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고 낯 두꺼운 친일부역 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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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_1

 

 

저명한 친일작가는

문학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로 인해서,

혀진 친일작가는 문학사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친일기록이 문학사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장을 연 문인들에 대해 가르칠 때마다

일제에 협력 민족을 배반한 과(過)를 함께 가르치지 못. 

저자 30년 국어과목을 가르치고 교단을 떠나면서 느낀 마음속의 짐 때문에 이 책을 집필.

저자는 친일파 연구의 고전 임종국<친일문학론>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을 넘나들면서 부역문인들의 친일작품 목록과 내용들을 정리. 

 

 

친일파,친일문인에 대 얘기하다 보면

임정100년, 독립100년의 역사를 따로 떠올리게 된다. 

친일문인의 일제강점기 행적 독립운동가의 삶과 따로 떨어진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며,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반독재, 반쿠데타 민주주의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남한 현대사에서 친일문인들이 메인스트림에서 밀려나지 않고

전 생애를 주류로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해방 후 승승장구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이

현대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굴절시켜 왔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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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철(저자)  국문학 전공. 1984년 안강여고 임용.

                      이후 순심고,지보고,의성여고,안동여고,구미고 국어,문학교사. 2016년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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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사 - 친일문학을 아직도 따져야 하는 이유 - 임헌영. 문학평론가, 민족문제연구소장.

 

"춘원은 산을 좋아했다.

여생을 산에서 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아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범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 피천득. 수필 <춘원>.

 

 

"세상 떠난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서 아무개(서정주) 같은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가 없어요.

일제 뿐만 아니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랬어요.

작가는 인격,인품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또 문학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물건은 다 버려도 자기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인품이 좋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 피천득.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파인 김동환의 3남 김영식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경찰에 투신해 총경까지 지냈고,

만년에 아버지의 모든 작품,행적,평가를 전집으로 엮었.

김영식은 친일을 사죄할 겨를도 없이 사라진 아버지를 대신해 선친의 죄과를 인정하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도 가입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친일문학

나치 부역자들을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의 이념에 따라

고유의 전쟁범죄, 평화에 대한 전쟁범죄, 인도에 대한 전쟁범죄까지 두루 다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는 여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흔히 그까짓 글 몇 줄 썼다고 그리도 가혹하게 심판하느냐는 건

친일행위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무시한 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전쟁범죄와 같은 궤도에 위치한다.

 

 

친일문학 예술 

단순히 학도병에 지원하라는 식의 구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발성으로 끌어내는 확고한 *이데올로기 구조를 갖췄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소멸되지 않기에 계속해 이식,번식,증가한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또한

겉으로 들어난 친일행위 자체만 문제가 아니라,

사상사적인 이데올로기가 뿌리깊게 박혀 씨앗이 퍼뜨려지기 때문이다.

 

 

친일파 옹호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강조하고,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며,

나아가 부추기기도 하는 극우파적인 이데올로기.

인종편견, 신앙편견, 약소국 억누르기,

자국이익을 위해서 무력침략을 감행해도 좋다는 *파시즘적 가치관을 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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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_Ideology : 어떤 개인이나 사회 집단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추상적이면서도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

                                      주의_主義, 이념_理念이나 사상_思想으로 번역할 수 있음.                 

                                      일반적으로 '정치 이념'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는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됨.               

                                      [참고] 개인의 이데올로기를 검증하는 행위를 사상검증이라고 함.

 

파시즘_Fascism : 일반적으로 포퓰리즘에 기반한 민족주의 와 국가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제3의 위치를 표방하며 군국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민족의 결속과 생존권의 확립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전체주의적 사상,

                              혹은 그러한 지배 체제를 의미함.

                              그러나 파시즘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합의된 정의는 없음.

                              이는 파시즘이 매우 모호하며, 국가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사상이기 때문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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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친미파, 독재권력 옹호, 민주화운동 반대, 평화통일 반대, 개혁과 개방 반대,

노동자 농민 관점이 아닌 재벌 상류층 이익 옹호,

사회복지보다 성장일변도의 신화 옹호, 해외파병 지지, 국가보안법 지지,

미국의 대북강경정책 지지, 일본의 대북강경책 지지, 박근혜식 국정교과서 지지, 이명박,박근혜 지지,

태극기부대 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따라서 촛불혁명과 친일문학은 너무나 궁합이 안 맞고,

남북 민족화해와 평화의 시대와도 걸맞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혐의가 있는 문학인에 대한 각종 기념행사,추모,유적지건립 등은

이 쟁점이 분명해질 때까지 억제하는 것이 진정한 문학인의 자세일 것이다.

 

 

드골문학예술인에 대해선 어떤 탄원,구명운동도 외면했다.

"그들이 도덕과 윤리의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_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_惡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학예술가들은 시대의 악을 규정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의 문학인이란 오늘의 문인과 달리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랬기 때문에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 유독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글머리에 - 문학을가르치면서 느낀 갈증

 

문학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개화기 전후의 우리 현대문학사를 설명할 때마다 갈증을 느끼곤 했다.

신체시,신소설,자유시,현대소설 등 개화기와 현대문학을 여는 첫 작품을 쓴 문인들은

모두 친일부역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를 쓴 최남선'보람있게 죽자' 따위의 글을 써

식민지 청년들에게 학도병 출전을 권한 인물이다.

 

신소설 <혈의 누>(1906)를 쓴 이인직

일본군 통역,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 한일병합 교섭 등 매국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첫 자유시 <불놀이>(1919)를 발표한 주요한

황민화에 앞장서는 시집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였다.

 

최초의 현대소설 <무정>(1917)을 쓴 이광수 역시

최남선과 함께 초기 민족주의 활동을 벌이다 변절한 대표적 친일부역자였다.

 

유독 친일파가 많은 분야가 문단인 것은

글쟁이들이 자기합리화와 정당화에 능란한 이들이기 때문이라는 농담은 가볍지 않다.

이른바 文弱이라는 낱말의 함의가 이들 문인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기록을 참고해 가며 책을 읽다가 확인한 것은,

이문열"그때 태어났다는 것, 그때 살았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관련해 진행된 친일청산 논의에 대한 이문열의 물타기에도 불구하고

일은 우리 민족사의 오욕이요 현실이다.

일제의 식민지배 35년이 현실이듯,

친일부역의 길을 갔던 이들에 대해 역사적 단죄가 비켜 간 것도 우리 역사의 일부다.

 

 

 

 

 

 

 

 

 

 

1. 이광수(1892~1950)- 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려 했건만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2인 문단 시대를 이끈 1910년대의 주인공이었다.

최초의 현대소설로 평가받는 <무정>(1917)

우리 문학이 여전히 신소설 류의 서사에 머물러 있을 때 장편소설 하나로 단박에 이 땅의 현대를 그려 냈다.

 

 

이광수일진회의 추천으로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세이(大成)중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학비를 마련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메이지(明治)학원 보통부 중학 3학년에 편입했다.

1915년 김성수의 추천으로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고, 이후 철학과 특대생이 되었다.

 

 

1925년 발표한 <민족개조론>

일제 지배 하의 자치를 주장한 민족개량주의자들에게 환영받은 대신,

애국지사와 청년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

이는 훗날 이광수의 변절을 예고하는 조짐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진무 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하신 곳이 가시하라인데,

여기에 있는 산이 가구야마(香久山)입니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향산(香山)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光자를 붙이고, 수자는 내지식의 郞으로 고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이라고 한 것입니다." 

- 이광수. <매일신보> 1940.1.05.

 

 

이광수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7년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 난 이광수는,

이듬해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다.

결국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그는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광수의 친일행적은 눈부셨다.

 

 

그는 창씨개명

'내지인과 차별없이 되기 위한 노력'에 전력을 다했다.

황실중심 사상과 그에 관련된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고,

'우리들의 천황이 사용하시는 말을 우리 국어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혼상례의 일본식화, 의례준칙의 일본화, 일본적 실내장식의 도화섭취, 식생활의 일본적 개량' 등을 권장했다.

 

 

이광수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를 국어로 받아들여 마침내 황국신민 가야마 미쓰로로 변신했다.

즉 말하자면,

모국어(조선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작가라는 자신의 고유한 문학적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다.

한일병합 27년,

결국 당대 최고의 작가는 이로부터 민족을 등지는 길로 나아갔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어에 대해 일종의 애착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천황께서 쓰시는 말을 우리의 국어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어로 일본의 국어를 삼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한 두 개의 국어를 병용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 이광수. <반도의 형제자매에게 보냄>. 1941.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로서 있을 수 없는 자기부정이었다.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 이광수.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 1940.

 

"그동안 조선사람 남자들은 병정이 못 되었으니 반편 국민 노릇을 한 셈이었습니다.

내후년부터야 옹근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 이광수. <징병과 여성> 1942.

 

"한 번 병역의무를 치르고 남으로써 완전한 국민이 된다.

병역을 안 치른 국민은 반편이다. 그러므로 징병이 고맙다는 것이다." 

- 이광수. <앞으로 2년> 1942.

 

 

해방 이후 그(이광수)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1948년 <나의 고백>에서

그는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기의 행위가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苦肉之策이었다"고 강변했다.

 

1949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여전히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광수는 1950년 7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10월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2. 김기진(김팔봉, 1903~1985) - 황민문학으로 투항한 계급문학의 전사

 

 

1943년 8월 1일부터 징병제가 시행되고,

10월 육군특별지원병 채용 시행규칙이 공포되면서 학도병제도가 실시되었다.

"한 사람에 천년의 목숨 없고, 천 살을 산들 썩어 살면 무엇에 씁니까!" 

- 김기진. <나도 가겠습니다 - 특별지원병이 되는 아들들을 대신해서> 1943.11.06.

 

 

해방 후 김기진은 반민특위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자수하거나 체포된 일 없이 공소시효인 8월 30일을 넘겼다.

 

이후 육군종군작가단에 입대해 전선문학에 해당되는 글을 썼고,

1952년에는 금성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다.

 

불과 7~8년 전

동포청년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몰던 친일부역자에게

훈장이 내려지는 일화 속에는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우리 역사의 단면이 어른거리고 있다.

 

프랑스의 전후 청산과정에서 문인,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대상에 오른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작가, 언론인 32명 중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중 7인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35년 동안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우리는 단 한 명의 문인도 단죄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말의 참회도 없이 해방조국의 과실을 챙겼다.

김기진한국펜클럽과 한국문화협회 고문, 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문화훈장을 받았다.

김기진은 1985년 5월에 죽었다.

 

 

신군부 집권기간 중이었지만 기득권 세력에게 세상은 언제나 태평성대였다.

1989년 한국일보사에서 그(김기진)의 문학을 기리는 팔봉비평문학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문인을 기념하는 문학상 중 김동인,서정주를 이어 세 번째로 제정된 문학상이다.

 

 

2013년 두 명의 음악가가 홍영후(홍난파)의 친일전력을 이유로 난파음악상 수상을 거부했다.

제정된 지 46년 만에 수상자 선정이 무산된 것이다.

팔봉비평문학상은 유명 비평가들이 수상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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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은 친일이고 상은 상일 뿐일까?

미당문학상,동인문학상도 마찬가지다.

가장 어둡던 시대의 아픈 자취를 짐짓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우리 문학사의 우울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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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동인(1900~1951)- 문필보국(文筆報國)의 전범 

 

김동인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0년대 후반이다.

히가시 후미히토(東文仁)창씨개명한 김동인의 친일행위

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후 본격화된다.

 

 

그는 역사소설을 통해 이른바 황민화운동과 내선일체의 선두에 섰다.

 

"조선의 역사소설은 마침내 김동인에 의해서 조선역사를 버리고 일본역사에서 취재하는 난센스를 빚어 냈다."

- 임종국.

 

장편소설 <백마강>(1941)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일본 제국주의체제)에 즉응해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 한 작품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자 일본이 구원하러 온다는 내용으로,

내선일체의 역사적 연원을 끌어내 부여신사 건립시책을 다뤘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선일체의 당위를 선전하고자 한 부역문인들은

대체로 한일고대사를 매개로 부여신사의 역사성을 강조하곤 했다.

 

 

"대동아전이 발발하자 이제는 내선일체도 문젯거리가 안 되었다. 지금은 다만 일본시민일 따름이다..." 

- 김동인. <감격과 긴장> 1942.

 

 

"조선에도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됐다. 병역이란 단지 국민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특권이다." 

- 김동인. <반도민중의 황민화 - 징병제 실시 수감>. 1944.

 

 

"학병제야말로 조선인의 황민화의 정도, 조선인의 일본인적 애국심의 강도를 다루어 보는 저울이다." 

- 김동인. 1944.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김동인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물론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를 거절했다.

 

 

해방 이후

김동인은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변명했다.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를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내 내에서의 저항행위"라고 주장했다.

김동인은 1951년 사망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1955년 월간 <사상계>에서 제정했고,

이듬해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1953년 장준하가 창간한 진보잡지 <사상계>

동인문학상을 제정한 속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광복군 장교로 싸웠던 민족주의자 장준하

하필이면 친일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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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지성인을 대표한다는 <사상계>는 미국의 아바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장준하는 역할에 적당한 아바타였다.

그가 미국 OSS와 인연을 맺은 건 1940년대다.

임시정부에 있을 때 굿펠로가 준비하던 한반도 진공작전에도 참가했다.

국내에서는 미군 방첩대(CIC) 출신 교관이 군사훈련을 가르치는 동안 자신은 정신교육을 맡았다.

이후에는 목회를 했다.

평안도 출신으로 반공주의로 똘똘 뭉친 개신교와 정서적 교감이 많았다.

반공,친미가 내재화된 상태로 볼 수 있다... 김성해. <지식패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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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은 이 밖에도

조연현문학상,육당학술상,팔봉비평문학상,무영문학상,미당문학상 등 무려 10개나 운영되고 있다.

 

제1회 동인문학상 심사위원 9명 중

김기진(김팔봉),백철,최정희,이무영,정비석,이헌구친일문인 42인에 포함된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친일문인 문학상

수상자,심사위원으로 하여금 친일행적에 관대한 입장을 취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언론사가 친일문인 문학상 운영에 힘씀으로써

마치 문인들에 대한 사회적 승인기구인 양 행세하는 것은 더 큰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들이 수상을 거부한 전례는 많지 않다.

 

동인문학상의 경우 황석영(2000),공선옥(2001),고종석(2003)이 각각 후보작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문학은 모국어를 통해 민족의 고유한 정서,사상,세계관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유명 시인,작가들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추인하고

그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역사에 대해 피치 못할 정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김동환(1901~?) -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북청 물장수> <국경의 밤> <웃은 죄> <산 너머 남촌에는>...

<산 너머 남촌에는>이라는 대중가요는 1965년 김동현이 작곡하고 박재란이 불렀다. 

출처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BpBKT8FFdws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김동환<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에서 "이기지 못하거든 죽어서 돌아오라"고 강변했다.

"아들아 오늘 나아가거든 마지막까지 참고 버티어서 끝끝내 이기고 돌아오라.

이기지 못하겠거든 신던 신 한 짝이라도 이 아버지는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 줄 알아라." 

- 김동환.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 1944.

 

 

1949년 2월 김동환반민특위에 자수해 수감되었다가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구차한 궤변으로 친일행위를 변명하지는 않은 듯하다.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자수한 뒤 그는 행방불명되었다.

부친의 일대기를 펴낸 셋째 아들 김영식이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 학술심포지엄에서

부친(김동환)의 친일죄과를 사죄한 것특기할 만하다.

 

 

 

5. 김억(1896~?)-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우리 나라 신문학의 첫 장을 연 사람들 대부분이 친일파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김억도 그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 상징파의 詩를 중심으로 한 조선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와,

조선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1921)을 출판했다.

 

 

평북 정주의 부유한 종가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한 김억은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모교교사로 일하며 김소월(1902~1934)을 가르쳤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길은 어긋났다.

김소월민족주의적 성향과 달리, 김억친일로 기울어져 간 것이다.

 

 

김억은 1937년 조선총독부의 문예를 통한 황민화 정책 실천을 위해 발족한

조선문예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친일의 길로 접어든다.

 

 

문인들의 친일행위에는 필수적으로 징병제 찬양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일제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억詩를 통해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침략전쟁에 나가 희생할 것을 선동했다.

"맘들은 한데 모아 역천은 부서지고, 님 따라 손 높이 들고 나설 때는 왔나니." 

- 김억. <님 따라 나서자> 1944.

 

해방 후 김억은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육군사관학교,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 전신) 강사를 지냈다.

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된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6. 김종한(1914~1944) - 덧없는 이미지와 서정성

 

 

김종한은 1940년 니혼(日本)대학을 졸업하고,

1942년 귀국해 조선문인협회가 개최한 좌담회 '일본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에 참석하는 등

징병제의 선전,선동에 동원되었다.

 

김종한30년의 짧은 삶을 고려하면 문단에서의 위상은 크지 않았고,

일제의 겁박이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른 전후 젊은 문인들의 친일은 자발적 친일로 규정되곤 한다.

노예의 길이란 선택이 힘들 뿐, 거기 일로 나아가는 데는 거침이 없는 법이다.

 

김종한의 전쟁 소재에 대한 천착은 징병 이후까지 이어졌다.

그는 詩 <초망(草莽)>에서

징병에 아들을 빼앗긴 채 늙은이와 여자들만 남은 시골농가의 비참한 풍경을 그린다.

국민문학자들은 이런 가정을 명예 유가족의 집으로 찬양하고 치켜세웠다.

"이끼 앉은 초가지붕에는 흐트러진 머리칼 같은 잡초가 무성해 있다.

'자식 복이 많으셔서요' 하고 안내하던 구장이 웃었다.

'내년엔 셋째 놈도 적령이래요'... 흙담 위에 두러누운 채로 호박 두어 개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 김종한. <초망> 1943.

 

 

자식 복을 들먹이며 셋째도 적령이라는 구장의 말... 잔인함의 정도를 넘는다.

그걸 천연덕스럽게 묘사한 김종한에게는 다행히 처자가 없었다.

런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당신의 아들에게도, 어머니! 드디어 징집의 날이 가까이 왔다!" 

- 김종한. <오늘은 욱군기념일> 1943.

 

민족과 모국어를 등진 시인의 시첩에 남은 詩는 고작 몇 편이다.

낯부끄러운 친일시에 남은 이미지와 서정성은 한갓 신기루일 뿐이었다.

 

 

 

7. 노천명(1912~1957)-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시인 노천명<사슴>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한 퀴즈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이 과감히 기린이라고 답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목이 길기로는 기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기린도 목이 길어서 슬픈가?

 

노천명이 친일에 참여한 것은 1940년대다.

2차 대전이 치열해지자 남자들만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애국금차회를 통해 금비녀를 헌납하고, 군복수리 등에 동원되었으며,

말기에는 정신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노천명<부인근로대>는 군복수리에 동원된 부인을 통해서 총후(銃後)의 각오를 노래한 것이었다.

문인들의 친일행위를 들여다보면

일정한 시기를 지나면서 반민족적 일탈이 매우 위태위태하게 치달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자기부정과

굴욕의 수사들 넘어 최소한의 민족적 정체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

노천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친일에 대한 변명,해명도 따로 보이지 않으니, 일말의 갈등이나 번뇌조차도 상정해볼 수 없다.

노천명의 친일은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기까지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다면 나도 사나이였다면

귀한 부르심을 입는 것을.   

- 노천명.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1943.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 노천명. <군신송> 1944.

 

 

"대동아전쟁의 승패는 결국에 있어서 적국 여성들과 일본여성의 근로투쟁에 있을 것입니다...

유복자의 외아들을 전지로 바치는 늙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엊그제 혼인한 남편을 특별지원병으로 내보내는 젊은 아내도 있었습니다...

여자정신대는 이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 

- 노천명. <싸움하는 여성> 1944.10.

 

바칠 외아들도 남편도 없었던 것이 노천명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노천명은 다른 친일문인들과 달리 불운했다.

1957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8. 모윤숙(1909~1990) - 영욕을 오간 렌의 선택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

쌀도 나무도 옷도 다 아끼십시오. 나라를 위해서 아끼십시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만은 아끼지 맙시다.

아들의 생명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저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바꿔 전쟁마당에 쓸모있게 던집시다." 

- 모윤숙. <여성도 전사다> 1942.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1951.

 

위의 두 글은 지은이가 같고, 두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愛國이다.

물론 애국의 대상은 명백히 다르다.

두 편의 글에 모윤숙멘탈리티가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듯하다.

현란한 변신가히 無碍의 경지라 할 만하다.

 

 

모윤숙친일 詩 <아가야 너는>

일부만 개작해 해방 직후 <등대지기 아가>라는 제목으로 시집 <옥비녀>에 실렸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어떤 정서와 이념의 변화 없이 일부 구절만 바뀌어 이 詩는 살아 남았다.

장차 일제의 전사가 될 대동아의 아들이 졸지에 순진무구한 등대지기가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친일부역 행위에 골몰하다

이내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전선에 서는 모윤숙의 무한변신을 닮았다.

 

해방 후 친일부역자들은

신생조국에서도 일제강점기에 누렸던 기득권을 잃지 않고 너끈히 간직할 수 있었다.

 

 

모윤숙은 해방 후 이승만의 노선을 따르면서 외교활동을 벌였다.

UN한국임시위원단 단장인 메논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메논이 애초의 뜻을 뒤집고 남한만의 총선을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영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뛰어난 지식인 여성을 모아 낙랑클럽을 조직

정부고위관리,군장성,주한외교사절 등을 대상으로 사교활동을 벌여

이승만 정부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로비를 전개했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0년에는 <황룡사 구층탑>으로 3.1문화상을 수했다.

 

3.1정신을 계승한다는 이 상은 <친일인명사전>의 문인 조연현,백철,최정희도 수상했다.

 

 

1990년 모윤숙은 80세로 사망했다.

정부1등급의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인간에 대한 평가로 흔히 功過를 논한다.

쿠데타로 민주헌정을 짓밟은 박정희의 過

조국근대화라는 功으로 상쇄되다가 결국 슬그머니 지워진다.

 

 

식민종주국을 위해 동포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몬 친일부역자 모윤숙과_過

신생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으로 덮어질까?

설령 그런 타협이 우리 역사의 아쉬운 선택이었다 치더라도 그것이 성찰 없이 추인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9. 박영희(1901~?) - 문학도 이데올로기도 모두 잊혀진 문인

 

 

 

박영희의 詩 <월광으로 짠 병실>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었다.

1920년대 초기 병적,퇴폐적 낭만주의 경향이 여과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카프(KAPF) 따위의 낯선 낱말들 틈바구니에서 박영희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다."라는 유명한 글귀를 남겼다.

 

 

카프를 주도한 박영희친일문인으로 변신한 것은 1938년 이후로 보인다.

박영희는 1936년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에 따라 만들어진 경성사상범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었는데,

이는 박영희의 친일동기를 생존에 두는 견해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1939년 박영희황군위문작가단 단장으로 김동인 등과 함께 중국을 다녀왔고,

이광수 등과 함께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위한 조직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일제가 창씨개명 정책을 시행하자

가야마 마쓰라가 된 이광수의 방식을 따라 박영희도 잽싸게 요시무라 고도로 개명했다.

일제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경우

대부분 한 글자를 추가하거나 성씨를 두 자로 분리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들은 성과 이름을 전부 바꾼 경우다.

 

"조선사람이 소설 한 권을 읽고 황국신민의 진의를 깨달을 때에

문학은 훌륭한 무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 박영희. <문학의 새로운 과제> 1941.

 

 

해방 후 박영희중등학교 교사, 대학강사 등을 지냈고,

1949년 국민보도연맹 선도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납북되었고, 이후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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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_ 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계급 의식에 입각한 프로 문학을 조직적으로 추구한 문학예술 단체

         [문학] 계급 의식에 입각한 프로 문학을 조직적으로 추구한 문학예술 단체.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PASKYULA) 두 단체의 결합으로 1925년에 조직된 후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나 내부 갈등과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5년에 해산하였음.

                   카프에 속한 작가들의 작품에는 빈부의 문제가 자주 등장함.

                   최서해, 주요섭, 이기영 등이 카프 초기의 주요 작가들임.

 

 

         [참고1]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朝鮮prolétariat藝術家同盟), 프로예맹(prolétariat藝盟)

         [참고2] 프로레타리아(prolétariat) 계급(무산계급) < -- > 부르주아(bourgeois)계급(유산계급)

염군사_焰群社 : 1922년 9월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단체.

                           해방 문학의 연구와 운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내세웠으며

                           직접 정치 활동에 참여하였음.

                           기관지인 ≪염군≫을 2호까지 편집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음...............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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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_2

 

 

 

10. 서정주(1915~2000) - "친일은 하늘 뜻에 따랐다."

 

 

 

서정주는 적어도 이 나라에서 시인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교과서마다 다투어 그의 시를 싣고,

나이 지긋한 시인들 중 상당수가 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제자들이다.

진보문학 진영의 원로 고은도 그의 제자였지만, 1970년대 민중시를 쓰면서 결별하게 된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詩 <자화상>은 23살 때 쓴 시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부친은 종이 아니라, 전북 고창의 거부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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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 : 지주 대신에 소작지를 총괄하여 관리하는 사람.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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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가 문필로 친일대열에 합류한 것은

1942년 <매일신보>에 평론 <詩 이야기 - 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시작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또 좋은 述語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하고 있다..."

불과 27살의 젊은 시인이 동방전통의 계승과 보편성에의 지향을 내세우면서

근히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정주주로 詩,소설,잡문,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1943년 11월 16일 <매일신보>

<헌시 -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를 발표했다.

학도지원병제도일제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육군특별지원병령과 해군특별지원병령 등을 공포해

한국인을 전쟁에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제도였다.

 

이 제도는 중일전쟁(1937) 발발 이후 안정적인 병력보급이 절실해지자,

장기적으로 조선에도 징병제를 시행한다는 목표 아래 과도적인 형태로 시행되었다.

 

서정주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학도지원병의 전투를 영웅적으로 미화하면서,

조선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고 있다.

해방을 맞을 때 서정주는 만 29살에 불과했다.

이는 그가 일제에 협력하라는 피하지 못할 압력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의 친일이 자발적 행위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서정주는 어떤 반성의 뜻도 표하지 않았다.

 

<서정주 문학전집>에 실린 자전적 글인 <천지유정> <흑석동 시대> <창피한 이야기들>에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부일파로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은 다만

"일본의 *旭日昇天之勢 밑에서 *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반민족적 행위에 하늘 뜻 운운하는 것은 파렴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 서정주. 월간 <시와 문학>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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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旭日昇天之勢 : 하늘의 태양(일본)이 치솟아 오르는 그런 기세

*從天順日派 : (그런) 하늘에(일본)에 순종하는 자세(마음)...................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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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찍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백 년은 갈 줄 알았다."라고

토로한 것과도 맥을 잇는 발언이다.

 

해방 후 서정주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해 詩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정부수립 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으로 근무했다.

 

어떤 시대든 주류로 살아가는 데에 서정주는 거리낌이 없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詩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전기 <이승만 박사전>을 발간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종군문인단을 결성해 활했다.

이후 정년까지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문단의 중진,원로 지위를 누리며 평탄한 삶을 살았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와의 유착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서정주

전두환 대통령 후보 찬조연사,

대통령 당선 출시 헌사,

주항쟁 이후 TV방송의 군사정권 지지발언 등으로

일제와 군부독재정권 주변을 맴돌며 권력과 야합한 인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1987년 1월 18일 전두환 생일축하장에서

자작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낭독했다.

낯부끄러운 찬양과 아부로 점철된 이 시는

문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는 극한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 주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 서정주 -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경기를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 서울국제체전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는 2000년 사망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중앙일보>미당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최근 미당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친일논란을 빚기도 했다.

2001년에는 고창미당시문학관이 건립되었고, 여기에서 2005년 이후 매년 가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11. 유진오(1906~1987)- 헌법 기초자로 기억되는 친일부역자 

  

 

유진오법학자,정치인,작가로 기억된다.

경성제국대학 수석입학,수석졸업을 자랑하는 이 당대의 수재는 자신의 재능을 다해 일제에 부역했다.

 

유진오내선일체를 위해 "반도인은 일본국민이고 국어는 일본어"라고 규정하고

일본어 보급과 일본어 창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모국어를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종주국의 언어를 창작수단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작가로서 뿐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정체성도 기꺼이 버렸다.

그의 행태는 자연스레 일본의 침략전쟁 미화학병,지원병 지원의 독려로 이어졌다.

 

 

독립 후에는 신생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을 기초했고,

대학교수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박정희 쿠데타, 신군부 쿠데타 이후에도 메인 스트림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 생애를 주류로 살았다.

1987년 사망하자, 고려대에 빈소가 마련되었고,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반발해 "고려대가 친일행위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며 철거를 주장했다.

 

 

 

 

 

12. 이무영(1908~1960)- 총독상을 수상한 농촌소설가 

  

이무영의 친일 장편소설 <청기와집>

조선에서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일간지 연재소설,

1942~1943년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연재되었고,

1943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소설은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제4회 조선예술상총독상을 수상했다.

 

 

4년 여 동안 일본에서 작가 가토 다케오를 사사해 일본어 창작에 자신감을 가진 이무영

문학의 창작수단으로 일본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작가가 모국어를 포기하고 식민지종주국의 언어로 문학을 창작하겠다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부정이었다.

 

 

이무영은 꾸준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문학작품을 통해

식량증산 등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선동했다.

친일작가들 중 그만큼 꾸준히 작품을 통해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조한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해방 후 시골에 칩거하던 이무영

1946년 조선문필가협회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며,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맡았다.

그러나 일제치하에서 자신의 부역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 <굉장소전>(1946)에서 친일파 청산을 폄훼했다.

<국민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피는 물보다 진하다>(1948)에서도

일파 역시 시대의 희생양인 것처럼 묘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무영해군소령으로 입대정훈교육을 담당하다가

1955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희곡 <팔각정이 있는 집>(1955)에서도 친일파의 죄상을 용서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이무영은 1960년 죽었고, <이무영 대표작 전집>(1975)에는 다수의 친일작품들이 개작되어 수록되었다.

 

 

 

 

 

13. 이원수(1911~1981)- '고향의 봄'에서 '지원병 형님'까지

 

  

<고향의 봄> <겨울나무>의 노랫말을 지은 이원수,

곡을 붙인 홍난파 모두 <친일인명사전>등재된 인물이라는 사실은,

식민지 시절 친일부역이 예술의 전 영역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졌음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1936년 이원수<오빠 생각>의 작사가인 최순애와 결혼했다.

이듬해인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이원수는 식민지 체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동시는 아이들을 독자로 쓰는 시다.

이원수는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내선일체의 논리를

동시라는 그릇을 통해 식민지조선의 어린이에게 주입하고자 했다.

<씩씩한 일본병정> <지원병 형님> 이야기는 민족적 정체성이 여물지 못한 어린이들에게는 치명적이다.

 

 

해방 후 이원수

경남 함안 지역의 한글강습소,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사, 한국문학가협회, 대학강사를 지냈고,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70년대 이후 이원수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죄다 받은 듯하다.

고마우신 선생님상(1970),

한국문학상(1973),

대한민국문화예술(1974),

예술원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0)...

 

이원수는 1981년 사망했지만, 살아서 친일을 고백하거나 참회한 적이 없다.

 

 

2011년 이원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창원시에서 기념사업 예산을 지원하자, 시민단체 등이 이를 저지했다.

이원수의 자녀가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지원병을 보내며>에서 "우리도 자라서... 굳센 일본병정이 되겠다"고 노래한 이원수

<겨울나무>에 겹쳐지는 것은 불편하고 씁쓸할 수 밖에 없다.

 

 

 

 

 

14. 정비석(1911~1991)- 낙원 일본을 칭송하던 <자유부인>의 작가

  

 

금강산 기행수필 <산정무한>의 저자 정비석

평북 의주生, 신의주중학교... 1932년 니혼(日本)대학 문과를 중퇴했다.

친일부역은 1940년 <매일신> 기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조선인에게 지워진 병역의무를

日王이 베푼 은혜로 인식하며 전사한 조선인 지원병과 유가족의 애국심을 찬양했다.

 

 

1943년 정비석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일본해군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 원수를 따라 침략전쟁에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했다.

 

 

해방 후 정비석신문기자,잡지사주간 등으로 활동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육군종군작가단으로 활동했으며, 

대중작가로 변신해 숱한 통속소설을 펴냈다.

특히 <서울신문>에 연재한 <자유부인>(1954)은 당시 풍속을 파격적으로 묘사해

사회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찌감치 대중작가로 변신했기 때문인지 정비석은 해방 후 문단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였는지 친일행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얼마간 비켜 있었던 것

그가 만년에 누린 행운이었을 것이다.

 

 

 

 

 

 

15. 주요한(1900~1979)-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1939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했고,

이에 따라 1940년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명령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조선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인이 되라는 요구였다.

대부분의 조선인이 반대했지만, 이에 적극 호응한 친일파도 적지 않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도 여기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친일파들은 갖가지 지혜를 짜내어 일제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창씨를 실천했다.

일본의 진무천황이 즉위한 곳의 산 이름이 가구야마(香久山)를 씨로 삼아

가야마(香山)라 하고,

광수의 光자에다 洙자는 일본식의 랑(郞)으로 고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된 이광수가 단연 그 선두다.

 

 

주요한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이름을 바꿨다.

고이치일제의 황도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딴 것이니

그는 확실히 덴노헤이카(天皇陛下)의 적자(嫡子)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평양 출신 주요한연극인 주영섭,

단편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의 형이다.

 

 

주요한이 본격적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다.

수양동우회안창호,이광수,주요한 등에 의해 결성된 교육,계몽,사회운동 단체로,

식민통치가 길어지면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되었다.

이는 본격적인 전쟁체제를 위해 양심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할 필요가 있던 일제가

수양동우회를 표적 수사한 사건이었다.

서울,평안도,황해도 등의 지역에서

모두 181명의 수양동우회 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중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년 무죄 석방되었는데,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

홍난파,이광수,주요한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후 주요한그야말로 눈부시게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어 보급운동에 참여하고,

애국채권을 팔았으며,

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義勇奉公 끝에

주요한은 1941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42년 5월 일본이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를 시행하기로 하자,

주요한조선임전보국단의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새로운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는 등,

다양한 기념식에서 연설,낭독,강연을 했다.

 

1944년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 공장을 짓는 데 관여해,

해방될 때까지 주요한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 졌다.

 

문인들의 *銃後奉公 중 중요한 것은

학병,지원병,징병,징용 등을 선전,선동하는 일이었다.

주요한은 이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지원병 응모 선동에 그치지 않고 조선청년들에게 지원병이 되어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했는데,

<첫 피>가 그 백미다.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주요한의 선동은 여성들에게도 이어졌다.

<댕기>에서 젊은 여성들에게도 간호부로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했다.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

 

 

주요한가미카제(神風)로 출전하는 조선청년을 숭고하게 묘사함으로써

조선청년들에게 日王을 위해 목숨을 바치길 요구했다.

1944년 발표한 산<구단의 꽃>에서 조선의 지원병,학병,여자정신대 등을

구단(九段, 야스쿠니 신사가 있는 곳)에 만발한 젊은 사쿠라꽃에 비유했다.

日王을 위해 죽어서 신사에 모셔지는 神이 되라는 것이었다.

 

 

1945년 1월 발표한 詩 <파갑폭뢰 - 박촌 상등병에게 드림>에서

주요한폭뢰로 자살공격을 감행한 조선인병사를 기리며 이를 따르자고 선동했다.

워낙 자기정당화,합리화에 능한 이들이 문인이고,

그걸 통해 자기최면에 가까운 확신에 이르기도 하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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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후봉공_銃後奉公 : 전쟁 중의 후방에서 나라나 사회를 위하여 힘써 일함

                                   여기서는 일제치하에서 부역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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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화려한 배덕의 시대를 건넌 이들로서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마땅했을 터인데.

日王과 전쟁을 찬양하다가 좌절되었으니,

흠모해 마지않았던 일본식의 할복해야 했었던게 옳았을 것이고,

아니면 민족을 향해 석고대죄라도 해야 옳았건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부가 수립되었고,

친일파들은 다시 지도자로 소환되어 정국의 전면에 등장했다.

 

 

해방 후 주요한이 나라의 주류로 살아갔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국에서 부흥부,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70년에는 공기업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내면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0년대 들어서는 세종대왕,안창호,안중근 등의 각종 기념사업회 일에 관여했다.

 

 

이분들의 기념사업이 이러한 극렬 친일인사들에 의해 추진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해방 후 식민지 역사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주요한은 만년에도 전경련 부회장 등 주요 경제단체 간부를 역임했다.

주요한은 1979년 사망해 전국실업인장으로 새문안교회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정부는 훈격 1등급인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시인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은 해방 45년 만인 1990년이었다.

이육사에게 추서된 애국장의 훈격은 4등급이었다.

이 엄청난 전도,이율배반이 환기하는 것이 떳떳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인 것이다.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역사가 빚어 낸 슬픈 자화상이다.

 


 


16. 채만식(1902~1950)- 조선사람은 닛본징이 되어야

 

 

 채만식은 걸출한 풍자작가다.

흔히 우리 판소리계 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작가

해학(익살스럽고도 품위가 있는 언행)김유정,

풍자(비유법으로 비웃고 폭로하고 공격함)채만식을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필활동을 통한 채만식의 친일은 1940년부터 시작된다.

<나의 꽃과 병정>(1940)에서

"일제의 중국침략은 역사적 필연이며,

東亞의 천지에 새로운 질서가 퍼질 전주곡이요,

역사의 웅장한 분류(奔流)"라고 강변했다.

 

 

일제가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를 시행하기로 한 것에 대해

채만식은 이를 환영하고 감읍해 마지 않았다.

그는 징병제 시행으로 "내선일체를 향한 길을 열어 준 천황의 시혜"에 대한 감격을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해방 후 채만식

1948년 <白民>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는 내용의 중편소설 <민족의 죄인>을 연재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친일을 하게 된 것'비겁하거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늬앙스를 드러냈다.

"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는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의 부류에 들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문학의 가장 중요한 요건자발성인데,

채만식친일 역시 자발적이었다.

친일행적에 대한 참회의 글을 찾아보기 어려운 풍토에서

채만식의 반성은 어느 정도 평가를 받지만, 그것이 그의 적극적 친일행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17. 최정희(1912~1990)- 군국의 어머니와 황군 아들

 

 

소설가 최정희는 영화감독 김유영의 부인이자, 김동환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김동환과의 사이에 훗날 소설가가 된 김지원,김채원 두 딸이 있다.

*夫唱婦隨라던가, 그녀도 남편 못잖은 친일행적을 남겼다.

 

최정희

1939년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예의 밤,

1940년 평양의 문예대강연회에서 <화상>을 낭독하면서 친일행렬에 합류했다.

1941~1942년까지 최정희노천명,모윤숙과 더불어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중 남편 김동환이 납북되었고,

최정희공군종군작가단 창공구락부에서 활동했으며,

1957년 월간지 <주부생활>주간을 지냈다.

해방 후 여러 작품을 펴냈다.

1959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4년 제1회 한국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1969년 한국여류문학인회장,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소설가협회 대표위원을 지냈다.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3.1문화상을 수상했다.

 

 

제의 강권지배에 항거해 들불처럼 일어난 거족적 항일투쟁의 이름을 딴

3.1문화상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조연현,백철,모윤숙 등 적잖은 문인들에게 주어졌다.

 

 

최정희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발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어떤 술자리에서 후배문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해서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나?"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거기에서도 참회의 뜻은 보이지 않는다.

 

 

김동환의 일대기를 펴낸 파인의 셋째 아들은

부친의 친일죄과를 사죄했지만,

소설가가 된 최정희두 딸은 모친의 친일행적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정희는 1990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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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_3

 
 
 
 
 

18. 최남선(1890~1957)죄과는 다섯 가지나 "나는 무죄다"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少年> 창간호(1908)

최초의 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요즘 같으면 高3 나이에 잡지를 창간했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이지만,

그것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한글을 깨우쳐

11살 때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하던 최남선의 비범성과 함께,

이행하던 시대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1908년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인 <少年>을 창간했는데,

지금 우리는 이 날을 잡지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1927년 최남선은 동북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국문화를 고찰한 논문 <불함문화론>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동방문화의 근원지를 단군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했다.

 

 

1928년 10월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조선총독부산하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기관으로,

이후 조선사 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했다.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일을

주변에서는 최남선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는 변절의 단초로 판단했다.

이 일로 최남선이광수와 절교해야 했고,

용운,홍명희 등도 그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한용운최남선나무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해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훗날 김창숙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

교도소장이 최남선<일선융화론>을 주면서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선생은 첫 몇 장을 읽더니 교도소장에게 책을 던지며 의연히 외쳤다.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 대는 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 김창숙.

 

 

1935년부터 최남선

한국과 일본의 '文化同原論'을 주장하면서 일본 神道의 보급에 관여했다.

그가 시도한 개량적 문화주의운동인 文化同原論은,

일찍이 1920년대에 한국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한 불함문화론에서

일본문화 우월론으로 넘어가는 1940년대 시기에서 과도기적 지위를 갖는다.

그것은 태생에서부터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였던 것이다.

 

 

1936년 6월 최남선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삼천리> 1939년 1월호 <최남선의 보수>에 의하면,

"학교에서 교수로 매월 800원,

매일신보사에 집필원고료를 매일 8월씩 월합계 240원을 받아, 합해서 1,040원의 수입"이 있었고,

그 밖에 "최근에 만선일보에 취임했으므로 거기서도 보수를 받기로 되었다."고 전한다.

간단히 계산해도 연수입이 약 15,000원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군수연봉 1,050~3,400원에 비하면 엄청난 고액이었다.

 

 

1943년 11월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학도병 일본 권설대로 활동했다.

동포 청년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종용한 것이다.

 

 

1945년 최남선<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에 보답합시다>라는 글을 통해

"대동아의 전쟁은 하늘을 대신해 불의를 치는 싸움이며,

조선동포도 대동아 민중으로서 세기의 거룩한 사업에 참가해

일본국민으로서 추진력의 일부를 만들고 있다."며 특공대 정신을 거론했다.

 

 

해방 이후 최남선

우이동에 은거하면서 외부출입을 삼가고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했다.

최남선민족개량주의자로 흘러가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것 때문에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비난받았다.

 

 

1949년 2월 최남선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 남선"민족을 위해서, 연구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협력했다"고 항변했고,

특별재판부에 참회의 뜻을 담은 自列書를 제출했다.

 

최남선은 자열서에서 자신의 죄과를,

 1) 조선총독부의 한국사 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된 사실(1928),

 2)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가 된 사실(1938),

 3) 만주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가 된 사실(1939),

 4) 일제 말기에 학병 권유 연사로 활동한 사실(1943),

 5) 악명 높은 日鮮同祖論을 부르짖은 사실.

 

그러나 최남선의 참회는 거기까지였다.

 

5가지 죄목에 대한 최남선의 다음 진술은 곧 무죄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조선사편수위원,중추원참의,건국대학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始終一貫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 밖에 벗어진 일 없었음은

天日이 저기 있는 아래 감연히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 최남선. 自列書 중에서.

 

결과적으로 최남선은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다.

 

1949년 5월 최남선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이승만친일과 청산을 방해하면서 지지부진하던 반민특위

6월 6일 친일경찰들이 특위의 특별경찰대를 강제 해산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재판에 회부된 친일파들은 사실상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최남선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다.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1957년 병사했다.

 

 

2011년 최남선장손이 조부의 친일론을 반박한 책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을 펴냈다.

 

*祖傳孫傳인가,

그는 책에서 조부의 행적이 '조선의 세계화 작업'이었다고 강조한다.

조선사편수회위원중추원참의 등 친일로 인식되는 부분은

'근대 세계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거진 오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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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전손전_祖傳孫傳 :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

                                    부전자전_父傳子傳 : 그 애비에 그 자식(아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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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비록 굴절되거나 왜곡될 수는 있지만,

국권피탈기에 최남선민족을 등지고 식민통치에 협조한 사실은 그 자체로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일제의 겁박이든 자발적 부역이든,

숱한 상황변수가 그들의 행위를 웅변으로 변호한다고 해도 말이다.

 

 

 

 

 

19. 이인직(1862~1916)- 이완용의 비서로 한일병합 주도

 

 

이인직은 국문학사를 배우는 중고생들이 반드시 만나야 하는 작가다.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1906)를 비롯해

<귀의 성> <은세계> <모란봉>을 쓴 개화기 문학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혈의 누>를 모르는 아이들은 없지만 정작 그걸 읽어본 아이들은 없다.

이인직을사오적 이완용의 비서제병합을 모의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경기도 이천 출신 이인직은 조선 말기에

외우아문참의,법부형사국장을 지낸 조중응*아관파천(1896) 뒤

국사범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자,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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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_俄館播遷

사건의 배경: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 사건)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조선에 커지자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피하고 독립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음.

아관_俄館의 의미: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의미함. 

                              고종은 일본의 압력에 맞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음.

파천_播遷의 의미: 파천은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성을 떠나 피신하는 것을 말함.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은

                              조선의 정권이 불안정하고 위기에 처해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을 의미함.

사건의 영향: 아관파천은 고종이 일본의 영향력과 위협을 벗어나 독립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임.

                     그렇지만 러시아가 조선의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음.

아관파천 이후: 1897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함.

                         아관파천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일본의 영향력과 조선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사건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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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응정미7조약(한일신협약, 1907) 체결에 참여하고

정미칠적, 강제합병조약(1910) 체결을 주도해 경술국적으로 손가락질받는 인물이다.

정계에 입문하면서 이인직은 멘토를 잘못 고른 셈인데,

그게 그의 성향 때문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1903년 이인직은 신문기자,정치가,외교관을 양성하는 도교정치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시절 그는 고마쓰 미도리에게서 배웠는데,

훗날 조선통감부 외사국장이 된 고마쓰와 재회하게 된다.

 

 

1904년 이인직일본육군성 제1군사령부 소속 판임 대우 통역으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1906년 이인직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이 되었고,

손병희,오세창 등이 일진회에 맞서기 위해 만든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의 주필로도 일했다.

첫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한 때가 이 시기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에 힘써 귀국한 뒤에 우리 나라를 독일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해 문명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비스마르크) 같은 마음이요." 

- 이인직. <혈의 누>. 1906.

 

 

이인직일관되게 일본의 관점에서 조선과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의 계몽사상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시아의 일부이면서도 *脫亞入歐를 추구해

자국을 歐美의 일부로 바라보고자 하는 일본인의 의식을 답습한 듯하다.

이는 그가 소설과 다른 저술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게 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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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아입구_脫亞入歐: 아시아를 넘어 구라파(유럽)으로 들어간다(진출)는 의미..........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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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1907년 이인직조중응의 후원으로 친일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당대의 실제 이완용의 후원을 받으며 이완의 비서 노릇도 겸하게 된다.

이완용송병준 내각이 들어서면 보복당하거나 합방의 공적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와 조선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는데,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에게 교섭에 나서게 했다.

이완용"현 내각이 붕괴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신의 내각이 조선합방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1909년 11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前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가 경상 한자신문사 주최로 열리자,

이인직은 대산신문사 사장 자격으로 참석해 추도문을 낭독했다.

 

 

1909년 12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밀명을 받아 이인직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국병합 문제와 관련된 일본정계와 여론동향을 정탐했다.

이때 이인직은 친일정객 내부의 권력쟁탈 과정에서

일진회가 주도하는 합방에 반대하기 위해 조중응과 함께 활동했다.

 

 

1910년 8월 이인직고마쓰 미도리를 만나 비밀리에 한일병합을 교섭했다.

이를 토대로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이완용

1910년 8월 22일 오후 통감관저 2층의 데라우치 침실에서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조선왕조518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일병합 후 이인직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사성으로 선임되어

1916년까지 재임하며 고등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경학원성균관의 기능을 정지시킨 총독부가

日王의 하사금으로 설립해 총독부의 식민정책을 홍보하는 기구로,

사성경학원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직이었다.

 

 

이인직은 1916년 54세로 죽었다.

이완용의 하수인으로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그는 작위는 물론이고 은사금 한푼 받지 못했다.

이인직을 친일의 길로 인도한 조중응은 한일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은사금 10만엔(20억 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20. 윤해영(1909~?)- <선구자>는 일제에 포섭된 만주 개척자 

  

동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GgJaj5JL96U

 

 

 

가곡 <선구자>는 한때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으로 뽑힌 노래다.

해방 전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윤해영의 詩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이 노래

북간도 룽징(龍井)을 배경으로 망명지사들의 삶과 꿈을 장중한 곡조로 형상화했다.

 

一松亭,해란강,비암산,용주사,용문교,용두레우물...

이는 모만주곡 젠다오성 룽징의 자연과 지명이다.

 

 

조국을 떠난 망명지사들의 고단한 삶이 짧은 시 속에 함축되어 있어

마디마디 식민지시대의 풍경을 떠올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 노래가 1960년대 이후 온 국민에게 사랑을 받아 온 이유다.

또한 1970~198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 때 즐겨 불린 것은

이 노랫말에 깃든 식민지 시대 독립투사의 삶이 전해주는 비장미 덕분이기도 했다.

 

 

1963년 12월 30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불린 이래,

기독교방송(CBS)의 시그널 음악으로 7년간 방송된 것도,

1991년 룽징의 일송정에 시비가 건립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이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윤해영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소식이 끊겼다.

이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자

작곡가 조두남자신의 고록과 수상집을 통해 이 노래에 극적 서사를 더했다.

 

 

조두남의 회고에 따르면,

1932년 조두남이 북간도 룽징의 여관에 머물 때

눈빛이 형형한 동포청년이 찾아와서 詩 한 편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조두남은 직감적으로 그가 독립운동을 하는 이임을 알았고,

나중에 이 노래에 자신이 곡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청년의 소식을 끝내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09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난 윤해영

유랑극단에서 일하던 작곡가 조두남과 교류한 것은 사실이다.

윤해영은 만주국 룽징에서 살다가

1940년대 초 헤이룽장성 닝안현으로 옮겨 1946년 6월까지 거주했다.

1940년 무렵 부인과 함께 닝안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詩도 썼다고 전해진다.

사를 그만둔 뒤 윤해영닝안현 협화회 홍보과 사무원으로 일했다.

만주제국 협화회는

1932년 7월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 아래 民族協和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설립된 조직이었다.

 

 

명분은 거창했지만

'만주국의 건국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교화적,정치적 실천단체'를 표방한 협화회

전국적으로 민중을 통제하는 조직이었다.

협화회는 각지에 분회를 조직해 만주국의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항일민중운동에 대한 파괴공작,선전,선무공작,전시동원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닝안현 거주 시기 윤해영조두남과 교류하면서 노랫말을 썼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쓴 詩와 가사는 20여 수라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만주 아리랑> <오랑캐 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발해 고지> <사계> <척토기> <낙토 만주> <룡정의 노래> 등

9편으로 1936~1944년 발표되었다.

 

가운데 <만주 아리랑> <오랑캐 고개> <아리랑 만주> <척토기> <낙토 만주> 등이 親日詩에 속한다.

이들 노래는 만주국의 건국정신인 五族協和를 바으로

조선인이 앞장서서 낙토 만주를 건설하자는 내용이다.

五族은 조선,중국,만주,몽골,일본을 뜻한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 특별 출간한

<반도사회와 낙토 만주>에 실린 <낙토 만주>에서는

조선인을 만주국의 터를 닦는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묘사하고 있다.

제국주의에 포섭되어 식민지 개척의 첨별 역할을 해야 했던 재만 조선인을 미화한 것이다.

 

 

1944년 1월 닝안현 닝안극장에서 열린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신작가요 발표회'에서

<목단강의 노래> <아리랑 만주> <룡정의 노래>가 연주되었는데,

<룡정의 노래>가 뒷날 한국에서 제목과 가사가 고쳐져 <선구자>로 불린 노래다.

 

 

이국에서의 고달픈 삶을 다룬 <룡정의 노래>

비장하게 독립의 꿈을 노래한 <선구자>로 바꾼 사람은 바로 작곡가 조두남이었다.

 

1943년부터 징병제를 찬양하고,

낙토 만주와 五族協和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군가풍 국민가요를 만들어 보급한

조두남<선구자>작사,작곡 경위를 왜곡한 것이었다.

이는 윤해영,조두남과 함께 활동한 在滿 음악인 김종화의 증언으로 진실이 밝혀졌다.

 

 

<룡정의 노래>는 1944년 1월 윤해영이 작사한 가사에 조두남이 곡을 붙여 발표한 것으로,

<선구자>와 가사내용은 물론 창작시기와 동기도 조두남의 주장과 달랐다.

조두남노래가 만들어진 경위를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교묘하게 감추려 했던 듯하다.

 

 

 룡정의 노래  선구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역하늘 바라보며 눈물 젖은 보따리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녘 종이 비암산에 울릴 
사나이 굳은 마음 갈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흘러온 신세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녘 종이 비암산에 울릴 
사나이 굳은 마음 갈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1945년 닝안에서 해방을 맞은 윤해영

만주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변화된 시대상황에 즉각 적응했다.

그는 닝안의 인민민주대동맹 선전문화부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주관하는 한편,

신안촌의 조선인 문화공작단을 지도,감독했다.

해방 이전에 일제의 五族協和에 복무하던 윤해영

어느덧 사회주에 복무하는 인민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작품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 30여 편을 썼다.

 

 

윤해영중국 내 친일파 처단이 격렬해지자,

1946년 7월 닝안을 떠나 북한으로 이주했다.

북한에서 토지개혁 정책을 찬양하는 노래 등 북한을 찬양하는 몇몇 노래의 가사를 썼다는 소식을 끝으로

윤해영은 종적이 끊겼다.

1956~1957년 무렵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해영,조두남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윤해영에게 있어 선구자란 

일제의 의도대로 낙토 만주를 건설하는 개척자,

일제의 침략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친일부역자를 이르는 것이었다.

 

 

 

21. 장덕조(1914~2003) - 銃後奉公 제일선에 섰던 역사소설가

 

 

장덕조는 흥미 위주의 스토리 전개와 활달한 문체로

단편 120여 편, 장편 90여 편을 발표해 한국문단에서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다.

여성작가 중 역사소설을 가장 많이 쓴 이로 꼽히는 그녀는

1960년대 동양방송(TBC) TV드라마 대본 <대원군> <여인열전>을 썼고,

이후 책으로도 나왔다.

 

 

장덕조1943~1945년 사이 집중적으로 친일 성향의 작품을 발표했다.

1943년 장덕조는 고작 29살이었다.

이는 일제에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으로,

친일이 자발적인 행위였다는 방증이다.

 

 

장덕조

조선인보다 인격적,문화적으로 훌륭한 내지인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용기,애국심,멸사봉공의 정신까지 배워 가는 일이 필요하다면서 내선융화를 선동했다.

 

일본의 강제동원령이 본격화되던 시기,

그러나 아들을 지원병으로 보내고 싶어하는 조선부인들이 어디 있겠는가?

부역언론들은 이러한 태도를 맹목적 모성으로 비판하고 교화하려 했다.

 

장덕조의 소설은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맹목적 모성을 에둘러 비판하면서

내지 부인을 군국의 어머니의 전범으로 제시한 것이다.

 

 

결심하는 데 갈등할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작가가 선전,선동을 목적으로 소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엔 어떤 미학적 고민도, 삶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선동의 논리를

교묘한 서사로 포장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친일부역에 참여한 문인들의 선전,선동 문학에는

이러한 의도가 천편일률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는

일본이 요구하는 전시총동원 체제에 적극 협력,수용하는 방식으로 수렴되고,

식민지 조선인이 감내해야 하는 징병,징용 등 모든 착취와 희생도

대동아공영이라는 명분으로 미화되었다.

 

 

일제는 친일부역 문인과 지식인을 통해

銃後의 민간인들도 침략전쟁에 협력,봉사할 것을 끊임없이 선전,선동했다.

이른바 銃後奉公이라는 구호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장덕조노천명,최정희,모윤숙 등의 여성문인과 마찬가지로

銃後奉公의 자세를 선전,선동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전선으로 간다는 것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친일부역 문인들은 전시동원체제에 부응해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고,

동포 젊은이들에게 日王의 총알받이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며,

후방의 여성들에게는 銃後奉公에 힘쓰라고 선동했다.

 

그러했으면서도 정작

이들 중 자기 자식을 일본군대에 보낸 이는 보이지 않는다.

 

 

해방 후 장덕조는 공식적 활동기록은 없다.

몇 편의 소설을 썼고,

1950년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가서 <영남일보> 문화부장 겸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그녀는 최초로 종군한 여성작가였다.

이후 최정희,손소희,전숙희 등이 종군한 작가였다.

 

 

장덕조는 잡지 <전선문학> 등에 반공소설,반공수필을 발표하고,

강연회에서 소설을 낭독하며 전시기간에 적극 활동했다.

적이 英美鬼畜에서 공산침략자로 간단히 바뀌었고, 황군의 銃後奉公 대신 직접 군복을 입고 국군을 따랐다.

훗날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고, 1976년에는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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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_4

 

 

 

 

22. 유치진(1905~1974) - 연극사 거목의 지난날은 *비루했다

 

 

유치진의 희곡 <조국>고교 국어1에 실려 있다.

 

해방 후 은둔생활을 하던 친일파 유치진은 1947년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재기했다.

그러나 교사용 지도서는 물론이고, 어떤 참고서도 속사정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문학교육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문학시간에 유치진

농촌과 식민지 현실을 탁월하게 묘사한 정통 사실주의(리얼리즘) 극작가라고만 배울 뿐이다.

 

 

유치진청마 유치환의 형이다.

잘 나가는 코미디언,가수,작가를 배출한 서울예술대학 설립자이기도 하다.

 

 

유치진의 친일의 길은

어용조직인 조선연극협회 이사에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1941년 외곽 지원단체인 극작가동호회 대표로 취임했는데,

조선연극협회 소속극단이 극작가동호회의 작품만을 공연해야 하는 특전을 누렸으니,

극작가동호회명실공히 일제의 비호를 받는 어용조직일 수 밖에 없었다.

 

 

유치진친일활동은 1941년 자신이 창단한 어용극단 현대극장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후 현대극장은 북부,서부,남부지방으로 장기 순회공연을 했는데,

주요 공연작은 유치진이 창작하거나 연출한 <흑룡강> <북진대> <대추나무> 등 친일 작품이었다.

또한 현대극장자체인력으로 이동연극보국대를 조직해 산간벽지에 파견했다.

그야말로 *옹근 보국_報國(친일을 위한)을 한 셈이었다.

 

 

유치진의 친일부역은 연극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대극장 대표로서 각종 지면에 발표한 글을 통해서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

일문평론 <반도의 징병제와 문화인 - 우선 상무정신>(1940),

감상문 <축 싱가폴 함락>(1942),

수필 <북진대 여화>(1942) 등을 발표했다.

 

 

1944년 유치진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조선문인보국회조선문인협회를 비롯한 여러 문학 관련단체를 통합한 거대조직으로,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문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외곽단체였다.

 

 

유치진은 1945년 8월 13일부터 시작한 현대극장<산비둘기> 공연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자신의 친일행위가 걸렸던지, 1947년 초까지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1947년 2월 유치진3.1운동을 소재로 한 단막극 <조국>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다양한 희곡을 발표했고,

우익 연극인들이 미군정 지원 아래 한국무대예술원을 결성할 때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연극계 전면에 다시 나섰다.

 

 

1948년에는 논문집필과 비평활동에 주력하면서 남한 연극계의 주도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연극학회 회장, 서울시문화위원로 피선되었다.

1950년에는 초대 국립극장장에 피선되었고,

한국전쟁 뒤에는 반공,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물을 주로 발표했다.

1961년에는 문교부 대학교수 자격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1958년 한국연극연구소를 설립했고,

1962년 부설 드라마센터를 건립했으며, 한국연극아카데미 등의 부설기관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연극아카데미를 폐지하고 초급대학과정으로 서울연극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1973년에 이를 다시 폐교하고 서울예술전문학교로 인가받았다.

이 학교가 서울예술전문대학을 거쳐 서울예술대학으로 발전했다.

 

 

유치진은 1974년 사망했다.

대부분의 친일부역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뒤에야 부역행위가 조명되기 시작했다.

유치진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연극인들서항석,함대훈,이서향,함세덕,주영섭 등이다.

주영섭은 형 주요한과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2018년 서울예술대학 학생과 교수들이

유치진의 아들 유덕형 총장이 입학전형료와 특성화사업비 등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사퇴를 촉구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유치진 일가가 법인이사,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세습구조도 비판받았다.

학교측이 개교기념일 무렵이면

교직원들에게 설립유치진의 묘소를 참배하라고 요구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학생들은 세습철폐, 교내 유치진 동상 철거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이것이 이 나라가 역사를 성찰하는 방식이라는 점이 쓸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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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_鄙陋 : 천하고 너절함.

*옹근 : 모자라거나 빠진 것이 없이 본디 있는 그대로 임.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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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최재서(1915~2001) -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 완성

 

 

일제강점기 평론가 최재서백철,곽종원,조연현 등과 마찬가지로

비평활동에 주력한 까닭에 일반독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문인이다.

덕분에 화려한 친일행적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반독자들의 관심에서 비켜 있었다.

 

 

황해도 출신 최재서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에 유학해 런던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경성제대 강사로 임용되고,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였다.

 

 

최재서<인문평론>을 창간하고, 1939년부터 편입인 겸 발행인을 지냈다.

최재서<인문평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친일 글쓰기를 시작했다.

창간호 권두에서 최재서문학자들도 건설사업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합리화했다.

 

 

<인문평론>전기 문학을 암흑기의 친일문학으로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다.

 1941년 최재서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임되었고,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는 총력전을 명분으로 모든 잡지를 통폐합해 친일 어용잡지 <국민문학>을 간행했는데,

최재서는 1941~1945년까지 <국민문학>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실제로 <국민문학>은 친일 작가들의 어용문학지에 불과했다.

反민족적 문학행위를 대변한 이 잡지를 통해, 최재서친일문학계를 대표하는 이론가로 부역했다.

 

 

1942년 최재서<징병제 실시의 문화적 의의>에서

"조선에서 징병제가 포고된 근본적인 의의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페하께서 반도 2천4백만을 고굉(股肱, 다리,팔,온몸)이라고 믿고 하셨다"는 점이라며,

日王의 시혜라는 점을 강조했다.

 

 

친일문인 가운데 시인,작가는

詩,소설,수필 따위를 통해 친일부역을 했지만,

평론가들은 친일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부역에 동참했다.

비평가 최재서<문화이론의 재편성>(1941)을 통해 국가본위의 문화이론 건설을 주창했다.

또한

"일본적인 사고방식을 실천하고,

일본의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일본정신을 현양해 가는 것이 새로운 비평"이라고 규정했다.

 

 

최재서가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은 <국민문학>

1942년부터 '반도 황국신민화 최후의 결정'을 위해 한글을 완전히 폐지했다.

최재서<편집후>에서

한글 사용이 문화적 창조력에 장애가 된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문인으로서 민족어,모국어를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또한

"조선어는 조선의 문화인들에게는 문화의 유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민의 종자였다...

이 고민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문화적 창조력은 정신의 수인_囚人(죄인)이 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획책한 조선어 사용금지가

조선문학의 주체인 자신에 의해 수행된 셈이었는데,

이는 문인 최재서심각한 자기부정이면서 동시에 친일부역 행위의 정점이었다.

 

 

최재서<국민문학> 1942년 8월 호에서

"조선작가는 더는 한글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향후 글쓰기는 국민문학이므로 당연히 국어(일본어)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집필자는 내선인 공동이 될 것이며,

독자는 반도 2천만이 아니라 1억의 전 국민이며

10억의 대동아 제 민족으로 되는 것이 그 이상이다...

모국어를 버린다 해도 조선문학은 멸망하기는커녕, 새

로운 조건의 출현으로 오히려 크게 그 규모가 확대될 것이다"라고 강변했다.

 

 

1944년 1월 1일 최재서돌연 창씨개명을 단행해 이시다 고조(石田耕造)가 된다.

다음날 이를 조선신궁에 가서 고했다.

1944년 2월 이시다 고조평론집 <전환기의 조선문학>으로 제2회 국어총독문예상을 수상했다.

반도문단의 국어화 촉진목적의 상장과 부상 1천 원으로 신설한 국어총독문예상은

최재서에게 친일부역의 상급이었다.

 

 

1944년 9월부터 최재서국민동원총진회 발기인과 상무이사를 지내면서 연사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국민동원총진회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징용과 징병, 군사기지 건설을 위한 노무동원에 앞장섰다.

1945년 이시다 고조<국민문학>에 단편소설 <민족의 결혼>을 발표했다.

 

 

김유신의 누이가 김춘추와 연을 맺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이 소설에서

최재서"무열왕이 가락민족의 딸을 받아들인 것은 이토록 자극적이었고 혁명적이기조차 했다"고 서술했다.

최재서열왕의 결혼이 삼국통일의 숨은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집필의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방 후 최재서는 평론 일선에서 물러나 연세대,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익스피어 작품번역 등 영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1948년 12월 시공관에서 열린 민족정심 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최재서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9년 8월 최재서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유예되었다.

 

 

최대서는 당대의 지성이었지만,

일제와 일제침략전쟁의 본질도,

대동아공영권 구호에 숨겨진 허구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일제의 욱일승천을 오판하고

일본의 신체제에 투항해 버린 그가 역사에 민족을 등진 부역자로 남은 이유다.

 

 

 

 

24. 백철(1908~1985) - 일부역하고도 한국 문화비평의 대들보

 

 

 "나는 이번 사변(중일전쟁)에 의해

북경,상해,남경,서주,한구 등이 연차 함락되는 보도와 접하고

또는 실사 등을 통해 지나의 모든 봉건적 성문이 함락되는 광경을 눈앞에 볼 때에

우리들의 시야가 환하게 뚫리는 이상한 흥분이 내 일신을 전율케 하는 순간이 있다...

기왕 허물어진 성문이면 하루라도 속히 허물어져 버리는 것이 역사적으로 진보하는 의미다." 

- 백철. <시대적 우연의 수리 - 사실에 대한 정신의 태도>. 조선일보 1938.12.02~07.

 

 

문학평론가 백철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이다.

그의 친일성향이 드러나는 첫 평론이다.

중일전쟁의 전개일제 말기 조선 지식인들이 대일협력으로 전환하는 한 유형이 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이 대일협력에 대거 나서게 되는 것은

주사변(1931) 직후,

중일전쟁(1937) 직후,

태평양전쟁(1941) 개전 직후 등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침략전쟁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세 사건 직후에 조선 지식인들은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이들은

일제가 선전한 대동아공영권,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구축이 불가항력이라고 오판하고 만 것이었다.

 

 

1939년 백철조선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다.

또한 총독부 어용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는 조선병합 30년이 되는 해이며,

관변 역사학자들이 일본이 건국되어 만세일계 국체를 이은 지 2,600년이 된다고 선전하던 해인

1940년에 맞추어서 부여에 대규모 신궁을 짓고,

여기에 여러 日王들의 위패를 모시고자 기획했다.

내선일체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고대일본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며,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 신사를 짓고자 한 것이다.

 

 

부여신궁1943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늦어지다가 일제의 항복으로 중단되었다.

총독부는 1940년부터 봉사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영화인, 문인들, 개신교목사들 등

지식인을 대거 동원해 신사 조영작업에 참여하게 했다.

 

백철봉사대 참관기에서

"당시 전후 300년을 통해 역대의 일본황조에서 대륙과 신라의 병세를 거(拒)하여

백제를 돕고 협력하는 데 있어 대군과 군량을 보냈다"는 사실을 언급했는데,

이는 고대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내선일체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백철<국민문학> 1942년 1월 호에서

"새로운 정신의 구체적인 화제로서 새로운 세계관의 파악,

새로운 감정의 준비, 새로운 문학관의 수립"을 들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새로운 일본정신, 일본주의,

적어도 일본적인 것을 체내에 받아들여 충분히 씹고 소화해

문학 속의 살아 있는 생명의 흐름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갈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친일부역에 눈먼 비평가의 논리는 늘상 그런 궤변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해방 직후 백철서울여자사범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1948년에는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후 동국대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에서 정년까지 재직했다.

 

해방조국은 그(백철)에게 친일부역의 죄를 묻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평론가로서 주류사회에 편입되었다.

 

 

1971년 백철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7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6년에는 3.1문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백철은 1985년 죽었다.

백철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어떤 참회도 하지 않았다.

 

 

"이광수는 일제의 주구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회장이 됐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개명했으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진과 더불어 남경으로 대동아문학자협회에 참석하는가 하면,

학병을 권유하기 위해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연설을 하는 등,

실로 무섭고 실로 가증한 짓을 감행했다." 

- 백철. <백철이 말하는 이광수> 1965. <한국의 인간상> 제5권 433면에 게재.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라,

어처구니가 없다.

 

임종국<친일문학론>에서  이 글의 몇 단어를 바꿔 백철에게 돌려 준다.

"백철은 일제의 주구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간사가 됐고,

시라야 세이테쓰(白矢世哲)로 개명했으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진과 더불어 남경으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참석하는가 하면,

학병을 권유하기 위해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좌담회를 하는 등, 실로 무섭고 실로 가증한 짓을 감행했다."

 

 

 

 

25. 이석훈(1907~?)-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을 꿈꾼 작가

 

평안북도 정주 출신 소설가 이석훈소설,희곡,수필을 썼고

방송 쪽에서 일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한 인물이지만,

문학사에서조차 거의 거론되지 않는 잊혀진 인물이다.

 

 

이석훈이 훼절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40년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시국강연부대에 참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전국의 강연을 통해

일반민중에게 "반도의 신체제인 국민총력운동에 발맞출 것"을 선전했다.

이 강연부대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 단편 <고요한 폭풍>(1941)이다.

 

 

소설에서 이석훈

"시대변화 속에서 소승적인 민족적 입장과 대승적 지성과 예지의 갈등을 지양"하고자 했다.

일제에 대한 협력을 민족/지성,소승/대승의 대립으로 *눙친다.

대단한 수사다.

문인들 특유의, 상황에 자기 논리를 끼워 맞추는 합리화 능력을 유감없이 선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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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눙치다 :  문제삼지 않고 넘기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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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이석훈조선문인협회 상무간사로 사무 일체를 맡았고,

녹기연맹의 일본어 기관지 겸 사상교양지 월간 <綠旗> 편집부 촉탁이 되었다.

녹기연맹조선인의 자발적 전쟁동원과 황민화를 목표로 한

전시 체제기 대표적인 민간 내선일체 단체였다.

 

 

녹기연맹이 펼친 사상운동의 핵심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을 꿈꾼 현영섭'조선어 전폐론'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내선일체 이념으로,

조선인의 민족적 성격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같은 시기 이석훈조선문인협회 사업으로 황군의 무운장구 기원과 함께

銃後에서의 정신운동의 수련 달성을 위해 일본에 성지순배사로 파견되어

신사,신궁과 日王들의 무덤을 순배했다.

순배 후 발표한 기행문에서 이석훈

 

일본을 神國이라 칭하며 조선인들도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석훈은 일본문학을 찬양하며 편협한 조선문학을 뛰어넘어야 하고,

국민문학은 국어(일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석훈은 작가의 표현수단인 언어와 관련해서 <국어문제회담>(국민문학 1943년 1월호)을 통해

"작가는 하루바삐 표준어로서의 일본어를 쓸 것이며,

학교에서도 어릴 때부터 명문을 가르쳐 참답게 아름답고 향내 높은 일본어를 익히라"고 주장함으로써

모국어 포기를 선동했다.

 

 

이석훈"징병도 국어상용도 일본에 철저하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실천"이라며

징병제에 적극적으로 부응할 것을 선동하고, 지원병제를 선전.

 

그에 따르면

징병,지원병으로 출정하게 되면 반도의 건아가 되고,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일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방송지우> 1944년 4월호에 발표한 <새 시대의 모성>에서는

아들이 출정하게 됨으로써 어머니가 천민에서 한층 지위가 높아졌다며, 징병제를 미화했다.

 

 

해방 후 이석훈은 얼마간 칩거하면서 번역작업을 하다가
<
백민> 1947년 1월호에 처음으로 실명을 쓰며 산문 <고백>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친일경력을 말하며 이해를 구하기도 하고,

"조선의 문화인들은 관용적이지 못하니 좀더 너그러워지라"며 불평했다.

 

 

1948년 해안경비대가 창설될 무렵, 이석훈해군정훈장교 중위로 입대했다.

1949년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해군본부 소령으로 진급해 초대 정훈감 서리를 지내다가

1950년 전역했다.

 

황군과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던 작가가 해방조국의 군인으로 간단히 변신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 이석훈은 인민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6. 김용제 -'시의칼'로 동포를 찔러댄 시인 

 

 

충북 음성 출신 시인 김용제는 이름이 낯설지만,

1940년대의 문단에서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겨 버릴 수 없는 유수한 논객이요 시인이었다.

 

그는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일문시집 <아세아시집>으로

제1회 국어총독문예상을 받은 당대에 가장 잘 나가는 시인이었다.

이 수상작은 '일본정신에 입각한 국어 작품일 것, 민중계발의 선전효과가 양호할 것'이라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선전기준을 충족하고도 남는 시집이었다.

 

 

총독부관리 6명,

조선군보도부장, 경성제대교수 2명, <경성일보> 학예부장과 논설위원 등

일본인들과 유진오,유치진,백철 등의 조선인으로 구성된 1943년 국어총독문예상 전형위원

11편의 후보작 가운데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김용제<아세아시집>최종작으로 선정했다.

 

"<아세아시집>은 총독상을 받을 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해 열렬한 일본정신의 기백이 있고,

또 표현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 <매일신보> 1943.3.21.

 

 

국어총독문예상 제2회평론 <전환기의 조선문학>으로

평론가 최재서,

제3회는 전기소설 <다케야마 대위>

창작집 <청량리 일대>로 소설가 정인택이 받았다.

부상으로 1천 원의 거액(현가 1억 원 이상)이 주어지는 이 상은

가난한 문인을 일제의 충실한 협력자로 유혹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김용제의 친일 글쓰기는

1939년 <동양지광>에 <아세아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에서 그는 "일본국민으로 일본정신을 배우고 아세아의 부흥을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에 그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이 되었다.

 

 

1943년 5월 김용제

일본의 건국신화를 소재로 한 서사시로

일본과 日王을 예찬한 두 번째 일본어시집 <서사시 어동정>을 발간했다.

 

이는 진무 日王의 어행적을 주로 일본서기에 의해서 노래한 장시였다.

후기에서 김용제

"이같은 존엄 웅대한,

또 소박한 정신미의 극치인 건국사화를 감동의 신앙으로써 노래하고 찬미할 수 있음은

역시 일본시인의 행복"이라고 감읍했다.

 

 

1944년 김용제조선문인보국회의 파견원으로 함경도 징병지에서 활약했다.

징병검사 상황과 징병에 관한 미담을 수집하고 작품화하기 위해서였.

 

 

같은 해 김용제銃後 반도의 정신적 각오와 皇都 조선의 건설 등을 노래한

세 번째 일본어시집 <보도시첩>을 발간했다.

 

 

시인 김용제솜씨 좋은 자신의 칼(언어)

식민지 종주국의 이해를 완벽히 대변하고, 그들의 지배논리를 선전,선동했다.

"감격의 총을 메고 나서는 청년들을 죽어 좋을 일터로! 사내답게 가거라" 하며 떠밀었다.

그것도 모자라 "간다! 갑니다! 하고만... 갔다 온다! 하지는 않았다"라며 짐짓 탄복까지 하면서...

 

 

1945년 8월 1일 김용제친일부역 문인들이 거쳐가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8월 10일 가네무라 류사이(김용제)

네 번째 일본어시 <아름다운 조선>이 나왔는데, 배포 도중에 해방을 맞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시집 전부를 폐기 처분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임화,김남천,유진오가 조선문인보국회 사무실에 들러,

보국회의 재산 일체를 양도할 것을 요구하자,

김용제는 상무이사 자격으로 양도증서에 서명한 뒤 잠적했다.

이는 자신의 부역,반민족행위를 인지하고는 있었다는 의미다.

 

 

1949년 여름 반민특위에서 김용제최재서와 함께 조사를 받은 뒤

구류 7일 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나,

6월에 경찰의 습격을 받아 사실상 와해상태에 놓였다.

게다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이 2차 개정되어 공소시효가 8월 31일로 당겨지면서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1954년 김용제흥사단 이사에 선임되어 1983년까지 재직했다.

1993년 김용제소설형식의 수기 <환상>을 발표해,

자신의 친일이 '항일 지하운동을 위한 위장'이라고 강변했으나,

본인의 주장일 뿐 객관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1981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김용제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김용제는 언론,출판계에서 활동하고, 1994년까지 생존했는데도

인터넷에는 그의 사진이 한 장도 눈에 띄지 않는다. <친일인명사전>에도 그의 사진은 없다.

 

 

 

 

 

27. 정인택(1909~1953)- 국책 선전으로 시종한 황국신민

 

 

소설가 정인택도 대중에겐 낯설지만, 임종국은 그를

"애국반 정신의 고양, 황도 조선의 건설, 내선일체의 앙양, 지원병 징병의 권유,

대화혼의 예찬, 만주 개척 및 기타 국책선전 등으로 시일관

대단히 우수한 국어(일본어) 문예작품을 우리 문학사에 선물해준 작가"로 평가한다.

 

"정인택은 <매일신보> 국어(일본어) 면에 선구적 작품을 발표해 1937년 국어 면이 신설된 이래 최남선,김소운의 다음을 이은 문인으로서 제3착의 영광을 누렸다."

 - 임종국.

 

 

서울 출신 정인택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주필을 지낸 친일부역자 정운복의 아들이다.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발표한 <국민문학에 영도>를 통해

정인택일제에 봉사하는 국민문학의 방향을 분명하게 정의했다.

<엄숙한 의무>에서는

"불타는 국민적인 것에의 열정을 억제할 길이 없다...

이러한 열정은 황민적인 자각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의도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황민화를 부르짖었지만,

정인택 자신도 식민 지배민족과 피식민 민족 사이가

힘을 바탕으로 한 억압과 굴종의 관계라는 사실을 아주 부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마음가짐, 기타>에서 정인택

"일본작가들은 의도하지 않아도 생리적으로 국민적인 것, 황민적인 자각에 이르게 되나,

조선작가들은 다르다... 조선작가가 일본적인 감성과 혼을 생리적으로 내면화하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집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는 1940년대 들어 만주 개척을 위한 이민정책을 펴면서

조선 지식인들을 동원해 농업식민정책을 선전했다.

정인택은 특히 만주 개척정책과 관련해 활동하면서 이에 관한 글을 누구보다도 많이 썼다.

 

 

정인택 <매일신보> 1942년 7월 27~29일자에서

"1939년 12월 공표된 만주 개척정책의 기본요강 덕분에

조선인 개척민도 일본인 개척민과 동등하게 취급되어 각종 편의를 받게 되었다"고 선전했다.

1942년 정인택이 발표한 <검은 흙과 흰 얼굴>만주 개척민 마을을 돌아보고 와서 쓴 단편이다.

정인택소설에서 허영과 물욕에 사로잡혀 있는 도시 젊은이들에게

구태를 청산하고 개척민 부락으로 이주해 헌신하라고 강변했다.

 

 

1940년대 정인택일제의 징병 관련 글을 부쩍 많이 쓰면서 학병,지원병,징병을 선전,선동했다.

 1945년 3월 정인<청량이 일대>와 <반도의 육독 다케야마 대위>

제3회 국어총독문예상의 마지막 수상자가 되었다.

 

 

정인택친일소설들은 하나같이 총독부의 식민지배정책을 선전,선동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덕분에 국어총독문예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지만,

같은 이유로 그는 해방조국의 독자들에겐 잊혀진 작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정인택은 일부 좌경화 경향을 내보이며 작품활동과 언론활동을 재개했다.

한국전쟁 중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1953년 북한에서 병사했다.

 

 

 

 

나머지 문인들 

 곽종원(1915~2001) - 전체주의 국가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  

경북 고령 출신 곽종원(이와타니 쇼모토)<국민문학> 1944년 2월호에서

조선의 병합, 전쟁의 승리 등이 역사의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자기주장을 위해 현실을 긍정했다.

 

그의 현실인식에서 일본 제국주의 사상은 첨단의 시대의식이었던 것이다.

<동양지광> 1944년 3월호에서도 전쟁과 일본화를 역사의 방향으로 설정하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관념이나 사유가 아니라 실천적 활동이며,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동참해 대동아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문학> 1944년 4월호에서 주장한

<결전문학의 이념>역사적 자각에 따라 국민적 자각이 생겨나고,

국민적 자각으로 인해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전체주의적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수립된다고 주장친일 문필활동의 절정이었다.

해방 후 숙명여대 교를 거쳐, 건국대 총장을 지냈다.

1973년 초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맡았고,

198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김문집(1907~?) - 광적인 부일협력, 창씨개명의 끝판왕.  

대구 출신의 소설가,문학비평가 김문집내선일체의 신문화주의 건설을 주장했다.

 "나는 구한국이 일본과 합방된 사실에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조선민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또한 본능의 의미에서 일본제국의 충실한 국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 김문집. <신문화주의적 문화비평 - 비상시에 처한 문단의 자각>. 삼천리 1938년 10월호.

 

 

 

김사영(1915~?) - 직역봉공과 증산운동을 찬양한 작가.  

경북 상주 출신의 소설가 김사영시국색 짙은 작품들을 일본어로 발표했다.

해방 후 문경고등학교 특수교사로 근무했다.

 

 

 

 김성민(1915~1969) - 지배이념과 내선 연애로 포장한 통속소설.  

평양 출신 시나리오작가,영화감독 김성민

1936년 일본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가 주관한 1천 원 현상 대중문예소설에

<반도의 예술가들>이 당선되어 일본문단에 등단했다.

이 소설은 1941년 <반도의 봄>으로 영화화되었다.

해방 후 김성민은 1950년대 대표적인 영화감독,시나리오작가로 활동했다.

정비석 원작의 <자유부인>을 했다.

 

 

 

 

 김영일(1914~1984) - '산골짝에 다람쥐'와 '대일본의 소년'.  

황해도 출신 아동문학가 김영일은 동요 <다람쥐> 등 많은 동시,동화,동요,동극을 창작했다.

"우리들은 대일본의 일꾼이란다... 우리들은 대일본의 똑같은 소년... " 

- 김영일. <대일본 소년> 1943.

해방 후 경기도 경찰의 간부로 근무했다.

한국아동문학회장 등 각종 단체 임원을 지냈다.

1984년 사망했다.

1989년 옹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에는 서울대공원에 동시 <다람쥐>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방인근(1899~1975) - <마도의 향불>의 대중소설가.  

충남 예산 출신 소설가,시인 방인근

1932년 <동아일보><魔都의 향불>을 연재하면서 대중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방인근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銃後를 지키는 군국의 어머니 상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지원병만으로는 정말 군인 같지 않아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 서운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에도 징병제가 실시된다는 법령이 내리는 것을 볼 때

가슴이 넘치는 감사와 희열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 방인근. <눈물겨운 자랑>. 매일신보. 1943.

해방 후 여러 문인단체에 참여하고 대중소설을 썼다.

1954년 영화사를 차려 <마도의 향불>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오용순(?~?) - 황국신민화와 새로운 인간의 형상화.  

전북 장수 출신 문학평론가 오용순

산문 <내일의 나>(1942)에서 자신이 국가사회의 일원이므로

신의 개성은 자기 완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다는 전체주의적 시각을 보였다.

그는 또 대동아 건설의 낭만주의와 영웅주의를 강조하고,

이 사명을 지닌 전사의 길이 자랑스럽다고 칭송하면서,

이에 동참하는 일에는 여인도 예외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

그의 친일 글은 내선일체에 기초한 황국신민화를 옹호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방 후 <서울신문> 편집차장을 맡았다.

1947년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윤두헌(1914~?) - 전체우위,현실긍정의 길을 문학의 기준으로.  

함경북도 출신 문학평론가 윤두헌

<언어의 문제>(1943)에서 문학에서의 언어 사용은

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식의 문제라면서,

상과 감정을 국민적으로 함으로써 국어(일본어)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두헌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했고, 학병,지원병제도를 찬양해 전쟁협력을 독려했다.

해방 후 북쪽 체제를 선택했다.

1956년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 문화선전성 예술국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9년 안막과 함께 부르주아 비평가로 비판받아 숙청되었다.

 

 

 

 이윤기(?~?) - 프로작가가 된 일본군 지원병.  

경남 거창 출신 이윤기는 1938년 4월부터 육군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5월 지원병 1기생으로 응모해 지원했다.

1940년 지원병 응모 관련 강습회를 열었고,

1941년 경남 각지를 돌면서 지원병 미담 강연과 지원병제도 설명회 연사로 참가했다.

이윤기현역병 신분으로 전쟁 관련기사를 썼다.

전쟁 찬양, 황민의 결의, 전쟁동원의 정당화 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우리들 반도인이 밤낮으로 갈망하던 징병제가 드디어 1944년도부터 실시된다.

정말 영광의 극치이고 一視同仁의 감사한 성은에 감격할 수 밖에 없다.

되돌아보면 1938년 지원병제도 실시 이래

반도청년의 헌신순국의 이상은 높고 해가 갈수록 지원자 수도 점점 많아져,

그 가운데에는 혈서 지원자도 있고,

특히 1942년에는 채용인원 4,500명에 비해 응모자가 실로 25만 명을 넘어

반도청년의 가슴에는 애국의 적성이 넘치고 있다." 

- 이윤기. <징병제 실시를 맞아> 1942.

 이윤기의 해방 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이찬(1910~1974) - 죽음을 선동하다 북에서 3대 혁명시인이 되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 시인 이찬(이무종)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품경향이 뚜렷하게 친일로 바뀌었다.

詩 <전사(餞詞) - 교문을 나서는 여학생들에게>(1945)

졸업하는 여학생들에게 공장에 들어가 정신대 활동을 할 것을 선동하는 작품이다.

 

해방 후 함남일보사 편집국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공산체제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1946)작사했다.

1981년 조기천,김혁과 함께

이찬은 북한 문학사에서 3명 밖에 없는 혁명시인 칭호를 받았다.

1974년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임학수(1911~1982) - 일본군의 자살공격을 찬양한 낭만주의 시인.  

전남 순천 출신 시인 임학수(임악이)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해방 때까지 호수돈여고,배화여고,성신여학교 교사를 지냈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김동인,박영희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로 뽑혀 중국 각지를 돌아보고 와서,

대동아 건설에 참여하자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 간사를 지내며 전선위문에 참가했다.

1943년 <학도총진군>을 발표학도지원병 응모를 격정적으로 선동하고

군사훈련과 군수산업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으며,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찬양했다.

해방 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다.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1951년 납북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영문학을 강의했다.

 

 

 

 장혁주(1905~1998) - 작가 노구치 미노루, 끝내 일본인이 되다.  

대구 출신 소설가 장혁주(장은중)

1940년부터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노구치 미노루(野口捻)필명인 장혁주와 섞어 쓰기 시작했다.

1930년 일본 문예잡지 <대지에 서다>에 일본어 단편소설 <백양목>을 발표했다.

1934년 조선 문단을 비판한 산문으로 물의를 빚어 조선 문단과 거리를 두게 되고, 근거지를 도쿄로 옮겼다.

1938년 내선반도문화좌담회에서 희곡 <춘향전>일본어 공연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조선어 보호를 주장한 조선 문인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1939년 일본 잡지 <문예> 2월호에 발표한 산문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에 이를 다시 거론하자,

조선 문인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글은 장혁주의 본격적인 친일선언으로 간주되었다.

이 글에서 장혁주는 파탄 직전까지 내몰린 조선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 채

파시즘의 전위를 자임하는 극단적 친일행태를 드러냈다.

 

"나는 조선통치에 관한 한 정당정치의 부활이 오히려 우려스럽고,

군부정치야말로 진보적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를 파쇼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리 해도 좋다." 

- 장혁주.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 일본잡지 <문예> 1939년 2월호.

 

해방 후 장혁주는 일본에 남았다.

총련,민단 양쪽으로부터 친일파라고 비판을 받았다.

 

 

 

 정인섭(1905~1983) - 천황귀일주의 주장한 아동문학가.  

경남 울주 출신 시인,문학평론가,아동문학가 정인섭

와세다大 영문과에서 수학하고,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33년 한글학회 회원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 수립에 참여했고,

1935년에는 조선아동예술연구회를 창립했다.

1939년부터 일제 정책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했다.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과 간사를 맡았다.

 

해방 후

교통부 관료, 중앙대 교수, 일본 텐리대 교수, 한글기계화연구소, 한글전용추진위원회 등에서 직책을 맡았다.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4년부터 죽을 때까지 색동회 회장을 지냈다.

 

 

 

 조연현(1920~1981) - 대동아공영권 선동 비평가, 문학상으로 기려지다.  

경남 함안 출신 시인,비평가,언론인 조연현

<신시대> 1943년 12월호에 실린 <단의 1년>에서

"국민문학에 대한 명확한 이론적 근거가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은

국민문학에 대한 신념의 불철저를 말해주는 것이다...

작가로 하여금 작품을 쓰게 하는 것은 작가의 논리가 아니라,

작가의 인생에 대한 신앙인 것처럼,

비평가로 하여금 평론을 쓰게 하는 것은 비평가의 논리가 아니라

비평가의 문학에 대한 신념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신념을 우위에 놓으면서도 개성을 강조하는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연현

"이성의 절대적 권위를 버리고 동양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일본 낭만파가 있듯이 대동아 낭만파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다.

그가 주장한 이러한 동양주의는 결국 일본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작동했다.

 

해방 후

김동리,서정주,조지훈 등과 우익문화단체 발족에 참여했다.

1954년 예술원 초대회원, 동국대 전임교수,

1965년 대한민국예술상을 받았다.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72년 3.1문화상 예술상을 받았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했다.

 

 

 

 조용만(1909~1995) - 조선민중을 교화와 계몽의 대상으로 여긴 지식인.  

서울 출신 소설가 조용만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33년 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신시대> 3월호에 발표한 <새 학년부터 고쳐지는 국민학교>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노골적으로 협력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24일 <매일신보>

<매일신보 전 종업원은 삼가 3천만 동포와 백만 독자에게 고한다>라는 제목으로

일제강점기의 행적을 반성하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후 조용만중앙대,고려대 교수를 지냈다.

 

 

 

 조우식(?~?) - "싸워 죽어라." 지원병 출정을 찬양하다.  

일제 말기에 활동한 시인,평론가,언론인 조우식은 생몰년은 물론 초기행적도 알려져 있지 않다.

1941년 <조광> 1월호에 평론 <예술의 귀향 - 미술의 신체제>를 발표하면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후

체제에 복무하는 시인,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기에 두드러지게 활동했으나,

해방 후의 행적도 1950년 경향신문 퇴직 이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글을 마치며...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도 기억투쟁이 필요하다.

 

 

2016년 한국문인협회친일부역 문인 최남선,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겠다고 나섰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결국 뜻을 거두어 들였다.

 

민족문제연구소육당춘원의 문학상 제정을 역사퇴행의 막장 드라마라며 규탄했다.

그런데 이 막장 드라마는 주체가 바뀌어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동서문화사2016년 12월에 두 사람을 기리는 상을 제정

시상까지 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동서문화사육당학술상춘원문학상을 시상까지 해 놓고도

문단의 반발을 고려해 공개하지 않다가, 2017년 2월에야 사실을 밝힌 것이다.

 

"한국 학계와 문단의 대표인 육당과 춘원을 빼놓고 우리 사학과 문학을 논할 수 없다...

이들은 도쿄 2.8독립선언,

서울 3.1독립선언 등 독립운동을 하고 옥살이도 했는데,

그들의 내재적 독립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구적 업적을 폄하해선 안 된다." 

-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육당,춘원은 호소력 뛰어난 연설과 글로 많은 젊은이를 전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비판의 대상이지 문학상을 만들 대상이 아니다." 

-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문인들의 친일부역 사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뒷사람인 우리가 부끄러울 정도다.

그러나 해방 후 이들은 아무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방해로 결국 해산되었고,

이후 우리 현대사는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망각할 것을 요구하는 세력들이 지배해왔다.

 

 

드골은 임시정부 수반으로 전후

부역자재판에서 문학예술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탄원이나 구명운동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도덕과 윤리의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대진영을 선택한 작가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의 자극적 웅변술이

어떠한 범죄와 어떤 벌에 해당되는지를 너무나 잘 보고 있다."

 - 드골.

 

 

로베르 브라지야크(1909~1945)

프랑스의 숙청재판에 회부된 지식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소설가,비평가,극작가,시인이었다.

그는 독일점령기 프랑스에서 부역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자신이 편집을 책임진 주간지를 통해 친독 파시즘과 반유대주의를 선동했다.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폴 발레리, 프랑스아 모리아크, 시도니 가브리엘을 비롯한 수많은 동료문인들이

드골에게 사면 또는 감형을 청원했다.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브라지야크의 사면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히틀러의 선전자들을 엄벌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독가스실만큼이나 살인적인 말들이 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드골사면요청을 거부했고, 35살의 브라지야크는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왜 돈으로 부역한 자들보다 말과 글로 부역한 자들이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느냐?"

"기업가와 작가를 비교하는 것은 카인과 악마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카인의 죄는 아벨에 그친다.

그러나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다." 

- 베르코르. <바다의 침묵> 작가.

 

 

 

치욕,고통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기억과의 투쟁

얼마나 중요한지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서독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종전 40주년 기념 국회연설도

과거를 기억하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지나간 일은 수정되거나 백지화될 수 없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된다.

참회와 속죄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함은 역사를 통한 신의 증언이다.

그것은 속죄의 원천이다.

이 증거를 망각하는 자는 내일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 의회연설. 1985.5.08.

 

 

 

그러나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는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시간으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 대해

전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박한용

"친일파 청산의 실패로

친일세력이 권력을 차지한 뒤 분단과 극단적 반공풍토,

그리고 독재,친일,반공의 결착 속에서 친일세력은 우리 사회의 중추를 죄다 장악"한 것으로 정리한다.

 

그리하여

계조차 친일문제 연구를 외면하고

과거 친일에 연루된 언론이 문제를 호도하면서 대중적 논의 구조마저 차단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박정희 집권기의 무분별한 기념사업과 함께

공익보다는 사익, 주관적,집단적 이익몰이 등이 기념사업의 주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역사의 굴절과 왜곡이다.

"친일인물 기념사업자들은

일제시기 이들의 친일행위를 문명개화,계몽운동의 선구로 옹호하고,

해방 후 이승만 독재정권에 빌붙은 행적에 대해서

반공애국투사,건국공로자로 높이 평가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 어용지식인으로 활약한 이들에 대해서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친일파에서 친미파 또는 지일파로 변신한 것을 두고

개방화시대의 선각자로 치켜세우고 있다." 

- 박한용. <친일문인 기념사업의 현황과 문제인식>. 2016.

 

 

 

민족문제연구소 2009년에 펴낸 <친일인명사전>수록된 친일문인 43명 가운데

문학상 등으로 기림을 받는 이들은 8명이다.

 

이제 여기에

육당과 춘원이 보태졌다.

현재 운영되는 친일문인 문학상 수상자 면면을 보면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웬만한 비평가 중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은 이가 없고,

유명작가 중 동인문학상을 받지 않은 이도 없다.

 

기념대상 인물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주체나 수여대상자도 자기성찰이 필요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 친일부역 문인들 모두가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본유학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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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문제는 역사적 책임 문제이면서,

동시에 기념사업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 문제이기도 하다.

망각을 통해 역사적 사실의 은폐와 말살을 넘어

과감하게 왜곡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는 일련의 기도에 맞서기 위해

비록 뒤늦은 지금에라도 기억과의 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191223月 安晋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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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장호철 / 인문서원 / 2019 / 432p / 20,000원   

https://m.blog.naver.com/ahnsfarm/221756991738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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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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