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근친상간, 뇌물, 섹스파티, 전쟁 등
세상의 모든 부도덕이 이 집안의 동력이었습니다.
뇌물과 섹스로 동료를 만들고
넘어오지 않는 적은 가차 없이 암살했지요.
성적_性的으로도 어찌나 방종했던지
두 형이 막내아우의 부인을 두고 잇달아 성관계를 갖기도 했었습니다.
오빠가 친여동생과 육체적 관계라는 소문도 왕왕 들려왔지요.
신이 ‘멸문지화’의 벌을 내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가문은 승승장구
그야말로 최고권력까지 손에 넣습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는 교황에 올랐으니까요.
성(聖)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인물이 성좌(聖座)에 오른 셈입니다.
중세 이탈리아를 뒤흔든 ‘보르지아’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는 친남매지간이지만 동시에 육체적 관계라는 악소문이 돌았다.
이를 묘사하고 있는 미드 ‘보르지아’. [사진출처=IMDB]
성관계가 금지된 교황, 그리고 그의 아들.
여기서부터 부패의 냄새가 짙게 풍겨옵니다.
철학자 마키아벨리는
그럼에도 이 가문에서 권력의 본질적 속성을 꿰뚫습니다.
사유가 켜켜이 쌓여 ‘군주론’이라는 명저가 탄생했지요.
보르지아 가문의 극단적 정치가 불러온 파문을 사색_史色합니다.
바야흐로 정치가 모든 뉴스를 뒤덮은 시기여서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문장.
보르지아 패밀리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유력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이탈리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황을 배출했을 정도의 유력 집안이었지요.
그들의 야망은 가훈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고대 로마의 지도자로서
유럽과 북아프리카·아시아 일부를 지배한 ‘카이사르’(시저)가 되는 것.
무엇이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집념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보르지아 집안의 대표적 위인인 알렉산데르6세. 추기경 시절의 모습.
특히
보르지아 패밀리가 뜻을 펼치던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중세 교황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정치적 파벌 싸움의 최대 격전지였지요.
스페인 지방 귀족에 불과한 보르지아 가문에게 뇌물은 필수 도구였습니다.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를 묘사한 그림.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였지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인물인지 여부.
신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한 이들은 변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던 시기입니다.
“최고의 자리를 위해서라면, 댓가는 필요한 법”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
알렉산데르와 그의 아들 체사레는 황홀경에 빠진 추기경들을 미소 지으며 바라봅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밤의 연회’(Banquet of Chestnuts)였습니다.
교황이 섹스 연회장을 밤나무로 장식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아들아, 여자들은 준비됐니?” 미드 보르지아에서 알렉산데르6세를 연기한 제레미 아이언스. [사진출처=IMDB]
알렉산데르 6세가 포섭한 이들을 굳게 신뢰한 건 아니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떨어지면 언제든 자신을 버릴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은 유일한 인물들은 자녀들.
큰아들 지오반니,
차남 체사레,
셋째 딸 루크레치아,
막내아들 조프레였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의 큰아들 지오반니. 그는 당초 알렉산데르6세의 군사담당이었다.
그러나 체사레의 마음속에는 불만의 불꽃이 일었습니다.
카이사르에서 딴 그의 이름처럼 타고난 전사의 심장을 가진 그에게
‘교회’라는 공간이 좁디좁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체사레는 애초부터 형 지오반니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형의 자리는 원래 내 것이었어야 해.” 어린 시절의 체사레 보르지아.
“체사레, 프랑스를 도와 밀라노를 공격하라.”
교황군의 총사령관의 자리는 이제 체사레가 차지합니다.
교황 알렉산데르는 체사레를 앞세워
도시국가로 갈린 이탈리아를 교황의 영토로 만들려는 야망을 키워갑니다.
특히 교황청과 반목한 북부 이탈리아가 대상이었습니다.
로마를 떠나는 체사레를 묘사한 후대 19세기의 그림.
프랑스 왕 루이12세는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산마리노 공화국까지 점령하면서 보르지아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알렉산데르는 수많은 예술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라파엘로 , 미켈란젤로 , 핀투리키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보르지아 가문 밑에서 일했었지요.
정치철학자인 마키아벨리도 지근거리에서 체사레를 지켜보며
현실 정치의 냉엄함과 통찰을 키웠습니다.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해 유력 가문의 영토도 취하는 ‘영악함’도 가지고 있었지요.
보르지아 가문에는 이를 훌륭히 수행할 ‘자원’도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절세미인, 보르지아 가문의 여식 루크레치아였습니다.
루크레치아의 첫 결혼은 1493년.
밀라노 공작 스포르차 가문에 시집을 보냈다가
더 좋은 혼례상대가 나타나자 가차 없이 결혼을 파기합니다.
두 번째 결혼은 스페인 아라곤의 알폰소 공작과 함께였습니다.
새신랑 알폰소는 그러나 이내 시체로 발견됩니다.
바르톨로메오 베네토의 ‘여인의 초상’ 모델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 추정된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루크레치아의 세 번째 결혼을 준비합니다.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와 함께였습니다.
사랑은 없고 정략만 가득한 결혼이었지요.
두 사람은 ‘쇼 윈도’에 불과한 결혼 관계를 이어갑니다.
“우리 집안의 비밀을 알려하지 말게.” 후대 화가 존 콜리어가 보르지아 가문을 묘사한 그림.
체사레 보르지아가 손님에게 와인을 건네는 장면이다.
루크레치아의 표정으로 이 와인에 독이 들어있음을 암시한다.
추기경·프랑스 군인도 애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녀 역시 ‘보르지아’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너무 날카로운 야망과 추문은 언제나 적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전횡에 학을 떼는 세력들이 점점 뜻을 모았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추기경 줄라이노 델라 로베레가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강력한 도시국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나,
수도승 사보나롤라도 보르지아 규탄에 앞장섰지요.
보르지아의 가장 큰 적 ‘델라 로베레’ 추기경.
강대국인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교착 상황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교황의 건강도 나빠져 가고 있었습니다.
1503년 8월 열병에 걸리면서였습니다.
루이 12세가 벌인 제 2차 이탈리아 전쟁 중 세리뇰라를 공격하는 장면. 사진은 화가 토니 체코라로가 1998년 그린 판화.
율리우스의 취임 일성은 이랬습니다.
“보르지아 가문은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한 교회를 모독했다. 나는 그들이 썼던 공간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당신 없이는 난 아무것도 아니군요.” 체사레 보르지아 초상화.
1507년 체사레는 스페인 북부에서 나바르 지역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결국 사망합니다.
볼품없는 모습의 나체로 그는 길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보르지아의 멸문과 다름없었습니다.
보르지아는 ‘부패한 교황청’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뒤를 이은 교황들의 부패도 지속됐지요.
결국 사달이 터져나왔습니다.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구교와 신교로 쪼개지게 되었지요.
성모 앞에 무릅꿇은 알렉산데르6세. 자신의 정부인 줄리아 파르네세를 모델로 성모를 그린 작품이다.
화가 피에트로 파케티의 작품.
마키아벨리는 황망하게 죽은 체사레의 흥망성쇠를 돌아봤습니다.
그가 성공했던 비결을 이렇게 결론짓지요.
“선량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 메디치 가문에도
보르지아 가문처럼
교황령을 군주국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마키아벨리였지요.
체사레 곁에서 정치 이론을 연구한 니콜로 마키아벨리.
잔인하고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는
마키아벨리즘은 그러나 점점 도전받고 있는 추세입니다.
정치인의 악행을 옹호하는 것이 현시대에는 매우 이질적이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곧 총선이 시작됩니다.
번거롭더라도,
출마자들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시기를.
보르지아 가문처럼 끔찍한 정치인을 솎아낼 유일한 기회가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무심함은
또 다른 마키아벨리주의자를 키우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군주론’의 1550년판 표지. 원제는 ‘IL PRINCIPE’.
ㅇ명저 ‘군주론’의 모델은 중세 이탈리아 보르지아 가문의 체사레였다.
ㅇ체사레는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6세를 위해 암살·뇌물제공·섹스파티를 마다하지 않은 잔인한 인물이었다.
ㅇ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성공으로 정치와 도덕이 분리된 정치 이론을 전개했다.
ㅇ그러나 그의 군주론은 현대 정치에 점점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더 깨끗한 정치인을 원한다.(투표합시다)
이글은 아래 강영운 기자님이 쓴 기사의 글을 옮겨온 글이며
글 제목을 수정하고,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글을 요소요소 수정 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또한 가독성과 명확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구절에 색상처리와 문장을 분절, 행으로 분리했음도 밝힙니다.
매일신문의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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