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와 한국전쟁_중공군 개입 1
원제 : 인천서 작두 탄 '전쟁의 신' 맥아더, 북진 헛발질 나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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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군사 경력의 최대 오점인 1950년 겨울 중공군 개입을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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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1·2차 공세
△ 중공군 공세에 밀린 맥아더의 대응 등 두 차례로 나눠 게재함.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이후 무리한 북진과 잘못된 판단으로 전세가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미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 경고와 실제 병력 이동을 과소평가해 방어 준비를 소홀히 했고,
정보 왜곡과 오판이 이어졌습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으며,
맥아더의 독단적 지휘와 한국전쟁 중인 현장 외면으로 위기를 한층 심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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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인천 상륙 성공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는 고대 그리스 영웅처럼 거침없는 운명을 향해 전진했다.”
6·25 전쟁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의 평가다.
맥아더가 한국에서 맞이한 영광-오욕의 전환점을 이 문장만큼 적확하게 표현한 글은 없었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맥아더의 운명도 격렬하고 극적인 속도로 파국을 향하여 치달았다.
목동(양치기)에서 왕이 된 후
신탁의 굴레(부친 살해+모친 결혼)를 벗지 못하고 운명의 절벽으로 떨어진 *오이디푸스처럼,
12개 과업 해결 후 질투에 사로잡힌 아내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헤라클레스 같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대접을 받던 맥아더는
인천 상륙 2개월 만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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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_Οἰδίπους (Oidípous / Oidipous)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캐릭터 중 하나로,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깊은 주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
고대 그리스 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극 작품에서 유명.
오이디푸스는 피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인간의 비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신화를 바탕으로
아래 의미를 갖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디푸스 콤플렉스라고도 함)라는 개념을 주창했음.
어린아이가 무의식적으로 이성 부모에게 애착을 느끼고, 동성 부모에게 경쟁심을 느낀다는 이론.
오이디푸스는 테베 고대 그리스 도시의 왕.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됨.
그의 아버지(라이오스 왕)는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되어
이 운명을 피하려고 부모는 아기를 버리지만, 아이는 살아남아 다른 왕가에서 자라게 되고,
성장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길에서 한 남자를 죽이는데, 그가 바로 친아버지였다.
이후 나라(테베)를 구하고 왕이 되어, 자신을 낳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모른채 어머니와 결혼하는데
진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하며 방랑자처럼 떠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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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_Hēraklēs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영웅 중 하나.
최고신 제우스와 인간 여성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으로
엄청난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로 유명한 영웅이며, ‘12가지 과업’이라는
매우 어려운 임무들을 수행함 (예: 네메아의 사자 퇴치, 히드라 처치 등)
강인함이 상징성이지만 지극히 나약한 인간적인 고뇌도 가진 존재로 묘사됨.
죽은 뒤 신으로 승격되어 올림포스 신이 됨.
즉, 본문에서 오이디푸스와 헤라클레스를 인용 은유적 표현을 한 것은 조금은 격이 잘 맞진 않지만,
맥아더라는 한 인물이, 다면적 성격체의 상징성으로 회자되는바, 한 두가지를 빼면 나머진 부정적
이미지들인데, 그런 성정의 운명론적인 부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극동사령관, 유엔사령관으로써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진 자신의 나르시스즘을 극복하지 못한채 결말을 허무하게 맞는다는 의미임.
헤라클레스는 강한 힘(권력)의 상징성을 은유하고,
오이디푸스는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종말을 상징성으로 은유하려 한 의도인 것 같음.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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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맥아더는 그야말로 ‘전쟁의 신’이었다.
적은 그가 예측한 그대로 움직였고, 전황은 그의 예언과 똑같이 전개됐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1950년 9월 28일(서울 수복)부터 갑자기 맥아더의 신기_神氣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신들린 것 같았던 맥아더의 선택은 다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별일 아닐 것”이라고 예측한 일들은 모두 ‘큰 사건’으로 이어졌고,
그가 “그럴 일 없다”고 했던 것들은 결국 전부 실제 사건으로 일어났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성공이 ‘신기’나 ‘실력’이 아니라 그저 ‘행운’과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던 맥아더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원산 상륙’ 실패부터다.
서해안의 인천에서 대성공을 거둔 맥아더는
동해안에서도 같은 식의 상륙작전을 성공시켜서
북한군을 뒤흔들고 적의 수도 평양을 양면 공략(서울에서 북진+원산에서 서진)하고자 했다.
차분한 육상 진격보다는 화려한 상륙을 통해 여론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맥아더다운 쇼맨십이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2차 상륙작전이 적절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 10군단의 인천 상륙과
미 8군의 낙동강선 돌파 이후
북한군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지리멸렬 북쪽으로 쫓기고 있었다.
해서 유엔군은 충분히 육상을 통해서도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맥아더의 고집 때문에
동부전선 10군단은 굳이 해상 경로를 따라 북진을 시도하게 됐다.
상륙군을 일단 서울에서 부산항으로 빼내 배에 태운 뒤,
다시 원산으로 싣고 가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병력 운송보다 어려웠던 게 무기·장비·보급품 수송이다.
원산까지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그냥 서울에서 원산까지
추가령구조곡(서울~원산 골짜기)을 통해 곧바로 이동하는 게 훨씬 간편했다.
결국 육상 경로를 택한 국군 1군단은 10월 10일 원산에 입성했는데,
이때는 아직 미 10군단이 배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계속 상륙작전을 강행했고,
미 10군단은 원산항 기뢰 제거 작업에 열흘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다
10월 26일에야 국군이 이미 점령한 원산항에 전투도 없이 들어갔다(행정상륙).
당시 원산에 걸어 들어갔던 미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해병대 역사상 가장 긴장감 떨어지는 상륙이었다”고 겸연쩍어 했다.
이렇게 유엔군 주력이 바다 위를 떠다니며 결정적인 시간을 허비하느라
북한군 잔당을 궤멸시키지 못했고,
나중에 있을 중공군 개입에 제대로 대비하지도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서울 환도식(1950년 9월 29일)에서 맥아더가 관례상 어쩔 수 없이 모자를 벗었는데,
그때 비로소 맥아더가 신기하게도 인간적으로 보였다.
모자를 벗으니 너무 늙어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 서울 수복 기념식 현장에 있던 영국 기자 레지널드 톰슨 -
1. 평양 10월 19일 : 압록강을 향한 질주
하지만 원산 상륙은 당시로선 작전 실패라기보단,
이기는 과정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전황은 여전히 유엔군에 유리했고,
맥아더의 군사적 권위에 감히 도전할 만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서부전선에선
월튼 워커의 미8군(미군·국군·영연방군 등 연합)이 평양을 향해 순조롭게 북진 중이었고,
동쪽 에드워드 알몬드의 미 10군단도 원산에 늦게 가긴 했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산의 좌절’은 ‘평양의 성공’으로 완벽하게 가려졌다.
10월 19일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기동력 뛰어난 미군 사단들과의 속도 경쟁에서 승리하며
평양 시내에 최초 입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것은
유엔군이나 미국 입장에선 ‘냉전 이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 수도를 점령’한 쾌거였다.
냉전 시작 이후 서방 국가들은
소련군이 수백만 병력과 수만 대의 전차로 파상 공세를 가해올까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냉전 이후 공산-자유진영 간 첫 대규모 전쟁인 한국전에서
적국 수도를 차지하는 군사적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 승리의 영광 또한 인천 상륙전과 서울 수복전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의 공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맥아더의 끝도 없는 건방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마지못해 칭찬 전문을 보냈다.
“장군의 지휘 아래 이뤄진 한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은
세계 평화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줬습니다”는 찬사를 인사치레성으로 해야만 했다.

1950년 10월 19일 미군 장교들이 평양에서 가장 먼저 평양 진입에 성공한 백선엽(가운데) 국군1사단장을 축하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전쟁은 끝자락이 어렴풋 보였다.
북한의 주요 도시 평양과 원산을 모두 점령했고
궤멸 직전 북한군은 산악지대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몇 차례만 진격을 거듭하면 머지않아 한반도 통일을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월 15일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나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인데 그해는 11월 23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큰소리친 맥아더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 합동참모본부에선 속전속결보다 안전한 진격이 필요하다는 신중론도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동서 간격이 좁은 평양-원산선을 안전하게 확보하면서,
북한군 재편성이나 중국 개입 가능성을 지켜보자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워싱턴의 신중론을 일축하고 공세를 서둘렀다.
원래 전쟁의 최종 목표와 진행 속도는
최고사령관인 대통령과 대통령 위임을 받은 합참이 결정할 문제였음에도,
당시 맥아더는 전쟁의 본질에 해당하는 이런 내용까지 도맡아 결정하고 있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논문에서
“워싱턴(NSC와 합참)이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한 채 결정을 유보하는 동안,
합참 승인을 받아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 했던 맥아더가
역으로 전략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특정 지역만을 담당해야 할 일개 *전구사령관(theater commander)이
나라 전체 운명이 걸린 전쟁의 성격 규정에까지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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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사령관_Theater Commander : 군사 용어로, 특정 전구_戰區,(Theater of operations)
즉 하나의 넓은 작전 지역에서 모든 군사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최고 책임자를 말함.
전구_ 戰區 _Theater : 전쟁이나 군사작전이 수행되는 광범위한 지역(구역) (예: 한반도, 중동 지역 등).
전구사령관 : 해당 지역에 배치된 육·해·공군 등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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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1기병사단 장병들이 1950년 10월 19일 태극기를 꽂고 평양 시내로 입성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
“평양을 점령한 미 1기병사단과 한국군 1사단은
곧바로 평양을 벗어나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10월 23일 평양에 있던 미군 부대는
각종 문서를 수집하는 200명 규모의 부대(인디언헤드 TF)뿐이었다.”
- 앨런 밀레 ‘The War for Korea 1950-1951’ 중에서 -
결국 맥아더는 평양 점령 후 5일 만인 10월 24일
워커 8군(서부전선)과 알몬드 10군단(동부전선)에
“최대한의 수단을 동원해 가장 빠른 속도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압록강을 향한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평양 북쪽에서 유엔군은 어떤 적을 맞이할 것인가.
지리멸렬하는 북한군? 아니면 혹시…
당시에도 미국 정부가 중공군 참전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이 한반도에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경고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국 정부로 부터 계속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는 미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 직접 외교 채널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제3국을 통해 메시지가 도착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공략하고 있던 9월 25일,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녜룽전(섭영진)은 주중 인도대사 K. M. 파니카르를 만나
“미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했다.
며칠 후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최고위 정보원으로부터 두 번째 경고가 나왔다.
중국 2인자인 총리 겸 외교장관 저우언라이(주은래)가 10월 2일 파니카르를 소환해
“한국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몰라도 미국이 선을 넘으면 분명히 중국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경고를 전달했다.
영연방인 인도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면
런던을 거쳐 워싱턴에 진의가 전달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 내각수상 김일성(왼쪽)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가 1958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11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 때로 추정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경고가 워싱턴에 도착하긴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통일(1949년) 이후 내부적 문제가 많은 중국 공산당이 미국과 전쟁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며
저우언라이의 경고를 ‘*블러핑’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했다.
영국 해외정보국(MI6)으로도 비슷한 첩보가 들어갔다.
중국공산당 내부 인사로부터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한국에 4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정보가 확인됐지만,
미국 정부는 이 첩보의 신빙성을 낮게 봤다.
MI6의 ‘40만 명 투입’ 정보는 지금 보면 매우 정확한 내용이었지만,
당시는 터무니없는 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미국 정부는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된 10월 24일까지도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도 손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자체 정보 분석을 통해 중공군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1950년 여름 내내 중국 남부와 중부 지역에 있던 인민해방군이
계속 북부 지방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단순히 “국공내전 때 남하했던 부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안일한 판단을 내렸다.
1950년 9월 맥아더 사령부는
만주에 있던 중공군 병력이 4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했지만,
중국 베이징 정부 입장에선 이 대병력을 압록강 너머 한반도로 보내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10월 24일 워커의 8군은 북한 패잔병만 소탕하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거침없이 북진을 시작(추수감사절 공세)했다.
그러나 한반도 북부 적유령 산맥과 청천강 사이 산악지대엔
이미 20만 명 이상의 중공군이 몸을 숨긴 채, 똬리를 틀고 유엔군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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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핑_bluffing :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된 신호나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함.
원래는 카드 게임인 포커에서 많이 쓰이던 용어인데 지금은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됨.
실제보다 더 강해 보이거나 약해 보이게 행동해서 상대의 판단을 흔들거나 유리한 결과를 얻는 것.
허세, 페이크, 속임수 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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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와 맥아더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재앙이 터졌다.
거대한 중공군 병력이 눈 덮인 산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중공군은 마치 유령 군대(phantom force)와도 같았다.”
- 한국전쟁 종군 전사가 로이 애플먼의 ‘Disaster in Korea’ 중에서 -
2. 운산·온정 10월 25일 : 이상한 군대의 출현
추수감사절 공세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첫날인 10월 24일 8군 좌익인 미1군단(국군1사단+미24사단+영연방27여단)은
압록강 하류 방면으로 거침없는 진격을 거듭했다.
그러나 청천강(살수)을 넘어서면서부터 뭔가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국군1사단을 지휘하던 백선엽은
“청천강을 넘자 왠지 불안한 적막감이 들었다”면서
“(청천강 이남에선) 패잔병과 피란민으로 북적이던 도로가 텅 비어 있고,
기온이 뚝 떨어져 하복을 입은 장병들이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가장 앞서 달려가던 백선엽 부대가 역시나 가장 먼저 적과 교전을 치렀다.
수풍댐을 목표로 북서진하던 국군1사단은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정체 불명의 대군’(백선엽의 표현)을 만났다.
산악지대에 포진하던 적의 매복에 걸려든 것인데, 당시엔 이게 중공군인지도 몰랐다.
교전 과정에서 국군 15연대가 붙잡은 ‘이상한 포로’를 심문하고서야,
유엔군을 막아선 적병은 북한군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뒤늦게 눈치챘다.
일본군 복무 시절 중국 군대와 접촉 경험이 많았던 백선엽은 포로를 직접 심문한 뒤
단박에 중공군임을 간파하고
직속상관인 미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에게 중공군 참전 사실을 보고했다.
밀번도 이를 8군사령관 워커와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지만,
맥아더는 별일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들은 객관적 사실을 외면하고
소수의 중공군 병력이 ‘지원병’ 형식으로 한반도에 들어왔을 뿐이라고 결론 냈다.
압록강 중류 초산 방면으로 정북진하던 8군 우익 국군2군단(국군 6·7·8사단)도
이 이상한 군대와 마주쳤다.
국군 1사단이 중공군과 조우한 10월 25일,
김종오의 국군 6사단은 운산 동쪽 온정에서 중공군과 대규모 교전을 치렀다.
백두대간 건너 미10군단 관할인 동부전선에선
10월 29일 중공군 포로가 16명이나 무더기로 잡히기도 했다.
이처럼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맥아더 사령부는 현실을 외면하고 ‘중공군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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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사실을 받아들이고
8군과 10군단의 방어를 평산-원산선에서 단단히 한 뒤 신중한 진격을 했더라면,
유엔군은 중공군 1차 공세(10월 말~11월 초)와 2차 공세(11월 말~12월 말)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북한에서 반격 기회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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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1사단이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붙잡은 중공군 124사단 소속 포로들의 모습. 미 해병대
“우린 10월 17일부터 한국군을 덮치기 위해 산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1950년 10월 25일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증언 -
당시
미군 지휘부가 꿩처럼 머리를 처박고 “우린 안전하다”고만 외쳤던 이유는
‘맥아더가 바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도쿄 시절(1945~1951년) 맥아더는
참모진을 모조리 자신의 추종자들로만 채우고
그들이 형성한 ‘인의 장막’ 안에서 달콤한 보고와 아첨만 들으며 살았다.
맥아더의 성향을 가장 잘 알았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은
수집된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고하기보다는,
맥아더가 좋아할 만한 내용만 취사선택해 첩보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웠기 때문에,
정보참모들 또한 맥아더 판단에 따라 “안 들어올 것”이라는 보고서만 계속 썼던 것이다.
맥아더가 내린 결론에 짜 맞추기 위해
윌로비의 정보부는 이상한 논리로 중공군 개입 불가 이유를 설명했다.
윌로비는 “중공군이 개입하려면 전세가 결판나기 전에 먼저 했어야 했다”며
“이미 북한군이 소멸하고 있는 지금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고 분석했다.
제대로 된 정보장교라면
적의 입장에서 적의 논리에 따라 적의 미래 행동을 유연하게 예측해야 했음에도,
윌로비는 자국의 논리와 상관의 가치관에 따라 적의 의도를 오판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당시 도쿄사령부 상황을 잘 알던
10군단 작전참모 잭 칠스 대령(지평리 전투 폴 프리먼 후임 23연대장)은
“맥아더 장군이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윌로비 또한 맥아더가 ‘원하는’ 정보만 생산했다”며
“윌로비는 당시에 분명 감옥에 갔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공군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이미 유엔군과 어떻게 싸울지 다 생각해 놓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군과 미군의 △숙련도 △기동력 △무장 △장교 수준 등
종합적 전력 차이를 이미 완전히 분석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한 고리’인 국군을 향해 초반 공격을 집중해 국군 쪽 전선을 무너뜨린 다음,
그 무너진 틈으로 병력을 집중 투입해 미군 퇴로까지 단숨에 끊고
유엔군 군단 전체(나중엔 8군 전체)를 포위 섬멸하겠다는 작전계획의 구상이었다.
국군 위주 공략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것이
바로 10월 25일부터 11월 7일까지 이어진 중공군 1차 공세다.
중공군의 첫 공격을 받은 아군 부대가
바로 국군 1사단(운산)과 국군 6사단(온정)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비극은 국군을 구하러 들어온 미군 부대로도 이어졌다.
중공군의 급습을 받고 멈춰 선 국군 1사단을 구하러 온 미1기병사단은
도리어 운산에서 1개 대대 전체(8기병연대 3대대)를 잃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적에게 포위당한 대대 병력을 도저히 구할 길이 없어
군단장이 사단장에게 ‘구출 포기 명령’(11월 3일)을 내렸을 정도로,
미군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적인 패배였다.
적중에 고립된 3대대 장병들은 개별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가 대대 병력 800여 명 중 600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를 따라 뉴기니, 레이테, 루손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미육군 정예 1기병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청천강 이남으로 물러나 유엔군 전력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하고 말았다.

미 1기병사단 군종장교 에밀 카폰 대위가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해 후송하고 있다. 카폰 대위는 1950년 11월 초 중공군 1차 공세 때 북한 지역에서 고립돼 포로로 붙잡혔다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13년 카폰 대위에게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을 사후 추서했다. 미 육군
“적이 진격하면 우린 후퇴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우린 교란한다(敵駐我攪).
적이 피곤하면 우린 공격한다(敵疲我打).
적이 후퇴하면 우린 추격한다(敵退我追).”
- 마오쩌둥이 강조한 유격전법인 ‘16자 전법’ -
3. 적유령산맥 11월 7일 : 적이 사라졌다
이 정도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면,
잠시 고삐를 놓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처음부터 찬찬히 돌이켜보는 게 사리에 맞다.
다행히도 워커는 그렇게 했다.
워커는 8군 전병력을 다시 청천강선으로 물리고 추가 보급과 병력 충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1기병사단 패배 이후인 11월 4일 워싱턴에 보낸 서신에서
“중공군은 보급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개입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여전히 현실을 외면했다.
그사이
중공군은 청천강의 유엔군 쪽으로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청천강 이북 쪽에서도 중공군의 공세 강도가 점점 약해졌다.
그러다 11월 7일에 이르러서는 중공군이 전선에서 싹 모습을 감추는 상황이 벌어졌다.
왜, 어디로 사라진걸까?
적이 갑자기 실종된 이유를 정확히 분석한 뒤 행동에 나서야 했지만,
맥아더는 이번에도 객관적 정보를 따르지 않고 자기 편의에 따라 중공군 실종 사건을 해석했다.
중국이 북한을 구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나선 게 아니라
압록강 이남에 완충지대를 만들 목적으로 제한적으로만 개입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압록강이 얼어붙기 전(당시 CIA 예상으로 11월 24일~12월 10일 결빙)
공세를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배 원인도 찾지 못한 채,
적의 정확한 규모도 모르는 상태로,
유엔군은 오로지 맥아더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 또다시 위험한 공세에 나서야 했다.
중공군에게 한번 호되게 당한 워커는 이번엔 신중했다.
2차대전 유럽 전선 조지 패튼의 휘하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단장으로 불리던 ‘불독’ 워커였지만,
이번 공격은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1차 공세(추수감사절 공세)보다 병력을 보강하고
좌익(미1군단)과 우익(국군2군단)외에 중앙에도 1개 군단(미9군단)을 추가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보급을 위해 공격 개시일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11월 24일이 공세 재개일로 결정됐다.
여전히 맥아더와 워커는 중공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11월 17일 주한미대사 존 무초와의 만남에서 중공군 병력을 3만 명 수준으로 예상했고,
8군 정보참모는 11월 21일 중공군 규모를 6만 명으로 추정했다.
2차 공세 시작일인 11월 24일 윌로비는 “최소 4만에서 최대 7만1,000명 수준”이라고 추산했다.
그러나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실제 중공군 병력은 3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23일 추수감사절 존 쿨터 미군 9군단장이 군우리에서 병사들에게 추수감사절 만찬을 배식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총공세 전날인 11월 23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병사들은 이번 공격만 성공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날 밤 8군 장병들은
후방에서 공중 수송된 훈제 칠면조에 크랜베리 소스를 곁들여 먹었고
△칵테일 새우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올리브
△파인애플
△견과류
△과일 케이크
△과일 칵테일로 이뤄진(한 호주 병사의 기록에 남은 메뉴) 성대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8군 전체에 희망이 가득한 날이었지만
‘불독’ 워커는 남들이 맡지 못한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워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이었지만,
당시 8군 군수참모(G-4) 앨버트 스테빈스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워커가 맥아더에 의해 강요된 이 총공세를 매우 주저했다고 한다.
그는(워커) 마지못해 총공격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좌측 공략을 맡은 1군단장 밀번에게는
“중공군이 출현하면 곧바로 병력을 뒤로 물리라”는 당부를 남겼다.
또 부대의 진격 한계선을 미리 설정해 두고
이 한계선을 넘어서 북진할 경우에는 자기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워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 유엔군에 진짜 지옥이 찾아왔다.

1950년 11월 미 8군 소속 병사들이 청천강 방어선에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유엔군의 거대한 포위 압박이 결정적인 결실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 유엔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되찾고 통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엔군은 즉각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 1950년 11월 24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코뮈니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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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뮈니케_communiqué :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성명서나 발표문을 뜻하는 말.
어원은 프랑스어 communiqué로, “알리다, 전달하다”라는 의미에서 온말로서
정부, 기업, 단체 등이 어떤 결정이나 입장을 공식적으로 외부에 알릴 때 사용하는 문서.
예를 들면 정상회담 후 공동 발표문, 기업의 중요한 공지, 국제기구의 공식 입장 발표.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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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천강 11월 24일 : 생지옥의 시작
1950년 11월 24일 10시 마지막 공세가 시작됐다.
지상군 총병력 24만 명으로 구성된 워커 8군은
세 갈래(좌: 미1군단, 중: 미9군단, 우: 한국군2군단)로 나눠 압록강을 향해 달렸다.
그날 아침은 추웠지만,
낮에는 영상 14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날이 풀렸다고 한다.
전 세계 언론의 눈이 공세 출발점 청천강으로 쏠린 순간을 맥아더가 놓칠 리 없었다.
맥아더는 이날 도쿄에서 여러 명의 기자를 대동하고 날아와서
신안주에 있던 8군 전방지휘소를 방문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이번 공격이 성공한다면,
유엔군 장병들을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집으로 돌려보낼(Home by Christmas)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이 두 번째 총공격에 ‘크리스마스 공세’라는 별칭을 붙였다.
상황은 한 달 전 ‘추수감사절 공세’와 똑같이 돌아갔다.
공격 첫날 왼쪽의 밀번 1군단,
가운데 쿨터 9군단이 압록강 방면으로 순조로운 진격을 거듭했다.
몇 시간 만에 최대 24㎞까지 북진한 부대도 있었다.
중공군은 진짜로 한반도 땅에서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 달 전처럼 이번에도 8군 오른쪽을 담당하던 한국군 쪽에서 일이 터졌다.
산악지대로 북상 중이던 국군2군단 소속 7·8사단이 공세 이틀째인 11월 25일
평안남도 덕천 근처 금성호 일대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적은 정확히 7사단(8연대)과 8사단(10연대) 경계 지점에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부으며
국군 병력을 몇 시간 만에 절반으로 찢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미 11월 26일 아침에는
국군2군단 전체가 혼란에 빠질 정도로 전황이 빠르게 악화됐다.
이번에도 한국군을 먼저 공격하고
그 틈 사이로 들어와 미군을 포위하는 중공군 전술이 성공을 거뒀다.
전선 오른쪽 한국군 군단이 이미 전투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맥아더와 워커는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패배 소식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지만,
워커는 이를 8군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한국군 작전 지역 내 국소적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묘향산 북쪽 희천으로 접근하던 미 2사단이 공격을 받은 구장동 전투(11월 25~28일),
튀르키예 여단이 중공군과 첫 번째로 맞붙은 와원 전투(11월 27~30일)를 치르며
비로소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공세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 병력을 4만~7만 명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실제 워커 8군 쪽 서부전선에만 18개 사단 23만 명을 배치했고,
동부전선 미 10군단 쪽에 배치된 15만 명(12개 사단)을 합치면
총 38만 대군을 운용하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가
자기들 편한 쪽으로만 첩보를 왜곡 해석하다가
결국 ‘범죄 수준의 예측 실패’를 저지르고 만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장면이다.
워커가 아무리 날고 기는 명장이라 하더라도
예상보다 최대 10배나 많은 적병을 돌발적으로 만났으니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1951년 미공군 B-29 폭격기가 북한 지역을 전략 폭격하고 있다. 미 공군
“20세기 미군의 최대 실수는
맥아더가 군대를 압록강까지 몰아붙인 결정적 이유였다.
중공군은 높은 언덕을 점령해 미군이 후퇴할 수 있는 길을 모두 봉쇄하고,
미군이 올라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결국
워커는 청천강을 포기하고 병력을 물려야 했다.
8군 전체에는 평양-원산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로부터
적의 공세를 버티며 뒤로 물러나는 철수 작전은 공격보다 훨씬 난도가 높고,
때에 따라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당시 미 8군의 비극도 철수 작전 도중에 발생하고 말았다.
중공군은 8군의 진격과 후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퇴로에 미리 병력을 매복해 두고 있었다.
퇴각 도중 중공군 포위망에 제대로 걸린 부대는 8군의 가운데를 떠받치던
미2사단(현재 주한미군 주력)이었다.
당시
2사단은 군우리(개천)에 포진 중이었는데,
군우리에서 평양 방면으로 가려면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첫째는 청천강을 따라 신안주까지 서진했다가
신안주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어 숙천으로 남하하는 서쪽길이었다.
이 길은 멀리 돌아야 했지만 평야지대여서 이동이 쉬웠고
신안주-평양 간 대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군우리에서 곧장 순천으로 남하해 평양으로 직행하는 동쪽길이었지만,
도로가 좁고 산악지대여서 적의 기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당시 2사단장 로런스 카이저 소장은 동쪽길을 선택했다.
상부에서는 서쪽길을 이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서쪽길은 1군단 병력이 이용하느라 교통 정체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직선로를 택한 것이다.
동쪽길 일부가 중공군 병력에 선점됐다는 전초부대가 보고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사단 병력으로 뚫고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카이저의 치명적 착각이었다.
동쪽길을 감싼 양쪽 산악지대에는 중공군 1개 사단 병력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유엔군 병력이 남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이어진 군우리 철수전에서
미 2사단은 계곡 양쪽 중공군에게 집요한 공격을 당했다.
당시 미군 보병사단의 정원은 1만8,000명이었으나
2사단은 이 전투 후 병력이 1만 명까지 급감했다.
이 사단에서만 5,000명 가까운 사상자(4,940명)가 발생했고,
사단 전투력은 1개 연대전투단(1개 보병연대+포병·공병 등 소규모 부대) 수준으로 추락했다.
당시 미 언론은 2사단의 참패를
‘인디언 태형’(북아메리카 원주민이 두 줄로 서서 생포된 적을 가격했던 형벌)이라고 묘사했는데,
‘인디언 헤드’라는 별명을 가졌던 2사단이
오히려 적에게 인디언 형벌을 당하는 기막힌 치욕을 맛본 것이다.

미8군 병력이 좁은 도로를 이용해 평양 방면으로 철수 중인 장면. 1950년 11월 말 경으로 추정된다. 피란민들은 도로를 이용하지 못해 길 옆 논을 따라 대피 중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후퇴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사단장(카이저 소장)도 함께 걸었다.
사단장은 ‘누가 여기 책임자인가, 자넨 누군가’라며 질문을 거듭했지만,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체처럼 보이는 물체를 사단장이 발로 걷어차자,
그 시체가 갑자기 ‘이 개자식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사단장은 ‘미안하네, 친구’라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 역사가 클레이 블레어가 묘사한 미2사단의 군우리 철수 혼란상 -
투스타(소장 : 별두개)가 일개 병사에게 상스러운 욕을 먹고 있는 사이,
백두대간 동쪽에서도 비극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원산에 상륙한 뒤 장진호까지 북상한 미해병1사단은
11월 27일 최대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포위돼 기습을 당했다.
미군은 자칫 2개 사단이 동시에 몰살당할 수 있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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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글(이 포스팅 글 후미에 아래와 같은 제목으로 '부록'을 담)
“상관 닦달보단 부하 목숨이 먼저”… 해병 사단장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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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전쟁을 쉽게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자칫하다간 패장으로 역사에 남게 생겼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서부전선 8군사령관 워커와 동부전선 10군단장 알몬드를 동시에 호출했다.
이때가 11월 28일이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맥아더 자신이 한국으로 가서 작전회의를 소집한 게 아니라,
한창 바쁜 두 야전사령관을 굳이 바다 건너 도쿄 사령부까지 호출했다.
시시각각 전선이 붕괴하던 위급한 순간,
워커와 알몬드는 맥아더를 만나러 왕복 8시간 비행을 하며 장시간 자리를 비워야 했다.
공세가 시작될때는 특파원들 까지 무더기 끌고서(자기과시 대외 선전용으로)
그렇게나 자주 한반도를 찾아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던 맥아더였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 순간엔 필요한 현장 방문을 외면하고 편한 도쿄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 ‘현장 지휘 때문에 바쁘다’며
군통수권자(트루먼)를 지구 반 바퀴 돌아 남태평양 외딴섬까지 불렀던(10월 15일 웨이크섬 회담) 맥아더가
자기 부하를 소집한 긴급하고 중요한 회의에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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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가장 나쁜 특성 중 하나인 ‘유아독존’과 ‘내로남불’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장 적나라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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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독존 _唯我獨尊 : 세상에서 자기만 잘났다고 뽐내는 태도, 불교에서 온 말.
[불교]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자신이 이 세상의 최고가 될 것을 예견했다고 전해지는 유래가 있음.
원어_原語 : 천상천하 유아독존_天上天下唯我獨尊
내로남불 _내Romance 남不倫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비속어적 표현을 축약해서 국한영 언어로 조합된 말.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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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공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⑦’
-심호섭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첫 본격적인 대결: 중공군 2차공세와 미군의
‘가장 긴 퇴각’에 대한 작전적 차원의 분석과 평가를 중심으로’
-Bill Mossman ‘Ebb and Flow’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Roy Appleman ‘Disaster in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 맥아더의 행적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 회고록
-백선엽 ‘군과 나’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
-H. 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이영창 anti092@hankookilbo.com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33119340004827
맥아더와 한국전쟁_중공군 개입 2
원제 : 리지웨이 등판 후 맥아더 ‘계륵’ 전락… 노병은 그렇게 서서히 사라졌다

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유엔군사령관과 매슈 리지웨이(왼쪽) 미8군사령관이 1951년 4월 초 강원 양양 지역을 순시하고 있다. 중간에 보이는 인물은 맥아더 사령부 참모장인 도일 히키 소장이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우린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We face an entirely new war).
본 사령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지금 상황은 본 사령부의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다.”
1950년 11월 28일 새벽.
미국 펜타곤에서 밤을 새우던 당직 대령 존 비시라인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서 날아온 긴급 전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불과 4일 전 크리스마스 공세(Home by Christmas Offensive)를 시작하며
“금방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맥아더가
갑자기 “전쟁을 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직 장교가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사태였다.
그래서 대령은
육군 작전·행정 참모부장(참모차장 바로 아래)인 매슈 리지웨이 중장을 긴급 호출했다.
이때가 오전 4시 15분이다.
맥아더 전문 내용을 들은 리지웨이 역시 육군 선에서 대응할 문제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이건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해야 할 사안이었다.
리지웨이는 곧바로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호출했고,
콜린스가 다시 오마 브래들리 합동참모의장을 통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트루먼은 그날 즉시
워싱턴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를 모두 불러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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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트루먼,
부통령 앨번 바클리,
국무장관 딘 애치슨,
국방장관 조지 마셜, 합참 구성원(의장+3군참모총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월터 베델 스미스,
대통령 특별보좌관 애브럴 해리먼이 모였다.
재무장관 존 스나이더까지 소환된 긴급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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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왜 갑자기 맥아더가 이런 불길한 보고를 보낸 거지?
NSC는 충격과 혼란에 사로잡혔다.
맥아더는 한 달 반 전(10월 15일)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지상 최대의 살육전을 안겨줄 것”이라고 자신했고,
4일 전엔 중공군 숫자가 많아봐야 7만 명일 거라며
“크리스마스 전에 병사들을 집에 돌려보낼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워커 휘하 병력이 24만 명인데,
어떻게 7만 명 중공군을 상대하며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까지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바로 나흘 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 끝내겠다는 그 말,
진짜 맥아더가 한 말이 맞습니까? 그
게 맞다면 그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았던 건가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던 겁니까?”
- 11월 28일 NCS에서 부통령 바클리가 던진 질문 -

워커와 맥아더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5. 도쿄 11월 28일 : 미몽 탈출
애석하게도 워싱턴에선 부통령의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국방장관이나 합참이 가장 당황했던 대목은
맥아더가 돌연
“전구사령관(맥아더)의 능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전 세계적 상황”으로 이 전쟁을 규정했다는 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겠다고 자신했던 맥아더는
갑자기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깡그리 부정하고 워싱턴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었다.
이제 트루먼, 마셜, 합참이 이 전쟁을 직접 챙겨야만 했다.
펜타곤이
‘한반도 철수 방안’까지 고려(당시 리지웨이가 육군참모차장과 논의)할 정도로
워싱턴 전체가 충격에 휩싸인 그때,
맥아더는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과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도쿄사령부로 불러
대책을 추궁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책임을 대통령에게 떠넘길 정도로 혼이 나간 반면,
두 야전사령관 워커와 알몬드는 맥아더만큼 충격을 받진 않았다.
서부전선 워커는 후퇴하는 병력을 추슬러 평양 사수를 할 수 있겠다고 답했고,
항상 지략보다 용기가 앞섰던 동부전선 알몬드는
그 상황에서도 북쪽과 서쪽으로 더 진격할 수 있다고 배포 있게 말했다.
바쁜 야전사령관들을 급하게 불러 놓고도,
맥아더는 얘기를 듣기만 했을 뿐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워커에겐 “가능하면 평양을 사수하되 상황에 따라 포기하게”라며 하나 마나 한 지시를 내렸고,
공격하겠다는 알몬드에겐 “함흥-흥남 라인을 지키고 있게”라고 충고하는 정도에 그쳤다.
9년 전(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에도 그랬던 것처럼,
평화 시엔 큰소리를 치다가
막상 위기에 처하면 결정을 회피한 채 움츠리는 맥아더의 버릇이 이번에도 여전히 반복됐다.
“그때 거기서 맥아더를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 해리 트루먼이 1950년 11월 말을 돌이키며 남긴 회고 -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싱턴에선 벌집 쑤신 듯 북새통이 벌어지고,
두 부하 사령관(워커·알몬드)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사이,
맥아더는 난리가 난 한국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도쿄에 앉아 ‘면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맥아더)는 주요 언론과의 연쇄 인터뷰를 통해
"트루먼 행정부가 유럽에만 신경을 쓰고 아시아는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터진 것"이라며
워싱턴을 겨냥했다.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유엔이나 다른 곳에서 중공군 공격에 대한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면서
정보 실패 책임을 본국 정부에 떠넘겼다.
그리고
“국경 지대에 대한 공중 정찰도 허용되지 않았다”면서
“군사 전쟁 역사상 이렇게 많은 핸디캡을 안고 싸운 경우는 없었다”고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변명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미국 역사상 1950년 7~11월의 맥아더처럼
지역사령관이 본국 정부 의견을 외면하고 마음대로 전략 방향까지 결정한 예는 없었고,
그렇게나 자주 대통령과 합참의 지시를 무시하고도
자리를 보존했던 군사 지휘관은 맥아더가 유일했다.
즉, ‘미군 역사상 이렇게 폭넓은 재량권을 쥐고 싸운 장군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사실에 부합한다라는 의미이다.
맥아더가 하도 *적반하장격으로 나오니
군 후배들 사이에서도 맥아더의 오만함을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12월 초 리지웨이는 합참이 맥아더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호이트 반덴버그(웨스트포인트 후배) 공군참모총장에게
“합참은 명령을 어기는 어떤 사령관이라도 해임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그때부터 5개월을 더 맥아더를 지켜보다가
1951년 4월 중순에야 해임 명령을 내렸다,
그 이유에 대해 트루먼은
“전투에 졌다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의 체면을 무시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의 체면을 지켜 줘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트루먼은 “내 부하는 내가 지켜야 했다”고도 말했다.
개인적으론 매우 성마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트루먼이었지만,
맥아더의 즉각적 해임이 국가에 가져올 충격파를 감안해
개인적 모욕을 잠시 감내하는 *선공후사 대범함을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가
당시 한반도 상황을 얼마나 오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가 하나 있다.
맥아더는 1950년 12월까지도
한반도에 파병된 중공군 사령관을 린뱌오(林彪·임표)로 알고 있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중공군 제1의 명장이긴 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해 실제론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였는데,
맥아더는 적 총사령관이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정보 수집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까지도 여전히 중공군 총병력을 20만 명(실제 30만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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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 _賊反荷杖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도리어 나무람을 이르는 말.
선공후사 _先公後私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일은 나중에 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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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후 평양 동쪽을 지나는 길이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밤하늘을 밝혔고 수많은 피란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군 보급소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워커 사령관이 보급 물자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불더미로 들어가 옷 한 개라도 건지려 했고,
미군이 위협사격을 하며 쫓아내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 당시 국군1사단장 백선엽이 목격한 평양 철수 -

1950년 12월 3일 북한의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을 맨발로 건너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6. 평양 12월 3일 : 한_恨 많은 대동강
“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12월 3일은 워커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었다.
한 젊은 장교가 평양의 8군사령관 지휘차량으로 다가가 사령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워커가 서른여섯에 낳은 늦둥이(당시 기준) 외아들 샘 워커(25) 대위였다.
샘은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해
당시 24사단 중대장으로 대동강 철교 경비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아버지 생일 축하를 위에 잠시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워커가 교통사고로 순직하기 불과 20일 전이다.
이때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건네는 마지막 생일 축하가 될 거라곤 당시로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워커는 사실 생일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날 워커는
“4일 오전 8시를 기해 모든 유엔군 병력은 평양에서 철수하라”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와의 도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11월 29일 오후,
워커는 청천강 쪽 전선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졌던 중공군은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 중이었고,
중공군 출몰 지점에선 아군의 패퇴 소식만 전해졌다.
지금 속도대로 계속 밀린다면
평양에 방어선을 친다 한들 측면이 뚫려서 곧바로 포위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결국
“평양을 사수하겠다”는 말을 맥아더에게 남기고 왔던 워커는 생각을 바꿔 평양 포기를 결심했다.
맥아더에게 평양 철수 승인을 요청하는 보고를 보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평양 철수는 워커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1950년 12월 4일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의 부서진 다리를 넘어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맥스 데스포어는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유엔군 패퇴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어,
12월 3일부터 민간인의 피란 행렬이 시작됐다.
당시 미군은
평양과 그 주변에서 남하하려던 피란민을 30만 명 정도로 추정했는데,
대동강을 지나는 다리들이 속속 끊어져 일부 피란민들은 물살을 헤치고 직접 강을 건너거나
부서진 철교 위를 위험하게 걸어 남쪽으로 대피했다.
당시 평양에 있었던 백선엽은
“대동강에 가설된 *부교까지 폭파돼
피란민들이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다 차디찬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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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_浮橋 : 다리를 받치는 기둥이 없이 배나 뗏목 따위를 여러 개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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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는
땅을 조금씩 내주며 순차적으로 후퇴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속한 퇴각을 결정했다.
청천강에서 물러난 뒤
평안남도 남부지방이나 황해도에서 방어선을 치지 않고,
곧바로 서울 북방 임진강까지 250㎞를 한 번에 물러난 것이다.
워커의 이 신속한 총퇴각은 한국전쟁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 결정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렇게 포기한 평양과 개성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한반도 통일은 이때의 평양 철수와 함께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 돼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중공군 보급 능력(1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움)을 감안할 때,
만약 당시 워커가 지형을 이용해 평양 인근에서 견고한 방어선을 유지했더라면,
중공군 공세를 한두 번 격퇴하고 다시 북진을 시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아쉬움은 모두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오히려
△워커의 공격 지향적인 평소 스타일
△일선부대 상황을 세세하게 챙겼던 지휘 철학
△전장의 지형을 중시했던 철저한 준비성 등을 감안한다면,
당시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다 조망할 수 있었던 워커의 선택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급사한 워커가 남긴 회고록이 없어 당시 어떤 생각으로 후퇴 결정을 내렸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가까웠던 8군 군수참모(G-4) 앨버트 스테빈스 대령의 증언을 참조하면
‘8군 병력을 지키기 위해’ 이런 대대적인 퇴각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전한 후방에서 장기간 전력 보강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반격조차 시도할 수 없을 정도로 8군의 상태가 엉망이었다는 얘기다.
오히려 워커가 명백하게 잘못한 부분은
1차 공격(10월 추수감사절 공세) 당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퇴한 국군 2군단을
2차 공격(11월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도 똑같이 우익에 단독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국군1사단을 미 1군단에 배속했던 것처럼,
국군2군단 예하 3개 사단을 분산시켰다면 미군이 국군을 지원하면서 중공군 공세를 버텼을 수도 있다.
“맥아더 장군과 워커의 후임자를 누구로 앉힐지 논의한 적이 있었다.
워커는 항상 위험한 전투 현장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맥아더는 리지웨이를 원했다.
나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 당시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의 회고 -

월튼 워커 장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커는 몇 가지 아쉬운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순직 직전 의도치 않게 한국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도저히 맥아더를 믿을 수 없었던 트루먼과 합참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를 한국에 보내 직접 전선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워싱턴이 한반도 포기까지도 고려하고 있던 순간에
워커는 육군참모총장을 향해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12월 4일 콜린스를 만난 워커는
“지금 병력만으로도 서울에서 충분히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고,
잠시 서울을 잃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뒤 재반격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콜린스는 ‘상황이 나쁘긴 했지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고,
8군의 저항 의지를 합참과 대통령에게 소상히 전달했다.
이 덕분에
미국 정부는 철수 대신 항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합참의장 브래들리는 “콜린스의 보고를 듣고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는데,
그 햇살은 실은 워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부하들의 사기를 고무하기는커녕 워커의 방어 계획에 재를 뿌리고 있었다.
12월 초 맥아더는
본국 정부에 “대만군을 끌어들이자”거나 “만주 폭격을 허가해 달라”며 확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또 도쿄를 방문한 콜린스를 만나선
“본국 정부가 추가 병력을 지원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맥아더가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계속한 이유는
‘워싱턴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진 것’이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요구를 모두 물리치자,
맥아더는 이를 ‘패배주의’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맥아더가 큰소리를 칠수록 그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맥아더가 한반도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워싱턴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맥아더를 대신해 콜린스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보내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인천에서 시작된 맥아더 신화는 여기저기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월튼 워커는 거칠고 좁은 한국의 빙판길에서 지프 속도를 한없이 높였다.
12월 23일 워커는 운전병, 부관, 경호원과 함께 지프를 타고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국군 무기 운반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지프 앞으로 뛰어들었고,
워커의 차는 충돌을 피하다 전복됐다.
워커는 즉사했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1950년 12월 15일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이 타흐신 야즈즈 튀르키예 1여단장(당시 준장)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워커는 이 사진을 찍은 뒤 8일 후 사고로 사망했다. 미 육군(위키미디어 커먼스)
7. 서울 12월 23일 : 한 영웅의 죽음
미8군사령관 워커가 1950년 12월 23일 사망했다.
워커는
서울 북방에 주둔하던 미24사단과 영국27여단을 방문해 수훈 장병들을 표창할 예정이었다.
그 길에 아들 샘(24사단 중대장)을 만나 크리스마스 휴일을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워커의 지프는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기 양주군 도봉리(현재 서울 도봉역 인근)에서
국군 6사단 화물차와 충돌해 길 밖으로 이탈했다.
워커는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근처 24사단 야전치료소로 이송됐으나,
군의관이 10시 50분 워커의 사망을 확인했다.
워커의 죽음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미 당시 맥아더의 행보를 보면 한반도를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그 즈음 맥아더가 워싱턴에 보낸 보고를 보면 철수(evacuation)라는 말이 자주 보였다.
대만군 또는 미군 부대를 추가로 지원하지 않을 거면,
미군 병력을 모두 일본으로 빼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1950년 12월의 한국전쟁은 워커 혼자 끌고 가는 양상이었고,
워커가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 철수 작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악전고투하던 워커마저 갑자기 사망하자 유엔군은 완벽한 지휘부 공백 상태에 빠졌다.
워커의 급사로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이 8군사령관직을 대행했다.
밀번은 온화하지만 소극적이었고, 리더십 있는 장군도 아니어서,
위기에 빠진 대군을 오래 지휘하게 둘 수는 없었다.
워싱턴이 빨리 워커 후임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한국 국민이나 미국 정부에 정말 다행이었던 점은
명장 워커의 후임이 또 다른 명장 리지웨이였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유럽 전선에서 사단장과 군단장을 지낸 뒤
펜타곤에서 요직(육군참모부장)을 꿰찬 리지웨이는
당시 미국이 전쟁 지역 야전사령관으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인재였다.
리지웨이는 워커 사망 소식을 들은 뒤
인사 명령을 받고 곧바로 극동으로 날아와 12월 26일 도쿄를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리지웨이를 만난 맥아더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8군은 자네 소관일세”라며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게”라고 당부했다.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패색이 짙어진 단계에 이르자,
그제서야 인심을 쓰는척 맥아더는 리지웨이 야전사령관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리지웨이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슈 리지웨이가 한 일은
전쟁을 하는 데 최고사령관(맥아더)이 필수불가결한 인물이 아니란 점을 입증한 것이다.
리지웨이가 적과 싸우는 동안 맥아더는 워싱턴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 윌리엄 맨체스터의 전기 ‘맥아더’ 중에서 -
8. 에필로그 : 거인(맥아더)의 마지막
리지웨이의 등장(1950년 12월 26일)은
3년의 6·25 전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리지웨이 부임 이후 맥아더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맥아더가 떠넘긴 책임을 모두 등에 진 리지웨이는
후퇴(1·4후퇴)와 반격 작전(1951년 1~4월)을 보란 듯이 훌륭하게 해냈다.
리지웨이는 유엔군과 국군에 ‘공격정신’을 강조하며
북위 37도선까지 물러났던 전선을 3개월 만에 다시 38도선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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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의 의지가 없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4차공세(1951년 2월)와 춘계공세(4·5월)를 버티지 못하고
한반도 전역을 공산군 손에 내줬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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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웨이의 가장 큰 공은
‘맥아더 없이도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의 공세 계획을 그저 승인해 주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리지웨이의 성공이 쌓이면서
인천의 환상에서 벗어난 미국 정부도
더 이상 맥아더에게 휘둘리지 않고 한반도 문제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좁아진 입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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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성명을 준비 중인 휴전 제의를 자기가 먼저 나서 선수를 치거나(1951년 3월)
△야당 지도자와 내통해 트루먼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1951년 4월)하는 등 불충을 거듭하다가,
결국 4월 11일 해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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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52년 군복무를 마칩니다.
제가 육사 연병장에서 선서했던 그날부터 세상은 참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희망도 꿈도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당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던 군가의 후렴구를 아직 기억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가사죠.
그 군가의 노병처럼 저 역시 군 경력을 마무리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께서 알려주신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했던 한 군인으로서 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1951년 4월 19일 맥아더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

해리 트루먼에게 해임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더글러스 맥아더가 1951년 4월 시카고 솔저필드 경기장에 모인 5만 명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여덟 번의 연재에 걸쳐 맥아더의 생애, 한국전쟁과 관련한 공과를 살펴보았다.
이제
맥아더에 관한 다섯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이 인물에 관한 논의를 정리해 보려 한다.
첫 번째 질문은 ‘과연 맥아더는 위대한 장군이었나’라는 의문.
한국전쟁에서 그는 ‘명장’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이기심과 공명심 때문에 전쟁 전체를 말아먹은 ‘졸장’에 불과했을까?
어디를 더 유심히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다르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인천 상륙’만 끊어서 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한 명장이 존재하기 어렵고,
그야말로 하늘이 대한민국을 위해 특별히 내린 ‘신의 장수’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 10월과 11월 중공군 개입 과정에서
맥아더는
방심, 오만, 불충, 확증편향 등
자신의 나쁜 측면을 모조리 드러내며 전쟁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인천의 성공이 맥아더의 눈을 완전히 가려 버렸고,
맥아더 때문에 거의 전쟁을 질 뻔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결국
6·25 한국전쟁에 대한 맥아더의 종합적 평가는
‘아집 때문에 졸장으로 전락한 명장’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질문. 맥아더는 북진 과정에서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의 강력한 권한에 수반되어야 할 마땅한 책임마저 외면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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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성공하고 북한으로 진격하는 사이
세 차례 정도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①적에 대한 정찰과 대비를 소홀히 했고
②예상보다 강력한 적의 침공 원인을 상관(대통령과 합참)과 부하(워커) 탓으로 돌렸으며
③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언론플레이로 시간만 끌다가 결정적인 골든타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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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달라진 맥아더의 말
세 번째 질문.
중국의 대규모 개입(중공군 30만 명 파병)을 예상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1차적으로 외국 정부와 그 수뇌부의 의도(마오쩌둥의 강력한 전쟁 개입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책임은 워싱턴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외교라인(국무장관 애치슨), 정보당국(CIA)의 책임이 가장 컸고
드러난 자료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펜타곤(국방장관과 합참)도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다.
이 모든 문제에서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저우언라이가 인도 외교관을 통해 미국 정부로 명백한 경고를 전달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중공군 개입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워싱턴 정부의 가장 뼈아픈 실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맥아더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1941년 12월에도 일본군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맥아더는
1950년 10월에도 자신의 나쁜 버릇인 ‘확증편향’을 반복하며,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군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상정조차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보참모들도 맥아더 구미에 맞는 첩보보고서만 생산하게 됐다.
그리고
관할 구역 내 적(중공군)의 동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결국 트루먼의 워싱턴 정부에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저항 의지와
*순망치한(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이 위협)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치·외교적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는 적의 위협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중에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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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망치한_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에 있는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하나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기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북한을 완전 정복하게 되면 중국은 그에 따라 위협적인 면이라는 의미로 피력한 말.
곧, 그렇게 되면 당장 중국이 그냥 두고볼 수 없다는 의미로 중국의 전쟁 개입 의도 입장을 말한 것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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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0년 9월 29일 '수도 환도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일등무공훈장 수여증을 전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네 번째 질문.
맥아더에게 한국은 무엇이었나?
그가 이승만에게 했던 다짐,
“캘리포니아를 보호하듯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전쟁을 그저 하나의 도구로써 이용한 것뿐이었을까?
맥아더 전문가인 이상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을 인용하면
“맥아더는 자기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군인이었을 뿐”이고
“한국인이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좋게 해석하는 것은
맥아더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맥아더는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애치슨 선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고,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결정에도 동의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내내 자신의 기본적인 임무는 한반도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소련의 남하로부터 일본 열도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대만군 참전
△원자폭탄 사용
△만주 폭격을 주장하며 줄기차게 확전을 시도했던 것도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군사적 성과를 향후 미 대선으로 이어가려는 정치적 의도였다고 보는 게 더 옳다.
여러모로
맥아더의 덕을 많이 본 일본인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고 해도,
한국이 맥아더의 과오까지 애써 외면하며 그의 공만 높이 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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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선언_Acheson Line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발표한 연설로,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을 설명한 것.
딘 애치슨_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
미국의 방위선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포함한다고 밝힘
하지만 한국과 대만은 방위선에서 제외된 듯한 표현을 사용
이 선언은 이후 한국 전쟁과 관련해 자주 언급됨.
일부에서는 이 발언이 북한에게 “미국이 한국을 적극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되어
한국전쟁 발발에 빌미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함.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 범위를 제시한 발언이며,
한국이 명확히 포함되지 않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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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
맥아더 퇴장(해임)은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맥아더가 리지웨이 부임 이후에도 계속 한반도 작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한국전쟁의 얼굴마담’으로 남아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대만군을 끌어들이고
만주를 폭격하고 중국에 원자탄을 사용했더라면,
한반도 통일이라는 염원을 과연 달성할 수 있었을까?
이 대답에는 ‘그렇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당시 참전을 결정한 마오쩌둥(모택동)의 결기는 대단했다.
워싱턴 정부나 도쿄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 본토를 통일(1949년)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중국공산당이
내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전쟁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마오쩌둥은 “100대의 주먹을 맞지 않으려면 한 대를 먼저 때려야 한다”는 논리로
미국과의 전쟁을 감수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탄을 얻어맞고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중공군 파병을 결정했다.
맥아더 말대로 만약 확전을 도모 했다하고 한다면
중국공산당이 수백만 병력을 한반도에 쏟아붓고,
소련이 지상군을 투입하는 ‘세계대전’으로 비화했을 수도 있다.
당시는 이미 소련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이 제한전(특정 목표 달성을 위해 무력을 정해 둔 선까지만 투입)에서
전면전(국력을 무제한으로 투입)으로 확전 비화했다면
한반도에 원자폭탄이 사용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전쟁을 계속 주장하며,
책임지지 못할 얘기를 계속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 늦었지만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맥아더의, 맥아더에 의한, 맥아더를 위한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맥아더가 퇴장하고서야 비로소 장군 개인적 카리스마가 아닌
전쟁 지도부(대통령·합참)와 군사 지휘관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는 정상적인 전쟁으로 변화하게 됐다.
지독한 내로남불 병에 걸렸던 초췌한 노병은 결국 그렇게 사라졌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며.
참고 자료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공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⑦’
-심호섭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첫 본격적인 대결:
중공군 2차공세와 미군의 ‘가장 긴 퇴각’에 대한 작전적 차원의 분석과 평가를 중심으로’
-Bill Mossman ‘Ebb and Flow’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Roy Appleman ‘Disaster in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맥아더의 행적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회고록
-백선엽 ‘군과 나’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
-H. 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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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창 anti092@hankookilbo.com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4071659000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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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_附錄
상관 닦달보단 부하 목숨이 먼저, 해병 사단장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1950년 11월 스미스 소장 : 중공군 개입 패퇴시 장진호 철수의 영웅
원본글 링크 :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040117580003764

6.25 전쟁 당시 미 해병1사단장(소장)이었던 올리버 스미스 해병 장군. 나중에 대장까지 진급한다.
“추위는 축축하고, 고통스러우며,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휘몰아쳤다.”
- 햄프턴 사이즈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 -
한기에 몸을 벌벌 떨며 텐트를 나가니 어제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분명 0도 근처에서 놀던 수은주는 밤사이 영하 23도로 고꾸라졌다.
전날까지 남아 있던 인디언 서머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진짜 겨울이 내려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려 꺼낸 철제컵이 손에 쩍 달라붙었다.
전투식량은 꽁꽁 얼어붙어 도저히 깰 수 없었다.
M1 카빈 소총은 발사되지 않았고, 헬리콥터도 뜨지 못했다.
극심한 추위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해병들은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추워서 그렇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이 집단쇼크 증상은
훗날 ‘Shook’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그나마
부상자의 상처마저 얼어붙어, 지혈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점이 추위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1950년 11월 11일,
함경남도 장진군의 인공호수엔 평년보다 혹독한 겨울이 더 빨리 찾아왔다.
바로 전날 케이크를 자르며 생일(1775년 11월 10일 창설)을 축하했던 미 해병대는
175년 만에 최악의 날씨를 맞이했다.
적을 만나기 전, 동장군과 죽느냐 사느냐라는 한판승부를 벌여야만 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악천후에서 치러야 했던 싸움.
장진호 전투는 기습적으로 찾아온 북극 한파와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6.25 전쟁 당시 겨울 전투를 하던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 해병1사단 병력. 미 해병대(위키미디어 커먼즈)
“음산한 땅에 분산된 연대와 대대들은 실오라기처럼 취약한 길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미8군은 이 끔찍한 봉우리들로부터 130km나 떨어져 있었다.
그(8군과 10군단) 사이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 ‘이런 전쟁’에 묘사된 장진호 전투 직전 -
★ 배경: 미군은 왜 거기 있었나
장진호는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 남단쯤 되는 곳이다.
주변에 번성한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가까운 도시가 남동쪽 산길로 90㎞를 가야 닿는 함흥이다.
북쪽엔 2,000m 급 준령과 넓은 고원이 펼쳐지고,
서쪽 평안도 땅으로 가려면
굽이치는 좁은 길을 통해 한반도의 등뼈(낭림산맥)를 넘어야 한다.
두 달 전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수복한 미 해병1사단은 어쩌다 이 오지까지 떠밀려 왔을까.
이미 해병대 왼쪽에선 국군6사단이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10월 26일)하고,
오른쪽에선 미7사단이 한중 국경 혜산진을 향해 진군(11월 21일 점령) 중이었다.
전쟁이 다 끝날 것처럼 보이던 이때,
미군 최정예 사단은
점령할 도시나 마을조차 찾기 힘든 개마고원 황량한 땅을 터덜터덜 지나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1일)를 이해하는 것은
‘왜 그 겨울 미 해병대가 그 오지에 있었나’라는 궁금증을 푸는 데서 시작된다.
가장 결정적 순간,
가장 잘 싸우는 부대가,
가장 깊은 산중을 헤매는 이 괴상한 광경을 만든 두 사람의 명령권자가 있다.
바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미 10군단장(동부전선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이다.
맥아더와 알몬드가 달았던 ‘칠성’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며,
해병 2만5,000명의 목숨을 지켜야 했던 사람이
바로 이글의 주인공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1사단장(당시 소장, 아래 사진)이다.

올리버 스미스의 이력.
“알몬드는 (전쟁 중에도) 퍼스트 클래스에서 살았다.
사령부엔 은제식기, 흰옷 입은 웨이터, 최고의 음식과 와인이 준비돼 있었다.
전용 트레일러엔 냉장고, 온수 샤워, 수세식 변기도 있었다.”
- 당시 장교들의 증언 -
★ 조건 : 무모한 상관은 적보다 훨씬 더 무섭다
스미스의 직속상관은 알몬드였다.
그해 여름 낙동강 전투 때 맥아더와 월튼 워커 8군사령관 사이에서 농간을 부렸던
그 알몬드(당시 맥아더의 참모장)가 겨울엔 동부전선으로 와 스미스를 괴롭히고 있었다.
미국 전쟁역사가들은 대체로 알몬드를
매우 거칠고,
심하게 공격적이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평가한다.
성과를 내려고 부하를 가혹하게 다그치는 것으로 악명 높았고,
항상 주변 사람 단점을 지적하면서 불화를 유발했다.
그에겐 “아무도 없는 사막에 두어도 분란을 일으킬 사람”(함께 일한 장교)이란 뒷말,
“미 육군 역사상 가장 공격적 리더”(전쟁사학자 스티븐 타페)란 평가가 따라 다녔다.
알몬드는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흑인 부대 92사단을 지휘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마치는 듯했으나,
야심가 알몬드는 전후 맥아더의 극동사령부에 지원해 재도약을 모색했다.
맥아더 역시 알몬드의 충성심을 높이 사 그를 참모장으로 발탁했고,
인천상륙작전에서 별도 상륙부대(10군단)를 만들어 알몬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알몬드는 맥아더의 맹목적 추종자였고, 맥아더는 알몬드의 든든한 뒷배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밥 호프(가운데)가 1950년 10월 원산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을 위문하고 있다. 미 해병대는 이미 국군이 확보한 원산항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항구 주변 기뢰 제거 작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장시간 동해를 맴돌며 입항을 기다려야 했다. 미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5,000분의 1 확률이라던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한 맥아더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10월 초 38선을 넘은 김에 아예 전쟁을 끝내 버리고자 했다.
유엔군 병력을 크게 둘로 나눠 한반도 서쪽에 워커 8군, 동쪽에 알몬드 10군단을 각각 배치했다.
정공법보단 한 방을 선호했던 맥아더는
‘9월 인천’에 이어 ‘10월 원산’에서도 또 한 번의 상륙작전 차력쇼를 선보이려 했다.
북한군이 무너졌던 당시,
유엔군이 원산을 확보하려면 서울에서 추가령구조곡을 통해 육로로 밀고 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실리보다 화려함을 욕심낸 맥아더는 부대를 부산으로 보내,
힘들게 배에 태워 다시 상륙시키는 복잡한 전법을 택했다.
그사이 국군이 원산을 육로로 점령해 버리자 미 10군단의 전투 목표가 사라졌다.
10군단은 기뢰 제거 작업만 한 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원산항에 걸어서 입항했다.
미 해병1사단도 그 부대 중 하나였다.

맥아더는 10월 말
한반도의 가장 좁은 ‘목’(평양~원산)을 두 손(8군, 10군단)으로 틀어쥐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끝낼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평양에 입성한 8군을 신의주와 압록강 하류로 올리고,
함흥 일대를 장악한 10군단을 8군의 동쪽에서 북상시켜 압록강 상류를 장악하는 구상이다.
그중
미 해병1사단은 흥남에서 장진호까지 북상한 다음,
방향을 틀어 무평리(지금의 자강도 전천군)까지 서쪽으로 진격한 뒤,
다시 북쪽으로 진격해 임시수도 강계를 공략하는 초장거리 임무를 맡았다.
원래 해병대의 고유 임무는 상륙 후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해병대가 이렇게 내륙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건 이례적이면서도 위험한 작전이었다.
해병1사단은 이런 이유로 개마고원에 오게 됐다.
해안에서 멀어지며 장진호를 향해 가던 11월 초,
해병 정보참모들은 중공군의 움직임과 규모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계속 입수했다.
그러나
알몬드는 중공군 병력이 많지 않다는 맥아더 사령부 정보를 맹신했다.
알몬드는 중공군을 ‘세탁업자’(20세기 초 재미 중국인 다수가 세탁업 종사)라고 폄하하며
해병대에 무작정 전진을 강요했다.
맥아더와 알몬드는 틀려도 정말 단단히 틀렸다.
유독 추웠던 장진호 주변 산속엔, 알몬드가 얕보던 세탁업자 ‘12만 명’이 숨어 있었다.
미군을 기다리는 중공군 9병단(병단은 과거 국군의 야전군 규모)의 목표는
미군 최정예를 포위 섬멸해서 미 정치권과 여론에 충격을 주고,
미국 정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단숨에 꺾어버리는 것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를 위해,
9병단 12개 사단 중 8개 사단이 여러 겹의 덫을 치고 해병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8대 1의 싸움.
아직 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악의 날씨에, 적이 있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캄캄한 산속으로,
군단장 알몬드가 사단장 스미스의 등을 거칠게 떠밀고 있었다.
무모한 상관은 소름끼칠정도록 적보다 무서운 법이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미 육군
“해병1사단이 한국에서 처한 모든 도전에서, 스미스 장군은 언제나 감정을 통제했다.
그의 감정이 상식이나 이성을 압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 스미스의 부관 마틴 섹스턴 대위의 회고 -
★ 각오 : 최고의 가치는 오직 부하의 생명
‘3중의 적’이 동시에 스미스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1)영하 30도 동장군
(2)몸을 숨긴 12만 명의 중공군
(3)적을 무시하고 스미스에게 ‘돌격’만 외치는 미국 장군(알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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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추위에서
△아군을 포위한 적을 물리치며
△상관이 가리키는 곳과 반대로
△병력을 보존해 무사히 탈출하는 ‘미션 임파서블’이 스미스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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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적이며 공격적인 알몬드와 비교해,
스미스는 모든 면에서 직속상관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었다.
스미스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UC 버클리)를 졸업한 뒤 석유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에 입사했다가,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해병 장교로 입대했다.
미국이 2차대전에 본격 참전하기 전부터 유럽(아이슬란드)에 배치된 해병대를 지휘했고,
2차대전 중 남태평양에 투입돼 일본군을 상대했다.
‘버클리 출신’이라는 이력처럼,
그의 리더십은 여느 해병대 장교의 거친 지휘 방식과 거리가 멀었다.
지적이고 부드러운 말투, 수준급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교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특히나 해병대 콴티코 기지 교관으로 있을 때
현대전의 여러 돌격 작전 효과를 수치로 분석한 뒤,
돌격은 그저 아군의 힘을 빼는 ‘가짜 영웅의 에너지 낭비’임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타페의 평가처럼, 스미스는 알몬드와 ‘밤과 낮처럼’ 달랐다.

에드워드 알몬드(오른쪽) 소장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도중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위키미디어 커먼즈)
“해병대는 일부러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온갖 꾀를 부려서라도 부대를 나누는 것을 미루며,
부대가 약해지기 전 적이 모습을 드러내길 학수고대했다.”
- 당시 미해병1사단 작전참모 알파 바우저 대령 -
그러나 스미스는 유하기만 한 군인은 아니었다.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던 외유내강 리더였다.
특히나 해병대를 모르는 알몬드 같은 육군 장군이 내리는 명령에 저항했고,
인천에 상륙한 후 서울을 공략하는 과정(9월 하순)에서 이미 알몬드와 갈등을 빚었다.
알몬드는 스미스를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변명만 한다”며 폄하했고,
반대로 스미스는 알몬드를 ‘
예측할 수 없이 돌출행동만 일삼는 사람(loose cannon)’으로 평가했다.
두 사람은 장진호에서도 극과 극의 접근 방식을 택했다.
후방 군단본부에 있던 알몬드는 빨리 전진하라고 독촉했지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높게 봤던 스미스는 해병사단 진격 속도를
‘거의 명령 불복종에 가깝게’(참전용사 마틴 러스의 회고) 고의로 지연시켰다.
영국 전쟁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의 표현을 빌리면,
스미스는 ‘알몬드의 성급함 때문에 곧 해병대에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집중 운용하고자,
벌어진 연대 사이 간격을 최대한 좁혀 이동시켰다.
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함흥에서부터 장진호 사이 여러 곳의 보급 거점을 설치하고 각종 군수품을 쌓았다.
장진호의 거점 하갈우리(나중에 사단본부 설치)에는 공병 작업에 필요한 제재소를 세우고,
군수품 보급 및 부상자 이송을 위한 비행장까지 닦았다.
경비행기를 위한 간이 이착륙장이 아니라,
주력 수송기 C-47이 뜨고 내릴 수 있었던 정식 비행장(길이 870m, 폭 15m)이다.
비행장을 세워가며 전진했던 스미스의 고집스럽고 철저한 준비는
나중에 많은 부하들의 목숨을 살린다.
스미스는 해병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을 극도로 피했다.
불확실성이 보이면 나아가지 않았다.
장진호 근처에 도달해서는
이동 속도를 더 늦춰 하루 평균 1.5㎞(시간당 62.5m)만 가는 ‘거북이 진격’을 했다.
알몬드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육군 장성인 그가 해병대 장군을 해임하거나 군법회의에 넘길 순 없었다.
이렇게만 보면
스미스가 겁쟁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미스는 헬리콥터를 타고 추운 날씨에 최일선 순시를 강행했고,
11월 27일 밤 중공군 공격이 시작되자
다음 날 사단 지휘소를 하갈우리로 옮겨 전투 지역에 바짝 붙었다.
장진호 남단 마을인 하갈우리는
호수 서쪽(해병5, 7연대)과 동쪽(육군 특임대)을 이어주는 요충지이면서도,
이미 중공군 수 개 사단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가장 위급한 때 사단장이 포위를 자초하며 최전방으로 옮겨 전투를 지휘한 것이다.
6·25 때 포병장교로 참전한 러셀 구겔러는
“지휘관이 현장에 있다는 건 부대 사기를 높이고 무형의 전투력을 증대시킨다”며
“스미스 장군이 해병대 구호인 겅호(gung-ho·깡이나 배짱을 의미) 정신을 몸소 실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루이스 풀러 미 해병 대령(해병1연대장). 그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은 전설적인 해병 장교로, 나중에 중장까지 승진한다. 미 해병대
“적군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제 발로 걸어와 우리를 포위하다니, 일이 간단해졌구만.”
- 장진호에서 포위당한 해병1연대장 루이스 풀러 대령의 반응 -
★ 전투: 미군 2만 명 몰살 위기
11월 27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 사이,
웅크리던 중공군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중공군 8개 사단은
△해병5·7연대가 배치된 최전방 유담리(장진호 서쪽)
△사단본부가 있던 하갈우리(장진호 남쪽)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덕동고개(장진호 남동쪽 산지)
△해병1연대가 있던 고토리(황초령 바로 북쪽)
△보급기지 진흥리(황초령의 남쪽)까지 거의 동시에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부대를 잇는 보급로도 대부분 끊겼다.
미군이 화력에선 우위였지만 병력 차가 최대 4배였다.
1개 사단으로 버틸 공격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유담리에서 진흥리까지 56㎞에 이르는 지역에 거대하고도 촘촘한 포위망을 쳐 두고 있었다.
맹렬한 추위와 높은 고도 탓에 철수 작전 난이도는 훨씬 더 높아졌다.
2차대전 때 주로 남태평양에서 활약하던 미 해병대에게 이렇게 추운 날씨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중공군의 포위 섬멸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고,
미 해병대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사단 병력 전멸 위기에 몰려 있었다.

도쿄 사무실에 앉아 전쟁을 낙관하던 맥아더도
전멸 직전 해병대의 상황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전투 개시 다음 날인 11월 28일 맥아더는 본국 합참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전쟁에 직면해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이제는 사령부의 통제와 힘을 벗어나는 상황을 맞이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자존심 강한 전쟁영웅이 한국전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앓는 소리’였다.
맥아더의 후퇴 지시를 받은 알몬드는 그제서야 해병1사단에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워낙 철저한 포위를 당한 탓에 공중보급 외엔 군단 차원에서 해줄 게 없었다.
오로지 스미스 휘하 부대와 해병항공대 지원만으로 겹겹의 포위를 뚫어야 했다.
미 해병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지만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후퇴는 진격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후퇴 작전 첫 단계는
가장 앞으로 나가 있던 유담리의 해병 5·7연대를 하갈우리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덕동고개를 사수해야 했다.
단 1개 중대(해병7연대 F중대)가 이 생명줄을 지키고 있었다.
F중대 245명은 11월 28일 새벽부터 16시간 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냈다.
당시 공격에 가담한 중공군 병력은 3,000명 이상의 연대급으로 추정된다.
이후로도 F중대는 병력 증원을 받지 못하면서 12월 2일까지 4박 5일 동안 공격을 격퇴했다.
사상자가 중대 병력의 4분의 3에 달하는 최악의 상황임에도,
F중대는 덕동고개를 끝내 사수했다.
이 덕에
8,000명의 2개 연대 병력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F중대가 사살한 중공군만 1,000명이 넘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F중대에서만 미군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가 2명(중대장, 일병) 나왔다.

1950년 11월 말 또는 12월 초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설치된 미 해병대의 부상자 대기소 모습. 민가를 이용한 시설이다. 미 해병대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린 다른 방향으로 공격 중이오.”
- 후퇴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은 올리버 스미스의 반응 -
★ 믿음 : 다쳐도 내 병사는 끝까지 데려간다
12월 4일 사단 본부로 후퇴한 해병5·7연대는
본부 병력과 합세해 12월 6일 하갈우리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이 철수 또한 쉽지 않았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를 거쳐 진흥리에 이르는 길은 깊은 계곡 지대에 있었고,
계곡 양쪽에 다수 중공군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해병1사단은 매복한 중공군과 고지전을 벌여가면서 후퇴해야 했다.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해 11일 흥남에 도착할 때까지
5박 6일 동안 134명의 해병대 전사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스미스는 ‘중장비를 모두 파괴하고 사단 병력을 수송기로 철수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해병대 역사상 그런 수치는 없었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싸우면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장비를 버리며 철수하면, 스미스의 계산으론 최소 2개 대대 병력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하갈우리에서 흥남까지 102㎞를 도보로 철수했다.

한국전쟁 당시 헬기를 통해 이송되는 미 해병대 부상자. 미 해병대
걸을 수 있는 경상자나 트럭에 태울 수 있는 부상자는 육로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몸을 가눌 수 없거나 응급수술을 요하는 중상자를 실어 나르는 게 문제였다.
스미스가 바득바득 우겨 가면서 세웠던 하갈우리 비행장이 비로소 큰 힘을 발휘했다.
헬리콥터와 경비행기로 옮길 수 있는 부상자는 하루에 6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공간이 넓은 C-47 수송기를 이용하면
10배 이상의 부상자를 흥남이나 일본으로 바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영하 20도에 땅속 50㎝까지 꽁꽁 언 동토를 파고 포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1월 27일 밤 전투가 시작된 후 30일까지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누적되고,
매일 100명 이상의 비전투 사상자(주로 동상)가 나왔다.
결국
스미스는 공사 진행률 40% 단계에서 비행장을 임시 가동하기로 했다.
12월 1일 오후 한 용감한 C-47 수송기 조종사가
아직 울퉁불퉁한 하갈우리 비행장에 가뿐하게 착륙하는 데 성공했고,
30분 후 24명의 부상자를 싣고 다시 떠올랐다.
스미스는 당시
“하갈우리 활주로가 뉴욕 라과디아 공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때부터 5일간 미군은 육군과 해병대 부상자 4,312명(꾀병 포함),
사망자 유해 137구를 수송기에 실어 날랐다.
스미스가
알몬드의 성마른 진격 명령을 꿋꿋이 버티며 비행장을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다.
부상자 이송은 ‘적을 죽이는 행위’와 직접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일선 부대 사기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해병대가 사상자 이송에 항공 전력을 동원한 것은
‘언제 어디서 죽거나 다쳐도, 끝까지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사단장의 확고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연히 지휘관과 일선 해병들 사이에 돈독한 신뢰감이 형성됐고,
사단장이 극한 상황에서 내리는 명령이 일선에서 철저히 지켜질 수 있었다.
미 해병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해병1사단의 인원 손실은 전사 561명, 부상 2,872명, 실종 182명 등 총 3,615명(육군 별도)에 달했다.
그나마 스미스가 꼼꼼한 대비와 과감한 작전으로 훌륭하게 철수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스미스가 알몬드의 공격 명령에 동조해 병력을 무작정 밀어 올렸더라면
해병1사단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미 해병1사단 병력이 1950년 12월 9일 개마고원 입구인 황초령을 넘어 함흥 방향으로 철수하고 있다. 미 해병대
“미 해병대 역사에선 총 294번(현재는 297번)의 명예훈장 수훈이 있었다.
그중 42개가 한국전쟁, 그중에서도 14개가 장진호 전투에서 나왔다.”
- 미군 전사가 로이 애플먼 -
★ 결론 : 한국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꾼 사단장
‘땅’의 관점에서 본다면, 장진호 전투의 승자는 중공군이다.
그러나 전체 전쟁의 관점에서 볼 때,
장진호 전투는 성공한 싸움을 넘어
군사상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박종상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평가받는다.
2차대전 최고의 후퇴작전인 *됭케르크 철수(1940년)에선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갔다.
이에 비해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가 4배에 이르는 적을 맞아 편제와 대형을 유지한 채,
적을 격퇴해 가면서 질서정연하게 후퇴한 작전이었다.
미 해병대도 공식 전쟁사(‘US Marines in the Korean War’)를 통해
해병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로 장진호를 기억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의 나비효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스미스의 빼어난 철수 작전은 일개 전투 수준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흐름을 바꿨다.
우선 미국의 전략군이라 할 수 있는 해병사단이 전력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다.
해병1사단이 중공군 9병단 병력 대부분을 잡아둔 동안
나머지 미10군단 병력은 무사히 흥남으로 철수했다.
해병1사단이 장진호에서 무너졌더라면 10군단 예하 사단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기적의 철수 작전’이라 불린 흥남철수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10군단은 부산과 거제 등으로 일단 물러났다가,
재정비를 거친 후 1951년부터 중동부 전선을 담당했다.
매슈 리지웨이가 주도한 역습에서 허리 역할을 맡았고,
수차례 중공군 공세를 격퇴하며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밀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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됭케르크_Dunkirk 철수작전 : Operation Dynamo라고 함.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벌어진 중요한 군사 작전으로, 공식 명칭은 다이나모 작전.
이 작전의 핵심은 고립된 연합군 병력을 영국으로 탈출시키는 것이었음.
영국은 군함뿐 아니라 민간 선박(어선, 요트 등)까지 동원.
약 33만 명 이상의 병사를 구조하는 데 성공.
많은 장비를 버리고 철수해야 했지만, 병력을 보존해 이후 전쟁 지속에 큰 역할을 함.
참고 : 이 작전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더욱 유명해짐.
시기: 1940년 5월 26일 ~ 6월 4일
장소: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 됭케르크
배경: 독일군이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하면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해안에 고립됨
역사적 의미
군사적으로는 후퇴였지만, 영국에서는 "기적적인 구출”로 평가됨
이후 윈스턴 처칠의 연설과 함께 국민 사기를 크게 끌어올림
간단히 말해, 패배 직전 상황에서 병력을 구해 전쟁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철수 작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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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함경남도 함흥에 조성된 해병대 장병 묘지에서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장진호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사단급 부대의 위업”
- 육군 준장 출신 전쟁역사가 S.L.A. 마셜 -
스미스의 장진호 철수는 그냥 후퇴가 아니라,
적과 맹렬히 싸우며 서서히 물러가는 ‘공세적 후퇴’였다.
미 해병대도 인명 손실이 컸지만 중공군 병력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발생한 중공군 사상자는
최소 2만 명(중국 집계)에서 최대 6만 명(미국 집계)이다.
그나마 중국 집계엔 동상 등 비전투 손실 3만 명이 빠진 것이어서,
중공군 입장에선 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하려다가
사실상 1개 병단 전체가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중공군 9병단은 막심한 피해를 추스르느라 12월 31일 3차 공세엔 합류하지도 못했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6만 명을 보충해 겨우 전선에 돌아왔다.
만약 9병단이 미 해병대를 잡고 전력을 유지했더라면,
3차 공세 당시 유엔군은 37도선(평택~원주~삼척)보다 더 아래까지 쓸려 내려갔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더 뒤로 밀리면 아예 한국을 포기할 계획까지 세워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병1사단의 분전은 유엔군 전체를 패배 위기에서 구한 원동력이 됐다.
6·25 전쟁처럼 야전군 규모 이상이 맞붙은 대규모 전쟁에서,
이렇게 한 명의 사단장이 전체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례를 발견하기 어렵다.
미군 역사상 가장 자기애가 강했던 총사령관(맥아더)과 가장 무모했던 군단장(알몬드) 아래,
스미스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단장이 있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으로선 천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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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렇고 그런 장군이 해병사단을 지휘했더라면,
알몬드의 등쌀에 밀려 사단 전체가 전멸하는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고
미국은 전쟁을 거기서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6·25에서 여러 유엔군 사단장이 활약했지만,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단장 중 한 사람을 올리버 스미스로 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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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창 anti092@hankookilbo.com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040117580003764
참고 자료
장진호 전투 상황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⑦’
-한종수 김상훈 ‘미 해병대 이야기’
-로이 애플먼 ‘장진호 동쪽’
-T. R. 페렌바크 ‘이런 전쟁’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Bill Mossman ‘Ebb and Flow’
-Max Hastings ‘The Korean War’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Lynn Montross, Nicholas Canzona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Charles R. Smith(edited) ‘U.S. Marines in the Korean War’
스미스의 리더십 및 세부 일화
-마틴 러스 ‘브레이크 아웃’
-햄프턴 사이즈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
-러셀 구겔러 ‘한국전쟁에서의 소부대 전투기술’
-Clifton La Bree ‘The Gentle Warrior’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Robert A. Wells ‘Cold, Hard Truths: Leadership Lessons from Korea, 1950’
-Charles M. Province ‘General Walton H. Walker: The Man Who Saved Korea’
-Benis M. Frank ‘Oral History Transcript: General Oliver P. Smith’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약간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과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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