다.

위스콘신 주지사를 역임한 후 군에 입대해 2차대전 중

맥아더 사령부 공보장교로 일한 필립 라폴레트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미 맥아더의 자아는

임명권자의 작은 비판조차 수용하지 못할 만큼 완고하고 경직돼 있었다. 대

통령 몸에 손을 대는 일조차 서슴지 않을 정도로, 독선은 가득찼고 심각했다.

 

 

 

 

 

맥아더가 보여 준 12가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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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대통령을 이겨 먹으려던 맥아더… 후버-루스벨트-트루먼에 ‘3연속 불충’

            이영창 2026. 2. 5. 04:32

 

 

시각물_다면체인간 맥아더

 

 

 

 

 

 

 

“나는 맥아더가 멍청한 개자식(sob)이라서 해고한 게 아니다.

그가 대통령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자식인 건 사실이지만.”

-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

 

 

 

제4면 명령불복 : 대통령을 거스른 장군

1차대전 때

맥아더는 규정을 지키지 않는 정도의 ‘일탈 군인’이었지만,

점점 중책을 맡으면서

군인이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위험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기인 1932년 보너스 아미 사건에서다.

 

배고픔(대공황)에 지쳐 워싱턴에 모인 제대군인들이 행진을 시작했을 때,

사태 악화를 막으려던 후버 대통령은 현장에 있던 맥아더에게 전령을 보내

“다리 너머로는 진압 병력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전령이 전달한 명령을 바쁘다고 못 들은 척하면서,

진압군을 다리 너머로 보내 강제 해산을 실시했다.

진압군은 제대군인과 그 가족들이 살던 캠프촌에 불을 지르고 최루가스를 뿌렸다.

최루가스를 맡은 어린이 한 명이 목숨을 잃고,

애완토끼를 지키려던 소년 한 명이 군인들 대검에 찔리는 등 사태는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번졌다.

 

이 잔혹한 진압은

나중에 후버가 재선에 실패하고 루스벨트가 32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도화선이 됐다.

 

 

후버의 다음 대통령 루스벨트에게도 불충을 저질렀다.

경제대공황 와중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국방예산을 깎아 다른 분야로 돌리려고 했는데,

지나친 예산 삭감에 반대한 참모총장 맥아더는

대통령 앞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가 다음 전쟁에서 패하여

미국 청년의 배에 총검이 꽂히고 적의 군홧발이 목을 누를 때,

그가 저주하며 내뱉는 이름이 맥아더가 아니라 루스벨트이길 바랍니다.”

 

부하에게 이런 저주를 들었음에도,

루스벨트는 사표를 내려던 맥아더를 막아세우며

“예산도 그대로, 귀관도 그대로 두겠네”라며 맥아더의 항변을 받아들였다.

 

이게 1934년의 일이다.

실제 루스벨트는 이 일이 있고 나서도

맥아더에게 1년이나 더 육군참모총장 직을 맡겼다.

맥아더도 대통령에게 이런 악담을 퍼부었던 게 심리적으로 부담은 됐는지,

나중에 회고록에선 “백악관을 나오자마자 현관에서 구토를 했다”고 돌이켰다.

 

 

다만

이 당시 루스벨트가 맥아더를 용서했던 것은

그의 능력이나 자질을 높게 평가했던 부분도 있겠지만,

군복을 벗은 뒤 자신의 대선 맞상대가 될 수도 있는 맥아더를 가까이에 두고 관리하려 했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능수능란한 ‘정치 9단’ 루스벨트는

큰 이익을 위해 자기의 개인적 감정을 꾹 누르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왼쪽부터) 미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대장, 체스터 니미츠 해군 제독이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친구는 가까이, 그러나 적은 더 가까이에.”

- 영화 대부 '돈 콜레오네' -

 

 

 

 

그러나

재임 기간이 5년에 이른 맥아더를 언제까지 참모총장에 둘 수는 없었다.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보냈다.

 

 

마닐라로 이동해 워싱턴 통제에서 멀어진 뒤부터,

맥아더의 명령 무시는 그 정도를 더해 갔다.

 

특히 일본 점령기(1945~1951년) 때는

미국 정부 소속 공무원이 아니라

마치 일본을 직접 다스리는 절대군주 내지는 총독처럼 굴었다.

 

 

당시 맥아더의 위상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1945년 9월 27일 맥아더와 히로히토 일왕(텐노)의 만남이다.

그때까지 일본인들에게 텐노는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온 현신(現神)과 같은 존재였으나,

짝다리를 짚은 장신의 맥아더와

차렷 자세로 경직된 히로히토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맥아더는 이 사진으로 자신이 텐노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점을 한 방에 각인시켰다.

 

 

이 기간 대통령 트루먼이 맥아더 도쿄사령부에 많은 재량권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맥아더는 그 재량권을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한 뒤

워싱턴의 재가 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곤 했다.

 

당시 맥아더와 합을 맞춘 주일 미 대사 윌리엄 시볼드

 

“미국 역사상 그렇게 거대하고 절대적인 권력이 한 개인 수중이 맡겨진 사례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맥아더의 유아독존 성격에 더해 본국 행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맥아더의 ‘자율’은 결국 대통령 및 합동참모본부의 지시마저 무시하는 ‘항명’의 단계에 이른다.

6·25 전쟁 내내 트루먼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맥아더의 독선적 모습은

도쿄 시절 ‘쇼군’ 생활 동안 잉태된 측면이 크다.

 

 

결국 맥아더는 후버-루스벨트-트루먼 등 세 명 대통령의 명령,

그리고 문민통제의 대원칙을 연속으로 거스른 희대의 ‘불충장군’으로 남게 됐다.

 

 

맥아더 하면 인천상륙작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인 입장에서야

6·25 전쟁 중 맥아더를 해임한 것이 매우 뼈아프고 아쉬운 결정일 수 있겠으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1951년 4월 트루먼의 유엔군사령관 해임은

10년 이상 여러 사건을 통해 누적된 맥아더의 고질적 명령 불복종에서 비롯된 사필귀정이었다.

오히려 너무 늦은 조치였다.

 

 

 

더글러스 맥아더(가운데)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조지 마셜(오른쪽) 미 육군참모총장이 1943년 작전 지역을 함께 둘러보고 있다. 왼쪽의 중장은 당시 맥아더 휘하의 6군사령관 월터 크루거. 미 해군

 

 

 

 

“맥아더가 편집증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실했다.

아시아는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워싱턴의 유럽 편향을 병적으로 질투했다.

결국 유럽 전체, 특히 영국인들이 자신을 향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확신하게 됐다.”

-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 -

 

 

 

제5면 피해의식 : 이게 다 마셜 때문이다

자기애_自己愛 강한 *나르시시스트(자기도취자)들은

자기 모습과 성취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즘도 일종의 심리적 왜곡 현상인데,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지 못할 때 이들은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기보다

‘저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책임을 밖으로 돌린다.

 

 

시기, 질투, 열등감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맥아더처럼 걸출한 능력을 갖춘 야심가일수록

‘내가 잘못해서 실패했을 리 없다’며 자신만의 희생양을 찾는 경향이 있다.

맥아더의 위대함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피해의식도

이런 심리적 *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맥아더가 평생 ‘나를 공격하는 집단’이라고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대상은

워싱턴의 ‘유럽 우선주의자’들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호주 필리핀 일본 한국) 임무를 많이 담당했던 맥아더는

미국의 핵심 국가 이익이 아시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유럽을 우선하던 미국 외교 정책 결정자들은

맥아더의 이런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2차대전 중 미국의 병력·무기·자원이 유럽에 집중될 때마다,

맥아더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주변 참모들에게 대통령 루스벨트에 대한 증오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가 루스벨트만큼 증오한 대상이 있으니 바로 마셜(당시 육군참모총장)이다.

맥아더의 눈에 마셜은 ‘영국인들에게 포섭된 유럽 우선주의자’ 그 자체였다.

 

 

마셜에 대한 반감은 1차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맥아더는 무지개사단 참모장·여단장이었고,

마셜은 유럽원정군 최고사령관 퍼싱의 참모로 일했다.

맥아더는 ‘장교들을 전출시키라’거나 ‘병력을 지원하라’

총사령부의 정상적인 지시를 부당한 간섭으로 간주했고,

책상머리에 앉은 퍼싱 사령부 장교들이 전투장교인 자신을 질투한다고 믿었다.

 

 

이때 형성된 마셜에 대한 반감은 수십 년간 이어지는데,

맥아더가 참모총장 시절 끝내 마셜의 장성 승진을 거부하거나

2차대전 때 참모총장 마셜의 명령을 경시한 것은 이런 개인적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사 구분이 철저했던 마셜은

1942년 필리핀 전선 패장 맥아더를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 수훈자로 추천했고,

한국전쟁에서도 맥아더를 해임하려는 트루먼에게 신중한 대응을 건의했다.

 

 

맥아더가 워싱턴의 상관들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은 거의 맹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초 맥아더를 만난 미국 극작가 로버트 셔우드(루스벨트의 연설 원고를 쓰기도 했음)의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매우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와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워싱턴 정책 형성을 좌우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결국 셔우드는 맥아더 사령부가 “극심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론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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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트_ Narcissist :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훌륭하다고 여기는 사람. 정식표기는 ‘나르시시스트’이다.

                                         자아도취자, 자기도취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독선적인 사람.

                                         과대비유적으로 : 내로남불.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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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와 체스터 니미츠 사령부의 공세 경로. 맥아더는 필리핀 섬을 차례차례 수복하며 일본으로 북상하고자 했지만, 니미츠는 태평양 일부 섬만 확보한 뒤 일본 본토로 곧장 진격하려고 했다. 프리츠커 군사박물관

 

 

 

 

그런 맥아더가 보기에

‘유럽파’ 말고도 자신의 다리를 잡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해군이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태평양 전력은 크게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가 지휘하는 태평양지역(POA) 사령부

△육군 원수 맥아더의 남서태평양지역(SWPA) 사령부로 양분돼 있었다.

 

 

해군·해병대 위주의 니미츠 사령부는

마리아나 제도와 이오지마 등 태평양 주요 섬들을 거쳐 일본을 직접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고,

육군 위주 맥아더 사령부는

뉴기니섬과 필리핀 제도를 차례차례 회복한 뒤 대만과 일본 본토로 북상하는 루트를 택했다.

 

 

맥아더가 굳이 어려운 길을 고집했던 이면에는,

맥아더 자신이 필리핀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나

필리핀 정치인들과 맺었던 개인적 인연이 반영된 것이 분명하다.

 

 

누가 봐도 니미츠의 접근법이 효율적이었지만,

맥아더의 위상이나 육군의 체면 등을 고려해

루스벨트는 양쪽을 모두 공략하는 것으로 어정쩡한 합의를 유도했다.

 

 

이 양면 접근법은 당시엔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나중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전력을 분산시켜 오히려 일본의 패망을 앞당긴 전략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든 맥아더 입장에선

자기보다 많은 병력을 받고 더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니미츠 사령부가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그 어떤 지휘관도 나처럼 지원을 받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맥아더의 자기변호는 사실과 달랐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의 전투 성과를 연구한 역사학자 스탠리 포크는

“(맥아더의 말과 달리)

맥아더는 자신이 벌인 대부분 전투에서 적군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동원했다”고 결론 냈다.

니미츠에 비해 낮았던 자신의 위상,

막대한 자원 투입에 대비해 신통치 않았던 전과를 능숙한 ‘언론 플레이’로 보충했던 셈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체스터 니미츠 태평양 사령관이 지도를 보며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맥아더는 자신이 겪는 곤란들을 아이젠하워(유럽 전선 총사령관) 탓으로 돌렸다.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에 반하는 자료를 백악관에 넘기며 자기 지위를 높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중에서 -

 

 

 

맥아더의 근거 없는 ‘피해의식’은 자연스럽게 ‘책임 전가’로 이어졌다.

자신이 총사령관으로 책임져야 할 패배·졸전의 원인을

부하장군 혹은 워싱턴 탓으로 돌리는 일이 잦았다.

책임 전가는 부하·동맹·동료·상관·대통령을 가리지 않고 반복됐다.

 

 

 

대표적 사례가

2차대전 미군의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였던 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 때다.

12월 8일(하와이 시간 7일) 맥아더는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고서도

10시간 이상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일본군에게 루손섬 전략 요충지였던 클라크 필드 비행장 폭격을 허용하고 만다.

 

 

이 공습 한 방으로

미군은 일본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략자산인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를

대부분 잃었다.

 

그래서

일본의 필리핀 침공은 교전 첫날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자신의 준비 부족과 늑장 대응 때문에 입은 손실을

워싱턴 정부 책임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맥아더는 부하를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을 준비가 항상 돼 있었다.

거의 여론의 제단 위에 바쳐질 뻔하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장군이

바로 초대 미8군사령관(태평양 전선) 아이첼버거다.

 

 

유럽 전선에서 태평양으로 차출된 아이첼버거는 1942년 말 부나-고나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맥아더는 아이첼버거를 전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밥, 부나를 차지하게, 아니면 살아 돌아오지 말게”라며 협박에 가까운 지시를 내렸다.

정작 아이첼버거가 긴 혈투 끝에 승리를 따내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에게 즉각 포상을 하지 않고 1주일이 지나서야 훈장을 수여했다.

 

아이첼버거는 이를 두고

“뉴기니의 첫 승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아이첼버거가 아니라 맥아더를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아이첼버거의 생각이 맞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졌더라면,

맥아더 사령부는 종군기자들에게 현장 지휘관 아이첼버거의 이름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 해전으로 꼽히는 1944년 레이테만 해전(니미츠·맥아더 합동작전)에서,

맥아더는 사마르 전투에서 발생한 병력 손실

단일 지휘권 부재 탓으로 돌리며 워싱턴을 겨냥했다.

다른 연합국에 책임을 넘긴 사례도 있는데,

1942년 뉴기니 지역 작전 실패를 호주군의 잘못으로 왜곡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맹에 책임을 넘긴 수준으로 그친 게 아니라,

동맹국의 전공을 가로채려 했다는 의심을 산 사례도 발견된다.

맥아더는 언론에 제공한 보도자료를 통해 미군의 공적을 언급할 때는

부대 이름을 정확하게 표시한 반면,

호주·뉴질랜드군 덕분에 승리했을 때는 그냥 뭉뚱그려서 ‘연합군’이라고 언급했다.

 

경제대공황의 굶주림을 참다 못해 정부에 추가수당(보너스)을 요구하러 모인 제대군인 및 가족들이 1932년 여름 워싱턴 의회의사당 잔디밭에서 쉬고 있다. 이들의 수도 시위와 정부의 강제 진압을 '보너스 아미' 사건이라고 부른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범죄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한국전쟁 내내 한국 땅에서 단 하룻밤도 자지 않았고,

가끔 일본에서 날아와 사진 촬영이나 공중 정찰을 하는 게 전부였다.”

- 미 역사저술가 햄프턴 사이즈 -

 

 

 

제6면 확증편향 :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맥아더의 자만감과 피해의식은 자연히 그의 머리를 굳게 만들었다.

광범위한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전구사령관이라면 응당 부지런히 첩보를 수집하고,

날것의 첩보를 편견 없이 분석·가공해 풍부한 정보를 생산하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확하고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렸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맥아더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고,

자기 생각을 거스르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뒷전으로 돌렸다.

그가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은 지극히 자의적이었고 자신의 선입견에만 의존했다.

 

 

 

그의 위험한 확증편향이 처음으로 국가적 문제가 된 것은

1932년 보너스 아미 사건(대공황 기간 제대군인들의 수당 요구 시위)이다.

퇴역 군인들은 배가 고파 수도 워싱턴에 모였지만,

육군참모총장 맥아더는

이들이 제대군인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한 중범죄 전과자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인 군중 97%가 제대군인이라는 정부부처(재향군인관리국) 실증조사가 있었음에도,

맥아더는 믿지 않았다.

반면 ‘시위대가 참모총장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는 뜬소문을,

맥아더는 믿었다.

그래서 무자비한 진압을 강행했다.

그러나 모두 맥아더의 오판이었다.

맥아더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전기작가 맨체스터도 이 장면에선

“오직 굶주린 미국인들이 있었을 뿐”이라며 맥아더를 비판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을 준비하지 못한 것도

확증편향 때문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적어도 일본이 1942년 4월까지는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에 반하는 첩보가 계속 들어왔음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공격이 시작되기 한 달 전 일본 해군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포착되고,

11월 27일 육군부에서 전쟁 경보를 받았음에도,

일본이 벌써 공격할 리는 없다고 믿었다.

심지어 일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 상황에서도

‘하와이와 달리 필리핀은 중립지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증언(당시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있다.

눈앞의 사실과 부하들의 첩보보다, 자신의 직감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1944년 태평양 전선 펠렐리우 전투 장면. 미 해군 전투기 F6F 헬캣이 일본군 지역을 폭격하고 있다. 미 해군

 

 

 

 

편견으로 인한 잘못된 추론 탓에 큰 실패를 맛봤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했으나, 맥아더는 같은 실수를 또 반복했다.

 

1944년 9~11월 남태평양 팔라우 인근에서 벌어진 펠렐리우 전투가 바로 그 예다.

뉴기니를 점령한 맥아더는 펠렐리우섬을 필리핀 상륙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지만,

니미츠와 윌리엄 홀시 등 해군 제독들은

“굳이 이 섬을 차지하지 않고도 일본 본토를 바로 공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작전을 반대했다.

 

결국 필리핀 없이는 일본으로 못 간다는 맥아더의 고집 때문에 펠렐리우 공략은 시작됐는데,

두 달간 전투에서 일본군의 처절한 항전 때문에 미군은 무려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지나치게 희생이 컸던 전투였음에도,

정작 이 전투 후 필리핀 공략이 너무 쉽게 성공하는 바람에

미군은 펠렐리우를 써먹지도 못하고 서둘러 일본 본토 쪽으로 북상해야 했다.

 

 

여기서

전구사령관의 반복되는 옹고집을 제어하지 못한 임명권자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확증편향과 전략적 식견 부재가 이 정도로 심각하다면 해임하는 게 옳았겠지만,

루스벨트‘맥아더를 순교자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생각에서

끝내 맥아더를 워싱턴으로 소환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맥아더 문제를 순수하게 군사적 입장에서 본 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맥아더의 다른 장점과 대중적 인기가 결국 그의 군 경력을 연장시켜 준 셈이다.

 

결국 기고만장한 맥아더는

그 뒤로도 자기 생각대로 전쟁을 지휘했고,

그 폐해는 6년 후 한반도에서 극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5490003090

 

 

 

 

 

 

 

 

.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눈·귀 대신 ‘머리’를 믿었던 빗나간 천재… 맥아더는 그래서 실패했다

           이영창 2026. 2. 12. 04:32

 
 
 
 

 

 

 

 

1944년 10월 레이테만 해전 직후 더글러스 맥아더의 모습. 이때 맥아더의 계급은 대장이었고 두 달 후 원수로 진급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1918년의 그가 아니었다.

부하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는데, 핵심 요직조차 잘 보지 않았다.

그는 참호나 야전사령부가 아니라 요새 같은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 사무실을 지키는 것은 리처드 서덜랜드라는

비밀스럽고 우월감으로 가득 찬 인물로 대표되는 참모진이었다.”

- 필리핀 시절 맥아더를 묘사한 미국 역사가 앨런 숌 -
 
 
 

제7면 人의 장막 : 충신을 내친 군주

나이가 들수록, 계급이 올라갈수록, 참모들과의 연령 차가 벌어질수록,

맥아더의 생각은 무뎌졌고 태도는 경직됐다.

2차대전(61~65세)과 한국전쟁(70~71세)의 맥아더는

1차대전 때 병사들과 함께 쏟아지는 포화 속을 누비던 그 용맹한 열혈 장군이 아니었다.

 

최고급 호텔 숙소의 안락함, 후방 사령부의 평온함에 길들여져,

전투 현장 순시도 잘 나가지 않았다.

바탄 전투(1942년 일본 필리핀 침공)에서

희생된 부하들을 기리고자 전용기에 ‘바탄’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바탄 전투 77일 동안 맥아더가 현장을 방문한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유엔군사령관 재직 9개월 동안 한국에서는 1박도 한 적이 없다.

전용기를 타고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해 잠시 한국을 들렀다가,

언제나 밤이 되면 도쿄로 되돌아갔다.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

눈과 귀 대신 자기의 머리를 더 신뢰하는 그 성품 때문에,

맥아더 곁에는 최고사령관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따르려는 추종자들만 남았다.

그나마 7년 동안(1932~1939년)

옆에서 바른 말을 하던 아이젠하워가 워싱턴으로 돌아가 마셜을 보좌하게 되자,

맥아더 참모진의 ‘간신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국으로 돌아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는 부하들이 자기 명성을 가로챌까 봐 전전긍긍하는 정신병자”라고 악담을 퍼부었고,

맥아더 역시 아이젠하워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놈의 배신자”라고 폄훼했다.

 

 

어쨌든 참모장 아이젠하워가 ‘탈출’하면서 맥아더를 둘러싼 ‘인의 장막’은 더 두꺼워졌다.

맥아더가 완고해질수록 참모들은 맥아더 입맛에 맞는 보고·정보만 올리게 됐고,

그 편향된 정보 때문에 맥아더는 더 현실과 멀어졌다.

악순환이었다.

1차대전 때 퍼싱의 ‘쇼몽 사령부’를 욕하던 맥아더가

그보다 훨씬 더 폐쇄적인 ‘예스맨 집단’을 자기 근처에 꾸린 것이었다.

 

 

필리핀 시절 맥아더를 보좌하다가

1942년 바탄 전투 도중에 함께 탈출한 이 참모진들을 ‘바탄 갱’ 또는 ‘바탄 보이즈’라고 부른다.

‘바탄 갱’은 맥아더의 이너서클 엘리트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와도 같았는데,

나중에 한국전쟁 당시

도쿄 유엔군사령부에서 맥아더를 보좌하던 장교 상당수가 이 ‘바탄 갱’ 출신이다.

 

 

 

 

 

“맥아더는 다방면에 걸쳐 비범한 재능을 지녔지만 인물에 대한 판단력은 형편없었다.”

-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 -

 

 

 

 

 

2차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장이었던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 참모 중 가장 횡포가 심했고 문제가 많았던 장군을 꼽자면

세 명 정도의 이름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문고리 권력자’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이다.

중국에서 대대장을 하던 소령 서덜랜드는

1938년 필리핀 군사고문 맥아더의 참모부에 들어가면서 쾌속 승진을 시작했다.

1939년 아이젠하워로부터 참모장(중령) 자리를 물려받고,

1941년에 준장·소장,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연대·여단·사단장도 거치지 않고 참모로서만 3성장군이 된 특이한 경우였는데,

맥아더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덜랜드는 부하들과 동료 장군들에게 폭언을 일삼았고,

자신이 맥아더 대신 보고의 중요성을 판단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면담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문고리 권력’으로 악명 높았다.

 

일본의 필리핀 침공 당일인 1941년 12월 8일에도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들은 항공대장 루이스 브레러튼(소장)이 맥아더를 찾아갔지만,

서덜랜드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장군님 바쁘시다”며 브레러튼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일분 일초가 급하던 순간 서덜랜드가 이상한 고집을 부리면서,

브레러튼은 B-17 폭격기들을 출격시킬 수 없었고 미군은 이른 반격의 기회를 놓치게 됐다.

 

 

나중에 서덜랜드는

호주군 장교의 부인을 연인으로 삼아 사령부에 두고

‘대위’ 계급으로 데리고 있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거듭했다.

전쟁 후 서덜랜드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맥아더 휘하에서 6군사령관을 지냈던 월터 크루거 장군

“인류에게 좋은 일”이라는 촌평을 남겼다.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참모였던 찰스 윌로비.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두 번째는

‘눈 감고 귀 막은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이다.

1940년 필리핀 주둔군 군수참모로 배치된 윌로비는

1941년 맥아더가 현역으로 복귀하자마자 정보참모로 발탁된다.

정보통도 아니었지만 맥아더에게 남다른 충성심을 보여 준 덕분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그는 숱한 정보 실패를 저질렀다.

일본의 공격 시점을 1942년 6월로 예측하는 바람에,

1941년 12월 시작된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950년 6월 미국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

맥아더 사령부 정보 책임자는 여전히 윌로비였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미 육군

 

 

 

세 번째는

‘맹목적 충성파’ 에드워드 알몬드다.

알몬드는 ‘바탄 갱’ 출신이 아니라 맥아더가 도쿄에 부임한 뒤에 뒤늦게 합류한 참모였다.

그는 원조 바탄 갱들을 능가하는 아부와 충성심을 과시하며 맥아더의 눈에 들더니,

급기야 참모장 자리를 꿰차고 인천상륙작전 때는 군단장으로까지 진급했다.

 

 

6·25 전쟁 초반 8군사령관 월튼 워커가 맥아더에게 했던 건의를

중간에서 묵살하거나 가로막았던 장본인이 바로 알몬드다.

 

맥아더의 참모 수준이 이 정도였다.

그나마 맥아더 휘하 전투부대 사령관에는 상당히 능력 있는 장군들이 배치됐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월터 크루거(6군사령관)와 로버트 아이첼버거(8군사령관),

한국전쟁에서의 월튼 워커(8군사령관)와 매슈 리지웨이(8군사령관) 등은

맥아더 참모들의 결점을 채울 만큼 장점이 많은 지휘관들이었다.

 

그 이유는 야전군사령관 인사는 맥아더가 직접 할 수 없었고,

대통령이나 합참의 의견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8월 31일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미 육군 원수가 조너선 웨인라이트 육군 중장을 반갑게 얼싸안고 있다. 웨인라이트는 1942년 5월 필리핀 바탄-코레히도르 저항전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3년 3개월 만에 풀려났다.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만약 일본이 침공한다면 연합군 병력 절반만으로도 일본을 가지고 놀 수 있다.”

- 1941년 일본의 필리핀 침공 전 맥아더의 인터뷰 -

 

 

 

제8면 과소평가 : 적을 얕보는 버릇

맥아더의 자만은 적에 대한 감시와 연구를 게을리하는 버릇을 낳았다.

장수가 적을 과하게 두려워했더라면 전쟁·전투에 대한 대비 태세라도 단단하게 할 수 있었겠지만,

맥아더는 항상 적을 얕보다가 큰코다치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인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에서 맥아더는 거듭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후퇴해야 했다.

 

 

 

1941년 중반,

일본이 진주만과 필리핀을 기습(12월 8일)하기 몇 달 전.

이때 맥아더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본과의 전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27세의 열혈 기자 존 허시(나중에 퓰리처상 수상)와 했던 인터뷰를 보면

맥아더가 취했던 대비 태세가 잘 드러나 있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중국에서 장기전(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힘이 빠졌다”면서

“절반가량 병력의 효율이 1등급에서 3등급으로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또 일본 정부가 서양의 강대국을 두려워하고 있고,

이미 유럽에서 전쟁을 시작한 독일(1940년 일본과 삼국동맹 체결)이

같은 추축국 일본의 개전을 말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틀린 내용이었다.

효율이 떨어진 군대는 일본군이 아니라 미군이었고,

일본 정부의 개전 의지는 맥아더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됐을 때도

이 과소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미군의 최대 군사기지 진주만을 공격했다면 분명히 큰 손실을 봤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일본이 필리핀 쪽에서는 곧장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공격하더라도 그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딱히 없었다.

자신의 지레짐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들은 지 10시간 채 안되어 일본군의 대규모 공습을 당해,

클라크 비행장에 세워 뒀던 알토란 같은 전투기·폭격기들을 대부분 잃는 수모를 당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 출범 기념식에서 이승만과 더글러스 맥아더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한국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과소평가로 적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개전 직후부터 북한군의 전력과 전투력을 무시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마침 공화당 정치인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가 도쿄에 있었는데,

맥아더는 덜레스 보좌관에게 “한 손을 뒤로 묶고서도 북한군을 처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9년 전 병력 절반만으로도 일본군을 가지고 놀 수 있다”(언론 인터뷰)고 했던 *방약무인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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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약무인_傍若無人곁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마치 제 세상인 것처럼 거리낌없이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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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미군 1개 대대만 투입해도 북한군이 미군 출현에 깜짝 놀라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견대로 나섰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1개 보병대대+1개 포병포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벌어진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다.

 

 

 

인천상륙작전북한 땅으로 진격하면서는 중공군의 전력과 참전 가능성을 또 무시했다.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내기 정확히 열흘 전인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는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이 보낼 수 있는 병력은 고작해야 5만, 6만 정도이고,

그들이 평양으로 내려온다면

사상 최대의 살육전(the 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이라고 의기양양해했다.

 

 

그러나 단 한 달 만에 상황은 뒤바뀌었다.

북한에 웅크리고 있던 중공군은 총 30만 명이었고,

해병1사단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미군은 장진호에서 사상 최대 살육전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

 

 

1950년 9월 인천에서 노르망디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군사적 성과를 달성한 맥아더는

딱 두 달 만에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중공군 2차공세)를 조국에 안겼다.

맥아더 전기를 쓴 작가 제임스 엘먼

“제트기·전차·중포·전략폭격기를 가진 고도로 기계화된 군대가,

보급도 덜 받고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덜 무장된 군대에 패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중공군 2차공세는 맥아더의 과소평가에서 시작된 대형 참사였고,

맥아더에 대한 과대평가를 보여준 증거다.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고 있다. 이 사진은 1958년 북한에서 발간된 기념 책자에 실린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위키미디어 커먼

 

 

 

 

“(한국전쟁 발발 직전) 맥아더의 활동은,

가끔 하네다 공항에 VIP를 보러 가는 것을 빼면, 식사 모임이나 식후 대화 정도가 전부였다.

혁명기념일에 소련 대사관, 국왕 생일에 영국 대사관,

바스티유 기념일에 프랑스 대사관을 갔지만, 현장 부대는 가지 않았다.

맥아더의 참모장은 당시 미군 준비 태세 부족의 이유를 ‘훈련 부족’이 아니라

‘평화기 징병을 하지 않은 점’으로 돌렸다.”

 

- 스탠리 웨인트라웁 '맥아더의 전쟁' 중에서-

 

 

 

 

 

 

 

제9면 임기응변 : 노력하지 않았던 게으른 천재

공자는 나이 쉰에 천명을 알았다(知天命).

예순에 귀가 순해졌으며(耳順),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50세(참모총장)에 천명과 같은 국가지도자의 명령을 어겼고,

60세(필리핀 총사령관)에 편한 얘기만 듣고자 참모들의 심기경호 속으로 숨었으며,

70세(한국전쟁 유엔군사령관)가 돼선 민주주의 법도인 문민통제 원칙을 수시로 무시했다.

 

 

맥아더는 분명 군인으로서 절륜한 재능을 갖춘 ‘역대급 장군’임에 분명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노력을 포기하면서부터 점점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변모해 갔다.

 

 

나이가 들수록 일선 병사들과 멀어졌고,

현장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걸러 들었으며,

자기 욕심과 실제 성과 사이의 괴리를 자꾸 언론 플레이로 메우려 했다.

 

 

평시에 맥아더는 적국 동태를 살피는 일에 소홀했고

앞으로 닥쳐올 분쟁이 어떤 모습일지를 예측하는 연구를 게을리했다.

일이 닥치면, 적이 쳐들어오면,

그제야 허둥지둥 대책을 마련하고 임기응변식 해법을 내놓았다.

그 임기응변이 범장(凡將)의 오랜 준비보다 분명 나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빠른 학습 능력 덕분에 전투를 거듭할수록

다른 장군들의 특기를 흡수해 자신만의 군사 전술을 계속 다듬어 나갔다.

 

 

태평양전쟁 전문가 리처드 프랭크

레너드 우드(전 필리핀 총독)에게 필리핀 방어체계 구축을 빌렸고,

부하 조지 케니(당시 5공군사령관)에게서 항공전,

대니얼 바비(남서태평양사령부 상륙군사령관)로부터 상륙전을 배워 항공·상륙전의 달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높은 지적 능력이나 군사적 천재성 등을 감안했을 때,

맥아더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사전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아

적에게 먼저 승기를 먼저 내줬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게 맥아더만의 책임은 아니다.

전쟁 전 국방력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국방장관·합참의 책임이었고,

적의 선제공격을 몰랐던 것은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예하부대 준비 부족만큼은 전적으로 맥아더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전구사령관(theater commander)이라면,

담당 지역 정세를 예민하게 파악하면서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예하부대 훈련 수준을 높여 두었어야 했다.

맥아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태평양전쟁 직전 필리핀에선 ‘워싱턴이 장비를 주지 않는다’는 불평만 했을 뿐

자기 휘하 필리핀군에 대한 훈련을 소홀히 했다.

실전 훈련을 하지 않은 결과,

1941년 12월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필리핀 병사들이

전투 시작부터 소총을 버리고 전장을 이탈하는 일이 속출했다.

 

 

한국전쟁 직전,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 소속 4개 사단 훈련 수준도 이와 다를 게 없었다.

장교들은 그나마 2차대전 경력자들이 많아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했으나,

대부분 2차대전 종전 후 입대한 병사들이 문제였다.

훈련을 통해 계속 실전 감각을 키우지 못한 결과,

한국전쟁 초반 북한군 포격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미군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맥아더의 임기응변이 통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윌리엄 딘의 24사단이 오산-금강-대전에서 결사 방어로 시간을 버는 사이,

일본에 있던 3개 사단(2·25·1기병사단)을 긴급 투입해 낙동강 교두보를 만들고,

미 본토에서 급파된 사단으로 반격을 하는 구상이었다.

이런 방어 계획은 예전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맥아더가 부랴부랴 만든 것이었는데,

실제 6·25 전쟁 초반부(1950년 9월 말까지) 전황은 맥아더 계획대로 흘러갔다.

 

 

 

 

1945~1948년 군정사령관을 지낸 존 리드 하지 중장.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군사작전만 임기응변으로 이끈 게 아니었다.

중요 보직에 사람을 쓸 때도 ‘즉흥적 용인술’이 잦았다.

6·25 전쟁 발발 후 딘의 24사단을 한반도에 선발 부대로 보낸 이유도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4사단은 당시 일본 주둔 4개 미 육군 사단 중 전투력이 가장 약했고,

한국에서 보여 준 전투 지휘의 수준을 볼 때 딘 역시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점은

맥아더가 1945년 8월 존 리드 하지 중장을 38선 이남 군정사령관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맥아더가 하지를 선택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하지의 24군단이 한반도에서 가까운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군인으로선 능력 있고 용맹한 지휘관이었지만,

높은 정무감각이 요구되는 군정사령관으로선 최악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들을 상대로 강압적인 포고령을 발령하더니,

국내 정치 세력과의 협조나 공조를 아예 거부했다.

인구 1,600만 명 나라를 함부로 예하부대 다루듯이 관리한 인물이 바로 하지다.

 

 

당시 군정통치에 어려움을 겪던 하지는

맥아더에게 “조언을 달라”거나

“한국 내 정치적 내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며 SOS를 보냈다.

 

 

그러나 맥아더는 “나는 지금 바쁘고 일본의 일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답신했다.

하지의 군정통치는 한국 입장에선 참사였다.

맥아더의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다.

 

더 나아가

하지에 대한 부분은

맥아더가 정치와 행정을 군사의 하위 개념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뒤이어 나올

정치군인 맥아더의 실체,

민주적 통제를 거부했던 맥아더의 위험한 정치관도

결국 이러한 군사 우월론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https://v.daum.net/v/20260212043219197

 

 

 

 

 

 

 

.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권력욕 눈먼 맥아더... '밀애 스캔들' 무마해 준 아이젠하워에 뒤통수까지

            2026.02.19 04:30  이영창 논설위원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미 육군 원수와 히로히토 일왕이 1946년 7월 일본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서 만났다. '사람의 모습을 한 신'으로 여겨졌던 일왕을 옆에 두고, 뒷짐을 진 채로 삐딱하게 서 있는 맥아더의 모습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내가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는 단 하나야. 그놈의 자식 루스벨트를 이기기 위해서라네.”

- 맥아더가 휘하 장군 아이첼버거에게 했던 말 -

 

 

 

 

제10면 정치군인 : 대선 추대받은 현역 장군

여기서 제시하는

맥아더의 12면체 특성 중

가장 신랄한 비판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그의 정치적 행보다.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선출 지도자(민간인)가 장군을 지휘하며

군의 통수권을 독점하는 문민통제(문민우위) 원칙을 일찌감치 정립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군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기회를 아예 제공하지 않고,

장교단을 정치적으로 중립인 전문가 집단으로만 활용하는 전통이다.

 

 

정치지도자와 군사지도자 권한에 큰 차등을 둔 것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장군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면 되지만,

정치지도자는 자신에게 표를 준 국민 전체를 향해 무한대의 책임을 진다.

 

 

특히

왕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공화정 체제로 건국한 미국의 경우,

독립 과정에서 영국군과 대립한 경험 때문에 상비군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이 컸다.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군권을 쥐면서도

토론을 통해 민간을 설득하는 등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문민통제 원칙은 역사적으로도 굳어졌다.

 

 

다만 250년 미국 역사에 실병력 통제권을 쥔 장군이 대통령 명령에 항명하거나

항명에 가깝게 저항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는데,

미국 언론에 언급되는 두 가지 주요 사례가 바로

△남북전쟁 당시의 조지 매클렐런(vs 에이브러햄 링컨)

△한국전쟁의 맥아더(vs 트루먼)다.

 

 

 

두 사람 모두 오만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나중에 직접 대선에 출마까지 했던 ‘정치군인’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매클렐런의 사례가 링컨의 공세 명령을 거부한 ‘소극적 반항’이었다면,

맥아더는 워싱턴 지침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하거나

언론을 통해 대통령 외교정책을 명시적으로 비판했던 ‘적극적 항명’이었다.

 

 

또 매클렐런은 ‘노예를 해방해 나라를 어지럽힌 군사 문외한 링컨

개인에게 저항한 것에 가까웠지만,

맥아더의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자아_自我

유럽 우선 외교정책을 상정했던 행정부와 의회 시스템을 부정하려고 했다.

 

 

결국

매클렐런의 저항은 링컨을 향한 것이었고,

맥아더의 항명은 워싱턴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불충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하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훌륭한 자질도 많이 갖췄지만,

민주주의 국가 군사지휘관으로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선출 권력에 대한 복종심’은 현저하게 결여된 상태였다.

대규모 부대를 호령하고 화려한 전공을 자랑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더 능력이 떨어지는 민간인’의 말을 따라야 하는 일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맥아더는

후버, 루스벨트, 트루먼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면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항명을 저질렀다.

 

 

 

 

 

해리 트루먼에게 해임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더글러스 맥아더가 1951년 4월 시카고 솔저필드 경기장에 모인 5만 명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전쟁은 군인에게 일임하기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다.”

- 문민통제를 강조한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

 

 

 

 

그(맥아더)의 거대한 자아는

최고위 장군(general in chief)에 만족할 수 없었다.

군통수권자_commander in chief 가 되어야만 치유될 수 있었던 결핍이었다.

 

그래서 결국 직접 대통령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맥아더는 현역 육군 대장(당시 미군 최고 계급) 신분이던 1944년

미 대선 공화당 예비선거에 ‘사실상’ 출마했다.

 

 

자신이 직접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지지자가 공화당 일각에서 자기 이름을 투표 용지에 올리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4월 공화당의 위스콘신 예비선거에서 실제 득표를 했고

일리노이 예비선거에선 1위를 기록했다.

 

그 스스로 정치인 활동을 한 적은 없었지만,

자기 후원자인 아서 반덴버그(미시간) 상원의원이 운영하는 캠프에 참모들을 보내

선거운동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있다.

1943년 한 해에만 맥아더 대선 출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참모장 서덜랜드(봄)와 정보참모 윌로비(여름)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보수 언론인들을 자기 대선 출마에 필요한 ‘바람잡이’로 활용하려 했던 증거도 있다.

맥아더는 유명 라디오 진행자 겸 작가인 프레이저 헌트에게

‘대선 출마용 전기’를 준비하도록 했는데,

이를 위해 헌트는 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사령부를 자유롭게 취재하는 특권을 가졌다.

나중에 이 전기(실제 출판되지는 않음)를 맥아더가 직접 수정한 사실도 있다.

 

 

맥아더의 대통령 욕심은

68세 때인 1948년 대선에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는 도쿄사령부에서 일본을 통치하고 있으면서

본국 정치무대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맥아더 입장에서 1948년 대선은 4년 전 선거보다 더 가능성이 있었다.

‘전시 출마’에 따른 부담을 덜 수 있었고 상대는 ‘거물’ 루스벨트가 아니라

‘어쩌다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풋내기 트루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의 항복을 직접 받은 맥아더는 4년 전보다 훨씬 유명해져 있었다.

1945년 갤럽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인가’를 물은 설문조사에서,

맥아더는 루스벨트-링컨-예수-워싱턴에 이어 5위에 올랐다.

1946년 설문에선 ‘생존 미국인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혔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정치에 발을 담그는 대신 부하를 ‘메신저’로 이용했다.

당시 일본 주둔 8군사령관으로서 맥아더 대신 워싱턴을 방문했던 아이첼버거의 일기를 보면,

맥아더는

당시 미국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와의 연합전선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젠하워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을 밀어주면,

1952년엔 자신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아이젠하워를 밀어준다는 거래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워싱턴에 한 번 가지도 않고 사과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기다린 맥아더의 고고한 선거전략은 끝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지지자들은 그가 직접 미국으로 와서 유권자들에게 얼굴을 보여주길 바랐지만,

맥아더는 계속 일본에만 머물렀다.

결국 텃밭인 위스콘신의 예비선거에서도 승리하지 못했고,

네브래스카에선 5위를 기록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후보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부 지지자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 맥아더는

1차 투표에서 8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공화당 최종 후보는 434표를 얻은 토머스 듀이로 확정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운데) 대통령이 1944년 7월 남서태평양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왼쪽)와 태평양사령관 체스터 니미츠를 하와이에 불러 담소를 나누고 있다 뒤에 보이는 장군은 합찹의장 윌리엄 리히 장군이다. 미 해군

 

 

 

 

“나 아스피린 하나 더 먹어야겠네.

내 인생에 나한테 이런 식으로 얘기한 사람은 맥아더가 처음이야.”

-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맥아더에게 보고 받은 루스벨트의 말 -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던 맥아더는 대통령들을 상관으로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직 대통령을 자신의 경쟁자로 삼거나

군통수권자와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며 워싱턴의 반감을 샀다.

 

2차대전 중엔 루스벨트의 권위를 여러 차례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4년 7월 루스벨트가 태평양 전선 주요 지휘관들을 하와이에 소집했을 때,

맥아더는 먼저 와서 대통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 있는 이벤트를 통해 군중의 관심을 유도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루스벨트의 연설문비서관 새뮤얼 로즌먼

“굉장한 자동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끽 소리를 내며 멈추는 오토바이 호위와 함께,

내가 이제껏 본 가장 긴 컨버터블 차량(오픈카)이 부두에 나타났다”

“그 뒷자리에 앉은 맥아더가 훌쩍 내리더니 배다리를 단숨에 건넜다”고 회상했다.

자신을 루스벨트의 회담 카운터파트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도착 장면을 왁자지껄하게 연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영소 3국 정상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얄타회담(1945년 2월 4~11일)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맥아더가 루스벨트 쪽으로 쏠린 여론의 관심을 돌리려고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의혹도 있다.

 

당시 맥아더는

겨우 루손섬(필리핀 최대 섬)에 상륙해 수도 마닐라 방면에서 전투를 시작했을 뿐이었지만,

이 상황을 과장해 “적군의 괴멸이 임박했다”고 공표했다.

 

맥아더의 한 참모는 나중에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인 동안 자기 이름을 드높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돌이켰다.

그러나 실제로 마닐라 전투는 3월 초까지 한 달 이상 이어졌고,

루손 지역에선 일본이 패망하는 8월까지 전투가 계속됐다.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위키미디어 커먼즈)

 

 

 

 

 

대통령을 무시하는 이런 특성은

루스벨트 후임 트루먼 집권기에도 바뀌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 펜타곤은

한반도 후속 대책 논의를 위해 맥아더에게 본국에 일시적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계속 거부했다.

 

결국

대통령 트루먼이 몇 차례나 중간 기착지를 거쳐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 외딴 섬 웨이크섬까지 이동해야 했다.

당시 군 통수권자를 만난 맥아더는 거수경례 대신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당시 웨이크섬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모습은 절대 상하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회담을 하는 두 나라 대통령처럼 동등한 관계처럼 보였다.

 

 

 

1930년대 초 더글러스 맥아더의 연인이었던 필리핀 여성 이사벨 로사리오 쿠퍼의 1942년 모습. 쿠퍼는 맥아더와 헤어진 후 할리우드로 가 배우가 됐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마닐라에서 근무하던 1930년 4월,

맥아더이사벨 로사리오 쿠퍼에게 푹 빠졌다.

당시 50세 맥아더는 16세 애인을 ‘우리 아가’라고 불렀다.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자 이사벨을 데려와 워싱턴 가까운 지역에 정착시켰다.”

- 리처드 프랭크의 '맥아더' 중에서 -

 

 

 

 

 

제11면 내로남불 : 난 되지만 넌 안 돼

맥아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특성은

바로 남에게 엄격하며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한 ‘내로남불’ 태도다.

남에 대한 비난을 삼가지 않았던 맥아더는 자기가 비판받는 상황을 결코 참지 못했다.

 

그는 자기 공적을 알리거나

대통령 외교 정책을 깎아내리기 위해 언론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면서도,

언론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소송까지 불사하며 강력하게 대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군참모총장 시절 드루 피어슨로버트 앨런 등 두 언론인과 벌인 명예훼손 소송이다.

 

 

1934년

두 기자는 칼럼을 통해 맥아더의 독재자 성향을 비판했는데,

맥아더는 이들을 상대로 “175만 달러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으로 치면 4,200만 달러(약 6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배상 요구인데,

실제 이 돈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단

두 기자와 다른 기자들의 추가 비판을 막기 위한 ‘재갈 물리기’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날 위기에 몰리자,

곧바로 소송을 취하해 버렸다.

피어슨이 맥아더의 전처와 맥아더의 정적을 취재한 결과,

맥아더가 필리핀 근무 시절부터 사귀던 34세 연하 여성을 워싱턴으로 데려와

집을 얻어주며 밀애 관계를 지속해 왔던 것이 밝혀졌다.

 

 

당시 맥아더는 이혼 후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 불륜은 아니었지만,

이 밀월 관계에 공직을 이용한 정황이 있고

어린 애인과의 대화에서 루스벨트의 장애를 언급하며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가 매우 곤경에 몰릴 수 있었던 스캔들이었다.

 

 

이 여성은 당시 16세(21세였다는 설도 있다)인 이사벨 로사리오 쿠퍼.

어릴 때부터 배우로 일했던 쿠퍼는

12세 때 필리핀 영화 역사상 최고의 키스 장면을 소화한 이력이 있었다.

 

 

1930년 이혼한 지 1년 정도 지난 상태였던 맥아더는

마닐라에서 어린 배우 이사벨을 만났고,

미국으로 발령(참모총장)을 받자 이사벨을 데리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피어슨이 맥아더와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사벨을 증인으로 부르려는 시도를 하자,

황급히 놀란 맥아더는 기자들과의 소송비용 일체를 부담하고

이사벨에게 거액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했다.

이사벨은 맥아더와 헤어진 후 할리우드로 가서 배우가 됐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육군 원수의 1947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맥아더는

자기 부관(소령) 한 사람에게

기자들과의 소송전, 이사벨의 폭로 대응 등 사적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이사벨이 자기 치부를 공개할 것이란 소식을 듣자,

맥아더는 부관을 보내 워싱턴 곳곳을 수색해 이사벨의 행방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나중엔 이 부하를 시켜 이사벨 측에 1만5,000달러의 합의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상관의 젊은 애인을 찾아 워싱턴 거리를 헤매고

돈으로 상관의 사고를 입막음했던 이 불쌍한 소령은 누구였을까.

바로 연합군총사령관과 미국 재선 대통령까지 오르게 되는 아이젠하워다.

 

 

맥아더는 나중에 이 고마운 부하에게 당시 뒤치다꺼리를 보답하긴커녕,

아이젠하워의 사생활을 꼬투리잡아

충성스럽던 부하의 정치 경력에 큰 상처를 내려고 했다.

 

1948년 대선 당시 아이젠하워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와의 연합전선을 구축(정부통령 후보)하는 동시

아이젠하워가 2차대전 때 비서(케이 서버스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워싱턴 내 아이젠하워의 친구들은

‘그렇게 되면 이사벨과의 스캔들을 폭로할 것’이라며 역공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쿄사령부 당시 맥아더의 사자로 워싱턴에 갔던 아이첼버거의 일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케손의 1942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맥아더가 남긴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은 바로 돈 문제였다.

1942년 1월 미군이 일본군 기습을 받고 바탄반도를 힘겹게 지켜내고 있을 때,

필리핀 대통령 케손으로부터

비밀리에 50만 달러(지금 가치로 987만 달러)의 거액을 받은 것이다.

 

 

이 돈은 케손이 미국 은행에 예치 중이던

과도정부 자금 64만 달러를 꺼내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에게 준 것이다.

참모장 서덜랜드(7만5,000달러), 부참모장 리처드 마셜(4만5,000달러),

전속부관 시드니 허프(2만 5,000달러) 등 맥아더를 추종하던 ‘바탄 갱’들도 거액을 수령했다.

 

 

명목상으로 이 돈은

필리핀 정부가 군사고문으로 일했던 맥아더에게 주는 ‘특별급여’였지만,

하필 일본 침공으로 패망 위기에 몰린 필리핀 정부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왜 맥아더 예전 급여를 챙겨줘야 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케손 입장에선 미국의 군사 지원이 시급했고,

맥아더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리 급하게 돈을 줬을 것이다.

한가하게 옛날 일(군사고문 시절)이나 챙길 때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현안(일본 침공)과 관련한 뇌물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의심된다.

액수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1년 급여가 7만5,000달러였으니,

맥아더가 받은 50만 달러는 거의 대통령의 7년치 연봉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케손을 필리핀 밖으로 탈출시켜 주는 대가로 받은 돈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당시는 미군과 필리핀군 연합부대가

바탄반도에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 방어작전을 하고 있을 때다.

그런 상황에서 바탄 남쪽 코레히도르섬 요새에서 머물던 총사령관이

주둔국 정부으로 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받았다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떠나

매우 파렴치한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다.

 

 

오랜 기간 필리핀 정부에게 도움을 줬던 아이젠하워의 상반된 행동을 봐도

이 돈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나중에 케손은 워싱턴에서 만난 아이젠하워에게도 특별급여 명목으로 돈을 주려고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감사장만 써 주시면 그걸로 족하다”면서 돈을 거절했다.

진짜로 순전한 급여 성격이었다면 아이젠하워가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 수상한 돈 거래는 당대에는 미국 정부 내 소수 인사만 알고 있던 비밀이었지만,

맥아더 사후인 1979년 캐럴 페틸로 보스턴대 교수가

미국 정부 측 송금 확인 자료를 찾아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온갖 훈장과 포상을 전부 자기 자서전에 기록했던 맥아더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받은 ‘특별급여’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가운데)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조지 마셜(오른쪽) 미 육군참모총장이 1943년 작전 지역을 함께 둘러보고 있다. 왼쪽의 중장은 당시 맥아더 휘하의 6군사령관 월터 크루거. 미 해군

 

 

 

 

 

“맥아더는 (자신의 라이벌) 마셜이 가라앉기만 한다면

국가라는 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도 좋아할 인간이다.”

- 맥아더 부하 아이첼버서의 일기 중에서 -

 

 

 

 

제12면 선사후공 : 언제나 내 일이 먼저

마지막으로 살펴볼 맥아더의 특성은 선사후공_先私後公이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 군의 이해나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의 명예·인연·체면을 앞세웠다.

 

이 특징은 그가 필리핀을 보는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맥아더는 아버지가 총독을 지내고 자신도 군사고문(원수)를 역임한 필리핀을

‘개인 영지’ 정도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정부가 볼 때 필리핀은

일본의 태평양 팽창을 막을 교두보 성격의 지정학적 요충지였지만,

맥아더 입장에선 그저 ‘내 세력권’이니 지켜야 한다는 당위적 인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정부로부터 뇌물 성격의 자금 50만 달러를 받으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맥아더가 필리핀 문제에서 자각하고 있던 특별한 우월감을 짐작할 수 있다.

 

 

필리핀을 향한 맥아더의 개인적 집착은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 본토를 공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미 해군은 굳이 필리핀에 상륙해 치열한 지상전을 치를 필요 없이

태평양 주요 섬만 차례차례 점령해 일본 본토를 폭격 사정권에 둔 다음,

일본 열도를 곧바로 공략하자는 접근법을 주장했다.

 

 

미군이 전쟁 중반 이후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제해·제공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 항구와 비행장만 점령하는 식으로도 전쟁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온 전략이다.

팔라우(필리핀 민다나오섬 동쪽)와 마리아나제도(괌·사이판 등)만 차지하면

필리핀 없이도 일본을 사정권에 둘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굳이 뉴기니섬과 필리핀 제도를 거쳐 일본으로 올라가는 길을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필리핀을 우회한다면,

미군 포로와 충성스러운 필리핀인들을 적의 수중에 내버려둔다면,

더없이 엄중한 심리적 반발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미츠와 다른 전략가들이

‘어떻게 하면 가장 희생을 줄이면서 단기간 내에 전쟁을 끝낼 것인가’를 놓고

철저히 군사적 고민을 했다면,

맥아더는 미국의 위신과 자신의 체면을 고려한 정치적 접근을 했던 것이다.

맥아더가 주장한 필리핀 탈환전을 두고

다른 군사전략가들은 “도쿄로 가는 가장 느린 길”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육군 소속의 마셜(참모총장)마저 필리핀 루트에 회의적이었다.

 

 

맥아더가 필리핀 탈환전을 미국의 전쟁 전략이 아니라

‘개인적 과업’ 차원에서 인식했다는 단서는 또 있다.

그는 1942년 필리핀을 탈출해 호주 애들레이드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을 만나

“나는 돌아갈 것입니다(I shall return)”라고 강조했는데,

 

이 발언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연설에 이어

맥아더가 남긴 말 중 두 번째로 유명한 말로 꼽힌다.

 

그 당시 맥아더의 메시지를 사전에 파악한 미 전쟁정보국(OWI·전시 선전 및 검열 담당 기관)에서

‘나(I)’를 ‘우리(We)’로 바꿔달라는 부탁했지만,

맥아더는 끝내 거부하고 필리핀 탈환은 ‘나의 일’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맥아더는 끝내 필리핀 탈환전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루스벨트는 1944년 7월 육군과 해군 주요 사령관들을 하와이에 모은 뒤

양쪽 의견을 다 반영하는 쪽으로 어정쩡한 합의를 이끌었다.

 

그래서 미군은 전체 병력을

니미츠 사령부와 맥아더 사령부 둘로 나누어 양쪽으로 도쿄를 향해 밀고 올라가야만 했다.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개인 감정, 필리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쟁 조기 종결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훼손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 조지 마셜 당시 육군참모총장 -

 

 

 

맥아더의 필리핀 집착은

1945년 3월 마닐라를 수복하고서도 계속됐다.

해군과 힘을 합쳐 일본 본토 공략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었지만,

맥아더는 돌연 ‘필리핀 제도의 완전 회복’을 전략 목표로 제시하며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다른 섬 장악 작전을 시작했다.

 

 

이때 맥아더는 거짓 보고로 합참을 속였다는 의혹을 받는데,

합참에는 “필리핀군이 미수복 지역을 되찾을 것”이라고 보고한 다음

정작 필리핀 7개 섬 수복 작전에 미군을 동원했다.

 

맥아더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전기를 쓴 클레이턴 제임스

“맥아더는 그저 개인적으로 필리핀의 해방자가 되고자 했을 뿐”이라고

이 군사작전을 평가했다.

합참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승장을 해임할 수는 없어 하는 수 없이 맥아더 작전을 사후 승인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워싱턴이 왜 이렇게까지 일선 장군의 허위보고와 항명을

그대로 참고만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현장 사령관이 대통령과 합참을 농락한 사실이 확인됐을 때

곧바로 해임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5년 후 6·25 전쟁에서 맥아더의 독단과 오만으로 인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대독 전쟁)과 태평양(대일 전쟁) 양쪽에서

국력을 갈아넣어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던 미국 정부(민주당 루스벨트) 입장에선,

공화당과 보수 진영의 지원을 등에 업은 맥아더를 해임했을 경우

국론 분열로 이어지는 상황만은 피하려고 했다.

 

 

맥아더도 루스벨트가 자신을 쉽게 자르지 못할 것이란 점을 알고서

항명과 복종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 나갔다.

맥아더가 계속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익을 공익처럼 보이게 하는’ 그의 특출한 포장 능력 덕분이다.

 

맥아더는 자신의 욕망을 ‘미국의 이익’이나 ‘미국의 자부심’

그럴듯한 외피로 숨기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자신의 개인적 열망이 투영된 필리핀 탈환전을 앞두고는

“우리에겐 (1941년 일본군에게 습격을 당한) 빚을 갚아야 할 국가적인 책임이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1941년 3월

필리핀 군사고문보다 한 단계 높은 고등판무관(과거의 총독 지위)이 되려는 마음에서

루스벨트 측근에게 스스로를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맥아더는 자신이 증오하는 루스벨트를 치켜세우며

“필리핀과 아시아 문제에 정통한 저의 자산을 대통령께서 활용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자신의 자리 욕심을 정권에 필요한 자질로 절묘하게 치환한 것이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나열했던 맥아더의 열 두 가지 특징을 잘 기억해 두자.

앞으로 두 편에 걸쳐 서술할 맥아더의 한국전쟁 행보(1950년 6월~1951년 4월)에는,

우리가 12면체 탐구를 통해 파악한 이 특징들이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방식으로 맥아더의 사고행동에 반영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희대의 전쟁영웅이 그렇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는지,

누가 봐도 질 게 뻔했던 대통령과의 싸움을 왜 계속 이어나가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회에선 맥아더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다룬다.

성공의 절정이었으나 몰락의 시작이었던 사건.

역사상 최고로 모험적이었고, 가장 독단적이었으며,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썼으나,

손꼽히게 성공적이었던 상륙작전. 바로 1950년 9월 인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참모, 휘하 사령관들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며 함께 웃고 있다. 왼쪽부터 제임스 도일 해군 소장(TF90 사령관), 에드윈 라이트 육군 준장(극동사령부 작전참모), 맥아더,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맥아더 참모장).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약간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탓''낙인'  그 지워낼 수 없는 반민족 행위

 

 

 

원제 : 친일·정치행위 *탓 ‘*낙인’… 교과서 밖 폐허에 방치된 최고의 한국어 연금술사

            장재선 전임기자 2026. 1. 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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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권때
무차별적으로 편협된 기사와 국민들이 혹할 만한 기레기 언론의 한 축을
굳건히(?) 자처해 왔었던 문화일보.
그 문화일보의 장재선 전임기자가 쓴 기사하나를 읽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포스팅 하기로 맘을 먹고 쓰는 글이다.
 
'탓''낙인'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기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배신을 자행했던
비루한 처신으로 인해 각인된 상징성이다. 
그 상징성의 각인에 대한 옹호는 신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옹호를 하려는 의식자체가 작금의 시대라 할지라도
역시 국가와 민족에 대해 배반자로써 다름아닌 표상이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자신의 확연한 민족배반적 의식(언행이나 글등)은 은근슬쩍 뭉개버리면서
'탓'과 '낙인' 이라는 의미를,
우리 정통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국가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국민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작위적 의미로 설파하려 했던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기사 전편의 내용 들을 꼼꼼하게 읽어봐도
스스로의 잘못된 의식에 대한 처연한 성찰적 부분은 별로 찾아볼 수 없는 듯 했다.
 
당위성적인 주장을 하는 것
옳고 정당함을 기반으로 하는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피력되어야 함인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내에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위협하는 배반적 요소와 음흉한 인간들이
온갖 도처에 너무나 많은 것 같다.(예 : 뉴라이트라는 엘리트 카르텔 조직계층이 그 대표적)
문화를 주제로 한다해서 '문화일보'라는 언론인지는 모르겠다.
 
문화를 다루든,
예술을 다루든, 
사상 인문적 사회현상들을 다루든, 그 어떤 심미적 현상으로 밥을 빌어 먹는 것이든,
그 행위와 그 행위속에서 표출되는 상징성들이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반역자인 의식속에서 싹틔워져 치명적인 위해_危害의 변_辯으로 자리매김될 수는 없다.
 
장재선 기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
매우 위험한 의식을 두루두루 긴 장문의 기사에 토로한 저의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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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일이나 부정적 현상을 야기한 원인이나 까닭
낙인_烙印 :  씻기 어려운 부끄럽고 욕된 평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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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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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서정주 작품 교과서 퇴출


‘부족방언의 요술사’ · ‘詩의 政府’ 찬사 불구
전두환 지원연설 등 정치행위 탓 노벨상 제외도
친일작품 11개… 제자 고은의 몰역사성 저격후 논란 확산
2015년 미당의 교과서 수록작품 1개… 2022년 이후엔 0개
후대에 잊어지는건 한국문학 큰 손실 될수도

 

 

 

 

미당 서정주가 1973년 서울 사당동 자택 뒷동산에서 포즈를 취한 것으로, 육명심 사진작가의 작품. 한국 대표 예술인이 촌로처럼 쭈그려 앉은 모습이 궁상맞다는 평도 있으나, 성(聖)과 속(俗)이 어우러진 시인의 폭넓은 내면을 담기 위한 것으로 미당이 아주 좋아한 사진이다.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는

정히 부족방언의 요술사다.”(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인간이 만든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의 시이다.”(이남호 고려대 명예교수)

 

 

 

○○○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이름은 서정주(1915∼2000).

15권의 시집을 통해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긴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우울과 탐미에서 시작한 그의 작품 세계는 해방 후 한국 전통 미학의 고원을 날았고,

인생의 파란만장을 품는 쪽으로 나아갔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에 특강을 하러 온 서정주를 본 적이 있다.

당시 칠순에 들어선 그는 이십대 청년들에게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당신이 어린 시절에 친구 집에 갔을 때,

 

친구 아버지가 “정주야, 무슨 일 있어 왔느냐”라고 할 것을

“서군, 무슨 사(事)로 왕림하셨나”라고 했다는 일화를 유머러스하게 전하며,

언어의 사대주의에 빠지지 말고 우리 말과 글을 갈고 닦으라고 했다.

그 강연을 통해 왜 그가 현대 한국어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시인으로 평가받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그의 아호 미당(未堂)은 친구가 지어준 것으로,

‘덜된 사람’이란 뜻이다.

평생 겸손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론 로댕과 같은 세계적 예술가처럼 부르기 쉬운 이름을 지향한 것이다.

겸허와 자긍의 양면이 다 있는 아호처럼 그의 생애도 빛과 그늘이 함께했다.

 

 

‘말당’ 서정주라니? =말당(末堂)이라는 멸칭은 그 그늘에서 나왔다.

군사정부 시절의 한 대통령 부인이

‘未堂’을 ‘末堂’으로 잘못 부른 데서 기인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그(서정주)와 독재정권의 밀착을 비아냥거리려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일 듯싶다.

 

 

실제로

서정주는 1981년 대선 때

전두환 후보 지원 TV연설을 했다.

1987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지었다.

 

 

그는 이런 정치 행위로 인해 노벨문학상 후보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국제PEN 한국본부 회장을 지낸 문덕수(1928~2020) 시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각국 PEN은 비공개로 노벨상 후보를 추천하는데,

한국 PEN이 1990년대에 서정주를 천거했더니

스웨덴 한림원에서 점검을 위해 서울에 사람을 보냈다.

 

 

“그 사람이 우리 문학인들로부터 미당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전두환 정권을 찬양했다는 대목에서 바로 ‘노(No)’ 했다는 겁니다.”

 

 

서정주의 그늘은

그가 2000년 12월 타계한 후 6개월쯤 지나서 더 짙게 드러났다.

 

시인 고은이 잡지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미당 담론’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그 담론은 미당의 몰역사성을 지적하며 그의 작품이 높게 평가받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고은은 미당의 추천을 통해 등단한 제자로,

한때

“서정주는 시의 정부(政府)”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스승을 저격하자 문학계 안팎이 시끄러웠다.

 

 

그로 인해

미당이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 작품을 쓴 사실이 크게 부각됐다.

 

서정주는 시, 수필, 소설 등에 걸쳐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 11개를 쓴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청년이 일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으로 참전한 것을 칭송하는 시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伍長 頌歌)’가 대표적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서정주가 포함됐고,

중·고교 국어·문학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 내용을 살폈던 이원영 동국대 국어교육학과 교수의 전언.

 

“미당의 시는 2000년대 초반까지 교과서 수록률이 높았습니다.

2009 개정 교육과정부터 낮아지다가 2015 개정 과정에서는

단 1편 ‘신선 재곤이’만 올랐습니다.”

 

 

이 교수 말을 들은 후 2022 개정 교과서들을 찾아봤다.

고교 국어·문학 검인정 교과서 9종이 시 작품을 448개나 수록하고 있는데,

그중 서정주 작품은 1개도 없었다.

 

윤동주, 정지용 시가 각 18편으로 가장 많았고

김소월(17), 신경림(15), 조지훈·백석(14), 한용운·이육사(12) 순이었다.

생존 시인으론 나희덕(12), 문정희(9), 정희성(8) 작품이 많이 실렸다.

 

 

눈에 띄는 것은

정지용, 백석을 포함해 이용악(10), 임화(2)

한때 월북 시인으로 분류됐던 이들의 작품도 꽤 올라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언급조차 금기시됐던 이들의 작품은 해금의 빛을 누리는 반면에

한국 대표 시인으로 불렸던 서정주의 시는 친일·독재 찬양의 그늘에 갇혔음을 실감했다.

 

 

교과서를 보니,

작년 가을 전북 고창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에 갔다가 느꼈던 씁쓸함이 떠올랐다.

문학관은 서정주의 고향 선운리의 폐교를 개보수해 지난 2001년 개관했다.

 

건축가 김원이 설계한 6층 건물은 미려했고,

곳곳에서 만나는 미당의 시 작품은 그 빼어남으로 새삼 경탄을 자아냈다.

 

 

그런데 5층에 있는 한 방에서 이마를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서정주의 ‘친일 작품’ 패널 6개가 자리한 방이었다.

이 문학관 개관 때 민족문제연구소가 요구한 대로 친일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서정주의 친일 변명- 종천순일파?’라는 제목의 패널도 보였다.

 

거기 담긴 글의 일부.

“나는 ‘이것은 하늘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그는 앞서

1940년 조선일보 폐간호에 싣기 위해 썼던 ‘행진곡’

민족주의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

 

 

그런 이의 변명이니 그럴듯하지만,

한국의 대시인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겨레 앞에 석고대죄를 한다는 자세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1970년대 말의 자서전 ‘천지유정’에서

그는 친일 행위에 대해 “깊이 사과해 둔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이후 그의 태도는 사과보다는 변명 쪽에 치우친다.

그와 문학 진영을 달리하는 쪽에서 거세게 공격할수록

서정주는 “종천순일한 것”이라는 태도를 지켰다.

 

 

그가 전두환과 가까웠던 것은

군사 정권이 반공(反共)에 철저할 것이라고 믿어서였다고 한다.

6·25전쟁 때 정신분열을 일으킬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그는

친공(親共) 세력이 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해 암약한다는 정권 측의 말을 신뢰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전두환이

뜻밖에 미당 시를 좋아한다고 수차례 표현한 것도 두 사람이 밀착한 원인의 하나였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친일군사정권 찬양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전체가 미래 세대 교과서에서 완벽히 지워지는 것이 온당한지는

의문부호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어 문학의 손실

“학생들이 미당의 언어를 접할 기회조차 없다면,

그렇게 해서 후대에 잊히고 만다면, 한국어 문학의 엄청난 손실이 아닐까요.”

 

 

이원영 교수의 이런 우려가 현실화할 수 있음을 서울의 한 중학교 국어교사의 말에서 느꼈다.

1999년생인 이 교사는 “중·고교 때 서정주 작품을 배운 적이 없다”라고 했다.

그에게 미당 작품이 교과서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아무 생각이 없다.

교과서에 수록될 때는 작가의 생애도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굳이 서정주를 올릴 이유가 없었을 듯 싶다.”

 

 

이와 관련,

미당 제자인 국문학자 윤재웅 동국대 총장은

“문화운동을 통해서 좋아질 것으로 본다”라고 했다.

 

검인정 교과서 편집진이 사회적 분위기를 보기 때문에

서정주 작품을 수록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 바람에서 동국대는 미당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 홈페이지에서 미당 시를 풍성하게 만날 수 있다.)

 

 

역시 미당이 생전 아꼈던 제자인 문정희 시인(전 국립한국문학관장)도 이렇게 말했다.

 

“한 시인이

그가 쓴 시를 통하여

그의 모국어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 말고 더 큰 애국이 있겠는가.

불행한 시대를 건너온 시인의 슬픈 얼룩 때문에

그의 빼어난 시를 교과서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큰 손실이다.”

 

 

한때 고은 시인이 이끌었던 민족문학 진영의 문학인들은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미당 담론’ 이후 25년이 지나서인지 그들의 비난 온도가 낮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영을 넘어서 문학계 신망이 높은 정희성 시인(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은

짧지만 웅숭깊은 답을 줬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에 관한 아무런 언급 없이 한국문학사를 기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정주(오른쪽)와 김동리가 생전 함께 웃는 모습. 이호철 ‘문단골 60년 이야기’

 

 

 

 

 

 

 

한국시·소설 양대산맥… 미당 - 동리 ‘평생 우정’

 

열여덟살에 만나 문학 동행

 

전북 고창 태생인 미당 서정주와 경북 경주 출신인 동리(東里) 김시종(1913∼1995).

한국문학사에서 시와 소설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두 사람은

1933년 처음 만난 이후 평생 우정을 나눴다.

미당이 만 18세, 동리가 20세 때였다.

 

 

두 사람은 1936년 김달진,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이즈음 동리가 시를 지었다며 미당에게 읽어줬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이란 구절에서 미당이 절창이라며 무릎을 탁 쳤다.

 

동리가 *무르춤한 얼굴로 말했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 일세. ‘꼬집히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이야.”

미당이 웃었다. “자네는 아무래도 소설 쪽으로 가야겠네.”

 

 

두 사람은 해방 직후

조지훈, 이한직, 김광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했다.

좌익 계열의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동리와 미당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차례로 맡는 등 문학계 중추 역할을 한다.

 

 

동리는 주로 서라벌예대에서, 미당은 동국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배출했다.

대학 제자가 아니라도 이들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들은 큰 주목을 받았다.

서정주 제자들은 스승의 집을 자주 찾아 저녁을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그 뒷바라지를 미당의 부인 방옥숙 여사는 군말없이 해냈다.

 

 

1960년대 가난한 스승의 집을 거의 살다시피 드나들었던 제자가

한때 승려였다 환속한 고은이었다.

그는 나중에 미당의 역사의식을 비판했는데,

동리의 제자 이문구가 문학 진영이 다름에도 끝까지 스승을 옹호하며

그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애쓴 것과 달랐다.

 

 

미당은 말년에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세계의 산 1628개의 이름을 매일 암송할 정도로 건강 유지에 힘썼다.

그랬던 그는 2000년 10월 아내가 타계하자 슬픔에 잠겨 곡기를 끊고,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무르춤하다  : 뜻밖의 사실에 가볍게 놀라 갑자기 물러서려는 듯이 행동을 멈추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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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오점_ 汚點 을 미화하려해도 이미 도저히 씻기울 수 없는 낙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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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그대 김영랑   '독을 차고 '

 

 

 

원제 : '독을 차고' 김영랑 시인의 항일과 아들이 밝힌 비화_秘話

                                                                             김영랑과 그의 셋째 아들 김현철

글쓴이 : 김명곤(kim5459)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어쩌면 이처럼 아름다운 시어_詩語가 있을까.

'솟아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아 물결이 은빛처럼 반짝이는 강'같은

청량한 내면을 가진 이는 영랑 말고 대체 누가 있을까.

 

가장 애송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내 마음을 아실 이',

'강물',

'가늘한 내음',

'노래',

'달',

'청명' 등 영랑의 시는 한결같이 아름답고

영롱한 세상과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인간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모습을

그는 '도른도른' 이란 정겹고 토속적인 남도 어휘의 조탁_彫琢(갈고 닦음)으로 그려낸다.

 

흔히들

영랑을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심성으로 노래하는 탐미주의 시인의 전형이라 평한다.

그가 좋아해 마지 않았던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명시 구절처럼

그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었다.

영랑 시의 아름다움은 소리를 내어 읽어야만 제맛이 난다.

처음 읽으면 뭉클한 감동에 가슴이 '철렁'하고,

한 참 읽다보면 "부드럽고 섬세한 서정이 어느새 운율을 타고" 흐르며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고 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

"언어의 격조가 높은 점에서는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다.

소월의 그 많은 한과 노래는 영랑의 옥저(옥피리)의 여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없지 않다"라고 했다.

 

 

 

 

 

 

 


'추_醜한' 세상에 반기를 들고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 본래는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다. ⓒ 김현철

 

 

 


영랑은 1903년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전남 강진에서 탯줄을 끊고 나왔으나,

그가 당장 경험한 세상은 일제에 의해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추한' 세상이었다.

청소년기에 무용가 지망생 최승희와 목숨을 건 열애에 빠지고,

프랑스 미인 여배우의 그림엽서 한 장에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순수미'를 시어(詩語)로 담아내고자 했던 그였다.

 

나긋하고 달착지근한 서정시를 쓰며 세상을 호호낙낙 살기를 꿈꾸었을 영랑이

사실은 '독_毒을 품고' 살았던 시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삶과 시를 제대로 조망_眺望하는 사람들은 그를 '시대의 반항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잡티 하나 없는 박속 같던 영랑이 '자연'을 거스르는 '부자연',

그리고 '아름다움'에 반하는 '추함'처음으로 저항한 것은 불과 14세때였다.

그는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휘문의숙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훈방조치 되었다.

아직 솜털이 송송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요주의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영랑의 항일정신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맞아 본격 발동한다.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지자

서울에서 몰래 입수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구두 안창에 숨기고 강진으로 내려온 영랑은

4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아 봉기하기로 친구들과 모의한다.

그러나 거사일 사흘을 앞두고 경찰에 급습 당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어린 학생(16세)신분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6개월 만에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된다.
  

 

휘문 고보 시절의 김영랑 ⓒ 김현철

 

 

 

 
영랑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기를 꿈꾸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견디지 못한 영랑은 동경유학길에 올라 아오야마학원(청산학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만난다.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같은 하숙집에서 교유_交遊 한 것도 이때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 영랑의 자유의식과 항일정신은 이때 더욱 고취되었다.

 

 

 

 

 

 

 


일본에서 '독을 차고' 귀향하다

일본에서 시문학을 공부하며 암중모색하던 영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한다.

관동대지진시 엉뚱하게 증오의 대상이 된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강진으로 돌아온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누워',

'사행소곡7수_四行小曲七首',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토속적 서정이 듬뿍 담긴 작품을 쏟아낸다.

 

 

그러던 어느날 부터 일제의 폭압이 극도로 심해지기 시작하자

저항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1930년 말에서 1940년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저항시를 쏟아내는데,

감미롭고 말랑말랑한 순수 서정시를 쓰던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윤동주와 한용운의 저항시에 버금갈 만한 다수의 시편이 그때 발표되었는데,

'독을 차고'는 그때 토해낸 시다.

 

 

김영랑의 생전 모습 ⓒ 김현철

 

 

 

 

 

 

내 가슴에 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害한일 없는 새로 뽑은毒
벗은 그무서운 毒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毒이 선뜻 벗도 害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毒 안차고 살어도 머지않어 너 나 마주 가버리면
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잣고 흘러가고
나종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것임을
「虛無한듸!」 毒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虛無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마음을 노리매
내 산체 짐승의 밥이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네맛긴 신세임을

나는 毒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외로운 魂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독을 차고'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 말,

일제는 황국신민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인의 혼까지 말살하려 들었다.

 

게다가 일제는 국책문학을 내세우며

천황을 찬양하거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시를 쓰도록 강요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는 그 당시의 상황을

'나라의 지사, 사상가, 종교가, 교육자, 지식인, 문인은 신사 참배하라면 허리가 부러지게 하고,

성을 고치라면 서로 다투어가며 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내로라 하는 대부분의 지도급 유명 인사들은 일제에 굴복했다.

 


영랑은 추한 세상에 빌붙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세태를 비관·비판하는 한편,

'독을 차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힘썼다.

데뷔 초기작부터 유독 '내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온 영랑은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를 갈고 닦아 자연과 세상을 노래하며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억제해 오던 터였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랑이리(일제)승냥이떼(친일 부역자)가 득실대는 세상에서

'독립이고 뭐고 모두가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영랑)를 회유하는 친구조차도 위협하며

'독을 차고(독을 마음에 품고)' 일제가 지배하던 세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독을 차고'에 이어

'거문고',

'두견',

'춘향' 등에는 그의 결연하고 비장감이 감도는 '내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디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饗宴)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김영랑 '거문고' 

 

 

 

 


쓴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쓴 시인

 

영랑은 시를 쓴 그대로 살았고, 살아간 만큼 시를 썼다.

그가 일찍이 '시문학誌' 에서 고백했듯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하며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머리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진실을 은폐시키지 못한다"고 절규하며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대한조선의 문인들이 일제에 아양떨며 머리를 굴려 추한 짓을 할 때,

영랑은 교활한 폭압체제의 실체를 폭로하고 항거했다.

그는 갖은 탄압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이 쓴 '아버지 그립고야'라는 책에 기록된 일화에 그의 '뚝심'이 잘 나와 있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 가구주들에게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할 때면

영랑은 "내 성명은 김윤식이다. 일본 말로 발음하면 '깅인쇼큐'다. 즉 나는 '깅씨'로 창씨했다"라며 당당히 대응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거부하도록 했는데,

자녀들은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매주 토요일 형사들이 대문을 두드리며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도

습관성 설사병 등을 핑계로 이리 저리 이를 피했다.

양복을 갖춰 입고 단발을 하라는 명령도 끝내 불복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한복을 벗지 않았다.

 


'외로운 혼'으로 '독을 차고' 살던 영랑은 회유와 협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자

홀연 절필을 선언했고,

1940년 '춘향'을 마지막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우리말을 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기

영랑은 일본어로 된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총을 가지고 싸운 독립군이 있는가 하면 펜과 종이로 싸운 사람들이 있는데,

영랑은 총칼 대신 펜과 종이로 싸운 독립군이라 할 수 있다.

 

 

친일문학연구가 임종국 선생이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친일을 하지 않은 영랑을

'일제 저항시인 7인'(윤동주, 변영로, 김영랑, 이희승, 황석우, 이승기, 오상순)에 포함시킨 이유다.

 

 

 

 


일제에 펜과 종이로 싸운 시인 영랑, 해방을 맞다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본래 모습. 1997년까지 우아한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고, 현재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있다. ⓒ 김현철

 

 

'울들(울지) 못하는 기린(조선)'이 마음껏 목놓아 울 해방이 찾아왔다.

절필을 선언한지 5년 만에 그는

 

'북'(일명 '치제'),

'바다로 가자',

'천리를 올라온다' 등을 통해

해방 조국에 대한 벅찬 기쁨과 희망을 실토하고 현실 참여 의욕을 보인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人生)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살리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伴奏)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人生)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김영랑 '북'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하늘과 넓은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뼉은치야
우리 모두다 가잤구나 큰바다로 가잤구나

우리는 바다없이 살었지야 숨마키고 살었지야
그리하여 쪼여들고 울고불고 하였지야
바다없는 항구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저나고 뼈 튀겨나고 넋이 흐터지고
하마트면 아주 꺼꾸러져 버릴것을
오! 바다가 터지도다 큰바다가 터지도다

쪽배 타면 濟州야 가고오고
獨木船 倭섬이사 갔다 왔지
허나 그게 바달러냐
건너뛰는 실개천이라
우리 三年 걸려도 큰 배를 짓잤구나
큰 바다 넓은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우리 큰배타고 떠나가잤구나
滄浪을 해치고 颱風을 거더차고
하늘과 맞다은 저水平線 뚜르리라
큰 호통하고 떠나 가잤구나
바다없는 항구에 사로잡힌 마음들아
툭털고 이러서자 바다가 네 집이라

우리들 사슬버슨 넋이로다 푸러노힌 겨래로다
기슴엔 잔뜩 별을 안으렴아
손에 잡히는 엄마별 아가별
머리엔 끄득 보배를 이고 오렴
별아래 좍 깔린 산호요 진주라
바다로 가자 우리 큰 바다로 가자 

 

 

김영랑 '바다로 가자'

 

 


영랑은 해방 정국에서

한때 순진하게도 대한청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다가 폭력적 상황에 질려 금방 그만 두었고,

이승만 정권에서 공보수석비서관이었던 '성북동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의 권유로 출판국장을 맡았으나

친일파들이 중앙청에 득실대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했다.

 

일제시대에 입었던 흰색 바지저고리와 검은색 두루마기를 그대로 다려입고

관청에 출근하는 그를 주변에선 못마땅해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랑이 경무대를 발칵 뒤집은 사건은 그의 유별난 결벽증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어느날 영랑이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집무실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무실 뒷벽 전면을 장식하고 있던 대형 병풍 그림을 보고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영랑이

 

"각하,

어찌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에 일본 금각사를 그려 넣은 병풍을 놓아둘 수 있습니까?

외국인들이 볼까 두렵습니다"라며 직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저게 일본 사찰 그림이란 말인가?

누가 그런 말을 해줘야 내가 알지. 당장 치우도록 사람을 부르게!"라고 했다.

 


무질서한 정국과 이승만의 독재에 환멸을 느낀 영랑은 7개월만에 출판국장직을 그만 두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영랑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49년 여름 신당동 자택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 김현철

 

 

 

 

영랑은 1950년

한국전에서 유엔군에 맞서며 후퇴하던 인민군이 쏜 유탄에 맞아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해방을 맞은 기쁨에 떡떡궁! 북을 쳤던 영랑은 "찬란한 슬픔"을 안고 일찍 그렇게 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영랑 사후 68년이 흐른 지난 2018년에서야

그의 애국정신을 기려 독립유공 훈장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영랑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예술인이 받는 금관문화훈장도 지난 2008년에서야 받았다.

 

전남 강진에 있는 영랑의 생가는

문학인의 생가로는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순수한 시적 감성으로 추악한 일제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여

'독하게' 그려낸 영랑.

 

교활하게 거짓을 감추며 더 추해져가는 현재의 일본과 잔류 친일파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시어_詩語로 이들을 꾸짖을까.

 

 

 

 

 

아들 김현철이 본 아버지 영랑, 그리고 대한민국

슬하에 5남 3녀를 둔 영랑은 '배 곯게 하는 문학은 절대 안 된다'고 자녀들에게 신신당부했으나,

두 딸을 제외한 5남 1녀가 글쓰는 일(영문학, 불문학, 언론인, 독문학, 영어학)을 전공하여

교수, 통역사, 언론인 등을 평생 업으로 삼아 아버지의 명을 어기며 살았다.

현재 영랑의 직계 자손 중

셋째 현철, 다섯째 현도, 여덟째 애란(여)이 생존해 있는데,

특히 셋째인 김현철(84) 선생은 전남 강진'영랑 현구 문학관' 관장을 거치며

영랑 시인의 삶의 족적을 관리.보존하는데 초석을 다졌다.

 


김현철 선생은 MBC 본사 기자를 거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미주 동포언론 '한겨레 저널'을 창간한 언론인 출신이다.

 

도미 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독하게 맞서 싸우다 한때 입국금지인물 명단에 오른적도 있다.

그가 7년 전 폭로한 박정희 관련 유튜브('비운의 여배우 김삼화')

5백만 회가 넘는 클릭을 기록하며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코리아 위클리''서울의 소리' 등에 남북관계와 한국정치 관련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영랑 사후 58년 만에 추서된 금관문화훈장 증서와 훈장. ⓒ 김명곤

 

 

 

 

 

이하 인터뷰

 

- 영랑이 뒤늦게나마 그 진면목을 인정받아 항일 저항시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감은?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지난 2008년의 금관문화훈장에 이어

작년에 독립유공훈장 건국포장을 받은 것은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장기간 친일파 정권이 지속된 탓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늦게 진실을 인정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좀 안타깝다.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 선친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모두는 아니지만 아버님의 시에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정서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면도 강하다고 본다.

가령 '바다로 가자' 같은 시는 해방정국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나,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예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역시 슬픔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희망의 세계가 암시되어 있다."

 


- '영랑 시인의 시는 운율적 흐름이 강해 한참 읽다보면 절로 노래가 나온다'는 평들이 많다.

 

"사실 아버지는 성악가(테너)를 꿈꾸셨다.

어머님과 지역 노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아버지의 남도 판소리는 당시 명창들도 놀랄 정도로 수준급이었고,

거문고, 가야금, 북, 양금의 연주 실력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임춘앵, 김소희 등 당대의 명창들을 생가에 초청하면

고수를 데려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북 연주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 선친과 음악에 얽힌 이야기 중 특별한 기억이 있을 듯하다.

 

"아버지가 서양 클래식뿐 아니라 판소리까지 고전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

4살쯤부터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는 그 긴 판소리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셨다.

미칠 지경이었다.

소변이 마려워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나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컸다."

 

 


- 영랑시인은 일제에 대해 '독을 차고' 사셨으면서도

  서정주 등 친일파 시인들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선친이 친일파 시인 서정주와 어울리는 것을 보고 대학생이던 큰 형님이

'왜 저런 분과 가까이 지내십니까'라고 종종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11년 연하의 서정주를 지칭하며) 불쌍한 사람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아버지는 매우 인간적인 분이셨다."

 


- 선생님이 본 아버님의 성격은?

 

"이광수, 김광섭, 정지용, 서정주, 박목월 등 선후배 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친은 수줍음을 매우 많이 타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불의를 보면 불같이 화를 내는 과격한 면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 출판국장 시절 한글맞춤법통일안 수용 여부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통일안을 반대하는 이승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절친 김광섭에 뒤틀린 나머지

교자상을 뒤엎고 나온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옹졸한 직계 상사가 사사건건 월권을 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정도다."

 


- 선친이 한국전 당시 북한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고들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설령 인민군의 포격에 돌아가셨다고 해도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도 북한군을 원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버님이 한때 잘 모르고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하신 일이 있으나,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을 선호하신 분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모셔서 결혼식 주례를 서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여운형 선생이 주례를 설 정도였으면 해방정국에서 좌파 사회주의로 기울었을 법한데.

 

"큰 형님의 생전 전언에 따르면,

언젠가 일본 유학생 시절 친구들이

'자네 같은 엘리트가 택할 길은 우리처럼 사회주의인데 왜 그 길을 따르지 않나?'라고 추궁하며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선친은 '사회주의 좋지… 그런데 말야, 자유가 없는 게 싫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선친은 같은 시문학파 동료이자 영랑이라는 호를 지어준 정지용과 단 둘이서

금강산 여행을 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나 사상에서 차이가 있어 서로 멀어지며 결국 결별했다.

선친은 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 분이셨다."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영랑 시인의 삼남 김현철 선생 ⓒ 김현철

 

 

 

 
- 한인사회 일각에서 선생님을 친북인사로 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한데.

 

"(웃으며) 지겹도록 들어온 한심한 소리다.

나 스스로는 누가 뭐래도 선친과 같은 진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 세대가 받아온 길고 긴 반공교육이 가져온 트라우마 때문에 북을 적대시 했다.

운영하던 신문사에서 김재준, 함석헌, 송건호, 함세웅, 문동환 등

민주인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으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한다."

 


-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은 독립 후 242년간 200여차례나 타민족을 괴롭혀 왔다.

노엄 촘스키에 따르면, 미국은 평균 9개월마다 침략 전쟁을 벌인 나라다.

이러한 미국을 보고 친미를 한다면 그게 정상인가?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오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과

미국을 인권국가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가령 악명높은 *관타나모 인권유린의 실상을 안다면 감히 미국을 인권국가로 부르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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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관타나모_Guantánamo 인권유린
미국이 쿠바 관타나모 만_灣에 설치한 관타나모 수용소_Guantánamo Bay Detention Camp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와 국제법 위반 논란을 말함. 주로 2001년 9·11 테러 이후 본격화되었음.

관타나모 수용소
설립: 2002년, 미국 정부
목적: 9·11 테러 이후 체포된 테러 용의자(주로 알카에다, 탈레반 관련자)를 구금
위치: 쿠바에 있지만 미국이 통제하고 있으며, 미국정부는 본토 법원의 관할을 피하려는 의도임. 
주요 인권유린 문제
- 불법적·무기한 구금
많은 수감자들이 정식 기소나 재판 없이 수년~20년 이상 구금
증거 부족, 오인 체포 사례도 다수, 무죄추정의 원칙과 적법절차 원칙 위반하고 있는 실정임.
- 고문 및 가혹행위
국제사회에서 가장 심각하게 비판받은 부분.
대표적 사례:  물고문(Waterboarding): 질식 공포 유발
                      수면 박탈: 며칠~몇 주간 잠을 재우지 않음
                      강제 스트레스 자세 유지
                      극심한 추위·소음 노출
                      종교적 모욕 (코란 훼손 등)
* 이는 유엔 고문방지협약(UNCAT) 및 제네바 협약 위반으로 간주됨음 물론 민주국가의 이율배반.

이 문제가 왜 중요한 문제인가?
관타나모 문제는 단순한 수용소 논란이 아니라, 국가안보 vs 인권이라는 대립으로써 접점이 없음.
테러와의 전쟁을 함에 있어서 현행 미국법의 한계를 초월한 월권적 인권탄압.
강대국도 국제법을 지켜야 하는가 라는 현대 국제정치와 인권의 핵심 쟁점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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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랑 시인이 살아 있다면 현재의 한일관계에 얽힌 논쟁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현재의 갈등은

친일파 70년 체제에서 나온 토착왜구 세력민족주의 진영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아버지는 결단코 토착왜구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 조국사태와 조국 이후의 사태를 어떻게 보시는지.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조국은 희생물이라고 본다.

희생물 없는 혁명이 어디 있겠나.

현재의 대한민국은 검찰왕국이다.

실제 대통령은 검찰총장 아닌가?

문재인 정권이 이제 칼을 빼들었다.

인사권, 감찰권 가져오지 않았나.

국민 다수가 공수처 찬성하고 있다.

검찰이 문재인과 국민을 이길 수 없다고 본다."

"조국은 검찰개혁을 위한 희생물, 검찰이 국민 이길 수 없다"

 

 

- 지난해까지만 해도 잘 풀리는 것 같던 남북관계가 교착국면에 있다. 무엇이 문제라고 보나.

 

"문 대통령이 미국의 압박으로 고민이 깊다는 점을 이해한다.

하지만 '민족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무르다고 생각한다.

북한과 군사합의서 써놓고 합동군사훈련에 '참수작전'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반드시 전시작전권을 환수해야 한다.

유엔제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금강산 관광 등 우리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미국의 압력으로 야기될 일시적 경제악화를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노력 없이 어떻게 평화통일을 기대하겠는가."

 

 

 

 

 

오마이뉴스, 김명곤 기자님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86163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약간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일년 내내 눈 내리는 마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김누리 2025. 10. 23. 06:42

 

 

 

 

 

 

 

 

'석포눈'이 내리는 마을,  공해 기업과 살아온 55년

기후위기생태학살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하루하루 현실로 다가오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과연 다른 세계는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다.

다른 세계는 물론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다른 행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과 아직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나무와 새들,

함께 호흡하는 뭇생명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함께 상상하고자 한다. 

 

2018년 11월, 영풍석포제련소 제1공장의 모습. 같은 해 2월, 폐수 70여 톤을 낙동강으로 유출하여 조업 정지 처분을 받았던 조치가 적법하다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의 판단이 내려졌다. 2021년 11월, 1970년도 제련소 준공 이후 51년 만에 처음으로 10일간 조업이 중단되었다.
 
 
 
 
 
한겨울도 아닌 계절에 눈이 내리는 마을이 있다.
 

해가 떠 있는데도 굴뚝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제련소 주변으로 짙은 눈안개가 껴 있다.

아황산가스미세 중금속이 뒤섞인 수증기 분진이 산간에 고여 있다가,

기온이 내려가면 차가운 대기에 얼어붙어 눈송이처럼 떨어진다.

 
 

주민들 사이에서 '석포눈'이라 불리는 그것이 피부에 닿으면 따끔한 통증이 일어나더라고,

영풍석포제련소 봉화대책위원회신기선 대표가 말한다.

 

정년퇴직 이후 고향인 봉화로 돌아온 그는 2014년부터 영풍석포제련소 폐쇄 운동을 이어왔다.

제3공장을 불법 증축한 제련소를 향한 반발이 본격화하면서 대책위원회가 출발한 해였다.

 

 

'석포(石浦)'.

그 이름의 '돌 석'과 '개 포'처럼 돌과 물이 많은 마을이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산맥들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자리하여,

'청정 숲속 도시'라는 이름이 붙은 경상북도 봉화군에서도 특히 산악지대로 이뤄진 오지에 있다.

 

험준한 바위산에는 금강소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강원도 태백시부터 황지천을 타고 내려온 석포의 협곡을 따라가다 보면 낙동강이 시작된다.

이처럼 강산이 조화로운 마을 한복판에, 어쩌다 거대 제련소가 들어서게 되었을까.

 

그 시간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오른다.

 
 
 
 
 
 
 
 

돌과 물의 마을에 죽음이 드리워진 이유

석포면에 제1, 2, 3공장의 산업단지 규모를 이루는 제련소의 광경.
 
 
 

석포에는

1961년부터 개발되다가 폐광의 흔적으로 남게 된 연화광산이 있다.

1930년대에 일제가 아연을 채굴하던 광산을 대한민국의 영풍기업사에서 인수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광산에서 나온 *카드뮴에 중독되어 뼈가 쉽게 부러지는 병이 퍼졌다.

 
일명 '아파, 아파'라는 비명에서 비롯한 *이타이이타이병.

 

이에 해외에서 대체 사업지를 찾던 일본의 주요 제련 기업인 도호아연과 손잡은 곳이 다시금 영풍이었다.

강변에 공해 시설 건립을 규제하는 환경법조차 생겨나기 전이었던 1970년,

영풍은 그렇게 도호의 기술력을 지원받아 낙동강의 발원지인 석포에 제련소를 세웠다.

 

1998년 연화광산이 문을 닫은 뒤에도 아연 광석을 전량 해외 수입하여 어느덧 50년 넘도록 운영하고 있다.

 

 

아연을 제련한다는 것은 황과 결합해 있는 아연 광석에서 순수 아연을 추출하는 것이다.

아연을 얻기 위해 광석을 뜨거운 쇳물로 녹이면, 황은 기체로 날아가 *아황산가스가 된다.

단 하루에만 트럭 약 50대에 실리는 25톤 정도의 원석이 제련된다고 한다.

 

*황산은 땅에 내려앉아 침적되고,

땅이 머금은 독을 빨아들인 식생이 산성화되어 수풀과 나무의 숨이 타죽는다.

한때 소나무들에서 연간 2천 톤 넘게 생산되었던 송이가 이제는 1톤도 나오지 않는다.

 
매년 봉화에서 열리는 송이 축제도 예전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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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뮴_ Cadmium : 화학 원소의 하나로, 기호는 Cd, 원자번호는 48인 금속.

              카드뮴의 특징 : 은백색의 부드러운 금속, 잘 녹슬지 않음, 다른 금속과 합금이 잘 됨

                                        자연에서는 아연 광석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음

              카드뮴의 사용 예 : 충전식 배터리(니켈-카드뮴 배터리), 안료(노란색·주황색 물감)

                                            도금(금속 부식 방지), 일부 플라스틱 안정제

             카드뮴의 위험성 : 인체에 매우 유독함, 몸에 쌓이면 신장, 폐, 뼈에 손상

                                          국제적으로 발암 물질로 분류됨, 그래서 현재는 사용이 강하게 규제되고 있음

             환경 문제 : 환경에 쌓인 카드뮴이 식품을 통해 들어와 신장 손상, 뼈 약화 위험 증가.

                               과거 일본의 이타이이타이병이 대표적 사례

 

이타이이타이병 : 일본에서 처음 보고된 중금속(카드뮴) 중독으로 인한 공해병

                            원인은 카드뮴(Cd)에 오염된 물과 쌀을 장기간 섭취했을 때 발명.

                            주요 증상은 뼈가 약해져 쉽게 골절되며, 심한 뼈관절 통증이 유발되고,

                            허리 다리 통증과 신장기능에 장애요소. 또한 키 감소하는 원인이 됨.

                            참고로 일본의 4대 공해병 중 하나임

아황산가스( SO₂, 이산화황 ) : 무색의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유해한 대기오염 물질, 물에 잘 녹음, 산성가스

                                                 석탄 석유같은 화석연료 연소와 화력발전소, 공장, 제련소에서 주로 발생.

                                                 눈,코,목 자극, 기침 호흡곤란, 천식이나 호흡기 질환 악화, 산성비의 주요원인

황산(H₂SO₄) : 매우 강한 산성을 가진 무색·무취의 액체로, 산업과 실험에서 널리 사용되는 화학 물질.

                       황산은 강한 산성·부식성을 가진 물질로, 산업적으로 중요하지만 매우 위험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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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련소가 일으킨 대기오염의 영향권에 있는 산림이 잿빛으로 말라 있다.

 


 

 

 

 

"어릴 때는 어린애들도 산에 가면 송이를 땄어요.

올라가면 송이 천지니까 송이 철만 되면 막 마음이 설레고 정말 축복받은 땅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 송이가 안 나는 데에도 제련소 영향이 있죠."

 

 

수질 오염 문제도 덩달아 불거졌다.

제련소 주변의 하천과 지하수, 낙동강 본류까지 흘러드는 중금속 농도가 기준치를 일찍이 넘어섰다.

강의 상류에서 서식하던 다슬기와 같은 *저서생물들이 제련소를 지나고 나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류의 안동댐 일대에서 *물살이가 집단 폐사하고 새들도 떼죽음을 맞는다.

 

학창 시절 낙동강과 접해 있는 학교에 다녔다는 신기선 대표에게 그것은 몹시 아픈 변화로 다가왔다.

 

"어릴 때는 고기가 지천이었어요.

산촌에서 하루에 죽도 세 끼 못 먹어서 그땐 정말 배고픈 시절이었거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먹을 게 없어.

그럴 때 이제 물가 가서 노는 거야.

손 휘적휘적하면 조개도 나오고 고기도 나오고 목욕하다 배고프면 물로 배 채우고.

낙동강이 놀이터였죠.

저는 그것 때문에 이 일하는 거예요.

참 기대어 살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품어준 강인데 다 망가져 버렸잖아요."

 

 

어릴 적 그의 굶주림을 살펴주던 낙동강은 여전히 1300만 명이 살아가는 영남의 식수원으로 있다.

그러나 오늘의 강물을 먹고 자라는 농산물에서는 독소가 검출된다.

밭에서 기르는 채소가 시들고 과수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주민들이 정작 손수 거둔 농작물을 먹지도 못한 채 값싸게 팔아넘기며 불특정 다수의 식탁으로 건너온다.

그 자체로 깊은 산촌이라 경작할 논도 적은 대지가 고요히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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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생물_ 底棲生物 : 강·호수·바다의 바닥(바닥층)에서 살거나 바닥에 붙어 사는 생물을 말함.

                                   보통 동물로는 조개, 갯지렁이, 소라, 불가사리, 게등이며,

                                   곤충 유충들이 이에 속하고 식물로는 해조류, 바닥에 붙은 미생물 등이 대표적임.

 

물살이 : 물에서 살아가는 생물의 생활 방식 또는 그런 생물들을 지칭하는 순 우리말 표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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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권리를 묻고 살려낼 본분을 답하다

 

2022년 10월, ‘석포, 피어나다’ 프로젝트로 메밀꽃이 만개했던 석포면의 모습. 환경오염 지역이라는 오명을 떨치기 위해 면사무소 직원과 주민들이 기획한 환경조성 행동이었다.

 

 

 

또, 그런데도 석포의 주민들은 침묵한다.

 

"말을 안 합니다.

그게 참 안타까운 면이에요.

마음은 있는데 못 한다며 이해해 주세요,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폐광 이후 대체 산업을 마련하지 못한 지역 경제는 제련소 중심의 고용과 소비에 의존해 있다.

그렇게 폐쇄적으로 고착된 구조에서 제련소가 최초로 조업 정지 처분을 받았던 2018년,

전 봉화군수는 행정심판위원회에 선처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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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제련소는 봉화군에서 유일한 대규모 사업장으로 제련소와 협력업체

그리고 공사업체 임직원 상당수가 관내에 거주하는 지역 주민이며,

또한 제련소가 소재한 석포면은 물론 관내 지역 경제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제련소의 조업정지는 (…) 지역민의 고용악화 초래,

제련소 임․직원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주변 영세 소매업의 생계위협은 물론

지역경제에도 큰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 금번 수질오염물질 배출에 대해 (…) 선처를 베풀어 주실 것을 탄원드립니다."           

- 2018년 10월 전 봉화군수 엄태항이 제출한 탄원서의 일부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소갑 제26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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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련소에 반대하는 신기선 대표이지만, 좀처럼 나서지 못하는 지역민들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한다.
 
 

"석포는 좀 어려운 구조라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이 제련소에 기대어 살잖아요.

생계가 여기 있는데, 이런 첩첩산중에서 제련소까지 문 닫아버리면 막막해지죠.

그래서 누가 불만을 얘기하면요.

살기 싫으면 보따리 싸서 이사 가면 돼. 왜 그런 문제 제기해?

여기 사는 사람들은 뭐 먹고 살라고? 이런 식으로 반응이 나오니까

입도 뻥긋 못하고 외부 노출이 금기시됩니다.

당장 내일 죽는대도 오늘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불편해도 그냥 손사래 치며 입 다물고 있는 거예요.

문제가 있다고 아우성을 치며 내세우지 않아서 그렇지,

실질적으로는 훨씬 문제가 많다고 봐야 합니다."

 

 

 

 

대신, 숫자로나마 얼마간 드러나는 현실이 있다.

지난 십 년 동안에만 제련소는 불법 방류와 배출로 120여 차례 적발되고,

90번이 넘는 행정처분을 받았으며, 국정감사에 9회 소환되었다.

 

문제를 개선하기는커녕 지자체나 정부 기관과 합심하여 사실을 축소하고 은폐하거나 맞소송으로 대응해 왔다.

2019년에 1868건의 대기오염물질 배출 농도를 조작한 상무이사가 실형을 받았을 때도,

서류 보존기간인 3년간의 자료만이 적발되었을 뿐이다.

 

 

와중에,

2022년 환경부는 제련소의 향후 운영에 103건의 조건부 통합환경허가를 내줬다.

대기, 수질, 토양, 폐기물 등의 환경 매체를 통합하여 허가를 관리하는 제도에서

103건의 조건이 제시되었다는 것은 103개의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허가가 나온 뒤 아니나 다를까,

올해 7월까지 요구되었던 오염 토양 정화 명령이 이행되지 않아 재명령이 내려진 상황이다.

 

 

그러나 공장 아래에 오랜 시간 축적된 지하의 오염 토양까지 제대로 정화하려면,

바닥을 파내기 위해 제련소를 뜯어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생업을 살린다는 제련소가, 동시에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법적 처벌마저 유예되거나 취소될 정도로 제련소가 비호받는 정경유착의 분위기 속에서,

주민들은 공해로 인해 체내에 쌓이는 평균치 이상의 카드뮴 농도나 피부 발진, 호흡기 질환 등의 증상을 안고

살아가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2021년, 급성 백혈골수암으로 산재 인정을 신청한 전 영풍 하청노동자 진현철

 

 

 

 

제련소 노동자들의 사정도 위급하다.

그간 산재 사고로 알려진 사망자15명이다.

재작년과 작년에만 3명의 하청노동자가 숨졌고

올해 6월에도 굴착기 운전 중 매몰되어 죽은 하청노동자가 있다.

 

더욱이 고용 승계도 약속되지 않는 하청노동자는 언제든 계약이 끊어질 수 있고,

원청 노동자보다 노동권과 건강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로 위험의 외주화에 내몰리는 열악한 위치에 처해 있다.

 

 

이제까지 급성 백혈골수암으로 투병 중인 진현철 전 하청노동자만이 가까스로 산재 인정을 받았을 뿐

(관련 기사 : "제련소 하청 노동자 백혈병, 첫 산재 인정" https://omn.kr/26jit)

그마저도 제련소에서는 항소로 일관하며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다.

 

 

전 대표이사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전 제련소장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구형받았을 때도

제련소의 앞날을 근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결국 도호아연의 위험 시설을 옮겨온 석포에서

노동자는 이윤과 효율의 논리에 의해 도구화되고, 주민은 생계로 인해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자연환경은 그 모든 인간 중심적인 개발에 희생되고 있다.

 

파괴된 산림과 오염된 강,

다치고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와 말을 빼앗긴 주민 모두 고통으로 연루되고, 연결된다.

환경이 오염될수록 지역민의 목소리는 위축되고

현장이 방치될수록 생태계도 빠르게 붕괴할 것이다.

석포의 문제가 가까운 영남권은 물론 모두의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까닭이다.

 
 
 
 
 
 
 

한 방울의 삶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무방류 설비 ‘제리디’를 선전하는 영풍석포제련소의 현수막. “한 방울의 공정사용수도 흘려보내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장이 하얀 색상으로 적혀 있다.(전형적인 *그린 워싱의 한 예라 볼 수 있음)

 

 

 

 

 

한편,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는 일들도 있다.

제련소는 올해 2월 말부터 4월 초까지 폐수를 무단 배출하여

물환경보전법을 위반했다는 처분을 받아 58일간 조업이 정지되었다.

 

다가오는 11월에도 작년 이맘쯤

황산 가스 감지기를 끄고 조업했던 것이 적발되어 받은 10일간의 처분이 실행된다.

 

 

7월의 대구고법 항소심에서는

수년간 발생한 카드뮴 오염에 대해 제련소에 무죄를 선고했지만,

조업 과정에서 나온 대기 분진이 토양 오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폐기물 매립이 지하수를 오염시킨 원인일 수 있다고도 지목했다.

(박지훈, '대구고법 "영풍 석포제련소 대기분진, 토양오염 영향 미쳤을 것"',

<부산일보>, 2025.7.28. 및 이경민, '고법 판결문 "영풍 석포제련소 무분별한 폐기물 매립,

지하수·하천까지 오염 가능성"', <전자신문>, 2025.8.4. 참조)

 

 

 

 

그와 같은 질문들은

제련소가 2021년부터 도입한 무방류 설비에 관해서도 되묻게 만든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공정수를 외부로 배출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폐수 배출 0%"를 실현하는 시스템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력이나 열에너지를 이용하는 설비의 특성상,

정전이나 고장이 발생하면 시스템 자체가 작동할 수 없다.

가동을 멈춰야 하는 조업 정지 때는 특히 그러할 텐데,

이미 세 차례의 조업 정지가 실행되었거나 예정되었고

추가적인 처분이 내려진 정지 기일들을 제련소 측에서 연기 중인 상황에서

무방류 설비를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나아가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 이용될 막대한 에너지가

오히려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역설을 일으키며,

물줄기를 막은 자리에서 쌓이게 될 오염물질이 다시 토양과 지하수를 위협할 수 있다.

 

즉, 기후 위기 시대의 수질 오염을 해결하려는 설비 구조 자체가

탄소중립에 역행하는 *그린 워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가깝게 보인다.

 

 

그럼에도 지난 8월 경북 지역의 한 중학교에서

기후 위기 대응 교육으로 제련소를 체험했던 날,

학생들 앞에서도 무방류 설비를 선보였다는 영풍을 향해 묻고 싶다.

 

자사 홈페이지의

"자연을 생각하고 보호하며 자연과 함께 성장"하는 "친환경 주식회사"라는 소개말에

영풍은 얼마나 떳떳한가.

 

'함께 성장'한다는 말과 달리 제련소가 앗아가고 있는 수많은 목숨의 시간은 어떻게 되는가.

누군가 제련소에서 퇴직하고도 자식이 이어 다닌다는 이유로

여전히 그 안에서의 일들을 말할 수 없다고 주저할 때,

다시금 누군가를 미래의 노동자처럼 길들이려는 듯한 말들 앞에서 정말 한 방울의 부끄러움도 없는가.

 

"우리가 지키려는 것은 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아이들의 학교와 마을의 불빛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바친다"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지음, 노승영 옮김, <시간과 물에 대하여>, 북하우스, 2020, 5쪽)라고 남긴

 

 

어느 책의 소망처럼,

오랜 시간 묵묵부답했던 주민들도

뒤늦게 제련소 이전 계획을 발표한 경상북도 앞에서 마침내 결의 대회를 열었다.

수백 명이 모여 "생존권 사수"를 외치며 이전에 반대했다.

실제로 이전은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가 어렵다.

애초에 세워지지 말아야 했던 강변에 세워졌으나 공정에 필요한 물의 수급처를 확보해야 하는 공해 기업의 특성상,

어느 곳으로 옮기든 간에 문제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체 문제가 심각해서 어떻게든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상까지 와버렸어요.

그래서 정리는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주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사는 도민이잖아요.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할지 논의하고 정부에서 대책을 세워야 해요.

신뢰할 만한 제도 장치를 마련해야 주민들을 설득하죠.

정의를 바로잡으려면, 양심을 지키면 됩니다.

공무원은 공무원의 양심을 지키고 회사는 회사의 양심을 지키고 국민은 국민의 양심을 지키면 돼요.

그랬으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신기선 대표도 지역민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을 말한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기후 대응을 위해 산업 체제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주민과 같은 취약계층이 구조적 피해를 겪지 않도록 보장하는 방향이다.

 

 

그는 제련소의 향방을 논하기에 앞서

재취업과 정기 건강 검진을 통한 무상 치료 등의 예방책을 마련하자고 말한다.

제련소가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을 환수해 필요 비용을 추징하자고 제안한다.

 

환경법도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익에 비해 미약한 벌금으로 끝나는 처벌 방식이 도리어 부정을 재발하도록 유도할 수 있기에,

기업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의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

 

 

이처럼 각각 환경과 생계를 바라보며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듯했던 신기선 대표,

주민과 노동자들이 다다른 곳은 다르지 않다.

바로 지금 여기의 땅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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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워싱_Greenwashing : 기업이나 조직이 실제로는 환경에 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해가 되는데도.

                                              환경 친화적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오해를 유발케 하는 식의 마케팅을 하는 것을 말함.

 

[사용 예]

애매한 표현 사용: “자연을 생각한”, “에코”, “그린” 같은 말만 쓰고 구체적인 근거는 없음.

부분만 강조: 제품 전체는 그대로인데 포장만 조금 바꾸고 친환경인 것처럼 홍보.

인증 없는 주장: 공신력 있는 환경 인증 없이 자체 기준으로 친환경이라고 말함.

비교 속임수: “이전 제품보다 친환경”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환경 부담이 큼.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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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를 지속하는 오늘을 향해

 

영풍 홈페이지(www.ypzinc.co.kr)의 메인화면

 

 

 

 

그렇다면 송이버섯과 같은 생태계와도 '우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작년도 봉화 송이 축제는 '송이 없는' 축제로 끝났다.

수많은 소나무가 병들었을뿐더러 길었던 폭염 끝에 살아남은 나무에도 송이가 잘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 축제는 지역민의 또 다른 삶터다.

인간 거주민도 비인간 원주민도 소외되지 않고 공존해야 하는 곳이다.

영풍이 연화광산을 폐광업소로 방치한 역사와 달리 생태 정의를 함께 지속해야 할 까닭이다.

 

"지속 가능한 제련 기술"이 삶보다 앞설 때,

지속 가능하다는 수식어는 생명이 아닌 산업과 자본의 존속을 더 추구하는 공허한 구호에 머무를 것이다.

 

 

"물이란 게 결국 생명수잖아요.

공기도 삶에서 대체되지 않는 필수 조건이고요.

그런데도 물에 생물체가 사라지고 나무가 다 죽고도 인간은 살았으니까 괜찮아,

우리는 건강해, 이런단 말이죠.

인간이 그만큼 모질다니까요.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고 그럴까?

시간이 더 흘러도 인간만이 괜찮을 수 있을까?"

 
 

올해 58일간 조업 정지를 실행했던 동안, 제련소 뒷산의 땅에서 산철쭉이 꽃을 피웠다.

 

 

 

 

모질다는 것은

"몹시 매섭고 독하다"라는 뜻과

"참고 견디기 힘든 일을 능히 배기어 낼 만큼 억세다"라는 뜻을 같이 지닌다.

모질게 강한 인간의 힘은 그간 자연환경을 착취하는 동력으로 쓰여왔다.

 

다만 그렇다면,

어려운 일을 '능히 배기어 낼' 힘으로 '살리는' 일을 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올해 58일간 조업 중지가 있고 나서 고사했던 산의 일부가 되살아났다.

(관련 기사 : "58일간 조업정지 후 영풍석포제련소 뒷산에 나타난 변화" https://omn.kr/2dca3)

 

 

 

"2019년도 조작 사건 때도

관리 부서에서 점검을 나와서 조심하니까 풀과 식생이 살아났어요.

씨가 날아와서 새파랗게 촉이 트는데,

신기할 정도로 다 죽었던 것들이 어디서 그리 오는 건지 끝내 싹을 내더라고요.

그러니까 독성 물질이 제거된다면, 자연계도 언젠가는 꼭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산의 죽은 나무들이 널브러진 땅을 직접 발로 밟아야 하는 순간이 서글프다고 말하던 신기선 대표가,

기적적으로 싹을 틔워낸 녹색 빛을 보았을 때 드물게 기쁨이 찾아왔다며 옅게 웃음 짓는다.

 

그의 바람처럼,

"과거를 넘어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점 위에 서 있다"는 영풍에게

과거와 단절된 미래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밝혀둔다.

 

기술로 미래를 지어가기에 앞서,

우리가 잃어버리게 했던 본디 그 자연의 모습을 되돌려줘야 한다.

강이기 전에 물이고 산이기 전에 삶이었던 생명의 시간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석포는 석포를 그 이름답게 존재하게 할 터전과 주민과 노동자가 함께 숨 쉬어가는 마을을 바란다.

어느 겨울, 푸르른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마음껏 맞으며 뛰어다닐 그날을 간절하게 바라면서.

 

 

 

 

 

 

김누리: 전주에 살며 읽고 쓴다.

             연루된 관계 속에서 공생할 수 있는 삶을 실천하기 위한 기록 활동을 하고 있다.

             돌봄과 연결의 힘에 기대어 더 정확히 비관하고 구체적으로 낙관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기획 공동진행 : <(사)세상과함께>,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https://v.daum.net/v/20251023064200187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약간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치매 걸린 뇌과학자의 충언_忠言

“이 병에 매료됐다… 인지저하도 대처 가능”

  김지수 작가   2025. 10. 4.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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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불허 인생, 표류하는 시간 속에 선물 있어”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 대니얼 깁스 박사
알츠하이머병의 전조는 후각 상실, 잘 관찰해야
진단부터 사망까지 10년, 조기 발견이 관건
운동, 식단으로 발병률 50% 낮출 수 있어

*인지예비능 있으면, 치매 와도 안정된 생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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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뇌과학자'의 저자 대니얼 깁스 박사. 30년간 진료실과 연구실에서 신경과 임상 연구에 헌신했고, *경도인지장애를 앓는 와중에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책을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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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인지장애_MCI, Mild Cognitive Impairment : 나이에 비해 기억력이나 판단력 같은 인지 기능이 다소 떨어졌지만,
                                                                                 일상생활은 대체로 혼자서 가능한 상태를 말함.

                                                                                 쉽게 정상노화와 치매의 중간 단계라고 이해하면 됨.

아밀로이드 : 우리 몸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뭉쳐서 쌓인 물질.

                     알츠하이머병(치매)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알려짐

타우 단백질 : 뇌 신경세포 안에서 신경의 구조를 지지하고 신호 전달을 돕는 단백을 말함.

뇌척수액_ CSF, CerebroSpinal Fluid : 뇌와 척수를 둘러싸고 흐르는 투명한 액체를 말함.

알츠하이머병 : 가장 흔한 형태의 치매로, 기억력 저하를 시작으로 인지 기능이 점차 악화되는 뇌 질환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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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뇌를 연구하며 수많은 치매 환자를 상대한 사려 깊은 신경과 의사가 있다.

기억이 뭉텅뭉텅 유실된 채 겁에 질려 진료실을 찾아오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을,

그는 가엾게 여겼다.

 

90년대만 해도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는 이 병을 증오했다.

 

치료법은 고사하고 진단조차 자기공명영상과 컴퓨터 단층 촬영 스캔뿐.

훨씬 뒤에 *아밀로이드*타우 단백질의 수치를 측정할 수 있는 *뇌척수액 검사가 개발됐다.

 

 

 

그러던 어느 날 벼락처럼 그에게도 치매가 찾아왔다.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

은퇴한 신경과 의사이자 *알츠하이머병을 안고 살아가는

전 세계 5천만 명 중 한 사람인 대니얼 깁스 박사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의 끔찍한 불운을 불쌍히 여기겠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병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의 알츠하이머 유전자를 발견하기 위해서

사서 출신인 아내와 탐정처럼 가족 계보도를 추적해 대가족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아밀로이드와 타우로 위축된 자신의 뇌 사진을 보면서

‘나 홀로 시사회’를 즐기고,

신약을 위한 임상 실험 참가자가 되어 언어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을 겪고 당당히 돌아온다.

 

 

나(작가 김지수)는 대니얼 깁스

알츠하이머병이라는 통제 불능의 역경을 수용하는 방식에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알츠하이머의 기본 정조인 상실과 고통의 서사를 반복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재난과 유머, 의학과 향수가 뒤섞인 그의 관조적인 문장에 나는 깊이 매료되었다.

 

 

바람 없는 바다 위를 표류하다 범고래를 만나는 장면은 특히 압권이다.

운 좋게 병을 조기 발견한 덕에

10년 넘게 가벼운 인지 손상만 나타나는 상황을 겪고 있는 중인 그에게 서면 인터뷰를 요청했다.

 

질문지를 보내자마자 이틀 만에 답변이 도착했다.

경이적인 속도였다. ‘잊기 전에 써야 한다’는 그의 메모 덕분에,

인터스텔라 사상 가장 빠른 답을 선물로 받았다.

 

 

문득 작년에 인터뷰했던 일본 노년 내과의사 가마타 미노루 선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생 8할은 잊어도 좋다’.

버림받은 기억, 증오와 원한, 미움과 집착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잊고 그저 햇볕을 쬐고 몸을 움직여 걷고 나면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했던가.

그런 식의 뛰어난 망각력이 우리를 살게 한다고.

 

 

아이러니하지만,

대니얼 깁스의 충고도 다르지 않았다.

걸을수록 뇌는 예리해지고 운동만으로도 알츠하이머 발병률을 50% 낮출 수 있다고 했다.

 

 

 

 

2007년 56세에 찍었던 대니얼 깁스의 뇌 사진. 노화로 인한 경미한 뇌 위축과 함께 가운데 아래 하얗게 *뇌하수체 *종양이 보인다.

 

 

 

 

 

 

 

 

 

-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억력은 여전히 조금씩 나빠지고 있지요.

주로 언어적 기억력이 떨어지는 게 문제에요.

사람 이름이나 지명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몇 년 전 아내 로이스와 함께 다녀온

스코틀랜드 북부의 한 중요한 도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요.

이웃 이름도 기억났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흥미로운 건 그동안 키웠던 반려견들의 이름을

반려인의 이름보다 더 잘 기억한다는 점이에요.

방향 감각은 아직 괜찮습니다.

동네를 산책하면서 길을 잃은 적은 없어요.

운전은 이제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만, 등장인물 수가 적은 책이 이해하고 따라가기에 훨씬 수월합니다.”

 

 

- 평생 수많은 치매 환자를 진료실에서 만나셨지요. 선생이 당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 겪어보니 어땠습니까?

 ‘이 병에 완전히 매료되었다’라는 표현이 놀라웠어요.

 호랑이와 함께 링에 올라간 기분이라니요!

“제가 이 병에 대처하기가 좀 더 수월했던 이유는

신경과 의사의 시각으로 이 병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5년에 찍었던 첫 *PET 스캔이 특히 흥미로웠는데,

뇌 전체에 아밀로이드가 쌓여 있었고

그 중에서도 후각 영역 여러 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걸 보면서 ‘정말 멋지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병리학적 소견과 신경해부학이 맞아떨어지는 광경에 우리 모두가 무척 흥분했었죠.”

 

그는 운 좋게도 일찍 병의 징후를 발견했기에,

생활의 안팎에서 이 병을 어르고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최초의 신호는 후각이었다.

 

 

 

 

- 후각을 잃어버린 그날의 일이 기억납니까?

“2006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어요.

장미 옆을 지나는데 향기가 나지 않았어요.

빵 굽는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인 후각적 환각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주치의에게 후각 문제를 언급했지만,

사실 *MRI에서 뭔가 나타날 거라는 예상은 못 했어요.

처음에 저의 뇌 스캔 파일을 혼자 열어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탁구공 크기만 한 종양 덩어리가 보였으니까요.

내 뇌에 암이 생기다니,

완전히 망했군… 솔직히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양성이었고 성가신 수술 정도로 제거할 수 있었어요.

뇌하수체 종양을 제거한 뒤로도 후각은 나빠졌고 몇 년 뒤에는 후각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1920년 경의 가족 사진. 가운데가 깁스 박사의 어머니, 양쪽에 외조부모가 있다. 외조모는 생애 마지막 몇 년간 치매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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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하수체 : 뇌 아래쪽에 위치한 콩알만하게 작은 내분비기관으로, 흔히 '내분비계의 지휘자’라고 불림.

종양 : 정상적인 조절을 벗어난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하여 생긴 덩어리를 말함.

MRI :  자기공명영상_Magnetic Resonance Imaging의 약자로,
           강한 자기장과 전파를 이용해 인체 내부를 자세히 촬영하여 검사를 하는 시스템을 말함.

           [참고] Resonance_공명의 뜻은 어떤 시스템이 특정 주파수에서 외부의 힘에 의해 크게 진동하는 현상을 말함.

파킨슨병 : 뇌의 특정 부위(흑질, substantia nigra)에서 도파민을 만드는 신경세포가 점점 소실되면서

                  발생하는 만성 진행성 신경퇴행성 질환임.

                  [참고] 도파민이 부족했을 때 나타나는 질환 : 손,팔등의 떨림, 근육경직, 운동 느려짐(서동증), 자세불안정.

PET scan : 전자 방출 단층촬영_Positron Emission Tomography의 약자로서,

                  몸속 장기나 조직의 ‘기능·대사 활동’을 영상으로 보는 검사 시스템을 말함,  

                  주로  세포가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하는지(기능)를 체크해서 암세포가 정상 세포보다 당을 많이 소비 하는 

                  활동성을 인지해서 암, 전이, 재발여부를 확인하는데 이 시스템을 이용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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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각 부진이 알츠하이머의 확실한 전조인가요?

“맞습니다.

보통 인지 기능 저하 증상이 시작되기 몇 년 전부터 진행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검사를 받아보기 전까지 후각 손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알츠하이머병뿐만 아니라 *파킨슨병 환자의 약 80%도 후각 저하가 나타나며,

역시 몇 년 전에 증상이 발생합니다.”

 

 

 

- 그일 이후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계도를 파게 된 거죠?

  책에서 그 부분을 읽고 저 또한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내 로이스는 무엇이든 계보를 파헤쳐보는 취미가 있습니다.

2012년, 우리는 침을 묻힌 면봉을 보내 DNA 분석을 맡겼고,

그때 내가 알츠하이머병의 유전적 위험 인자인 APOE-4 대립유전자를

두 개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당시에는 인지 장애 증상이 없었지만 80세가 되면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치매 발병 위험이 거의 100%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부모님 두 분 모두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알츠하이머병은 제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가족력을 확인해 보니,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외숙모, 외삼촌 몇 분도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했습니다.”

 

가족의 이야기와 자료를 훑을수록 더 많은 실마리와 패턴이 읽혔다고 했다.

그의 외할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잠옷을 입고 동네를 헤매고 돌아다녔다.

할아버지는 생애 마지막 몇 년에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그 시절에 우리는 이런 증세를 치매가 아닌 노망이라고 불렀다.

그의 친할머니는 여든한 살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여러 조각과 점을 연결해 나가자, 치매의 계보도가 맹수의 윤곽처럼 불길한 모습을 드러냈다.

 

 

 

- 오랫동안 의사로서 진료실에서 본 치매 환자들은 어땠습니까?

“알츠하이머병 진단에 대한 반응은 다양합니다.

제가 처음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던 1980년대에는 현실 부정이 가장 흔한 반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의사들도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고

그저 환자를 격려하는 게 최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뇌의 변화, 곧 아밀로이드 플라크와 신경섬유 엉킴은

알츠하이머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최대 20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제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약물이 있고,

초기 단계에 복용하면 효과도 매우 큽니다.”

 

 

실험실에서 연구 중인 젊은 날의 깁스 박사.

 

 

 

 

- 환자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나요?

“독립성을 잃을 것에 대만 두려움이 압도적입니다.

대부분 홀로 분투하게 되더라도 진심으로 가족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라더군요.”

 

 

 

- 가족 이야기를 해보지요.

  선생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병세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나요?

“우리 아이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APOE-4 대립유전자를 두 개 갖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모두 적어도 한 개는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의 위험을 이해하고 있고,

발병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게 중요합니다.

더불어 저는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 같은 나쁜 소식보다,

아이들과 더 활동적인 삶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합니다.”

 

 

- 문득 궁금합니다.

  어떤 기억은 빨리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오래 남습니까?

“저의 경우,

한 달 전에 읽은 책 내용은 기억 못 하지만 경력 초기에 만난 환자의 경험,

30년 동안 알츠하이머를 다뤄온 임상 경험과 기억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단어가 혀끝에서 가물거리는 일이 많지만,

로이스와 아이들과 함께한 인생,

유년기의 경험을 글로 쓰려면 문장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지요.

 

대개는 사건을 떠올리는 서술 기억 문제는 알츠하이머 초기에 나타나지만,

자전거나 피아노 치는 법을 수행하는 절차 기억은 대체로 후기까지 잘 기능해요.

 

서술 기억은 측두엽과 대뇌 피질에 있고,

절차 기억은 더 깊은 기저핵과 소뇌에 저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가족도 몰라보는 사람이 복잡한 피아노곡을 연주해서 주변을 놀라게 하죠.”

 

 

천천히 잠식해가는 병, 치매. 그 안과 밖을 당사자와 전문가의 눈으로 들여다본 책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

 

 

 

 

 

- 프루스트의 마들렌 냄새를 맡으며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을 예로 들며,

  나의 마들렌은 음악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동감합니다.

  저 또한 음악을 들을 땐 뇌가 반쯤 열리는 것 같습니다.

“음악은 정말 놀랍습니다.

비틀스의 ‘미셸’은 라디오를 들으며 짝사랑에 한숨짓던 10대 시절의 침실로 데려다줍니다.

머릿속에 항상 노래가 들어있어서 노래와 기억이 함께 달려 나와요.

보통 1960년대 노래입니다.

가수나 노래 제목을 항상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가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왜 음악이 제 뇌 속에 그렇게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다른 연구자들도 이 부분을 연구했는데,

아마도 음악과 관련된 신경망의 중복성 때문인 듯해요.

알츠하이머병을 앓은 프리마돈나가 기억을 잃은 뒤에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듣고 춤 동작을 시연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박사는 더불어 시간의 힘을 견뎌낼 만큼 의미가 있는 기억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시간의 힘을 거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반복과 의미 부여.

 

 

 

대니얼 깁스 박사의 뇌 아밀로이드 PET 스캔. 군데 군데 하얀 부분이 관찰된다.

 

 

 

 

 

- 뇌 영상 소견상으로는 상태가 더 나빠야 정상이지만,

  선생은 책을 쓰고 인터뷰를 진행할 만큼 지적 기능이 오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많은가요?

“통계를 보면 PET 스캔에서 아밀로이드가 보이지만 인지는 정상인 노인들이 20%나 됩니다.

저축해놓은 뇌세포 용량이 커서예요.

인지예비능 덕분이죠.

 

*인지예비능은 뇌가 포위 공격을 당해도

인지 기능을 높게 유지하도록 돕는 뇌의 예비적 신경망입니다.

일종의 예비 발전기 역할을 해서 정신적 삶을 보존해 줍니다.”

 

 

- 인지예비능의 비축 정도를 스스로 알 수 있나요?

“정확한 계측은 불가합니다.

십자말풀이나 독서로 인지예비능이 증가했다는 데이터도 확인할 길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성장기 때 부모님이 북돋워 준 호기심, 창의력, 비판적 사고도 도움이 됐어요.

공학자였던 아버지는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직접 만들어보라고 격려했고,

음악을 사랑했던 어머니는 어린 저에게도 음악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제가 알츠하이머 와중에도 책 읽기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사서 출신인 아내 로이스 덕입니다.

저는 요양 시설에서 지내는 친구 R과도 몇 달에 한 번 만나 점심을 함께하고

각자의 가족, 개, 신경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요.

다방면으로 저의 인지예비능을 채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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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예비능 : 주로 인지과학, 신경과학, 노인학, 정신건강 분야에서 사용.

                      한마디로 설명하면 뇌가 손상이나 질병, 노화 등으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에 맞서

                      스스로 유지하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함.

                      영어로는 보통 Cognitive Reserve라고 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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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 시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십니다.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여덟 번의 임상 시험에 참여했어요.

2017년 9월 말, 임상시험 약물을 투입받았을 때는 큰 부작용도 겪었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단순한 단어조차 읽을 수 없더군요.

문자 메시지도 뒤엉켰고, 수표장 정산도 할 수 없었어요.

빨리 감기로 알츠하이머 후기로 가서 체험해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다행히 고혈압약과 스테로이드를 주입받자 다시 글을 읽을 수 있었지요.

그 후 평소처럼 한 달에 6~8권의 책을 읽었고,

기억력이 1년 전 아니 2년 전보다 더 좋아졌다는 느낌마저 들었어요.

이런 임상 시험으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기여를 합니다.

병을 멈출 방법은 잘 설계된 임상 시험 밖에는 없으니까요.”

 

그(깁스 박사)는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을 자신의 일로 확장했다.

새로운 치료법 연구에 임상참여자로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인지 손상의 징후를 기록하고 증거를 모았다.

‘잊지 말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걸 기억하라’고 메모했다.

병이 깊어질 때 사람들은 실수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실수를 의식했다고 말했다.

 

 

 

딸의 결혼식 장에서. 다행히 쪽지를 보지 않고 축사를 전부 외워서 낭독했다.

 

 

 

- 인지 저하를 늦추기 위해 평소에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하루에 1만 보 걷기를 목표로 하고 걷습니다.

하루 3,000보 정도만 걸어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일례로 저의 인지 평가 점수는 평균적으로 유산소 운동 후에 8퍼센트 높아집니다.

57분 동안 산 정상까지 등반했을 때는 15퍼센트나 높아졌어요.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은 뇌에 정말 좋습니다.

운동은 단기적으로도 효과가 큰데 아마 심박출량(cardiac output)이 늘어나기 때문인 듯 해요.

요즘도 저는 글을 쓰기 전에 빠르게 걷습니다.”

 

 

- 환자가 된 이후 시간의 의미와 감각은 어떻게 달라졌지요?

“시간이 훨씬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인지 쇠퇴 속도는 급격하지 않아서,

종종 미래의 재앙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미래에 대한 생각에 너무 매몰되는 건 좋지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사람들을 도와 의미 있는 시간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허비할 시간이 없어요.”

 

박사는 임상을 통해 부정확한 타임라인을 유리한 쪽으로 돌리는 법을 찾을 때마다 뛸 듯이 기쁘다고 했다.

 

 

- 그럼에도 진단부터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이 10년이라는 사실은 충격입니다.

   당신의 친구이자 뇌과학자인 리사 제노바가 테드 강연에서

   ‘우리의 미래는 치매 환자 혹은 그를 돌보는 간병인’이라고 선언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어요.

   궁극적으로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낙관적인 출구를 찾지요?

“저는 알츠하이머병을 예방 심지어 치료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낙관합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실현되진 않더라도 우리 자식 세대에는 확실히 가능할 거예요.

몇몇 약물은 언젠가 효능이 증명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매일 먹는 음식, 행동특정 생활 방식의 변화

알츠하이머병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나오고 있어요.

 

책에도 썼지만,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최대 50%까지 늦출 수 있는 중요한 생활습관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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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

2 지중해식 식단

3 지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기

4 사회적으로 즐겁게 교류하기

(이건 제게 꽤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모임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5 매일 밤 최소 7시간 반 이상 수면하기 

***********************************************************************************

등이 있습니다.

더불어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 흡연, 당뇨 같은 심혈관 위험 요인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목표는

병이 진행을 최대한 늦춰서 알츠하이머 말기에 이르기 전에

다른 원인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깁스 박사가 친구와 함께 임대해서 여름 항해를 즐기는 바바리아 86 범선 ‘이스케이프 호’.

 

 

 

 

- 선생의 저널리스트 친구 그레그 오브라이언은 여전히 잘 지내나요?

“그럼요.

그레그는 중증 알츠하이머의 경험담을 담은 저서 ‘명왕성에서’를 펴냈죠.

젖은 옷을 입고 약속 장소에 나타날 정도로 상태는 계속 나빠지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글을 쓰며 질환과 잘 싸우고 있습니다.

리사 제노바그레그 오브라이언 모두 제 책에 멋진 추천사를 써줬어요.”

 

세상에는 치매를 앓는 뇌과학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았다.

대니얼 깁스는 정신의학회에 각자의 임상을 공유하는 의사들과의 우정어린 멋진 협업에 고무된다고 했다.

이 책을 바탕으로 제작된 동명의 다큐멘터리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

신경학 관련 영화제인 로체스터 영화제 (https://reelmindfilmfest.com)에 출품되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의 인생에서 알츠하이머라는 복병이 예기치 않은 새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리어 측면에서 인지가 정상이었고 축적된 신경학 지식도 탄탄했지만,

그는 그토록 사랑하는 의사 직업을 예순두 살에 그만두어야 했다.

일흔 살에 이르면 알츠하이머 환자가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여전히 배의 키를 잡고 항해 중인 깁스 박사.

 

 

 

- 은퇴 후 보낸 첫해의 기억을 나눠주시겠어요?

“2013년 그해 여름,

엔진이 고장 난 배 위에서 1시간 반을 보낸 기억이 있어요.

바람도 한 점 없어서 늘어진 돛을 펼친 채 바다 위를 떠다녔지요.

그러다 100미터 거리에서 범고래 무리를 만났어요.

어느 찰나에 갑자기 눈부시게 솟아오르더군요.

 

20년 가까이 항해를 하며 알게 된 게 있습니다.

범고래를 보게 되는 때는 범고래를 찾으려고 애쓸 때가 아니라 거의 기대하지 않을 때라는 것을.

그냥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거죠.

계획대로 엔진이 멀쩡하게 작동됐다면 못 봤을 거예요.

 

은퇴 후 첫해를 입력하면,

바다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목적 없이 표류하던 그날의 일이 떠올라요.

범고래의 선물, 시간의 선물이요.”

 

항해의 즐거움이란 계획한 장소에 도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 자기가 그곳에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는 답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 여전히 뇌가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뇌 자체가 아름답다고 확언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연구하기 흥미로운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요.”

 

 

-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대체로 통제력 상실에 관한 것이죠.

하지만 나는 이 병의 후기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이스와 나는 일종의 협약을 맺었어요.

바로 현재를 살자는 것입니다.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하고 진행을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요.”

 

 

킬리만자로산에 있는 만다러헛까지 하이킹한 깁스 박사와 아내 로이스.

 

 

 

- 여전히 새로운 배움이 있는지요?

“나의 개 잭에게서 소중한 순간을 포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부엌일을 할 때마다 잭이 은근슬쩍 당근이나 치즈, 닭고기 한 조각이라도 떨어질까 기대하며

신경을 집중하는 모습은 경이롭습니다.

그 작은 조각은 내게 2주만 지나도 잘 기억 못하는 책 한 권일 수도 있지요.”

 

 

- 누구에게 가장 감사합니까?

“52년의 결혼 생활과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경도인지장애(MCI) 진단을 받았던 때부터

지난 10년 동안 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사람.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 마지막으로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를 통해 선생이 꼭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알츠하이머병은 느리게 진행되는 질환입니다.

베타 아밀로이드 플라크는 20년 전에 처음 관찰되지요.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제 과학 논문에도 있어요.

생활 습관 개선과 새로운 항아밀로이드 약물을 포함한 모든 개입은 질병 초기에 가장 효과적입니다.

 

고소득 국가의 치매 환자 대부분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병원에 옵니다.

그 점이 가장 안타까워요.

가능하면 40대에 모든 탐색을 시작하세요.

 

뇌는 운동하지 않을 때보다 운동할 때 더 예리해져요.

사라지든 남아있든, 기억은 이 세계에 우리가 어떻게 속해있는지에 대한 감각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을 더 일찍 진단해서 시간을 벌어야 하는 이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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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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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불륜속 사랑에서 불멸의 작품이...

 

 

 

원제 : 희대의 불륜이 사랑을 녹여 불멸의 작품으로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5. 9. 27. 06:36

 
 
 
 
 
 
 
 

 

원래 사랑은 사나운 불길처럼 덮쳐오는 것이어서, 이를 막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10대 소녀의 가슴 속 자그마한 화톳불은 감성을 먹이 삼아 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다섯살의 나이 차이도, 상대가 유부남이란 사실도 상관없었다.

집안의 반대는 외려 기름에 물붙기식이었다.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사회적 비난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으니까.

 

10대 소녀는 그 길로 유부남의 손을 잡고 사랑의 줄행랑으로 달음박질쳤다.

두 사람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닿지 않는 곳으로였다.

두 사람은 사랑을 지지해주는 동료들과 함께했다.

세상의 모든 열정을 두 사람이 삼켜버렸기 때문이었을까.

그해에는 ‘여름’이 없었다.

초 이상저온 현상이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지구에 에어컨이 켜졌나...여름이 왜 이렇게 추워.”

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다의 두 남자’. 19세기 초 스산함이 그려진 작품.

 

 

 

도피 일행은 저택 마당에 모였다.

모닥불에 모여 앉아 스산한 여름에 걸맞은 내기를 했다.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게임이었다.

우승자는 유부남과 불륜에 빠진 소녀, 18살의 메리 고드윈이었다.

 

이야기의 제목은 ‘프랑켄슈타인’.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대(大) 시인 바이런, 영국 작가 존 폴리도리,

유부남 애인이자 작가였던 퍼시 비시 셸리의 이야기도 소녀의 것과 비교하면 밋밋했다.
 
금지된 사랑의 도피가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연 셈이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1831년 판에 수록된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이미지.
 
 
 
 
 
 

자유의 딸, 메리 고드윈

메리 고드윈의 분방함은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가 자유의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었으니까.

엄마 메리 울스턴크래프턴은 여성의 자유와 인권에 누구보다 관심이 있는 철학자였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여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여성이었다.

1792년 그녀가 쓴 ‘여성의 권리 옹호’*페미니즘의 초기 경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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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_Feminism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과 억압을 해소하고,

                                    모든 성별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운동.

                                    핵심은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야 한다”가 아니라, 성별 때문에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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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이 아니야.” 메리 셸리의 어머니 울스턴 크래프트. 그녀는 페미니즘의 초기 혁명가이기도 했다.

 

 

 

 

 

영국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미국인 모험가 길버트 임레이와 사랑했다.

결혼하지 않았음에도 사랑의 결과물로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았다.

세상은 시기하고 모함했지만 그녀의 혁명적 사고방식에서는 문제 되지 않는 일이었다.

 

길버트와의 사랑이 끝나자,

메리는 무정부주의 운동가인 영국인 윌리엄 고드윈과 결혼을 택했다.

 

혁명가와 혁명가의 만남이었고,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고드윈이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배경이었다.

엄마 메리는 딸 메리(동명)를 낳다가 11일만에 산욕열로 죽었지만,

아버지 윌리엄은 혁명가의 사고방식으로 딸을 양육했다.

 

권력에 저항하고, 억압에 반대하는 책을 메리의 친구로 만들어주면서였다.

 

 

 

윌리엄 고드윈의 집은 지식의 샘과 같아서,

지적으로 목마른 지식인들이 이곳을 찾아 갈증을 풀었다.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미국 전 부통령 에런 버를도 그 중 하나였다.

지식인의 대담을 귓동냥으로 듣고 자란 메리 고드윈의 지적 영토는 매일같이 넓어졌다.

 

윌리엄은 딸 메리가 15살 되던 해

그녀를 스코틀랜드의 급진주의자 윌리엄 벡스터의 집으로 보냈다.

더 넓은 세상, 더 진보된 생각을 알고 싶어하는 메리를 위해서였다.

 

스코틀랜드의 스산한 여름과 황량한 비탈을 그녀는 평생의 글거리로 삼았다.

 

 

 

 

“평범하다면, 그건 내 딸이 아닐 테지.” 윌리엄 고드윈 초상화.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히다

영국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 낯선 손님이 와 있었다.

젊은 청년 퍼시 비시 셸리였다.

그는 윌리엄 고드윈의 지적·정치적 추종자였다.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1793년 작품)를 황금률로 여기던 인물이었다.

 

퍼시는 귀족 집안의 자제였지만

집안의 재산을 불우한 이웃에게 기부하겠다고 선언한 피 끓는 청년이기도 했다.

‘정치적 정의’에 감화된 뒤부터였다.

 

집안이 퍼시 셸리에게 금전적 지원을 끊으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퍼시는 혁명가였고,

혁명가라는 사람들은 귀족의 밑동까지 도끼로 끊어낼 위인이었으니까.

먹고사는 걱정은 퍼시와 부인의 관계까지 무너뜨렸고,

그는 존경하는 스승에게로 도망쳤다.

누군가는 철부지 도련님의 도피라고 조소했다.

 

 

 

“난 퍼시라고 해, 결혼했는지는 묻지 말고.” 퍼시 셸리 묘사도.

 

 

 

 

온세상이 다 비웃어도, 한 소녀만큼은 퍼시에게서 ‘광휘’를 봤다.

윌리엄 고드윈의 딸 메리였다.

젊고 생기 넘치는 퍼시는 외모도 수려했던 데다가,

그 정신세계가 메리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혁명가 그대로였다.

 

 

벼락처럼 다가온 이상형과의 만남.

 

두 사람은 혁명과 자유를 논하면서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메리의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 무덤을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서 정사가 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메리의 나이 16세, 유부남 퍼시의 나이 21살이었다.

 

퍼시메리가 사랑을 나누던 울스턴크래프트의 무덤을 묘사한 1815년 그림.

 
 
 

 

사랑의 발각과 도주

 

사랑은 채도가 높아 암막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법이어서,두 사람의 사랑은 금방 들통이 났다.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은 대노했다.

금이야 옥이야 처럼 키운 딸이 유부남과 금지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니.

자신이 믿었던 제자와,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불처럼 화내는 윌리엄에게 퍼시는 자신을 변호한답시고

자신이 유부남인 건 메리와의 사랑에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윌리엄은 말문이 막혔다.

 

 

“메리, 나만 믿고 따라와.” 퍼시 셸리.

 
 
 

퍼시가 지껄인 헛소리가 윌리엄 본인이 쓴 책 ‘정치적 정의’에 담긴 내용이어서였다.

자신이 소싯적 책에 장황하게 풀어낸 ‘결혼제도 비판’이 한 유부남을 감동시키고,

그 유부남이 자신의 어린 딸을 불륜의 세계로 끌어낸 셈이었다.

 

 

퍼시는 더 이상 윌리엄의 집에 머무를 수 없었다.

1814년 6월 그는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또 한번 떠났다.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손을 잡은 한 소녀, 메리 고드윈이었다.

메리의 의붓언니 클레어도 그들과 뜻을 같이했다.

그 여정에서 메리는 퍼시의 아이를 가졌다.

그의 나이 고작 16살이었다.

 

 

 

 

윌리엄 고드윈‘정치적 정의’퍼시 셸리를 그의 집으로 이끌었다.

 
 
 
 

 

퍼시와의 불안한 사랑

 

메리는 퍼시의 아이를 품었지만, 퍼시는 온전히 갖지 못했다.

그는 정치적 혁명만이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혁명가였다.

하체가 누구보다 자유로운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독점하지 않는 사랑을 꿈꿨고, 육체적 쾌락은 만인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질투하고, 울분을 토하고,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메리는 퍼시를 사랑했다.

퍼시가 메리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줘도, 메리는 선을 넘지 않았다.

 

퍼시의 혁명가적 기질에 빠졌지만, 그 자유분방함이 가시가 되어 메리는 상처받았다.

 

 
 
 

“내가 저이를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결혼 전은 메리 고드윈).

 
 
 

불안정한 사랑이 아슬아슬 줄을 타던, 1816년.

 

그해에는 여름이 오지 않았다(year without a summer).

인도네시아에서 폭발한 탐보라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가스가 햇빛을 차단해서였다.

낮은 어두웠고, 밤은 칠흑 같았다.

퍼시와 메리, 클레어는 어둠 속에서 여행을 계획했다.

 

 

클레어가 그토록 사모하던 시인 바이런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였다.

바이런은 몇 달 전 자신을 사모한다는 클레어의 편지를 받고,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 희대의 난봉꾼.

클레어의 뱃속에는 바이런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지만, 바이런은 그녀를 진지한 관계로 여기지 않았다.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 좋은 날씨군.” 스위스 제네바 별장 빌라 다오다티에서 글을 짓는 바이런.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그날은 유령 이야기의 밤이었다.”

스산한 여름밤, 모닥불, 글재간으로 가득한 문인들.

이야기가 잉태되기에 가장 완벽한 환경이었다.

퍼시, 메리, 클레어, 바이런, 폴리도리가 기괴한 이야기를 짓는 내기를 벌였다.

가장 괴상하고, 가장 흉측하며, 가장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에 상을 주자는 것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을 지은 메리가 내기의 승자가 됐다.

창백한 얼굴의 젊은 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실험실에서 누더기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자 힘없이 꿈틀대며 되살아나는 광경이었다.

폴리도리‘더 뱀파이어’ 역시 이날 밤에 생명을 얻은 불멸의 명작이었다.

 

두 작품은 SF의 효시로 평가될 만큼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바이런의 주치의 존 윌리엄 폴리도리도 내기 게임에서 ‘뱀파이어’를 써서 호평받았다.

 
 
 
 

‘프랑켄슈타인’

이성을 통한 진보(계몽주의)가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다

메리의 회의적 고뇌가 짙게 녹아든 작품이었다.

 

괴짜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이를테면 메리가 바라보는 퍼시의 모습이었다.

 

이성을 맹신하다 괴물을 만들어버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자유·이성만을 지고의 가치로 삼으면서 소중한 모든 것에 상처를 주는 퍼시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성은 인간의 물질과 정신세계를 한 층 더 고양해주는 촉매이지만,

감정이 배제된 우상화된 이성은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메리의 생각이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은 외친다.

 

“나의 악행은 그토록 혐오스러운 고독을 내게 강요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오.”

 

어쩌면 메리가 퍼시에게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지.

“진정한 사랑은 구속을 견디지 못한다”면서 난봉을 거듭한 퍼시에게 메리는 찔리고, 상처받았으니까.

 

 

 

‘프랑켄슈타인’ 초고. 이건 어쩌면 메리퍼시 셸리를 향한 비판일지도 모른다.

 
 
 
 
 

메리와 퍼시의 삶은 ‘프랑켄슈타인’처럼 기껍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1816년에는 퍼시의 아내 헤리엇이 자살했다.

두 아이를 남겨둔 채였다.

 

메리는 그해 퍼시와 결혼 후 아이를 연달아 낳았지만,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참척(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남)이라는 메리의 슬픔 앞에서는

이성이니, 계몽주의니 하는 그 모든 사상들이 공허하고 무의미한 허구로 치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1819년 6월 메리는 일기장에 적었다.

“나와 퍼시는 5년을 함께 살았다.

만약 그 5년 동안의 모든 일이 잊힌다면, 나는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메리의 우울증은 더욱 깊어졌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창조물이 괴물이 되어버렸듯,

퍼시의 아내 메리는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상처가 가득한 채로 깊은 우울의 연못에 빠졌다.

 

그에 반해서 퍼시는 숱한 여인들에게, 구애하며, 애걸하며, 쾌락을 쫒고 좇았다.

 

 

 

 

“엄마, 아빠 어디갔어요...?” 말라리아로 사망한 퍼시메리의 자식 윌리엄.

 
 
 
 
 

퍼시의 죽음, 그리고 찾은 평온

1822년 7월, 퍼시는 메리 곁에 있지 않았다.

친구들과 뱃놀이를 즐기러 나가던 차. 폭풍우가 배를 덮쳤다.

며칠 후 바닷가에서 퍼시의 시신이 발견됐다.

메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의 죽음을 온몸으로 맞았다.
 
 

메리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퍼시의 부재는 되레 삶이 다소 평화로웠다.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글을 썼고, 연애하면서도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페미니즘의 원칙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었어서, 그녀는 미혼모나 간통죄로 내몰린 구슬픈 여인들을 도왔다.

 

미국 배우이자 시인이었던 하워드 페인이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그녀의 마음속 바다에는 여전히 자신의 남편이었던 퍼시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천재와 결혼을 한 몸이니, 다른 천재와는 결혼할 수 없어요.”

 

 

 

 

 

메리 셀리의 초상화

 

 

 

 

노년의 메리 셸리는 잔잔했지만 평화로웠다.

아들 퍼시(아버지와 동명)와의 삶은 퍽이나 행복했다.

며느리와의 관계도 매우 좋았다.세 사람은 여행을 다니며, 이야기하며, 아버지 퍼시를 그리며 삶을 이어나갔다.

 

1851년 2월, 아들과 며느리의 손을 잡은 채, 그녀가 53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사인은 뇌종양이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녀의 방에는 죽은 아이들의 머리카락, 퍼시와 함께 쓴 일기장,

퍼시의 명저 ‘아도나이스’가 놓여 있었다.

아들 퍼시는 그녀의 관 속에 유품을 *껴묻거리로 넣어 주었다.

 

너무 사랑해서, 가장 상처받은 것들과 함께 했었던 생애의 흔적들을 마지막 영면의 평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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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묻거리 :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그 종류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장신구나 의관, 무구(武具), 애완 용품 외에도

                  장례 때 사용한 도구 등 다양하다.

                   [유의어]  배장품_陪葬品, 부장물_副葬物, 부장품_副葬品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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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위크스가 만든 메리퍼시셸리 기념 조각상.

 
 

 

요약

메리 고드윈은 10대 때 유부남 퍼시 셸리와 만나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음.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하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탄생.

‘프랑켄슈타인’은 이성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겨있는데, 이는 퍼시에 대한 메리의 생각임.

퍼시는 혁명가적 자질로 숱한 쾌락을 좇았고, 그가 죽음으로써, 메리는 비로소 평온을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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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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