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킨 소로야의 ‘해변의 아이들’. 1910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품. [ 대표작 ]
한 수도사가 소년 한명한명 바다 속으로 안내합니다. 치료를 위한 해수욕이었습니다. 장애인인 아이들은 잠시나마 물결의 일렁임을 느낍니다. 고된 일이었지만, 땡볕에서도 수도사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도사의 검은 옷 사이로 땀줄기가 비 오듯 흘렀습니다. 먼발치서 지켜보던 사내는 연민과 동정, 숭고와 같은 감정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제가 당신의 모습을 그려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이들을 자신의 캔버스에 담아내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유희의 장소인 이 바닷가에,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를 돕는 한 조력자가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습니다.
수도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러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발렌시아의 바다에서 치료차 해수욕하는 장애 아이들을 그린 ‘슬픈 유산’ [ 대표작 ]. 1899년.
화가였던 사내는 빠르게 붓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완성하지요. 제목은 ‘슬픈 유산’(Sad Inheritance). 매독에 걸린 부모로부터 장애를 물려받은 아이들을 의미했습니다. 화려한 지중해 바다와 대비되는 아이들의 슬픈 운명에 전 세계는 찬사를 보냈지요.
화가는 스페인의 대표 예술가로 떠오릅니다.
그의 이름은 호아킨 소로야.
스페인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 그를 사색합니다.
올해 8월 10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호아킨 소로야. 1909년.
부모 없는 아이로 자란 호아킨 소로야
호아킨 소로야는 1863년 2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언제나 화창한 날씨가 인간을 포근하게 품어주는 아름다운 도시였지요. 하지만 내면의 날씨는 늘 우중충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콜레라 대유행으로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작 2살에 고아가 되었던 것이지요.
소로야와 그의 여동생 콘차는 외삼촌에게 맡겨집니다.
자물쇠 제조공인 외삼촌 부부는 그들을 제법 잘 보살폈지만,
부모의 빈자리를 완전히 메워줄 수는 없었지요.
소로야는 슬픔을 그림으로 소화했습니다.
외삼촌은 그에게 자물쇠 제조를 가르쳐 주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소로야의 눈은 언제나 캔버스를 향해 있었지요.
재능을 보인 그에게 외삼촌 부부도 결국 지지를 보냈지요.
수도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찾아 명화를 습작하기도 했습니다.
호아킨 소로야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작품 ‘몬텔레온 공원을 방어하는 포병들. 1884년 작품.
꽤 재능있는 화가였습니다. 22세가 되던 해에는 이탈리아 로마와 파리에서 유학할 기회도 얻었지요. 마드리드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2등을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몬텔레온 공원을 방어하는 포병들’(1884년)이란 작품이었습니다. 침략자 나폴레옹에 저항하는 스페인 군대를 묘사한 그림이지요. 화가로서 첫발을 디딘 소로야의 그림에서는 다소 진중함이 엿보입니다. 가족사의 비애가 그림에 녹아든 것일 수도 있었겠지요.
소로야가 로마에서 머물 당시 그린 ‘미친 사람을 변호하는 호프레 신부’. 1887년 작품이다.
로마에서의 공부는 그를 한층 더 성숙한 화가로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르네상스 화가의 작품을 직접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디테일은 정교해졌고, 붓의 놀림은 더욱 거침없어졌습니다. 그의 그림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랑을 찾아 발렌시아로 돌아온 소로야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녀가 있는 발렌시아로요.”
약 4년의 공부를 마친 후 그는 스페인으로 귀국을 준비합니다.
예정보다 빠른 귀환이었지요.
17살 때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이 그리워서였습니다.
사진관에서 조수로 일하던 당시 알게 된 클로틸데 가르시아 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홀로 사는 삶’을 견디지 못했지요.
1886년 클로틸데 가르시아의 사진.
2년 후 그는 소로야와 결혼한다.
‘가족’이란 이름은 언제나 소로야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의 부재는 또 다른 욕망을 낳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예쁜 아이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꿈을 그는 자주 꾸곤 했습니다. 1888년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 클로틸데와 결혼에 성공합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도 셋이나 낳았지요.
검은 옷을 입은 아내 클로틸데.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화폭에 옮기다
결혼 후에도 그는 제법 괜찮은 경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림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연민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 노예’(Trata de blanca)로 불리는 작품이 대표적이지요.
기차로 끌려가는 매춘 여성의 현실을 그린 소로야의 ‘백인 노예’. 1894년 작품.
좁은 기차 칸에 두건을 머리에 쓴 젊은 여성이 잠들어있는 그림입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나이 든 여성은 포주이지요. 숙녀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그들은 도시 뒷골목에서 돈을 받고 남성을 상대해야 할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소로야는 날카롭게 그려낸 것이었지요. 물론 팔려 갈 소녀들에 대한 연민도 잊지 않았습니다.
두 노년의 어부가 젊은 어부의 상처를 보살피는 모습을 그린 ‘그들은 여전히 물고기가 비싸다고 말했다’. 1894년 작품. 시대상을 잘 묘사한 화가의 사실주의를 느낄 수 있는 작품.
소로야를 스페인의 대표 화가로 만든 작품은 앞서 언급한 ‘슬픈유산’(1899년)이었습니다.
바닷가에서 해수욕 치료를 받는 장애 소년들을 그린 그림이었지요. 그는 바닷가에서 아이들을 발견할 때의 감정을 그대로 적어났지요.
‘슬픈 유산’ 소묘.
“어느 날 아침 어부들의 스케치를 하고 있을 때, 저 멀리 한명의 사제와 가까운 거리에 벌거벗은 아이들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산 후안 데 디오스 병원의 아이들이었다. 장애인, 정신병자, 나병 환자가 찾는 곳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불행한 사람들의 존재는 나에게 고통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투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자신과,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의 처지는 닮아 있었습니다. 해수욕으로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의지에서 어린 시절 그림으로 슬픔을 달래보려 했던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 테지요.
그림에 담긴 아련함을 당대의 사람들도 느꼈습니다. 1900 년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대상을 타게 된 배경이지요.
이듬해에는 마드리드 국립 미술 전시회에서 명예 훈장 (medalla de honor)을 수상합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조감도.
가족을 예술의 영감으로 삼은 호아킨 소로야
예술은 도덕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하지요. 다양한 여성을 만나고, 또 쉽게 질려하면서 그 감성을 미적 감각으로 표현하는 예술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예술감각을 가지고도 방탕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부인에게는 끊임없는 사랑을, 세 아이들에게는 깊은 애정을 표현했지요.
그의 작품에는 가족이 모델로 서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1895년 호아킨 소로야의 ‘엄마’. 아내 클로틸데가 셋째 엘레나를 낳고 요양하는 모습을 그렸다. 엘레나는 후에 그의 아버지처럼 화가가 됐다.
그의 그림 ‘엄마’(마드레)를 보시지요. 새하얀 침대 위에서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사랑스레 쳐다봅니다. 아이는 쌔근쌔근 자고, 산모는 따뜻한 눈길로 아이를 보듬습니다. 아내 클로틸데와 셋째 딸 엘레나가 모델인 작품입니다. 그가 얼마나 가족을 사랑했는지 느껴지시는지요.
아버지의 무한 사랑을 받은 엘레나가 화가의 길을 택한 배경입니다.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 중 가족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았지요.
‘바닷가 산책’, ‘목욕,하베아’도 대표적입니다.
“자기야 예쁘게 그려줘. 늘 그랬듯이” 아내 클로틸데를 모델로 한 ‘바닷가 산책’. 1909년 작품.
“아빠, 또 그림 그려요?” 가족들이 해수욕 하는 장면을 묘사한 ‘목욕, 하베아’.
스페인식 루미니즘을 구현한 거장
“발렌시아의 빛으로 다가간 화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는 거장의 자리로 올라갑니다.
1900년에 파리 만국박람회를 다녀온 뒤, 그는 후기 인상주의의 화법을 체화하기 시작했지요.
자연의 빛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는 ‘외광회화’를 스페인식으로 소화해낸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지중해의 태양이 그의 캔버스에서 다시 빛났습니다.
스페인식 루미니즘이 꽃피기 시작합니다.
소로야의 1903년 작품인 ‘해변의 아이들’. 빛을 유려하게 구현한 작품으로 평판이 높다
‘소녀’. 1904년 작품.
‘말의 목욕’.(1909년)
그의 대표작 ‘해변의 아이들’ 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발렌시아 앞바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마치 지금이라도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은 느낌을 자아냅니다. 아이들 위로 내리쬐는 태양 빛은 또 얼마나 생생한지요.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였으니까요.
소로야가 그린 미국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초상화.
그림 속에서 살다가 그림으로 죽다
모든 예술가에겐 자신까지 집어삼키고 마는 ‘역작’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소로야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지요. 1911년 미국 히스패닉 협회가 그에게 작품을 의뢰합니다. 본토 스페인을 그리워할 이민자를 위한 그림이었지요. ‘스페인의 비전’이었습니다. 어느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지역의 풍경을 그려달라는 쉽지 않은 소명. 소로야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서울 아니 마드리드에서 온 화가 양반이래.” 토속적인 장면을 자신의 색감으로 구현한 ‘스페인의 비전’ 중 하나인 ‘카탈루냐의 물고기’.
소로야는 엉덩이가 무거운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려냈지요. 고관대작과 귀족들의 풍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장과 어물전에서 땀내 나는 서민들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전통 의상을 입고 서로의 풍속을 즐기는 남정네들과 여인들이 대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냄새 나는 그림입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아야 몬테’. 이 역시 ‘스페인의 비전’ 중 일부다.
위대한 작품은 때론 예술가를 무너뜨리곤 한다지요. 이 경우도 그렇습니다. 첫 의뢰를 받은 지 8년 만에 완성한 그 작품을 그린 뒤로 소로야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지요. 그 와중에도 그는 가족들의 그림을 그리며 이따금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가족이란 삶의 근원이자, 행복의 기원이었던 셈입니다.
“화가 양반, 그림 그만 그리고 여기서 춤이나 한판 추세.” 아라곤 지방 민속 무용을 묘사한 ‘라 호타’.
스페인의 비전 중 하나인 ‘카스티야 빵의 향연’.
‘스페인의 비전’을 완성한 다음 해인 1920년. 그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것이었지요. 3년 뒤인 그는 마지막 숨을 거뒀습니다. 물론 그의 옆에는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가족들이 함께였지요.
눈부신 태양만큼이나 빛났던 소로야
육신은 스러졌으나, 이름은 영원히 남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이름이 평생 스페인 사람들에게 기억되도록 애썼습니다. 소로야의 집과 작품들을 스페인 정부에 기증한 것이었지요. 1932년 소로야 박물관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소로야의 시원한 색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즐비하지요.
“사랑하오, 내 생이 다할 때까지.” 호아킨 소로야와 아내 클로틸데는 소울메이트 그 자체였다. 1922년 사진을 찍은 뒤 다음 해 소로야는 눈을 감았다. 아내 클로틸데의 품속이었다.
올해 8월 10일은 호아킨 소로야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그를 기리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곳에 직접 가긴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 푸른 바다의 윤슬에서 그의 조각을 발견합니다.
마드리드 소로야 박물관. 생전 소로야가 가족들과 함께 머물던 곳이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햇살을 담아냈던 그의 솜씨가 떠오르는 뜨거운 여름입니다. 그의 그림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가족을 향한 사랑, 인간을 향한 연민도 함께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호아킨 소로야의 자화상. 1909년.
<네줄요약>
ㅇ호아킨 소로야는 스페인식 인상주의 화가로 명성을 높였다
ㅇ그의 작품에는 약자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매독 후유증을 앓는 아이들, 매춘 여성이 대상이었다.
ㅇ2살 때 부모를 잃었던 그는 가족을 향한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ㅇ난봉과 방종을 예술의 동력으로 삼았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랐던 셈이다.
<참고문헌>
ㅇ호아킨 소로야, 바다, 바닷가에서, 에이치비프레스, 2020년.
이 포스팅은 매일경제의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님의 기사글을 옮겨온 것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내용의 글은 가독성을 위해 미미하게 수정했으며, 사진은 좀 더 크고 선명하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한곳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한 소녀가 서 있습니다. 꽃을 보면서 까르르 웃는 한 소녀에게서 그는 눈을 떼지 못했지요. 17살이 갓 지난 소녀는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인 역시 그를 사랑스럽게 여겼지요.
프랑스 화가 마리 드니즈 발레의 A woman‘s study from life.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지만 노인의 나이는 벌써 72세. 둘의 나이 차이는 50살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어이 그녀에게 ‘청혼’의 뜻을 전하지요. 노욕에 가득 찬 범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기의 대문호 괴테의 일화입니다. 사랑을 문학의 동력으로 삼은 그를 사색합니다.
“사랑은 숫자에 불과하다네 하하.” 독일화가 요제프 칼 슈틸러가 1828년 그린 노년의 괴테.
사랑을 문학의 원동력으로 삼은 남자, 괴테
노년의 사랑에서 보듯, 괴테의 삶은 꽤 욕망에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삶의 주기마다 불같은 사랑이 찾아왔고, 열정이 불탄 자리엔 문학이 자랐습니다. 첫사랑부터 끝사랑까지, 빠짐없이 명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는 타고난 작가였지요. 괴테를 알기 위해서는 괴테의 연인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독일 화가 게오르크 멜키오르 크라우스가 1775년 즈음 그린 괴테.
괴테는 젊은시절부터 꽤나 많은 사랑을 한 정열의 사나이였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줄여 괴테로 통용되는 이 사내는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시민 계급의 아들이었지요. 독일 북부 지역 법률가인 아버지로부터는 근면한 생활태도를 배웠고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는 이야기를 짓는 능력을 물려받았지요. 서민 집안에서도 유복했고 그 덕에 마음껏 고등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우연히 빠진 삼각관계...대작의 씨앗
16살 때 라이프치히에 입학하면서 그는 몇몇 풋사랑을 경험하지요. 보다 강렬한 사랑의 경험은 그가 23살이던 해 찾아옵니다. 인구 5000명의 작은 도시 베츨라르에서였습니다. 변호사 경력을 시작하려고 이곳을 찾았습니다.
괴테가 근무한 독일 베츨라르 사무실. <사진=Andreas Praefcke>
새 도시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도시는 유서 깊었지만, 인습이 켜켜이 쌓여있는 느낌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낯선 법원에서 변호사로서의 경력 시작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앞섰지요.
“혹시 연인 있으세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보다는 불안이 가득한 나날이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불현히 찾아왔지요. 무도회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만난 ‘그녀’ 때문이었습니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아침이슬처럼 영롱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소재로 가벼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샬럿 버프라는 것까지 알게 됐지요.
샬럿 버프와 그녀의 약혼자 캐스트너와의 삼각관계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이어졌다.
기대는 언제나 실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무도회장에서 그녀가 어떤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몸이지요. 잠깐이나마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성이던 괴테. 샬럿테의 약혼자였던 캐스트너와도 우정을 잠시 쌓았지만, 공허함은 커집니다. 결국 샬럿테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지요.
반(半)자전적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문학이 나를 구원하리...”
괴테는 사랑으로부터 저주받았고, 문학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사랑의 생채기를 자신만의 미문(美文)으로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랑에 아파하는 유럽의 시민들 역시 그의 문학에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두 번째 사랑이 끝났을 때 만든 작품이 그랬지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년 초판본. <저작권자=H.-P.Haack>
주인공 베르테르는 삼각관계에 괴로워하다
사랑하는 여인 로테가 자신의 라이벌과 결혼하자 죽음을 결심합니다.
마치 젊은 괴테가 샬롯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괴로워하듯이요.
괴테의 친구인 칼 빌헬름 예루살렘 역시 약혼자가 있는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후
고뇌하다가 죽음을 택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두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지요.
유럽의 스타작가가 된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유럽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20대 중반의 작가 괴테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요.
유럽의 모든 귀부인과 고관대작들이 그와의 만남을 기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베르테르 열병’이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었지요.
젊은이들은 작품 속 베르테르처럼 옷을 입었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소설을 읽고 따라 자살하는 일까지 생겼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지요.
기독교 국가에서는 ‘자살’은 죄악과 같았기에, 덴마크와 이탈리아에서 이 소설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자살한 베르테르의 무덤을 찾은 샬롯을 묘사한 그림. 작자미상 1790년대 작품.
이 작품이 당시 유럽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건 전형적인 격식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주제와 표현방식에서 보더라도 틀에서 벗어났지요.
사랑에 아파하고, 정열이 불러온 격정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그는 고스란히 담아 냈습니다.
베르테르는 세상과 조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열 떄문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낭만적인 ‘영웅’의 원형이었습니다.
베르테르와 샬롯을 묘사한 그림.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진 것을 상상해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그저 ‘치정극’으로만 해석되지 않는 깊이를 보여줍니다.
작품 속에서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봉건 귀족 계급에 의해 좌절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을 묘사하면서입니다.
사회의 위선을 베르테르의 눈을 빌려 고발했던 것이지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귀족은 될 수 없었던 괴테 본인의 문제의식을 작품으로 녹여냈던 셈입니다.
이전 문학이 전설·역사를 주제로 현실과 괴리된 것과는 명확히 달랐지요.
괴테는 그만의 독창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가였습니다.
‘질풍노도’ 문예사조를 이끈 괴테
모든 대문호가 그러하듯, 괴테의 이전과 이후의 문학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 개인적 체험을 담아낸 작품들이 많아지면서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질풍노도’라고 불리는 ‘슈트룸 운트 드랑’ 운동이었습니다.
독일문학은 이제 유럽의 중심으로 발돋움하지요.
영국에서는 문화적인 유행이었고, 나폴레옹은 이를 7번이나 정독한 걸로 유명합니다.
문학사가들은 이 시기를 ‘괴테의 시대(Goethezeit·괴테자이트)’라고도 불렀지요.
“괴테, 나도 당신의 책을 보고 울었다오.”
괴테의 후원자가 되어준 작센-바이마르대공 샤를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1757-1828). 독일 화가 하인리히 콜베의 작품.
그는 더 이상 ’서민‘ 괴테가 아니었습니다.
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칼 아우구스트가 그를 직접 궁전에 초빙한 뒤였습니다.
공작은 괴테를 직접 궁전의 수석 고문으로 임명하지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름에 귀족에게만 붙는 ’Von‘이 붙는 이유입니다.
전폭적인 후원 아래 여러 인사들과 우정을 쌓았지요.
’빌헬름 텔‘로 유명한 독일의 대표작가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실러도 그 중 한명이었습니다.
독일의 또 다른 대문호인 [ 프리드리히 쉴러 ] 는 괴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금지된 사랑을 즐긴 괴테
“부인, 사랑합니다. 당신이 남편이 있더라도요.”
성적 욕망을 그는 문학의 불쏘시개로 삼았습니다. 바이마르 공국에서 머물 때에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7살 연상의 샬로테 폰 슈타인이라는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이를 작품으로 소화했지요. 그녀가 유부녀였던 탓에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런데도 편지를 1800통이나 주고받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이어 나갔지요. ’쉴 사이 없는 사랑‘, ’달에게‘ 등 그녀와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사랑이여, 너는 삶의 왕관이다. 쉴 사이 없는 행복이다.” -쉴 사이 없는 사랑 中-
7살 연상의 유부녀였음에도 괴테와 정신적 사랑을 나눈 샬럿 폰 슈타인
괴테의 문학 인생에서 “최고로 정열적인 상태의 산물”은 ’마리엔바트 비가‘였습니다. 그의 나이 74살인 1823년에 쓴 작품이었지요. 19살 소녀와의 결혼이 물거품 된 뒤의 감정을 담았습니다.
괴테는 2년 전 만난 울리케 본 레베초브에게 끌렸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나이를 되뇌면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의 애착을 보여주곤 했었지요. 그런데 어느새 그 마음은 사랑과 정열로 변했습니다. 침대에 누운 노인은 밤마다 소녀와의 사랑을 상상하면서 잠들곤 했었지요.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요. 15년 전에 울리케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기억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괴테의 마지막 사랑으로 통하는 울리케 폰 레베초브.
둘의 나이 차이는 55살이었다.
오랜 기간 마음을 키워 온 괴테였습니다. 삶이 끝나기 전에 그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었지요. 그는 자신의 주군이자 친구이기도 한 바이마르 공작에게 ’청혼‘의 의사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완곡한 거절로 전해집니다. 시의 제목이 ’마리엔바트의 비가‘인 이유이지요.
슬픔과 비애로 가득했지만,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았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승마냥, 시구(詩句)와 시어(詩語)를 모아 자신의 마음을 써 내려갔지요.
요한 티슈바인이 그린 이탈리아 여행 중인 괴테
괴테는 어릴 적부터 노년까지 끊임없이 사랑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를 자신의 작품에 녹였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 침묵할 때, 신은 내게 고통받음을 말할 재능을 주셨네. ···떨칠 수 없는 그리움만이 나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네, 끝없는 눈물만이 남아있네.” -마리엔바트 비가 中-
황혼에 접어든 노인의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격정이 묻어납니다. 사랑의 정열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괴테가 펜을 쥘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 뒤에는 실연의 상처 있었다
마지막 사랑이 끝난 뒤엔, 마지막 정리도 함께 시작됩니다.
그가 미처 쓰다만 여러 작품이 토막 나 있었고,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60년 동안이나 완결을 짓지 못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파우스트‘였습니다.
악마 메피스토로부터 세상의 온갖 명예·부를 가질 수 있다는 유혹을 받는 현자 파우스트의 이야기지요.
프랑스 화가 장 폴 로렌스가 그린 파우스트 박사.
괴테의 작품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예술계에서 파우스트는 단골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현자 파우스트가 악마로부터 힘을 받은 후 한 첫 번째 행동은
10대 소녀이자 순수하고 순결한 그레트헨을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레트헨은 실제로 괴테의 첫사랑 이름이었지요.
실패한 첫사랑을 모델로 삼아 문학으로 구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93년 그린 모젤강 인근.
프랑스 국경을 표시하는 기둥에는 ‘Cette terre est libre’(이 땅은 자유다)고 적혀있다.
그는 문학과 그림에도 소질이 있는 팔방미인이었다.
현자 파우스트는 물론 괴테 본인이었지요.
문학이 그리는 허구세계에서라도 그는 사랑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었을까요.
괴테의 첫사랑인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의 첫 문장을 쓰게 했고
그의 마지막 사랑 울리케는 파우스트를 매조짓게 했습니다.
70대 노인의 노욕이 시대를 정의하는 명작의 동력이었던 셈이지요.
죽음 뒤에도 이어진 괴테의 시대
죽음 이후에도 ’괴테자이트‘(괴테의시대)는 계속됐습니다.
후대의 음악가와 철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추앙‘했기 때문이었지요.
베토벤은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계획도 세웠을 정도입니다.
베토벤은 공공연히 “파우스트 교향곡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이마르에 마련된 두 사람의 동상
괴테와 실러는 독일 문학을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영국의 작가 토머스 칼라일은 괴테와 연관된 수많은 작품으로 그를 기렸습니다.
1919년 독일의 제헌의회가 헌법을 작성하고
승인한 장소로 수도 베를린이 아닌 바이마르를 선택한 것 역시 괴테의 영향으로 알려졌지요.
“예술가에게 자유를 그러면 그들은 더 큰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는 격언 괴테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반면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빈약한 상상력의 예술가들이 이 땅에는 너무 많습니다.
1999년 발행된 괴테 기념 우표.
ㅇ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사랑을 문학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ㅇ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한 뒤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ㅇ74세에 19살 소녀에게 청혼한 뒤 거절당했다. 이 아쉬움으로 ‘파우스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ㅇ우리는 괴테가 아니다. 사랑에도 선을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