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 Bernini ! 질식한 돌에 숨결을 불어넣다
부제 : 탐미_酖美의 육욕적_肉慾的 본능이 심미적_深美的 예술을 낳다.
원제 : "내 연인과 동생이 불륜이라니"…끔찍한 사실에 이성 잃은 男
성수영 2025. 7. 12. 06:19
제 1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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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이후 마지막 천재
돌에 숨결을 불어넣은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_Giovanni Lorenzo Bernini

로마의 성당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에 소장된 베르니니의 조각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 일부.
남자(베르니니)는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내 동생이 불륜 관계라니.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 끔찍한 소문이 사실이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아침 일찍 연인의 집에서 나와 출근하는 동생의 모습.
그리고 동생을 배웅하는 연인의 발그레 상기된 얼굴과 흐트러진 옷매무새.
지난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누가 봐도 뻔했습니다.
골목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 베르니니의 손이 분노로 떨렸습니다.
이성을 잃은 남자는 쇠지렛대를 집어 들고 홀린 듯 동생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동생의 옆구리를 후려쳤습니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동생은 허겁지겁 도망쳐 간신히 성당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성당 안에서 사람을 해치면 사형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분노는 연인에게로 향했습니다.
베르니니는 하인을 불러 명령했습니다.
연인을 찾아가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라고.
하인은 그 끔찍한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아무리 법체계가 느슨하고 인권 개념이 희박했던 17세기 로마라도,
이런 흉악 범죄는 중형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이었던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에게 고작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솜방망이 처벌.
이어진 교황의 말은 더욱 황당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으로 로마에 태어난 천재 조각가다.
그런 천재는 때때로 독특한 행동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천재를 이해하고 보호해야 한다.”

베르니니의 자화상(1623). 베르니니의 조각에 비해 그림은 몇 점 남아있지 않지만, 그는 그림 실력도 출중했다.
보르게세미술관
교황은 대체 왜 이런 비상식적인 판결로 베르니니를 감쌌던 걸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베르니니는 과연 얼마나 천재였던 걸까요.
‘미켈란젤로 이후 이탈리아의 마지막 천재 조각가’로 불리는, 베르니니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압도적인 천재
1622년 완성된 조각 작품 ‘페르세포네의 납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보르게세미술관
저승의 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하데스의 탐욕스러운 얼굴과 수염, 불거진 근육과 힘줄,
공포에 질린 페르세포네의 표정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건 매끄러운 살결, 움켜쥔 손에 눌린 허벅지 살의 디테일입니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얼굴 확대. ⓒ최은진

살결을 파고들어가는 손의 모습.
차가운 대리석이
마치 인간의 살결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해버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과 두 손으로 직접 거대한 돌덩어리를 깎아
이 모습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이 작품을 완성할 때 베르니니의 나이는, 고작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1598년 이탈리아반도의 나폴리에서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니니는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예술가였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의 영재 교육 덕분에 베르니니는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도
웬만한 어른 못지않은 그림과 조각 실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가족이 로마로 이사한 1606년,
‘꼬마 천재’ 베르니니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그곳에도 퍼져 있었습니다.
“실력을 한번 보고 싶군.”
예술을 사랑했던 교황 바오로 5세가 베르니니를 직접 불렀던 이유입니다.
“사람 머리를 한 번 그려보거라.”
베르니니를 본 교황은 말했습니다.
교황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니까, 긴장해서 그림을 망치더라도 적당히 격려해줘야겠군.’
하지만 베르니니는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습니다.
“어떤 머리를 그릴까요? 남자로 할까요, 여자로 할까요? 젊은이로 할까요,
늙은이로 할까요? 슬픈 표정, 유쾌한 표정, 비웃는 인상, 호감 가는 인상,
교황 성하께서는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당돌한 태도에 내심 놀란 교황은 말했습니다.
“성 바오로의 얼굴을 그려보거라.”
어린 베르니니는 과감한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30분 만에 스케치가 완성됐을 때,
완성된 작품을 본 교황과 추기경들은 그 뛰어난 실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감동한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될 것이다.
이 아이를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리고 교황은 베르니니의 손에 금화 열두 닢을 올려줬습니다.
베르니니는 평생 그 금화를 쓰지 않고 간직했다고 합니다.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
라우렌시오는 서기 258년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로마 황제에게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그릴 위에서 서서히 몸이 타들어가는 화형에 처해졌다.
라우렌시오는 "한 쪽은 이제 잘 구워졌으니, 어서 뒤집어서 드시오"라고 농담을 던진 뒤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작품에는 그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일종의 영적 깨달음을 경험하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베르니니 이전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를 제대로 표현한 조각가는 한명도 없었다.
불길을 비롯해 조각으로 만들기 어려운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우피치미술관
베르니니는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더욱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는 노력하는 천재였습니다.
산 채로 불에 타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조각을 만들 때,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직접 불 앞에 갖다 댄 뒤 거울로 자신의 찡그린 표정을 관찰했습니다.
라우렌시오의 얼굴을 실감 나게 묘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조각한 라우렌시오의 얼굴에는 찡그린 표정이 없습니다.
그러면 완성도가 더 높아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참아 가며 정신일도_精神一途하는 초인적인 의지,
그리고 그 결과물을 포기할 줄 아는 냉정한 예술혼.
열아홉 베르니니의 예술은 이미 이런 경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살아 숨쉬는 돌
이제 베르니니는 교황의 사랑, 로마의 상징이 됩니다.
20대에 이미 그는 서양 조각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여럿 만들어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스물일곱 살 때 만든 ‘아폴론과 다프네’입니다.

아폴론과 다프네. ⓒ최은진 /보르게세 미술관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아폴론은 님프(요정)인 다프네에게 반해 쫓아다닙니다.
다프네는 질색하며 도망을 다녔지만, 결국 아폴론에게 잡힐 위기에 처합니다.
그 순간 다프네는 아버지(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부탁해 월계수로 변합니다.
베르니니는 바로 그 순간을 잡아냈습니다.
‘드디어 잡았다’는 듯한 아폴론의 집중한 표정,
다프네의 고통에 찬 필사적인 몸부림,
이미 나무로 변하기 시작한 손과 발까지.
누구도 본 적 없는 그 광경을, 베르니니는 현실에 불러냈습니다.

손 끝에서 나뭇잎이 돋아나며 다프네는 나무로 변하기 시작했다. ⓒ최은진 /보르게세 미술관

다프네의 발이 뿌리와 잎으로 변하고 있다. ⓒ최은진 /보르게세 미술관
이런 베르니니의 작품들은 바로크 미술로 분류됩니다.
베르니니의 ‘다비드’를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비교하면,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의 차이를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거인 골리앗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는 다비드의 모습에는
다른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이처럼 르네상스 미술은 정적이고 이성적인 미술입니다.

미켈란젤로(좌)르네상스 미술(정적_靜的)과 베르니니(우) 바로크 미술(역동적_力動的)의 다비드.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다릅니다.
슬링(물매 혹은 투석구)의 끈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고, 돌은 발사되기 직전입니다.
앙다문 입과 집중한 표정, 긴장한 온몸의 근육이
마치 실시간 스크린샷처럼 그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다비드가 바라보는 저편에 골리앗이 있다고 상상하게 됩니다.
돌은 곧 힘차게 날아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겠지요.
그러고 보니 다비드의 발도 받침대 바깥으로 나와 있군요.
이렇게 작품은 밖으로 ‘열려 있고’, 예술은 작품을 벗어나 세상으로 확장됩니다.
바로 진짜 역동적인 인간의 몸 동작이 생생하게 표출되고 있는 거지요.
바로크 미술은 이처럼 역동적이고 감정적인 미술입니다.
그 중심에 베르니니가 있었습니다.

다비드의 역동적인 모습. ⓒ최은진 /보르게세미술관

팽팽하게 당겨진 끈과 긴장한 근육. ⓒ최은진 /보르게세미술관

다비드의 한쪽 발이 받침대 밖으로 나와 있다.
작품이 바깥으로 '열려 있는' 바로크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최은진 /보르게세미술관
명사들과 부자들은 베르니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베르니니가 그들을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성직자였던 몬토야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몬토야는 교황청 재판소에서 일하는 엄격한 법학자였습니다.
베르니니는 그 몬토야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 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작품이 완성됐다는 말을 듣고 몬토야와 함께 구경하러 온 추기경은
갑자기 몬토야의 얼굴을 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고 합니다.
“이게 그 조각이로군.”
이어 조각을 만지면서는 추기경은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이게 진짜 몬토야고 말이야.”
일종의 썰렁한 ‘아재 개그’였지만,
그만큼 조각이 실물과 똑 닮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각이 로마 시민들의 화젯거리가 되면서 몬토야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혹시 몬토야 선생님 아니십니까?”
길거리를 걷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겁니다.
베르니니의 전기를 쓴 프랑코 모르만도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베르니니가 조각상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몬토야는 그가 죽은 직후 영원히 잊혔을 겁니다.
하지만 조각상 덕분에 그는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됐습니다.”

몬토야 대주교의 흉상. /산타 마리아 디 몬세라토
보르게세 미술관을 만든 스피치오네 보르게세 추기경도
베르니니의 매력에 흠뻑 빠졌습니다.
보르게세 추기경은 베르니니에게 자신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베르니니가 조각을 거의 다 완성할 무렵,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대리석 조각의 이마 부분에 금이 간 겁니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이를 부수지 않고 마무리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똑같은 조각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보르게세 추기경이 베르니니를 찾아왔을 때,
베르니니는 이마 부분에 금이 간 조각을 보여줬습니다.
추기경은 속으로 크게 놀라고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베르니니를 너무나도 존경했기에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베르니니도 아무렇지 않은 척 추기경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몇 분 후, 베르니니는 방 한쪽에 놓인 천을 잡아당겼습니다.
그 밑에는 흠집 없는 또 다른 조각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감격해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 됐습니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의 첫 번째 버전(왼쪽)과 두 번째 버전(오른쪽). 빨간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부분에 금이 가 있다.
베르니니는 이처럼 ‘연출의 중요성’을 아는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성당 안에 들어선 신자,
대리석 앞에 선 관람자의 마음을 조종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베르니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교황이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대는 로마를 위해 만들어졌노라. 그리고 로마는 그대를 위해 만들어졌노라.”
괴팍한 천재의 막장 드라마
천재 중에서는 괴팍한 사람이 많습니다.
베르니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베르니니)의 아들은 베르니니를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베르니니의 눈빛은 너무 날카로워서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일에 몰두할 때는 너무 열정적이어서, 불을 뿜을 정도로 분노하는 일이 잦았다.”
베르니니 자신도 말했습니다.
“나는 일할 때 피를 토한다.”
한편 사생활에서 그는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었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베르니니는 스스로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는 주색(酒色)에 빠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베르니니가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여성은 코스탄차 보나렐리였습니다.
코스탄차는 베르니니가 함께 일하던 동료의 아내.
그러니까 베르니니와 코스탄차의 관계는, 불륜이었습니다.
다만 코스탄차의 남편은
이런 관계를 암묵적으로 허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베르니니가 30대 후반일 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2년 가까이 이어집니다.

코스탄차의 흉상
코스탄차의 조각상을 보면
베르니니가 애인에게 품었던 애틋한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베르니니가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지 않고 스스로 제작한 유일한 조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스탄차의 모습이 신화 속 여신처럼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수수한 드레스의 목 부위는 풀어헤쳐져 있고, 머리에는 아무 장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베르니니가 종교인을 주제로 만든 다른 조각과 달리,
코스탄차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조각에는 오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베르니니의 귀에는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르니니의 동생이 코스탄차와 불륜을 벌이고 있다”는 거였지요.
1638년 5월의 어느 날,
베르니니는 그 소문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베르니니는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베르니니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시골로 출장을 좀 다녀올 거야. 며칠 걸릴 것 같아.”
그리고 다음날 아침,
베르니니는 로마를 떠나는 대신 코스탄차의 집 근처에 마차를 세운 뒤 골목에 숨었습니다.
얼마 안 돼 베르니니는 집에서 나오는 동생과 그를 배웅하는 코스탄차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겁니다.
베르니니는 분노와 모욕감에 치를 떨며 동생을 쫓아가 쇠지렛대로 마구 때렸습니다.
분노에 미쳐버린 베르니니에게는,
자신과 코스탄차의 관계도 불륜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인을 시켜 코스탄차에게까지 해코지를 했습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베르니니는 끝내 동생을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을 쫓아갔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동생은 근처 성당으로 간신히 도망쳤습니다.
베르니니는 뒤를 쫓아 성당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성당 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던 베르니니는 결국 발길을 돌렸습니다.
동생은 곧 다른 도시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 ‘막장 드라마’는 당시 로마에서 엄청난 이슈가 됐습니다.
몇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입니다.

우르바노 8세. 의복과 장신구 표현이 탁월하다. /카피톨리노 박물관
하지만 사법권을 갖고 있는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베르니니에게 사면장을 발급한 뒤 형식적인 벌금만 부과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교황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가 점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베르니니가 교황의 이미지를 선전하는 핵심적인 인물이자
로마 최고의 예술가였다는 겁니다.
당시 로마는
유럽 전체의 정치·문화 중심 수도가 되기 위해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강대국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무기의 으뜸은 예술. !
탁월한 작품을 활용해 교황청의 권위를 과시하고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게 교황청의 계획이었습니다.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베르니니는 그 핵심에 있는 마지막 퍼즐키였습니다.
그러니 베르니니가 중형을 받게 된다면
교황 자신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는 건 물론, 로마의 위상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베르니니는 정당한 사법절차대로 처벌을 받지 않게 된 주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베르니니는
또 다른 사건으로 인해 예술가 생명이 위험해질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번에는 사생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 앞에는 독특한 모양의 성 베드로 광장이 있다.
레오 14세 교황도 지난 5월 즉위 직후 이곳에 모인 군중에게 첫 인사를 했다.
지금 성 베드로 광장의 모습을 설계해 완공한 사람이 바로 베르니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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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보르게세 박물관에서 사진을 보내주신 최은진님께 감사드립니다.
- 이번 기사는 Bernini: His Life and His Rome(Franco Mormando 지음),
- 디자인 천재(제이크 모리세이 지음, 김난령 옮김),
- Bernini(Anna Coliva, Andrea Bacchi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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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너무 야해, 근데 아름다워"...몰락한 男 승부수에 '발칵'
성수영 2025. 7. 19. 00:02
제 2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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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뭘 했냐고? 고개를 들어 로마를 보라
로마를 만든 '천재 공간 디자이너'
잔 로렌초 베르니니_Giovanni Lorenzo Bernini

“건물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건물을 가리켰습니다.
간밤에 건물 외벽을 따라 생겨난, 뱀처럼 기어가는 듯한 끔찍한 균열.
그것도 보통 건물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 세계의 심장, 성 베드로 대성당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겁니다.
만약 무너진다면 그야말로 대참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
수군거림은 곧 확신에 찬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건축도 모르는 그놈이 대성당을 무너트린다!”
그 비난의 대상은 공사 책임자,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나빴습니다.
베르니니가 유부녀와 불륜을 벌이고,
그 불륜 상대와 자기 동생의 간통을 목격하자 동생을 쇠 지렛대로 때려죽이려 했던
‘막장 드라마’가 바로 얼마 전 일이었으니까요.
“천재 예술가는 사생활이 더러워도 봐줘야 한다”는
황당한 이유로 용서를 받았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본업인 예술과 건축에서마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단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탑을 당장 철거하라. 관련 비용은 베르니니가 지불하라.”
예술가로서 가장 빛나야 할 40대의 나이에,
베르니니는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습니다.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어이 부활합니다.
역사상 가장 성스러우면서도 외설적인 걸작 하나를 만들어낸 덕분이었습니다.
조각의 천재였던 그는 왜 건축에 손을 댔다가 한순간에 무너졌던 걸까요.
그리고 그를 구원한 문제의 걸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탈리아 로마의 모습을 만든 천재 예술가, 지금 베르니니의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너, 건축을 배워라
10대 때부터 천재적인 조각 실력으로 로마를 뒤흔들었던 베르니니.
1623년, 새로 즉위한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스물네 살의 베르니니를 부른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과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대의 영광이다.
하지만 내가 그대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보다 더 큰 행운이다.”
그리고는 명령했습니다.
“이제부터 건축을 공부하라. 그대의 건축 실력을 조각 실력만큼 키워라.”
한 마디로,
‘앞으로 너에게 건축을 맡길 테니 열심히 공부해 두라’는 말이었습니다.
교황처럼 높디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왜 한낱 젊은 예술가의 진로를 몸소 정해준 걸까요.
교황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바람 앞에 가톨릭의 권위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맞서 교황은 가톨릭의 심장인 성 베드로 대성당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만들려 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도 성당을 보면 너무 감격해서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성당을 만들자.’
물론 이런 ‘인생을 바꾸는 예술 작품’은 돈만 쓴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젊은 천재 베르니니라면
그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게 교황의 판단이었습니다.

요즘이야 건축과 조각이 완전히 다른 분야지만
당시만 해도 둘의 경계는 희미했습니다.
교황은 베르니니에게 주물 공장 감독관, 수자원 관리 감독관 같은 직책을 맡기며
그를 엘리트 건축가이자 감독관으로 키워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교황의 남자’가 된 베르니니에게 첫 번째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성당 중심의 심장부, 베드로의 유해가 잠든 그 자리 위,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바로 그곳을 장식할 거대한 청동 조형물(발다키노)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1624년 6월 교황청은 공개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성 베드로의 유해 위에 발다키노를 만들고 싶은 자는 15일 내로 설계안을 가져오라.”
하지만 이렇게 거대하고 중요한 프로젝트의 공모 기간이 고작 보름이라니.
짧아도 너무 짧았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공모전은 이미 내정자를 정해 놓은 ‘무늬만 공모전’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당선자는 베르니니였습니다.
교황의 귀띔을 받은 덕에 일찌감치 멋진 설계를 준비할 수 있었으니까요.
초짜 건축가 베르니니는 곧바로 공사에 착수해 발다키노를 멋들어지게 만들어냅니다.
어쨌거나 결과가 너무 좋았습니다.
‘낙하산’인 그에게 눈총을 보내던 로마 시민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차가운 증오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베르니니의 가장 큰 라이벌이자 또 다른 천재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1599~1667)였습니다.
“건축 모르는 놈”…베르니니의 굴욕
잠깐 성 베드로 대성당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성당의 재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1506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비롯한 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여기에 손을 보탰고,
프로젝트 책임자는 시간이 흐르며 계속 바뀌었습니다.
베르니니가 교황의 명령으로 건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공사가 120년 가까이 진행된 상태.
당시 재건축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마데르노라는 건축가였습니다.
그를 조수이자 제자로서 오랫동안 보좌해온 사람이 바로 보로미니였습니다.

예술가로 출발한 베르니니와는 달리 보로미니는 석공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건축적·구조적 지식과 경험이 많았고, 공학적인 기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베르니니보다 요즘 건축가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지요.
그는 경험과 천재성을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보로미니의 재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스파다 궁전의 ‘마법의 복도’.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 복도는 사람이 직접 봤을 때 37m 정도의 길이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이 복도의 길이는 겨우 8m에 불과합니다.
이런 마법은 보로미니가 끝에 배치한 조각상의 크기(실제 60cm 가량),
기둥의 위치와 높이 등을 절묘하게 배치해 눈속임 효과를 만들어낸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보로미니에게는 건축가로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성격이 괴팍하고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가는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반드시 건축주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교황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치 없는 보로미니는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재건축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이어받겠지.’
그리고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스승님(마데르노)이 1629년 세상을 떠난 겁니다.
보로미니의 예상과는 달리, 그리고 다른 모든 로마 시민들의 예상대로,
대성당 재건 프로젝트의 새로운 총책임자는 교황의 총애를 받는 베르니니였습니다.
보로미니의 자존심은 형편없이 구겨졌습니다.
‘저 건축도 모르는 비전공자 놈이 총책임자라니….’
큰 충격을 받은 보로미니는 얼마간 베르니니 밑에서 일하다가,
자존심적인 문제로 인하여 결국 프로젝트에서 스스로 손을 떼게 됩니다.

그리고 8년 뒤.
보로미니에게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옵니다.
교황의 명으로 두 개의 종탑을 건물 위에 얹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베르니니.
하지만 첫 번째 종탑을 올린 순간, 대성당 외벽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성당 밑의 연약한 땅이 무거운 종탑을 받치지 못하고 가라앉은 게 원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전임자(마데르노)가 기반을 잘못 다졌다’는 쪽과
‘베르니니의 설계가 잘못됐다’는 쪽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습니다.
베르니니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전문가는 보로미니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중한 건축가들은 먼저 지반부터 살핍니다.
무턱대고 건물부터 올리다니, 말도 안 돼요.”
한마디로,
건축공학적 지식도 없는 베르니니가 억지로 공사를 진행하다 일을 망쳤다는 얘기였지요.
사실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이 사건의 책임은 전임자인 마데르노에게 있습니다.
베르니니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었고요.
하지만 보로미니는 재건축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실력 있는 건축가.
그런 보로미니가 “베르니니 잘못”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여론은 베르니니에게 책임을 묻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여러 악재가 겹칩니다.
일단 베르니니의 ‘불륜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의 평판이 땅에 떨어집니다.
여기에 더해 베르니니에게 건축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던
든든한 후원자 우르바누스 8세까지 세상을 떠납니다.
새로 즉위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베르니니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물.
교황은 명령했습니다.
“종탑을 철거하라.
그리고 관련 비용은 베르니니가 물어내도록 하라.”

천재, 다시 일어서다
로마 시민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베르니니는 이제 끝났어.”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가장 큰 ‘고객’인 교황에게 완전히 찍히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베르니니는 자신의 출발점인 조각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부활합니다.
한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작은 예배당을 만들기 시작한 게 계기였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코르나로 예배당.
바로 이곳에서 베르니니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가 탄생합니다.
‘성녀 테레사의 환희’입니다.
성녀 테레사는 16세기 스페인의 수녀이자 대(大)신학자입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천사에게 창으로 심장을 찔리는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테레사는 엄청난 고통과 대단한 종교적 황홀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베르니니는 바로 그 격렬한 환희를 느끼는 순간을 숨김없이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외설 논란’을 우려해
그 장면을 엄숙한 분위기로 묘사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는 논란을 감수하는 일종의 승부수이자,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는 지극히 베르니니다운 행동이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황홀감에 빠진 테레사의 얼굴.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테레사의 모습입니다.
테레사가 생전 공중 부양 현상을 여러 번 겪었다는 기록을 반영한 것입니다.
베르니니는 펄럭이는 옷자락을 멋지게 표현해냈고,
여기에 더해 조각의 모든 면이 부드러운 하나의 덩어리로 이어지도록 다듬었습니다.
그러니까 건축가이자 ‘공간 디자이너’로서 천재성이 융합된 것이었지요.
예배당 천장에서 비추는 자연광과 금빛 브론즈로 제작된 뒤쪽 구조물이 반사하는 후광.
그 덕분에 조각이 무거운 돌덩어리라는 사실은 잊혀지고,
대신 ‘영적인 에너지와 공중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작품이 발표되자 베르니니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여론은 반전됐습니다.
“그 조각 봤어? 역시 베르니니는 천재야.”
“베르니니가 아니면 누가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겠어.”
극찬이 쏟아졌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조각이 너무 외설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트집을 잡기에 조각은 너무 아름답고, 또 성스러웠습니다.
육중한 돌덩이가 중력을 무시하고 떠 있는 듯한 착시와 체감적 모습이 가히 초현실적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기적을 두 눈으로 체험하는 수단이자,
바로크 조각이 갖고 있는 극적인 아름다움의 정점이었습니다.
‘피우미 분수’를 제작한 건 그의 부활을 확정지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분수는 지금도 로마 관광 필수 코스로 꼽히는 나보나 광장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분수 제작을 의뢰한 건 교황입니다.

원래 교황은
베르니니에게 분수 제작을 맡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명 예술가들에게 “설계도를 내 보라”는 연락을 돌리면서도 베르니니는 쏙 빼놓았으니까요.
가장 유력한 후보는 보로미니였습니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영리한 술수를 씁니다.
자신이 제작할 피우미 분수 모양을 작게 모형으로 만든 뒤,
친한 귀족에게 부탁해 교황의 식탁 위에 올려놓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칫 교황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기도 했습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교황은 모형을 본 순간 30분 가까이 그 모형을 여기저기 관찰하며
그 아름다움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이런 설계는 베르니니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다.
모형을 안 봤으면 몰라도, 일단 봐버렸기 때문에 베르니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피우미 분수입니다.
분수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인물 조각들이 각각 배치돼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에 미치는 교황의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황청과 베르니니의 관계는 다시 회복됩니다.
물론 ‘꼼수’에 밀려 일감을 빼앗긴 보로미니는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보로미니는 베르니니에게 계속 밀리게 되고,
훗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처음과 끝
이 무렵,
유럽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30년간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으로 막을 내린 것.
의미심장한 것은
이 조약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가톨릭이 더 이상 ‘세상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교황청의 권위는 추락했고,
가톨릭이 독점하던 막대한 종교적 수입도 개신교라는 경쟁자와 나눠야 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1655년, 새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즉위합니다.
그가 꺼내 든 카드는 ‘예술을 통한 권위의 회복’.
이전에도 비슷한 목표를 추구한 교황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해서
로마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바꿔놓겠다는 게 교황의 꿈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황은 베르니니와 ‘드림팀’을 이뤄,
쇠락해가는 로마의 영광을
예술의 ‘장엄함(magnificenza)’으로 되살리려는 마지막 몸부림을 시작합니다.
교황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얼굴, 바로 앞 광장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성당 앞은
미로처럼 뒤엉킨 골목길과 허름한 집들로 가득 찬 무질서한 공간이었습니다.
교황은 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광장을 만들기로 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청 1년 예산의 절반을 모두 투입해야 했으니까요.
당연히 반대는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돈이 돌면서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며 계획을 밀어붙였습니다.


무질서했던 공간은
베르니니의 손에서 광활하고 장엄한 ‘성 베드로 광장’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베르니니는 이 광장을 ‘어머니의 팔’로 설계했습니다.
284개의 거대한 기둥이 타원형으로 늘어서,
마치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 광장에 모인 모든 이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모습.
이는 신자들을 축복하고,
갈라선 이들을 화합시키며,
믿지 않는 이들을 돌려세우는
가톨릭 교회의 포용력과 권위를 완벽하게 구현한 극한적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광장이 외부를 향해 뻗은 가톨릭의 팔이었다면
‘카테드라 페트리’(베드로의 의자)는 성당 가장 깊은 곳에서 빛나는 심장이었습니다.
초대 교황이었던 사도 성 베드로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 의자.
베르니니는 이 의자를 둘러싸는 거대한 청동 장식을 만들었습니다.
제단 위에 이 성스러운 의자와 장식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뒤 창문에서는 천상의 빛이 쏟아져 들어와 금빛 광선과 구름 조각 사이로 퍼져나갑니다.
입구인 광장(처음)부터 가장 깊은 곳(끝)까지,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거대한 공간은
이렇게 베르니니라는 천재의 손에서 마침내 완성됐습니다.

베르니니의 기념비를 찾으시나요
성 베드로 광장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
베르니니의 명성은 이제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마침내 당대 최고의 권력자,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마저 그를 원하게 됩니다.
베르니니가 67세가 되던 1665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직접 베르니니를 궁정에 초대한 사실입니다.
원래 교황청은 베르니니의 출국을 막으려 했습니다.
베르니니는 유럽 최고의 예술가이자 로마를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만든 주인공.
그런 베르니니가 프랑스에 눌러앉는다면, 로마의 위상은 실추될 게 뻔했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협박에 가까운 강력한 요구로 베르니니는 프랑스에 잠시 머물게 됐습니다.
베르니니가 프랑스에서 남긴 대표적인 작품은 루이 14세의 흉상.
이 조각상은 실제 루이 14세의 모습보다 눈이 좀 더 크고, 이마가 좀 더 높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일부 프랑스인들이 “조각상이 잘못됐다”고 하자 베르니니는 답했습니다.
“내가 만든 왕은 그대들의 왕보다 더 오래 사실 것이오.”

프랑스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베르니니는 열정적으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168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후유증으로 인해 베르니니는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내 팔은 한평생 그렇게나 열심히 일했으니 죽기 전에 짧게나마 쉬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82세였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한 예술가가 대개 그렇듯,
시대가 바뀌고 유행이 변하자 베르니니는 ‘흘러간 촌스러운 예술가’ 취급을 받았습니다.
18세기 유럽 미술의 대세는 신고전주의.
화려하고 감정적인 바로크 미술과 정반대로,
신고전주의는 심플하고 순수하며 냉정한 예술을 추구했습니다.
신고전주의자들은 바로크 미술을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퇴폐적이며 혐오스럽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베르니니는, 새로운 세대가 비판하는 ‘적폐’의 대표주자였습니다.
하지만 바로크 미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르니니가 다시 없을 위대한 천재 예술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1757년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가 그린
‘현대 로마의 풍경화들이 걸린 화랑’이 그 증거입니다.
신고전주의 유행이 한창일 때
그려진 이 커다란 그림에는 로마를 대표하는 풍경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익숙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왼쪽 아래의 피우미 분수,
기둥이 있는 성 베드로 광장,
그리고 조각상 ‘다비드’와 ‘아폴론과 다프네’.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들이지요.
그는 로마의 모습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베르니니의 시신은 집 근처 성당에 조용히 묻혔습니다.
1898년 후손이 작은 대리석 명판을 얹어주기 전까지,
그의 무덤 위에는 어떤 장식도 없었습니다.
베르니니가 죽은 유명인의 무덤 장식과 화려한 조각상을 한평생 만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베르니니에게 기념비는 딱히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리석 묘비, 화려한 청동 무덤 장식, 베르니니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 그 어떤 것도
베르니니라는 천재의 기억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대신, 베르니니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로마 시내를 둘러보면 됩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부터 보르게세 미술관까지 펼쳐지는 그 장엄한 건축과 예술품들.
그 자체가 바로 베르니니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기념비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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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보르게세 박물관에서 사진을 보내주신 최은진님께 감사드립니다.
- 이번 기사는 Bernini: His Life and His Rome(Franco Mormando 지음),
- 디자인 천재(제이크 모리세이 지음, 김난령 옮김),
- Bernini(Anna Coliva, Andrea Bacchi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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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https://v.daum.net/v/20250719000203047
[ SinEun의 참고사진 ]
옮겨온 글과 사진 링크 : https://blog.naver.com/tournoteblog/220766795797
바티칸 산 피에트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에 있는 한가운데 서 있는 웅장한 모습의
‘발다키노’(baldacchino)는 베르니니(Gianlorenzo Bernini)의 작품입니다.
베르니니의 대표작인 발다키노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당 돔과 더불어 대성당의 가장 큰 볼거리입니다.


발다키노는 1623년 5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8세(Pope Urban VIII)의 지시에 의해 시작됩니다.
베르니니는 우르나노 8세가 성당 한가운데 거대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성 베드로가 묻혀있는 묘지 위에 세상에서 가장 큰 발다키노를 만듭니다.
1633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축일에 완성돤 발다키노는 높이 30m에 무게만 37t짜리에 달하는 청동 작품입니다.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나선형 기둥은
소용돌이가 치는 모습으로 이는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내부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와 네 명의 천사가 조각돼 있습니다.
또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이름과 가문에 대해서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발다키노 제작 당시에는 엄청난 양의 청동을 사용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청동을 떼어와야 할 정도였다 전해집니다.



발다키노 중앙 제대 아래에는 성 베드로를 비롯해 역대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묘지가 있습니다.
발다키노는 독립된 제단이나 무덤을 덮는 *‘천개’(天蓋)라는 의미입니다. 고대와 중세에 권력자와 신들의 제단, 설교단 등을 덮는 장식으로 호화롭고 화려한 조각이나 공예품으로 만들어집니다. *천개_天蓋 : 하늘의 지붕이란 뜻.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꽤 많이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과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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