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상병 사건 뭐길래, 대통령 격노설, 진실은 ?

 

 
 

 

 
실종자 수색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20살 해병대원 故 채○○ 상병.
 
 
국민 모두가 안타까워했었던 이 사건이
 
어쩌다 정치권 최대 이슈가 된 걸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한 방에 풀어드립니다.
 
함께 공부할까요?

 

 

 

 

 

▶‘채 상병 특검법’ 밀어붙이는 野 6당, 무슨 사건?

 

안녕하세요.

‘채 상병 사건’이 정국을 강타했습니다.

특검법안이 국회에서 통과가 됐습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시 국회로 돌아올 거고
그러면 재의결로 통과시키겠다는 게 민주당 전략이죠.

 

 

야당이 다 모였습니다.

여기 보면,

조국 대표가 있고

이준석 대표가 있고요.

장혜영 정의당 의원,

박주민 민주당 의원 있고,

새로운미래 김종민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까지.

 

이러다 보니까 저희에게 질문 주셨어요.

채 상병 사건 팩트 정리 부탁드립니다.

너무 복잡하다 이거예요.

뭐가 문제인지. <동앵과 뉴스터디>는 팩트만 전해드리잖아요.

보십시오,

아주 난리입니다.

 

민주당 “특검법 거부하면 아주 큰일 날 걸?”
조국혁신당 “그러면 국민은 대통령을 거부할걸?”
진보당“거부하면 윤 대통령 탄핵의 문이 열릴 것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정권 내놔야 할 것이다”
새로운미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대통령을 특검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세게 나온 상황입니다.

 

국민의힘나 홀로 지금 막고 있죠.

“수사를 일단 해보고”

“공수처 수사가 진행 중이니까”

“그 이후에 특검을 해야 한다”.

 

그런데 또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채 상병 특검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체

이 사건 무엇이 논란이기에

이렇게 시끄러운 건지 지금부터 한 방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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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쏟아진 작년 여름, 해병대에 무슨 일이?

작년 여름 기억나십니까?

아주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는데

경북 예천에도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집니다.

산사태 나고 도로 유실되고,

주택 붕괴되고 난리가 났습니다.

무려 15명이 사망하고 실종자가 9명, 2명은 끝내 찾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업이 진행된 거죠.

거기에 해병대 1사단 신속기동부대가 투입이 됩니다

 

해병대 신속기동부대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24시간 내에 투입 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부대예요.

해병대 1사단이 경북 포항에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경북 예천으로 지원을 나간 거죠.

 

이것도 사실은 논란이 있죠.

이런 일, 재해가 발생했을 때마다

뭔가 국가에서는 빨리 인력 동원해서 실종자를 찾으라고 하는데

보통 동원되는 게 군 장병들입니다.

 

그런데 군 장병들이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수색 교육을 받거나 훈련을 받은 건 아니다 보니까

과연 손쉽게 동원하는 게 맞느냐 논란도 있습니다.

어쨌건 해병대 1사단이 투입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렇게 ‘인간 띠’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탐침봉을 들고 띠를 이루어서 가면서

실종자들을  찾는 작업을 진행한 거죠.

거기에 故 채 상병이 함께 참여한 겁니다.

 

채 상병은 해병대 1사단 제7포병대대 소속이었는데

여기에 투입이 돼서 갔어요.

사실 채 상병 이름 많이들 알고 계시죠?

그렇지만, ‘채○○’으로 한 것은

유족들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해서

이제는 ‘故 채 상병’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원래는 일병이었는데,

사망 후에 1계급 추서가 되면서 지금 ‘상병’으로 불리고 있죠.

 

여기가 어디냐면 경북 예천군의 내성천이라는 천이에요.

채 상병도 여기에 투입이 됐는데

내성천 22.9km를 이렇게 다니면서

실종자가 여기 어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색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7월 19일 오전 9시 10분경

이 내성천에 있는 보문교 주변 하천 지반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가 많이 내렸으니까

상당히 물이 불어난 상황에서 지반이 침하하면서

아주 그냥 빠른 속도로 급류가 휘몰아 내리치면서

탐색을 하던 이 장병들을 순식간에 휩쓸고 간 거죠.

 

그러면서

3명이 떠내려갔는데

채 상병 외에 다른 2명도 함께 휘말렸습니다.

2명은 본인이 직접 헤엄을 쳐서 빠져나왔고

채 상병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급류로 휘말려 갑니다.

 

그리고

14시간 만인 그날 오후 11시 8분경

떠내려간 지점에서부터 한 6.5km 떨어진 곳에서 사망한 채 발견이 됩니다.

 

그 다음 날

바로 윤석열 대통령은

故 채 일병에 대해 “국가유공자로 최대한 예우를 하라”고 하면서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하죠.

 

왜냐하면

당시에 왜 구명조끼를 입히지 않았느냐부터

여러 논란이 이미 발생을 했었거든요.

 

유족의 뜻에 따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이 됐고요.

보국훈장 광복장도 서훈이 됩니다.

 

 

대통령이 지시를 했죠.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라.

그 조사를 해병대수사단이 시작한 거죠.

해병대수사단이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지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한 겁니다.

 

 

군 지휘 체계는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군 통수권자 누구죠?

당연히 대통령이죠.

그 밑에 국방부 장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합참의장이 있어요.

별 4개 대장입니다.

그리고 해군참모총장이 있고요.

왜냐하면 해병대에서 수색을 나갔기 때문에

그 부분을 조사하다 보니까 해병대 지휘 체계를 살펴보고 있는 거예요.

 

왜 살펴봐야 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해병대사령관 중장이 있고요.

해병대 1사단장인 임성근 소장,

7여단장 대령, 제7보병대대장

그리고 그 밑에 중대장부터 해서 쭉 현장 간부들이 있죠.

 

해병대수사단은요.

이렇게 보면, 여기 해병대사령관 직속으로 딱 떨어진 독립적인 이제 수사 기구입니다.

열흘 동안 조사를 합니다.

누가? 박정훈 대령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이 열흘 동안 조사한 결과는 이렇습니다.

어디까지?

여기까지는 책임을 물어야겠다.

그래서 임성근 사단장부터, 7여단장, 중대장, 현장간부, 대대장 2명, 중위, 상사까지요.

이하 8명에 대해서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을 해야겠다고 보고합니다.

 

 

과실치사라는 건,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잘못이 있었다는 거예요.

업무를 잘못 이행했다는 거죠.

(사망 사고) 책임이 있었다고 박정훈 수사단장이 보고를 합니다.

그 결과예요.

 

 

여기서부터 바로 이 논란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채 상병 사건’의 1차적인 핵심 논란여기서 벌어집니다.

박정훈 수사단장의 항명

임성근 1사단장의 과실치사 논란 이 논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채 상병 사건조사한 해병대수사단항명?

이제 본의 아니게 워낙 유명하신 분이 됐죠.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은 해병대에 들어와서

군사경찰 병과로 해서 쭉 이쪽 업무를 하다가

해병대수사단을 이끄는 수사단장이 됩니다.

2023년 7월 20일부터 대통령 지시에 따라서 조사를 시작했죠.

 

7월 28일, 결론을 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구에게?

아까 수사단 직속상관이 해병대사령관이라고 했죠?

김계환 사령관에게.

곧 공수처에서 수사를 받게 될 텐데

어쨌든 해병대사령관에게 보고를 합니다.

아까 보여드린 것처럼 임성근 사단장 이하 8명을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넘기겠다고요.

 

여기서 조금 설명을 드려야 되는데,

해병대수사단이 수사를 해서

그 결과로 바로 검찰 거쳐서 재판으로 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법이 개정이 되면서

군대 내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할 경우

군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경찰로 넘기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에서 은폐할 수 있다 내부 조사를 하게 되면.

그러다 보니까 제3기관인 경찰에서 사망 사건의 경우엔 무조건 수사를 해라,

그래서 해병대수사단이 조사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공식 수사는 경찰로 조사 내용 넘겨서 경찰이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단 이 구조를 아셔야 이걸 이해하실 수 있어요.

 

 

어쨌든 (수사단장_박정훈 대령이) 위에 보고를 한 겁니다.

8명에 대해서 과실치사 혐의로 넘기겠다.

김계환 사령관, 그때까지 아무 말 없습니다.

 

그리고 28일에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혀요.

그리고 이날 오후에

박정훈 수사단장은 채 상병 유가족들을 만납니다.

만나서 “조사 결과 8명에 대해서 과실치사 혐의로 이첩할 겁니다”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이렇게 8명이 뭔가 책임을 질 것처럼 알고 계셨던 거죠.

 

 

그리고 이틀 뒤인 7월 30일에

박정훈 대령은 직접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이 내용 그대로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이종섭 장관은 결재를 합니다.

이대로 진행하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장관 결재까지 났으니까

다음 날 바로 오후 2시 언론에 이런 내용을 브리핑을 하고

국회 국방위에 가서 이 내용을 보고하기로 약속을 잡아요.

그리고 나서 이제 소관 경찰청인 경북경찰청에 이 내용을 이첩해야겠다고 결정을 다 합니다.

언제?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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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직전,

여기서부터 이제 문제가 생긴 건데 (2시 발표) 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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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섭 국방장관

“보고 취소하라”

“경찰에 이첩 보류하라” 지시를 내립니다.

 

박정훈 대령은 이렇게 하루 만에 바뀐 이유

“대통령실 외압 때문이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죠.

 

이건 제가 내일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릴 건데

이종섭 장관은 그게 아니고

“결재 후에 여러 의견을 들어봤더니

이게 이렇게 다 경찰에 넘길 건이 아니더라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지시를 바꾼 것”이라고 얘기를 해요.

 

 

결과적으로

그런데 ‘보류하라’고 그랬잖아요.

넘기지 말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틀 뒤인 8월 2일 박정훈 대령이 넘기지 말라고 한 내용을 넘깁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경북경찰청으로 넘겨요.

그랬더니 그 사실을 알고 국방부 검찰단

넘기지 말라는데 넘겼다며 경찰로부터 다시 이 자료를 회수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바로 그다음 날

박정훈 수사단장에 대해서 “이건 항명이다” 넘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걸 마음대로 넘겼다,

이거는 군 지휘 체계를 무시한 항명이다.

그래서 그 혐의로 해병대수사단을 압수수색하고요.

해병대사령부 보직해임심의위원회

박정훈 수사단장을 “사령관 지시 사항 불이행한 중대한 기강 문란”이라며 보직해임 시키죠.

 

 

박정훈 대령은 이렇게 얘기를 해요.

내가 구두로 넘기지 말라는 지시는 받았지만 문서상 나는 이미 결재를 받았다.

근데 문서상으로 명확하게 수정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항명이 아니다라고요.

나는 결재를 받았고 보류하라는 구두 지시 받았지만

문서상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예정대로) 넘긴 거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박정훈 수사단장 항명 논란’인데

그러면 장관은 왜 이 8명을 넘기는 걸 보류하라고 했을까요?

 

 

 

 

▶‘8명→2명’ 줄어든 혐의자, 왜?

당시 박정훈 해병대수사단장은

8명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국방부 검찰단이 (이첩 자료) 회수했죠.

그러고 나서는 2023년 8월 21일에 8월 2일에 (이첩 자료) 회수했잖아요.

8월 21일에 다시 경찰에 이첩을 하는데

그때는 2명만,

여기 보시면 아까 박정훈 단장이 말한 8명 중에 여기 위에 4명 빼고,

밑에 중위‧상사 빼고 중간에 있는 대대장 2명만 과실치사 혐의로 경북경찰청에 이첩합니다.

 

그러면 왜 둘의 판단이 달랐을까요?

그것의 발단을 좀 알 수 있는,

아까 처음에 박정훈 수사단장이 8명을 경찰에 넘기겠다고 해서 이종섭 장관에게 보고했고,

결재 받았잖아요.

그 내용이 일부 언론에 공개가 됐는데

 

그러면 8월 21일에는 빠진 이 임성근 1사단장

왜 경찰에 과실치사 혐의로 이첩해야 한다고 그 당시에 판단했는지 볼게요.

 

 

첫 번째

‘호우피해 복구 작전의 주요 임무가 실종자 수색임을 알고도 출동 당일 뒤늦게 여단장에게 수색 임무를 전파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2023년 7월 15일 경북 예천에 비가 많이 왔잖아요.

7월 15일 경북 재난상황실에서 임성근 사단장에게 “실종자 수색해 달라”고 요청이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임성근 사단장은

그 내용을 자신의 밑인 박상현 7여단장에게 이틀이 지난 7월 17일에야 넘겨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 임무는 실종자 수색이다”라는 걸 이틀 지나서야 알려줬다는 거예요.

 

이게 왜 문제냐면

그러다 보니까 이틀 동안 제대로 준비를 못 하고 해병대원들이 현장에 나갔다는 거예요.

당시 현장에서는 실종자 수색이 업무가 아니라

그냥 수해 복구인 줄 알고 삽‧곡괭이 이런 걸 준비해서 나갔다,

이게 이제 해병대수사단(박정훈 대령)의 조사 결과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못해서

밑에서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못했다,

이런 것에 책임을 물은 거고요.

 

 

두 번째

‘외적 자세 등에 대해 지적만 하면 ‘구명조끼 이런 것과 안전로프 구비 등 안전대책에 대해서는

오히려 세부 지침을 하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잘해.

똑바로 해,

홍보 잘해 이런 것만 지시를 내렸지

수색 나간 장병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지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MBC 보도에 따르면

당시 부사관

“임성근 사단장이 화상회의에서 각 부대장들에게 복장을 통일해라. 빨간 체육복 착용 이런 걸 강조했다”고 말해요.

해병대의 옷이 빨간색이잖아요.

빨간색 체육복 입고 이렇게 수해 복구하고 실종자 수색하니까 되게 홍보가 잘된다.

보기 좋다.

이런 것들이 보도가 되니까 “적극적인 홍보 아주 좋다” 뭐 이런 얘기도 주변에 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포인트가 어떻게 하면 잘 홍보하고, 많이 알려질까 이런 것만 신경을 썼지

정작 안전에는 신경을 안 썼다.

사망 사고 책임임성근 사단장에게 있다,

이게 해병대수사단(박정훈 대령)의 결과입니다.

 

간부 얘기에 따르면

당시 “장화를 신고 물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해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원래는 물속으로 들어가라는 게 아니라 수변(물가)

그러니까 물 주변에 있는 곳을 수색하는데 거기는 질퍽질퍽 하잖아요.

그래서 장화를 신고 가잖아요.

근데 이제 물에 들어가야 할 때도 장화를 신어버리면

만약에 물에 빠졌을 경우, 장화 신고 헤엄치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군화를 신겨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이 7포병대대장 “지금 분위기 모르나? 복장 통일해”라고.

지금 빨간 옷에 장화 신는 복장인데 이걸 통일해야지 무슨 군화냐고.

이제 윗선의 눈치만 봤다는 보도들이 나오고 있어요.

 

2023년 7월 18일,

실제로 7여단장은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수변, 그러니까 물에 들어가지 말고 주변만 다녀라.

입수는 금지다.

그런데 혹시라도 의심지역 있으면 수색할 때 장화 높이까지만 들어가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거예요.

박상현 7여단장이 그랬더니,

포병대장이 그 지시를 듣지 않고 “우리는 내일 허리까지 들어간다”고.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탐침봉을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이 사진만 봐도 장화보다 조금 높은 수준까지 들어간 것 같네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허리까지 들어가라고 (7포병대대장이) 지시를 내렸다는 거죠.

 

해병대수사단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냐면

“사단장이 복장과 업무 브리핑만 챙기다 보니까 이 성과에 부담을 느껴서 무리하게 입수 지시했고 장화를 신지만 않았어도, 군화만 신었어도 물에 휩쓸렸을 때 스스로 빠져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단장이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국방부 판단은 여단장은 제대로 지시를 내렸잖느냐.

여기 보면 “장화 높이까지만 들어가라”

그런데 그 지침을 위반하고 허리 높이까지 입수 지시한 이 대대장은 범죄 혐의 인정되니까,

여기는 과실치사.

그 위에는 솔직히 직접적인 사망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혐의를 특정할 수 없다.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고 해서 대대장 2명만 넘기라고 지시를 한 겁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국회에 나와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잘못을 엄중히 처벌을 해야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범죄인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당시에는 죄 없는 사람으로 봤다는 거예요.

 

 

 

▶ ‘채 상병 사건’ 뒤 대통령실 외압 의혹?

 

결과적으로,

박정훈 수사단장과

임성근 1사단장은 둘 다 수사선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박정훈 전 수사단장은 국방부 검찰단에서

항명죄 및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청구했지만 기각되고,

대신 불구속으로 기소를 하면서

지금 현재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임성근 사단장도 공수처 수사를 받고 있는데요.

 

 

아까 국방부 조사단에서 경찰청에 이첩할 때 임성근 사단장 빼고 넘겼잖아요.

하지만 채 상병과 함께 급류에 휩쓸려 갔다가 살아 돌아온 동료 장병이

전역 바로 다음 날 임성근 사단장을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고소를 했고

이 때문에 공수처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원래 ‘채 상병 사건’ 핵심 논란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 정국을 강타하는 정치권 이슈로 떠오른 건

바로 이 이유 때문이죠.

 

2023년 7월 30일,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박정훈 수사단장이 “8명 넘겨야 한다” 보고를 했고

이종섭 장관도 결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

7월 31일, 갑자기 이종섭 장관이

“넘기지 마, 브리핑도 취소해” 보류를 지시했고,

8월 2일 박정훈 수사단장은 이 8명을 경찰에 넘겼고.

그랬더니 바로 국방부 검찰단이 다시 경찰청으로부터 이걸 회수하는데

이 과정 뒤에 누가 있다는 의혹이 벌어진 거예요.

 

즉, 대통령실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겁니다.

 

 

 

 

 

구성: 동정민 기자·김정연 작가
연출: 황진선PD
편집: 허수연‧박현아PD

동정민 기자 ditto@ichannela.com

Copyright © 채널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아래 동영상은 여기까지 공부하며 읽어 온 전부에 대해서

알기쉽게 차근차근 영상과 함께 설명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scrap.kakaocdn.net/dn/gZ8Yq/hyV2srmH0i/9fEa1NJy0uHw4AAxjRyUTk/img.jpg?width=1280&height=720&face=106_162_258_532

 

 

 

 

 

*****

그야말로 콩가루집안 같은 군체제 조직의 엉성한 단면을 그대로 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하고 불행한 이슈만 양산하는 국군통수권자(대통령)도 개입 되어있다는

의혹입니다.

정황으로 보아 의혹은 의혹이 아니라 '사실'로 밖에 안보입니다.

하물려 이럴진대 진짜 전쟁같은 긴급 유사가 발생한 다면, 이처럼 어정쩡 시스템 체제가

국가방위에 제대로 대응이나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글은 위 '채널 A'의 동정민 기자가 게시한 인터넷 기사를 채록· 옮겨온 것입니다.

장문인데다가 빡빡한 글이 난독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읽고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과 이해를 조금은 쉽게 하기 위하여

문장을 주부와 술부로 가급적 분절해 행을 바꾸었으며,

어색한 문장은 쉽게 수정했고,

그로 인하여, 첨언, 삭제, 어휘 교체 등의 편집을 했음을 밝힙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한 나라의 수장(대통령)으로 인하여 큰 불행과 어마어마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그들이 옳게 나라를 다스리고 국민의 행복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하게끔

충언과 째찍을 날려야 할것이라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치자들의 옳지 못한 행위와 현상 들로 인하여

나라가 뒤흔들리고 있는 큰 이슈만큼은 너도나도 관심을 갖고 통렬히 지켜봐야 하리라고 봅니다.

 

*****  SinEun

 

 

 

 

 

 

 

 

 

이 포스팅 말미 아래에 추가한 채상병 관련 글은

위 글 포스팅 후 한달 10여일 지난 오늘자(2024. 06. 17) 대외에 발표된 기사글입니다.

 

대통령의 수사에 대한 외압 정황과 참모들과의 모의적 연결고리가 구체적이고 명확해 보입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국민에게 말 못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책임의식이 쥐꼬리만큼도 없는 권력의 수뇌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뻔뻔함과 두터운 가식으로 치장한 채 번지르르한 모습에는 정말 치가 떨립니다.

 

제발 ! 스치듯 지나치다가라도 한 번 쯤은 세밀하게 눈 부릅뜨고 진실을 가슴에 담기 위해서

하릴없이 그저 소설책이라도 읽듯이 살펴봤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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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채워지는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 연결고리

이은기·주하은 기자 2024. 6. 17. 06:31

지난해 9월12일 국무회의에 함께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오른쪽).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 회수’ 전후로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수차례 전화를 건 사실이 확인됐다.
박정훈 대령 측은 ‘수사 외압’이 이 통화에서 비롯된 거라고 의심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채 상병 사건’ 주요 국면마다 직접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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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기록을 이첩한 지난해 8월2일에는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세 차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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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순직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은

현재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재판과 관련해 6월3일까지

중앙지역군사법원에 제출된 통신사실조회 회신 결과(이종섭 전 장관 통화 기록)에 따르면,

 

이종섭 전 장관은

지난해 7월31일부터 8월9일까지

대통령실·정부 고위 관계자, 국민의힘 의원과 광범위하게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아래 그림〉 참조).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한 대통령실·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결과 회수’ 전후로 이종섭 전 장관에게 수차례 전화를 건 사실이 확인되면서,

박정훈 대령 측이 주장했던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연결고리가 채워지고 있다.

 

박 대령 측은

경찰 이첩 보류·과실치사 혐의자 제외 지시(7월31일)와

국방부 검찰단의 조사기록 회수 조치(8월2일),

이 전 장관의 국방부 조사본부 이관 지시(8월9일) 등이

윤석열 대통령의 통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함과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채 상병 사건에 대한 대통령실 관여 정황은

지난해 7월31일부터 두드러진다.

이날 오전 11시께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안보실 회의가 열렸다.

박정훈 대령은 이때 윤석열 대통령이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격노한 뒤부터 수사 외압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국가안보실 회의가 끝날 즈음인 같은 날 오전 11시54분,

이 전 장관은 대통령실이 사용하는 ‘02-800-’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아 2분48초 동안 통화했다.

이 통화 직후인 오전 11시57분 이 전 장관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게 채 상병 순직사건 경찰 이첩을 보류하고,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된 언론 브리핑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오후 2시20분께 이종섭 전 장관은

정종범 당시 해병대 부사령관을 국방부 집무실로 불렀다.

그때 정 전 부사령관이 기록한 장관 지시사항에는

“누구누구 수사 언급하면 안 됨”

“사람에 대해서 조치·혐의는 안 됨”

“경찰이 필요한 수사자료만 주면 됨”

“법무관리관이 수사단장(박정훈)에게 전화 검토” 등의 내용이 담겼다.

회의를 마치고 우즈베키스탄 출장을 가기 위해 이동하던 오후 2시56분,

이 전 장관은 임기훈 당시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의 전화를 받았다.

11분15초간 통화가 이어졌다.

이날 임 전 국방비서관은 김계환 사령관과도 두 차례 통화했다.

7월31일 정종범 당시 해병대 부사령관이 기록한 장관 지시 사항을 토대로 만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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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수사단(박정훈 대령)은

예정대로 지난해 8월2일 오전 10시30분쯤,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한 8명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해

채 상병 순직사건을 경북경찰청으로 이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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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 축소와 왜곡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박정훈 대령은 법에 따라

빨리 “경찰에 이첩하는 것만이 정직한 해병대를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이첩을 마칠 무렵인 이날 오전 11시45분께 조태용 당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이종섭 전 장관에게 문자를 보냈다.

4분 후인 오전 11시49분부터 2분40초 동안 두 사람의 통화가 이뤄졌다.

김계환 사령관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조사기록 이첩을 마친 직후

오후 12시4분, 이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3분간 통화했음이 확인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여름휴가 첫날 한 일?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본격 등장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 휴가 첫날인 8월2일 오후 12시7분부터

자신이 검사 시절부터 사용하던 번호로

이종섭 전 장관에게 세 차례 전화를 걸었다.

발신 기지국은 대통령 관저가 있는 한남동이었다.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은

오후 12시 7분부터 12시11분까지 약   4분 동안,

오후 12시43분부터 12시56분까지 약 13분 동안,

오후 12시57분부터 12시58분까지 1분간 세차례 통화했다.

 

박정훈 대령은 이날 오후 12시45분께

김계환 사령관으로 부터 “현 시간부로 보직해임이다.

앞으로 많이 힘들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2023년 8월27일 군검찰 제출 진술서).

이 전 장관이 윤 대통령과 첫 통화를 마치고 30여 분이 지난 시점이다.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이첩한 사건도 당일 회수됐다.

같은 날 오후 1시50분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경북경찰청에 회수 의사를 밝혔고,

오후 7시20분 국방부 검찰단이 조사기록 일체를 되찾아갔다.

 

 

엿새 후

이종섭 전 장관의 통화 내역에

윤석열 대통령 번호가 한 차례 더 등장했다.

이 전 장관이 경북경찰청에서 회수한 사건을 국방부 조사본부로 이관하기로 결정하기 하루 전인

지난해 8월8일 아침 7시55분,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이 33초가량 통화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다음 날인 8월9일부터 사건 재검토를 시작해

8월24일 경북경찰청에 사건을 다시 넘겼다.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와 달리

국방부 조사본부 재검토 결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대상자는 8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혐의 대상자에서 임성근 전 사단장은 제외됐다.

이종섭 전 장관의 변호인 김재훈 변호사

“국방부 장관이 안보 위협, 외교 현안, 잼버리 파행 해결 등과 관련해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들과 수시로 소통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통화 여부나 통화 내용에 대해선 밝힐 수 없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 사이 통화에서 채 상병 순직사건 관련 언급은 없었다고 밝혔다.

 

 

6월4일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종섭 전 장관은

지난해 7월31일부터 8월9일까지

신원식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와도

13차례 통화를 나눴다(7월28일부터 7월30일 사이에도 전화 세 번, 문자 다섯 번이 오갔다).

 

두 사람 사이 통화는

해병대 수사단 압수수색 다음 날인 지난해 8월4일(5회)과 8월7일(5회)에 집중됐다.

이 통화 기록은

8월21일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신 전 의원이 아래 한 말과 정면배치(모순)된다.

 

당시 신 전 의원은 이 전 장관에게

“장관의 판단이나 엄정한 수사에 혹시라도 여당 간사가 전화하는 것이,

아는 척하는 것이 방해될까 봐 안 했다.

한 번도 전화를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관련해 국방부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장관이 당시 국방위 여당 간사로서 다양한 국방 현안에 대해 평소처럼 통화했다.

채 상병 관련 사안은 통화한 바 없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신 전 의원은 이 전 장관에 이어 윤석열 정부 두 번째 국방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

 

 

이은기·주하은 기자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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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전방위 전화, 채 상병 사건 흐름 바꿨나

문상현 기자 2024. 7. 2. 06:27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흐름과
최근 공개된 통화 기록을 맞춰보면
일종의 패턴이 발견된다.
윤 대통령이 움직이면 용산이 일사불란하게 따랐다.
그때마다 결정적 장면이 나왔다.

 

6월21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가 열렸다. 앞서 공개된 통신 기록 속 전화통화 내용을 설명한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과 유재은 법무관리관(앞줄 가운데)의 증언이 주목받았다. ⓒ시사IN 신선영

 

 

 

채 상병 순직사건 수사 외압 의혹이 불거진 직후(2023년 8월)

대통령실과 국방부 관계자들은 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이들의 말과 주장을 간추리면,

이 수사 외압 의혹의 불씨라고 의심받은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는 없었다.

대통령실도 관여하지 않았다.

외압 의혹은

상관의 명령을 어긴 군 간부(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대령)의 거짓말로 시작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형국의 기가막힌 주장

 

 

1년여 뒤인 2024년 6월,

법원(박정훈 대령 항명 사건 재판)을 통해

외부에 공개된 이들의 통신 기록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통화도, 대통령 보고도 없었다던 이들의 주장과 달리

통신 기록에는 전화통화와 문자를 수십 차례 주고받은 사실이 관찰된다.

 

단순히 통화를 했거나 그 횟수가 많았기 때문에 ‘수사 외압 의혹’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사건 흐름과 통화 기록을 맞춰보면,

이들의 통화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날이면 어김없이 채 상병 순직사건의 주요 국면이 크게 뒤바뀌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윤석열 대통령이 있었다.

 

 

2023년 7월19일 발생한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를 마친 박정훈 대령은

그 사고 책임자로 당시 해병대 지휘부 8명을 지목했다.

 

2023년 7월28~30일,

박 대령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에게

이들 8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하겠다고 보고한 뒤 결재를 받았다.

7월31일 국회에 채 상병 사망 경위를 보고하고,

조사 결과 발표 뒤 경찰에 사건을 이첩해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박 대령은 ‘집단 항명 수괴’ 혐의로 국방부 검찰단에 입건됐다.

국방부 검찰단은

채 상병 사건을 조사한 해병대 수사단 관계자들이

모두 상관의 명령을 어겼다고(항명) 판단했고, 그 우두머리(수괴)로 박정훈 대령을 지목했다.

 

경찰에

채 상병 사건 조사 결과를 이미 장관 결재까지 나서 이첩이 완료된 것에 대해

후에 장관이 구두로 다른 참모들을 통해 보류하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게

박정훈 대령과 해병대 수사단이 받는 혐의의 골자였다.

 

박 대령은 군검찰 수사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7월31일) 김계환 사령관이 ‘VIP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후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정말 VIP 맞습니까?’라고 묻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2023년 8월28일 진술서)."

 

국방부 장관과 해병대 사령관에게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 보고를 마친 박 대령이 경찰에 이첩하려고 하자,

김 사령관이 ‘VIP 격노’를 언급하며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는 취지다.

 

박정훈 대령이 주장한 ‘VIP 격노’는 ‘전언의 전언’이다.

그의 군검찰 진술서에 따르면 VIP 격노는 김계환 사령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이고,

김계환 사령관 역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에게 들은 이야기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다.

대통령실과 국방부 관계자들이 이를 근거로 박 대령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그러나 박정훈 대령이

‘VIP 격노’에 대해 들은 날인 2023년 7월31일,

대통령실과 군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통신 기록과 당시 수사 외압 사건 흐름을 연결하면,

그가 들은 전언에 확연한 힘이 실린다.

 

〈시사IN〉이 확보한 통신 기록을 보면,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은 7월31일 오전 11시54분 ‘02-800’으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았다.

이 번호는 일반 전화라 사용자는 특정되지 않았지만, 대통령실 내선 전화로 알려졌다.

 

 

 

정식 절차 없이 회수된 사건기록

임성근 해병대 전 1사단장(오른쪽)이 6월21일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에서 질의에 답하고 있다. 이날 임 전 1사단장은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왼쪽은 박정훈 대령. ⓒ시사IN 박미소

 

 

이종섭 전 장관은

이 통화 직후

김계환 사령관에게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 이첩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는 박진희 전 국방부 장관 군사보좌관을 통해 이뤄졌는데,

이날 박진희 전 군사보좌관과

김계환 사령관 사이 통화 내역이 확인된다(오전 11시57분).

같은 날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박정훈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이첩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박 대령은 “유 법무관리관과 통화하면서 ‘외압’이라고 느껴졌다”라고 주장한다.

 

 

〈시사IN〉 취재에 따르면

 

수사 외압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해병대 고위 간부들로부터

“김계환 사령관에게 ‘VIP가 격노했다’는 말을 들었다”라는 진술과

이를 뒷받침할 녹취를 확보했다.

 

해병대에 퍼진 ‘VIP 격노설’은

이종섭 전 장관 또는 임기훈 전 대통령실 국방비서관에서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종섭 전 장관의 이첩 보류 지시

박진희 전 군사보좌관 휴대전화로 전달됐다.

 

박 전 군사보좌관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이날 수차례 전화통화를 한 사실이 통신 기록으로 확인된다.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은

7월31일 이종섭 전 장관, 김 사령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임 전 비서관은 이날 오전, 윤 대통령이 ‘격노’한 것으로 알려진 회의에 참석했다.

 

통신 기록으로 확인되는 주요 국면은 2023년 8월2일이다.

박정훈 대령은

이날 오전 이종섭 전 장관의 지시를 어기고 경찰에 사건을 인계했다.

같은 날 저녁,

국방부는 경찰로부터 사건기록을 다시 회수해 왔다.

이후 박 대령은 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됐다.

 

압수수색 영장 등 정식 절차도, 전례도 없이

사건기록이 회수된 것은 이번 수사 외압 의혹한 축이다.

 

8월2일 군 수뇌부와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통신 기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등장한다.

박정훈 대령이 경찰에 사건기록을 넘긴 시점은 이날 오전 11시.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정오(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이종섭 전 장관과 통화했다.

오후 1시25분에는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과 통화했다.

임 전 비서관은 윤 대통령과 통화 이후

이시원 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등과 여러 차례 전화를 주고받았다.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과 통화한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8월2일 오후 1시51분 경북경찰청 수사부장과 통화했다.

이날 저녁(7시20분께) 국방부 검찰단은 경찰에서 사건기록을 회수해 왔다.

하루종일 수차례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은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 이시원 전 공직기강비서관, 유재은 법무관리관

국방부 검찰단의 사건기록 회수를 기점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통신 기록 속

윤석열 대통령의 전화번호는

2023년 8월8일에도 확인된다.

국방부 조사본부의 채 상병 순직사건 재검토 착수 전날이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재검토 이후

해병대 수사본부의 최초 조사 결과와 달리

혐의자를 원래 8명이었는데 두 명만을 특정하는 것으로 바꿔 경찰에 사건을 이첩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8일 오전 7시55분 이종섭 전 장관과 통화했다.

 

이후 임기훈 전 대통령실 국방비서관은

이시원 전 공직기강비서관 및 박진희 전 국방부 군사보좌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이들은 8월2일 이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가 이날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

 

 

임기훈 전 대통령실 국방비서관(오른쪽)과 박진희 전 국방부 장관 군사보좌관이 6월21일 오전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가 열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통신 기록을 보면,

수사 외압 의혹의 주요 장면(사건기록 회수, 국방부 조사본부 재검토 등)에서

항상 윤석열 대통령의 전화번호가 등장한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나 전화가 뜨면,

이후 군 수뇌부와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집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직후 채 상병 순직사건과 관련한 흐름이 크게 변화했다.

 

대통령실 관계자와 국방부 수뇌부의 관여 여부를 넘어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다만 통화 기록은 ‘정황 증거’다.

각 전화통화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그 내용이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사 외압 의혹의 흐름과 통신 기록은 ‘의심의 끈’으로 연결될 뿐이다.

 

실제 연락을 주고받은 당사자들은

당시 전화통화가

“당시 현안(이종섭 전 장관의 우즈베키스탄 출장, 잼버리 등) 관련 통화였다”

“수사 외압 의혹과는 관련 없는 업무 전화였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6월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에서 통신 기록 내용과 관련한 증언이 나왔다.

대통령 또는 대통령실 개입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드는 말이었다.

2023년 8월2일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한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은,

통화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당시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이첩한 채 상병 사망사건 변사사건 기록을 회수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건기록 회수와 관련한 내용으로 국방부 차관과 직접 통화를 했다는 뜻이다.

 

 

 

 

대통령실의 ‘임성근 전 1사단장 구하기’

유재은 법무관리관 대통령실 관여 정황을 증언했다.

그는 청문회에서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이 ‘경북경찰청에서 저에게 전화 올 것’이라고 말해줬다”라고 말했다.

 

실제 2023년 8월2일 임 전 비서관은

오후 1시42분 유 법무관리관과 통화했고,

그 직후 유 법무관리관은 경북경찰청 관계자와 전화를 했다.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청문회에서

“경북청과 통화 내용은 사건기록 회수와 관련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임 전 비서관도 유 법무관리관과 통화하기 직전인 오후 1시25분에

윤 대통령과 통화했다.

 

〈시사IN〉 취재에 따르면

 

경북경찰청 관계자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 관계자를 통해

‘유재은 법무관리관으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당시 국수본 관계자는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 소속 전 행정관과 통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범철 전 차관과 유재은 법무관리관의 증언은,

통신 기록으로 확인되는 대통령실 개입 정황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측면이 있다.

특히 신 전 차관의 증언은

대통령실뿐만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직접 개입 정황으로도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직접’ 기록 회수를 지시했거나

적어도 사전에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왼쪽)이시원 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이 ‘채상병 특검법’을 위한 입법청문회에 참석해 있다. ⓒ시사IN 신선영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은

대통령실의 ‘임성근 해병대 전 1사단장 구하기’라는 측면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

 

 

앞서의 모든 과정이

임 전 1사단장 구명을 위해 이뤄졌다는 의혹이다.

특히 특정 루트를 통해 대통령실로 ‘임 전 1사단장 구명 민원’이 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심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JTBC는 6월25일,

지난해 5월 해병대 1사단 골프 모임 추진 계획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를 입수해 보도했다.

 

JTBC 보도에 따르면

이 대화방에서 임성근 전 1사단장과의 골프 모임 등을 계획하는 대화가 오갔다.

대화방에는 해병대 출신인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 이 아무개씨

전직 청와대 경호처 직원 A씨, 현직 경찰 B씨, 변호사 C씨 등이 있었다.

 

모임을 주도한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 이 아무개씨는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조작 사건컨트롤타워로 지목된 인물이다.

법원은 이씨에 대해

“김 여사와 가족 계좌를 직접 관리하며 시세조종에 깊이 관여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앞서 임성근 전 1사단장은

6월21일 국회 청문회에서

“이 아무개씨를 아느냐”라는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모른다”라고 답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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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권' 37일 만에

7월 5일 제 22대 국회에서 보안 수정된 '채상병 특검법'이  다시 통과되어 대통령 재가에 들어갑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손원제 기자 2024. 7. 5. 20:35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안녕하세요. 논썰의 손원제입니다.

최근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한 전화번호가 하나 있죠.

바로 02-800-7070번입니다.

용산 대통령실 유선 번호라는 것만 확인됐을 뿐,

어느 사무실에서 누가 쓰는 전화인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게 뭐라고 대통령 비서실장도

“대통령실의 전화번호 일체는 기밀 보안사항입니다. 지금 이 회의를 실시간으로 북한에서도 시청하고 있을 것입니다.”(정진석 비서실장, 1일 국회 운영위)

국가안보실 1차장도

“누가 어떻게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제가 모르는 얘기지만…”(김태효 1차장, 1일 국회 운영위)

대통령실 총무비서관도

“그거는 국가안보와 대통령실의 보안 관리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에 그거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윤재순 총무비서관, 1일 국회 운영위)

 

누구 전화인지 말할 수 없다.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그러나 대통령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 할수록

국민의 의혹은 더욱 커질 뿐입니다.

아니, 이미 국민 대다수는 그간 드러난 몇가지 사실을 반추하며

이 번호가 누구의 어떤 번호인지에 대한 대략적 추정과 판단을 내리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대통령실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겠다고 저러고 있지만, 통하지 않을 겁니다.

 

이 번호 전체가 처음 공개된 건

지난 6월21일, 국회 법사위의 채 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가 열린 날이었죠.

 

박지원 “이종섭 장관.”

이종섭 “예.”

박지원 “800-7070 전화를 누구한테서 받았어요?”

이종섭 “그…. 어떤 내용의 전화냐, 누구와의 전화냐 이것은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지원 “이건 또 밝히는게 적절하지 않다? 이시원 비서관한테 받은 거 아니에요?”

이종섭 “어…. 제가 뭐 그 대상, 그 다음 내용은 밝히기가 적절하지 않지만.”

박지원 “국방비서관한테 받은 것 아니에요?”

이종섭 “이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지침이나 이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문답)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어떻습니까.

이 번호로 걸어온 전화를 받은 당사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도

누가 걸었는지에 대해선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전화를 건 대통령실과 전화를 받은 국방부가 모두 철통 방어에 나선 모양새입니다.

 

 

 

이종섭, 대통령실과 통화 후  14초만에 외압 지시

800-7070 번호가

이 전 장관 휴대폰에 뜬 건

아시다시피 지난해 7월31일이었죠.

 

대통령실에서 열린

안보 분야 수석·보좌관 회의가 끝난 직후인

오전 11시54분이었습니다.

 

이 전 장관은 168초간 이어진 이 통화를 마치고,

곧바로 14초 만에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게 참모 휴대폰으로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해병대 수사단의 채 상병 순직 관련 수사 결과 언론브리핑을 취소하라’지시합니다.

자신이 바로 전날 “수사가 잘 됐다”며 결재한 내용을 뒤집은 겁니다.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의 시발점인

이 통화의 존재를 최초로 제기한 건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입니다.

박 전 단장은 ‘사단장 혐의를 빼라’는 부당한 외압을 거부하고

법 규정대로 조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했다가 항명죄로 되레 기소 당하게  됩니다.

그가 군 검찰에 낸 진술서에 김계환 사령관으로부터 들은 이 통화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수사단장 “도대체 국방부에서 왜 그러는 것입니까?”

해병대 사령관 “(오늘) 오전 대통령실에서 VIP(대통령) 주재 회의 도중
1사단 수사결과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VIP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후 이렇게 되었다.”


수사단장 “정말 VIP가 맞습니까?”

해병대 사령관 “맞다.”(고개를 끄덕이며)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대통령실 회의에서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격노한 윤 대통령이 이 전 장관을 연결하라고 한 뒤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하느냐’며

질책했다는 ‘VIP 격노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이후

대통령실국방부 모두 대통령 격노도,

통화도 없었다며 극력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공수처 수사를 통해

대통령실 내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온 뒤

이 전 장관의 외압성 개입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어 국회 입법청문회에서 전체 번호가 특정됐고,

운영위에서 누가 어디서 건 전화인지를 규명하려는 질의가 쏟아진 것입니다.

 

 

 

 

대통령 부부 집무실 또는 부속실 전화 가능성 커져

대통령실이 운영위에서 계속 철벽을 쳤지만,

결과적으로 이 번호로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범위는 크게 좁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실 조직크게 비서실국가안보실, 정책실, 부속실, 경호처 등으로 구분됩니다.

이 가운데 정책실과 경호처는 채 상병 수사와 직접 관련성이 없습니다.

남은 건 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부속실입니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 부부의 집무실에도 유선 전화가 설치돼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안보실과 비서실은

운영위에서 800-7070 번호는 자신들의 번호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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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안보실장님 계시죠? 800에 7070이 안보실장 번호라는데 맞습니까?”

장호진 “제 번호 아닙니다.”

고민정 “그러면 안보실 보좌관실 번호입니까?”

장호진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 저희는 4자로 시작하는데요.”

고민정 “그러면 비서실장님께 여쭐까요? 비서실장님 800의 7070 번호이십니까?”

정진석 “처음 듣습니다.”

고민정 “비서실장님 번호도 아니고 안보실장님 번호도 아니고 그러면 대통령인가요?”

정진석 “대통령실의 전화번호는 기밀상 외부로 유출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고민정 민주당 의원, 1일 국회 운영위)

 

 

어떻습니까.

비서실장도 안보실장도 안쓰는 번호라면,

남는 건 윤 대통령 부부 집무실이거나

대통령 부부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부속실 밖에 없습니다.

여기로 치고 올라가자, 보안을 이유로 확인을 거절한 겁니다.

고 의원은 대통령실이 이미

증거인멸 차원에서 7070 번호 회선을 재배치했을 가능성도 제기했죠.

 

고민정 “올 초에 회선이 재배치됐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만약에 재배치한 게 확인이 되면 이건 증거 인멸입니다.”

윤재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민정 “아, 회선 재배치가 확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증거인멸에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쓰던 핸드폰을 중요한 시기에 교체를 할 경우에 증거인멸에 (해당합니다).”

윤재순 “대통령 비서실은 수시로 인원이 늘어나고
사무실이 늘어났다 줄었다 합니다.
그때마다 전화기가 설치가 되기도 하고 철거하기도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무슨 증거인멸이라고 하시면 그건 동의할 수 없다,
그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고민정 “사람 바뀐다고 전화 바꾸지 않습니다.
사건이 있어야 번호가 재배치되는 거 아닙니까?”

윤재순 ”그건 의원님 생각이시고요.”

 

 

집무실 번호 재배치 했다면 증거인멸 가능성

뭔가 번호에 재배치가 있었음을 자인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답변입니다.

그런데 윤 총무비서관 답변의 진위를 따져보려면,

7070 번호가 애초 누가 쓰던 번호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부처나 기업에서 전화번호가 재배치되는 경우가 잦지는 않죠.

다만 만약 통상적 업무를 하는 일반 직원이 쓰던 번호였다면,

직제 개편 등으로 재배치됐다고 볼 여지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집무실이나 부속실장 등 주요 부서장에 배속된 번호였다면 사정이 다릅니다.

대통령이나 핵심 측근이 쓰는 번호를

갑자기 다른 사람이 쓰도록 재배치하는 일은 상식적으로 벌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뉴스진행자 “800에 7070 이게 만약에 대통령의 번호였다면,
이건 가설입니다,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쓰는 번호였다,
대통령이 직접 쓰는 번호를 여러가지 라인 배치하면서 확확 바꾸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죠.
혹시라도 대통령이 일반적으로 쓰는 번호였는데
그 이후에 바꿨다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 되고 법적으로 논란이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증거 인멸을 둘러싸고…”(1일 MBC ‘권순표의 뉴스하이킥’)

 

 

이처럼

대통령실이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확인하길 거부하면서,

오히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전화번호의 주인이 윤 대통령 본인이거나

가장 가까운 인물일 가능성은 더욱 짙어졌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그러면 저희가 궁금한 것이
이렇게 끝까지 못 알려주겠다라는 거는 한 두 가지 정도 가능성 아니냐.
첫번째는 대통령 본인 내지는
대통령이 관장하는 부속실 같은 대통령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인물의 번호거나.
(…) 아니라면 혹시 김건희 여사나
김건희 여사의 지휘를 받는 인물이 사용하는 번호는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결사적으로 절대 못알려주겠다,
여야에서 합의하는 한명씩만 보자 그래도 못 보여주겠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 2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저 개인적으로는 전화가 설치된 장소가

윤 대통령 집무실일지,

부속실일지,

아니면 김건희 여사가 쓰는 5층의 소집무실일지는 앞으로 밝혀야 될 문제지만,

실제 그 번호로 이 전 장관과 통화한 당사자는 윤 대통령 본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첫째,

애초 해병대 사령관이

박 전 단장에게 전했다는 ‘격노설’의 당사자가 윤 대통령입니다.

사건 초기 의도적 왜곡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적은 시점에서 전달된 정황인만큼

당시 상황을 가장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국방부 장관이 통화 뒤 곧바로 지시 이행에 나선 점에 비춰봐도,

국방부 장관보다 상급자의 질책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통령실에서 국방부 장관보다 상급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부속실장이 대통령의 말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전 장관도 다른 경로를 통해 상황을 확인해보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 전 장관은 14초 만에,

사실상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해병대 사령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비공식 라인을 통해 내려온 지시일 경우에도 그렇게 즉각 움직일 가능성은

대통령 전화일 때가 아니었을 경우 그 가능성은 더 낮다고 봐야 할 겁니다.

대통령실도

대통령 통화 여부는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서도,

대통령이 직접 실무자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잦다며

은연중 밑자락을 까는 모양새입니다.

 

“누가 어떻게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제가 모르는 얘기지만,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궁금한 게 생기면
어떤 실무자에게 수시로 전화를 하시는데…”(김태효 1차장, 1일 국회 운영위)

 

 

어떻습니까.

설사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어도

통상적인 일일 수 있다는 인상을 심으려는 것 같다는 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이런 점들 때문에

윤 대통령 자신이 직접 이 전 장관에게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커보인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대통령실 “수사 보고 안해”, 그러면 누가? 의혹 자초

 

만약 대통령이 직접 통화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은 왜 이런 전화를 걸게 된 걸까요.

그날 회의에서 채 상병 수사 관련 보고는 없었다고 대통령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사단장 혐의를 적시한 해병대 수사단 조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별도의 통로가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궁금한 게 생기면
어떤 실무자에게 수시로 전화를 하시는데,
그 전에 이뤄진 안보실 보고에서 이 사건이 보고되지는 않았습니다.”(김태효 1차장, 1일 국회 운영위)

 

 

채 상병 순직 수사 결과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는 겁니다.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면,

대통령이 공식 보고 아닌 별도 경로로 수사 결과에 대해 알게 된 건 아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야권 일각에선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주범 중 한명인 이아무개씨를 고리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김 여사 쪽에 구명 로비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박균택 “민간인 이OO 모릅니까?”

임성근 “민간인 이OO 모릅니다.”

박균택 “해병대 출신이고, 본인하고 골프 모임 자주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릅니까?”

임성근 “한 번도 골프 친적도 없고 전혀 저 인원은 모릅니다.”

(박균택 민주당 의원,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과 문답. 6월21일 법사위 입법청문회)

 

 

그러나

이후 이씨가 속한 해병대 출신 모임 카톡방에

임 사단장과 골프 약속을 논의하는 메시지가 올라온 사실이 드러나는 등 의혹이 증폭됐습니다.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통령실의 대응이

오히려 김 여사 로비설까지 촉발하며 국민적 의혹을 더 키우고 있는 셈입니다.

 

대통령실이 기초적 사실관계 확인조차 거부하며

대통령 방탄에 열을 올리는 상황은

진실 규명을 위한 특검 수사의 필요성을 한층 더 일깨웁니다.

공수처가 일부 수사 성과를 내고 있지만,

이미 조직 역량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전 장관과 대통령실로 치고 올라가지 못한 채

해병대 사령관이 박 전 단장에게 격노설을 전한 게 사실이냐 아니냐 수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김건희 로비’ 사실이면 국정농단

 

‘김건희 로비설’까지 제기되는 지금

상황은 이번 의혹이 단순 외압 의혹을 넘어

권력형 비리이자 국정 농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합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처럼

상당한 수사 역량과 기소권까지 갖춘 특검을 통해 의혹 전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토록 감추고자 하는 ‘윤 대통령 격노설’과

800-7070 전화번호 미스터리도 강제 수사를 통해서라면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습니다.

 

 

윤건영 “기록물법에 의하면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는
특히 차관급 이상과 하는 회의는 다 기록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수석보좌관 회의에는 속기사가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속기록만 확보할 수 있으면 이건 금방 밝혀질 수 있겠네요.”

윤건영 “그래서 국회 운영위라든지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보다는
강제적 수단이 필요한 것 아니냐라는 고민이 드는 겁니다.”(윤건영 민주당 의원, 2일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

 

 

 

어떻습니까.

왜 윤 대통령이 그토록 특검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건지도 짐작해볼 수 있지 않나요.

4일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채 상병 특검법이 다시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21대 국회에 이어 또 거부권을 쓴다면,

자신과 부인에게 제기된 모든 의혹을 자인하는 것으로 많은 국민은 받아들일 겁니다.

특검을 피하려다 더 엄중한 국민의 분노와 심판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번만은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논썰에서 함께 계속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금 바로 영상으로 확인하시죠.

 

기획·출연 손원제 논설위원 wonje@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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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근친상간, 뇌물, 섹스파티, 전쟁

세상의 모든 부도덕이 이 집안의 동력이었습니다.

뇌물과 섹스로 동료를 만들고

넘어오지 않는 적은 가차 없이 암살했지요.

성적_性的으로도 어찌나 방종했던지

두 형이 막내아우의 부인을 두고 잇달아 성관계를 갖기도 했었습니다.

오빠가 친여동생과 육체적 관계라는 소문도 왕왕 들려왔지요.

 

신이 ‘멸문지화’의 벌을 내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가문은 승승장구

그야말로 최고권력까지 손에 넣습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는 교황에 올랐으니까요.

성(聖)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인물이 성좌(聖座)에 오른 셈입니다.

 

 

 

중세 이탈리아를 뒤흔든 ‘보르지아’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체사레와 루크레치아는 친남매지간이지만 동시에 육체적 관계라는 악소문이 돌았다.
이를 묘사하고 있는 미드 ‘보르지아’. [사진출처=IMDB]
 
 
 
보르지아 가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필독 고전으로 통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보르지아 가문의 한 사내를 배경으로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체사레 보르지아가 그 주인공.
아버지이자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의 권력을 위해
체사레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관계가 금지된 교황, 그리고 그의 아들.

여기서부터 부패의 냄새가 짙게 풍겨옵니다.

 

철학자 마키아벨리는

그럼에도 이 가문에서 권력의 본질적 속성을 꿰뚫습니다.

사유가 켜켜이 쌓여 ‘군주론’이라는 명저가 탄생했지요.

보르지아 가문의 극단적 정치가 불러온 파문을 사색_史色합니다.

바야흐로 정치가 모든 뉴스를 뒤덮은 시기여서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문장.
 
 
 
 
 
 
카이사르를 꿈꾼 성직자 집안 ‘보르지아’
 
 
“Aut Caesar, aut nihil“(카이사르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보르지아 패밀리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유력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이탈리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황을 배출했을 정도의 유력 집안이었지요.

그들의 야망은 가훈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고대 로마의 지도자로서

유럽과 북아프리카·아시아 일부를 지배한 ‘카이사르’(시저)가 되는 것.

무엇이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집념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보르지아 집안의 대표적 위인인 알렉산데르6세. 추기경 시절의 모습.
 
 
 
 
권력은 성인군자에게는 다가오지 않는 법입니다.
단단한 자기 조직만이 권력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종교라고 해도 그 점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보르지아 패밀리가 뜻을 펼치던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중세 교황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정치적 파벌 싸움의 최대 격전지였지요.

스페인 지방 귀족에 불과한 보르지아 가문에게 뇌물은 필수 도구였습니다.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를 묘사한 그림.
 
 
 
 
교황의 자리를 돈과 섹스로 사다
 
보르지아 집안의 가장이자 성직자인 알렉산데르 6세.
그는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을 하나씩 포섭해 나갔습니다.
돈과 섹스를 활용했지요.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건드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보르지아 집안에서 손님들의 교성이 울릴 때마다, 우호표는 시나브로(조금씩조금씩) 늘어났지요.
 
 
 
 
 
 
 
알렉산데르6세는 젊은 시절부터 교황이 된 이후까지 색을 끊임없이 탐한 인물이었다. 사진은 미드 ‘보르지아’의 한 장면. 알렉산데르6세는 미중년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했다. [사진출처=IMDB]
 
 
섹스를 통한 포섭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알렉산데르6세는 결국 교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492년 8월이었습니다.
추기경 시절부터 여러 애인과 혼외자를 뒀을 정도로 부패한 종교인이었지만,
당시 교황청 고위인사들은 이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였지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인물인지 여부.

신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한 이들은 변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던 시기입니다.

 

 

 

 

                          “최고의 자리를 위해서라면, 댓가는 필요한 법”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된 후에도 ‘섹스를 활용한 포섭’은 계속됩니다.
50여명 전라의 여성이 추기경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알렉산데르6세가 자리한 교황의 공간에서였습니다.

알렉산데르와 그의 아들 체사레는 황홀경에 빠진 추기경들을 미소 지으며 바라봅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밤의 연회’(Banquet of Chestnuts)였습니다.

교황이 섹스 연회장을 밤나무로 장식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아들아, 여자들은 준비됐니?” 미드 보르지아에서 알렉산데르6세를 연기한 제레미 아이언스. [사진출처=IMDB]
 
 
 
사생아를 앞세워 권력을 탐한 교황
 
“내 아들을 교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네”

알렉산데르 6세가 포섭한 이들을 굳게 신뢰한 건 아니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떨어지면 언제든 자신을 버릴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은 유일한 인물들은 자녀들.

큰아들 지오반니,

차남 체사레,

셋째 딸 루크레치아,

막내아들 조프레였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의 큰아들 지오반니. 그는 당초 알렉산데르6세의 군사담당이었다.

 

그중 가장 믿을만한 인물은
장남 지오반니와 차남 체사레였습니다.
 
알렉산데르 교황 6세는
큰아들 지오반니에게 교황군의 총사령관을,
둘째 체사레에겐 발렌시아 대주교를 맡겼습니다.
 
군사력과 권력, 두 축을 아들들에게 전담시킨 셈이지요.

그러나 체사레의 마음속에는 불만의 불꽃이 일었습니다.

카이사르에서 딴 그의 이름처럼 타고난 전사의 심장을 가진 그에게

‘교회’라는 공간이 좁디좁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체사레는 애초부터 형 지오반니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형의 자리는 원래 내 것이었어야 해.” 어린 시절의 체사레 보르지아.
 
 
 
 
또한 둘은 한 여자를 두고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아라곤의 산시아’라고 불린 여인이었지요.
그녀는 막냇동생 조프레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제수씨를 큰형과 작은형이 애인으로 삼은 막장 중 막장.
교황의 가족에게서 일어난 일이었지요.
 
 
 
 
 
                         “남편보다 왠지 아주버님 둘이 더 멋진데.” 아라곤의 산시아.
 
 
권력을 쥔 체사레...아버지 알렉산데르6세의 심복으로
 
지오반니가 로마 테베레강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목부터 다리까지 상처가 가득합니다.
누군가에게 암살당한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야밤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범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막연히 추정할 뿐이었습니다.
지오반니의 죽음으로부터 이득을 볼 단 한 사람.
동생 체사레였습니다.

 

“체사레, 프랑스를 도와 밀라노를 공격하라.”

교황군의 총사령관의 자리는 이제 체사레가 차지합니다.

교황 알렉산데르는 체사레를 앞세워

도시국가로 갈린 이탈리아를 교황의 영토로 만들려는 야망을 키워갑니다.

특히 교황청과 반목한 북부 이탈리아가 대상이었습니다.

 

 

 

로마를 떠나는 체사레를 묘사한 후대 19세기의 그림.
 
 
 
 
체사레는 전략적으로 원숙한 군인이었습니다.
북부 지방인 이몰라와 포를리에서 승전보를 곧 올렸지요.
난적인 밀라노 공작 스포르차 가문과의 전투에선 정면 승부보다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하던 프랑스 루이 12세의 ‘침략’에 힘을 빌려준 것입니다.
 
 
 
 
                         “체사레, 나와 함께하면 보르지아에도 도움이 될 걸세.”
                         프랑스 왕 루이12세는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힘을 빌려 스포르차 가문을 몰락시킨 뒤 후에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산마리노 공화국까지 점령하면서 보르지아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美를 정략적으로 활용한 보르지아
 
 
 
“아름다움은 곧 신의 뜻을 대변하네.”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알렉산데르는 수많은 예술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라파엘로 , 미켈란젤로 , 핀투리키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보르지아 가문 밑에서 일했었지요.

정치철학자인 마키아벨리도 지근거리에서 체사레를 지켜보며

현실 정치의 냉엄함과 통찰을 키웠습니다.

 

 

 

        보르지아 패밀리는 또한 예술의 후원자기도 했다.
 
 
보르지아 가문은 그저 전쟁에만 강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해 유력 가문의 영토도 취하는 ‘영악함’도 가지고 있었지요.
보르지아 가문에는 이를 훌륭히 수행할 ‘자원’도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절세미인, 보르지아 가문의 여식 루크레치아였습니다.

 

루크레치아의 첫 결혼은 1493년.

밀라노 공작 스포르차 가문에 시집을 보냈다가

더 좋은 혼례상대가 나타나자 가차 없이 결혼을 파기합니다.

두 번째 결혼은 스페인 아라곤의 알폰소 공작과 함께였습니다.

새신랑 알폰소는 그러나 이내 시체로 발견됩니다.

 

 

 

 

                         바르톨로메오 베네토의 ‘여인의 초상’ 모델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 추정된다.
 
 
 
보르지아 가문이 아라곤 공작 집안의 적 ‘프랑스’와 손잡기로 결심한 직후였습니다.
범인이 체사레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체사레와 루크레치아가 근친상간한다는 추문도 함께였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루크레치아의 세 번째 결혼을 준비합니다.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와 함께였습니다.

사랑은 없고 정략만 가득한 결혼이었지요.

두 사람은 ‘쇼 윈도’에 불과한 결혼 관계를 이어갑니다.

 

 

 

        “우리 집안의 비밀을 알려하지 말게.” 후대 화가 존 콜리어가 보르지아 가문을 묘사한 그림.
        체사레 보르지아가 손님에게 와인을 건네는 장면이다.
        루크레치아의 표정으로 이 와인에 독이 들어있음을 암시한다.
 
 
루크레치아는 남편의 동생인 프란체스코와 금지된 사랑에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추기경·프랑스 군인도 애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녀 역시 ‘보르지아’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안티 보르지아’의 등장
 
 
“보르지아 가문의 전횡을 끝내야 한다.”

너무 날카로운 야망과 추문은 언제나 적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의 전횡에 학을 떼는 세력들이 점점 뜻을 모았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추기경 줄라이노 델라 로베레가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강력한 도시국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나,

수도승 사보나롤라도 보르지아 규탄에 앞장섰지요.

 

 

 

 

                         보르지아의 가장 큰 적 ‘델라 로베레’ 추기경.
 
 
정치적 위기와 함께 군사 캠페인도 안갯속이었습니다.
남부 지방인 나폴리를 두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을 벌였지만,
교황청은 전혀 존재감을 보이고 있지 못했지요.

강대국인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교착 상황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교황의 건강도 나빠져 가고 있었습니다.

1503년 8월 열병에 걸리면서였습니다.

 

 

 

        루이 12세가 벌인 제 2차 이탈리아 전쟁 중 세리뇰라를 공격하는 장면. 사진은 화가 토니 체코라로가 1998년 그린 판화.
 
 
 
 
 
교황 알렉산데르의 죽음이 불러온 가문의 위기
 
알렉산데르 6세가 고해신부를 불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신이시여, 저의 죄를 사하소서.”
그는 마지막 순간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살, 뇌물, 섹스라는 수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서만큼은 그도 구원받고 싶은 ‘길 잃은 양’에 불과했습니다.
 
 
 
 
병상에 누운 알렉산데르 6세. 미드 ‘보르지아’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체사레도 몰락의 길로
 
날고 기는 체사레라도 교황이라는 지지자 없이 홀로서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의 뒤를 이어 새롭게 교황에 오른 이는 율리우스 2세.
보르지아 가문을 가장 강하게 비판해온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었습니다.

 

율리우스의 취임 일성은 이랬습니다.

보르지아 가문은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한 교회를 모독했다. 나는 그들이 썼던 공간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당신 없이는 난 아무것도 아니군요.” 체사레 보르지아 초상화.
 
 
 
율리우스 2세는 지속해서 체사레의 군사 캠페인을 방해합니다.
체사레는 힘을 잃어갔지요.
과거 알렉산데르 6세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었습니다.

 

1507년 체사레는 스페인 북부에서 나바르 지역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결국 사망합니다.

볼품없는 모습의 나체로 그는 길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보르지아의 멸문과 다름없었습니다.

보르지아는 ‘부패한 교황청’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뒤를 이은 교황들의 부패도 지속됐지요.

결국 사달이 터져나왔습니다.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구교와 신교로 쪼개지게 되었지요.

 

 

 

         성모 앞에 무릅꿇은 알렉산데르6세. 자신의 정부인 줄리아 파르네세를 모델로 성모를 그린 작품이다.
         화가 피에트로 파케티의 작품.
 
 
 
 
 
‘빌런’ 체사레로부터 영감을 받은 마키아벨리
 
“군주는 잔인하다는 불명예를 개의치 말아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황망하게 죽은 체사레의 흥망성쇠를 돌아봤습니다.

그가 성공했던 비결을 이렇게 결론짓지요.

“선량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 메디치 가문에도

보르지아 가문처럼

교황령을 군주국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마키아벨리였지요.

 

 

 

                         체사레 곁에서 정치 이론을 연구한 니콜로 마키아벨리.
 
 
 
 
근대에 들어서면
마키아벨리가 주창했던 마키즘이 독재정치 이론에 악용됩니다.
수많은 스트롱맨(독재자)들이 ‘마키아벨리즘’ 정치로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고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는

마키아벨리즘은 그러나 점점 도전받고 있는 추세입니다.

정치인의 악행을 옹호하는 것이 현시대에는 매우 이질적이기 때문이겠지요.

 

 

 

                         ‘군주론’은 메디치 가문 로렌초 디 피에로에게 헌정됐다.

 

 

 

 

잔인한 통치자가
과연 현대 민주주의 시민의 대표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당한 목적만큼이나 그 수단 역시 깨끗해야 한다는 게 시대의 요구입니다.

 

 

이제 곧 총선이 시작됩니다.

번거롭더라도,

출마자들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시기를.

보르지아 가문처럼 끔찍한 정치인을 솎아낼 유일한 기회가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무심함은

또 다른 마키아벨리주의자를 키우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군주론’의 1550년판 표지. 원제는 ‘IL PRINCIPE’.
 
 
 
 
 
<네줄요약>

ㅇ명저 ‘군주론’의 모델은 중세 이탈리아 보르지아 가문의 체사레였다.

ㅇ체사레는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6세를 위해 암살·뇌물제공·섹스파티를 마다하지 않은 잔인한 인물이었다.

ㅇ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성공으로 정치와 도덕이 분리된 정치 이론을 전개했다.

ㅇ그러나 그의 군주론은 현대 정치에 점점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더 깨끗한 정치인을 원한다.(투표합시다)

 

 

 

 

이글은 아래 강영운 기자님이 쓴 기사의 글을 옮겨온 글이며

글 제목을 수정하고,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글을 요소요소 수정 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또한 가독성과 명확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구절에 색상처리와 문장을 분절, 행으로 분리했음도 밝힙니다.

매일신문의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생무살인_生巫殺人

 

 

 

 

 

 

 

 

 

최고의 문화유산 '한글'…

세종대왕은 '신조어'가 언짢을까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야고분군'을 비롯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석굴암, 팔만대장경, 직지심체요절(직지),

숭례문, 창덕궁, 훈민정음, 동의보감 등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문화 유산들은 적지 않습니다.

이중 으뜸은 '훈민정음' 즉 한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10월 9일 훈민정음 창제를 기리는 국경일 '한글날'입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문자와 지식의 세계를

일반 백성에게 열어주기 위해 만든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표음문자입니다.

1443년에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습니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은 만든 인물·시기·목적·원리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문자입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1894년 고종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선포한 '국문선포'로 인해
'한글'은 창제 이후 약 450년만에 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이후 한글 연구자들에 의해 가로쓰기, 띄어쓰기 등 한글 사용에 관한 여러 의견과 연구를 했습니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1908년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어연구학회'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고친 후

1913년에 다시 이름을 '한글모'로 고치면서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27년 '한글'이라는 동인지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문헌은

1877년 영국인 목사 존 로스가 쓴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입니다.

1896년에 주시경, 서재필, 미국인 선교사 허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는 한글 최초로 띄어쓰기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가 보편화 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모두 28자였는데

모음 'ㆍ'(아래아) 1개와 자음 'ㆁ'(옛이응), 'ㆆ'(여린히읗), 'ㅿ'(반치음) 3개가 사라지면서

현재 자모는 모두 24자입니다.

 

'ㆍ'(아래아)는 소실된 명확한 해설은 아직 없고

'ㆁ'(옛이응)은 소리는 그대로 남았지만

초성에 쓰이는 'ㅇ'과 별 구분이 없어 사라졌다고 추정됩니다.

'ㆆ'(여린히읗)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거의 사라졌으며,

한자와의 연동을 위해서만 일부 사용됐고

'ㅿ'(반치음)은 'ㅅ'이나 'ㅇ'의 의미로 병합됐습니다.

 

자음의 기본 글자 'ㄱ', 'ㄴ', 'ㅁ', 'ㅇ', 'ㅅ'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글은 과학적입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

'ㅁ'은 입술,

'ㅇ'은 목구멍,

'ㅅ'은 이빨 모양에서 본떠 만들었고

나머지는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체계적입니다.

즉 기본 자인 ㄱ에 획을 더해 ㅋ을 만드는 식입니다.

 

 

 

 

 

모음의 경우도

'하늘, 땅, 사람'을 형상화한 'ㆍ', 'ㅡ', 'ㅣ'를 기본 글자로 하고,

나머지는 기본 자에 획을 하나씩 더하거나 조합해서 만들었습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로 이루어진 음소 문자라

다양한 소리를 표기할 수 있어서

외국어와 자연의 소리를 적는 데에도 편리하고,

문자의 디지털화에도 유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처럼

배우기 쉬운 한글 덕분에 문맹은 찾아보기 힘들고

산업과 문화가 크게 융성하는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초기 대한민국 문맹률은 90%가 넘었습니다.

광복 후 '우리나라 말과 글을 배우자'는 문맹 퇴치 운동으로

광복 직후 77.8%에 달했던 문맹률은 1970년에 7%로 급감했고

현재는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1%이하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글을 못 읽고 쓰는 국민이 거의 없다는 소리입니다.

 

문해률은

교육부가 2021년에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성인의 문해율은 79.8%로 2017년 대비 2.2% 상승했습니다.

연령이 높을수록,

월 가구소득이 낮을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농산어촌에 거주할수록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한글의 우수성

대한민국 국민이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언어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언어연구학으로 세계 최고인 영국 옥스퍼드대의 언어학대학에서

세계의 모든 문자를 놓고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의 기준으로한 순위에서

한글이 당당히 1위를 차지했습니다.

 

또 유네스코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말뿐인 언어 2900여 종에 가장 적합한 문자를 찾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 역시 한글이었습니다.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영국의 문화학자 존맨-

 

 

 

'돌민정음'…한글은 쉽지만 한국어는 어려워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헤이 쥬~ 돈 메이킷 뱃~, 테이커 샛 쏭↗ 앤 메이킷 베러↘~~)

이 처럼 과거 우리는 팝송 가사를 한글 발음으로 적으며 외우던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한글 역시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고

드라마나 노래 가사를 해석하기 위해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음악시장 분석업체 루미네이트가 발표한 2023년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스트리밍(음원+영상) 상위 1만 곡 통계에서

한국어 음원 비중은 3.1%로 영어, 스페인어, 힌디어에 이어 4위를 기록했습니다.

세계 80억 인구 중

한국어를 쓰는 인구의 비율이 0.6%임을 감안하면

전세계 음악 시장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가수의 팬덤들은 상당수의 한국 낱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아이돌(Idol)의 '돌(dol)'과 훈민정음을 합쳐 만든 합성어 '돌민정음'이라고 부릅니다.

 

돌민정음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느낌을 살려

'오빠'(oppa), '언니'(unni), '애교'(aegyo),

'yeonseupseng'(연습생), '먹방'(mukbang), '치맥'(chimaek)등

영어 알파벳을 빌려 한국어 발음을 옮겨 적습니다.

 

이렇게

생존한 '팬덤 단어' 중 일부는 공식 단어로 등재되기도 합니다.

지난 2021년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추가된 26개 단어를 살펴보면,

'먹방'(mukbang)과 '치맥'(chimaek) 등과 같은 낱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돼 있지 않은 단어들입니다.

 

'먹방'은

국립국어원이 만든 로마자변환법을 따랐다면 'meokbang'로 표기되는 게 맞지만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철자로 썼습니다.

'언니'(unni)와 '누나'(noona) 역시도 공식 표기법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 처럼 한류의 중심에 한글이 있습니다.

글로벌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의 '2022년 언어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6월 기준 한국어를 학습하는 이용자 수는 총 1070만여명으로,

전년 대비 29% 증가했습니다.

 

이는 듀오링고 내 5억여명의 학습자 중 7번째로 많은 수준입니다.

1위 영어에 이어 스페인어·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이탈리아어 순이었습니다.

 

 

한국어 교육을 제공하는 국가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20년은

한국어가 해외 각지에서 제2외국어로 공식 채택되면서

관련 학습 수요가 증가했습니다.

인도를 비롯해 러시아 등 총 9개의 신흥국이

한국어를 현지 초·중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했습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2021년말 현재 한국어를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총 42개국의 1806개 초·중학교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9년에 30개국에 불과 했지만 3년만에 40%나 증가했습니다.

 

 

 

 

 

 

올해 1월 기준으로

한국어를 대입시험의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도입한 나라

일본,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등 총 8곳에 달합니다.

 

2025년에는

홍콩 대학 입학시험에 한국어 과목이 추가되고,

대입시험 성적으로 한국어능력시험(TOPIK) 성적이 처음으로 공식 활용될 예정입니다.

 

한국어능력시험 시행 국가와 지원자는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시행 국가는

2014년 66개국에서

지난해 81개국으로,

같은 기간 지원자는 20만여명에서 35만여명으로 15만명이 증가했습니다.

 

 

 

 

 

정부가 운영하는 세종학당은

처음 개설한 2007년에는 3개국, 13개소였지만

2023년 페루와 아이슬란드 등 16개국에 19곳을 신규 지정해

전 세계 85개국 248개소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첫 개설 당시

740여명의 학생을 가르쳤던 세종학당은

지난해 처음으로 10만명을 넘어 11만 7636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정부는 촘촘한 한국어 공급망 구축을 위해서

세종학당을 통해 권역별 세종학당 운영기관 발굴과 컨설팅 등을 지원하고

2027년까지 세종학당을 전 세계 350개소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한글은 한 두 시간이면 깨치지만

한국어는 쉽게 배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어는 조사가 다양하고 어미 변화가 많은 데다

존대어법이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어렵다고 털어놓습니다.

서구 문화권 특히 미국 국무부 소속 외교연구원은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를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인 '난이도4'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국어학자는 한국어 동사 변화가 무려 60~70가지나 돼

외국인들이 배울 때 큰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가령 '좋아하다'라는

동사는 좋아해, 좋아하니, 좋아하네, 좋아하겠어, 좋아하시네 등으로

어미가 변화무쌍해 배우기 어렵다고 합니다.

또 한국어에 한자나 일본식 표현이 많은 것들도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신조어' 세종대왕님이 보시면 정말 노하실까?


1990년대에 나온 '오렌지족', '야타족', '명태',
2000년 초반에 나온 '방가방가', '하이루', '캡짱', '깜놀' 등 여러분들은 어떤 신조어에 멈춰있나요?
 
 
 
 

 

 

 

2017년쯤에 유행했던

'댕댕이'(멍멍이), '머통령'(대통령), '커여워'(귀여워), '머전팡역시'(대전광역시), '세종머앟'(세종대왕) 등

같이 비슷한 모양의 한글 자모를 이용해

단어를 조합하는 방식인 일명 '야민정음'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SNS 등에서 많이 쓰였습니다.

 

이용자가 늘면서

야민정음의 일부 단어는 번역 서비스도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글 번역기에 '댕댕이'을 입력하면 'dog'로

'머통령'을 입력하면 'president'로 올바르게 번역이 됩니다.

 

또한 온라인을 통한 의사소통이 확대되면서

의미를 전하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줄임말'도 우후죽순 생겼습니다.

'별다줄'(별 것을 다 줄인다)이란 말까지 생길 정도입니다.

 

 

동영상 플랫폼과 SNS가 유행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만큼

이곳에서 신조어가 빠르게 생성되고 전파되고 있습니다.

순발력 있는 표현과 재미를 주며

직관적인 소통을 원하는 신세대들에게 신조어는 가장 좋은 소통의 언어들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신세대는 늘 있었기 때문에

신조어는 지금도 생기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조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어제의 신조어는 흥미와 재미를 잃어 서서히 소멸합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2005~2006년 사용됐던 신조어 938개 중

10년 뒤인 2015년까지

총 20회 이상, 연평균 1회 이상

매체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단어는 250개(26.6%)에 불과했습니다.

신조어 10개 중 7개는 10년 안에 소멸한 것입니다.

 

신조어 대부분이

특정 연령층(10~20대)이 사용하는 언어로

세대 단절 현상, 부모와 자녀간 언어장벽을 만든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신조어 뜻 대부분을 모르는 기성세대의 경우

젊은 세대보다 더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과거 온라인설문조사업체 두잇서베이가 조사한 결과

신조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응답자가 전체의 64.8%에 달했습니다.

 

연령대를 교차분석한 결과,

신조어를 긍정적으로 인식한 세대는

20대와 30대인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세대는 40대, 50대, 60대 이상 등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처럼

신조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즐기는 젊은 세대와 달리

기성세대는 한글과 한국어를 파괴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합니다.

흔히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보시면 노하신다'라고 말하면서요.

 

 

하지만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조어는 시대흐름에 따라 생기고 사라집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겁니다.

 

과거 유행했던 '방가방가', '캡짱', '안습' 등은

지금에는 사용하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어졌고

'댕댕이'(멍멍이), '띵작'(명작) 등

'야민정음'처럼 표기하는 데 제한이 없고 응용이 가능하다는 건

한글의 우수함 때문이란 시각도 있습니다.

 

 

물론 '○○충', '○○녀', '○○한' 등 혐오표현과

비속어, 남녀·세대비하 언어들을 쓰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않고 무분별하게 신조어 남용 또한 자제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 키패드에 적합한 글자로 한글이 꼽히는 이유 또한

자모의 조합으로 글자를 만들어내는 표음문자인 한글의 편리함 덕분입니다.

자음만 따서 사용하는 'ㅇㅇ', 'ㅇㅋ', 'ㅋㅋ' 등은 빠르게 돌아가는 디지털시대,

SNS에서 빠른 속도로 말을 전달할 수 있도록 편리함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한글을 도구삼아

이리저리 줄이고 붙이고 조합하며 흥미를 갖고 만든 신조어는

오히려 한글의 아름다움을 존속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님의 눈에는

아이들이 한글의 유연한 특성을 이용해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한글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보고

하늘에서 '한글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구나'라고 흐뭇한 미소를 띄고 있지 않을까요?

 

 

 

 

CBS노컷뉴스 김성기 디자이너 zizibar@cbs.co.kr

 

이 포스팅 글은 윗분의 글을 옮겨온 것으로서,

가독성과 시인성을 위해 문맥과 단락을 요소요소 부분편집했으며, 사진 데이터도

일부 크기를 변경했음을 알립니다. 김성기 디자이너님 ! 좋은 글 감사합니다. 꾸벅 !!!

 

 

 

 

[한국기자협회 창립 59주년 특집]
기자협회보·마크로밀엠브레인, 기자 994명 여론조사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오전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모습

 

 

 

윤석열 정부의 대언론 소통을 긍정 평가하는 현직 기자는

10명 중 1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임 정부와 비교해 언론 활동이 위축됐다는 우려는 절반을 넘었다.

기자협회보가 한국기자협회 창립 59주년을 맞아 마크로밀엠브레인에 의뢰해

기자 994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7일까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정부의 대언론 소통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9.9%가 ‘잘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잘하는 편이다8.6%였고,

매우 잘하고 있다1.3%에 그쳤다.

 

‘잘못하고 있다’응답은 85.1%였는데,

 

이 중 매우 잘못하고 있다52.8%,

잘못하는 편이다32.3%였다.

잘 모르겠다5%였다.

 

 

응답을 성별, 언론사 유형, 소속 부서별로 살펴봐도

대부분 부정 평가(80~90%)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역별로는 제주지역 응답자의 100% 정부가 대언론 소통을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어서 강원 96.2%, 충청권 94.5%, 전라권 90.8%, 서울 85.5%,

경기/인천 77.6%, 경상권 74.3% 순으로 부정 평가를 내렸다.

 

 

 

 

 

기자 개인의 정치 성향과 연령대별 결과에선 비교적 큰 차이가 드러났다.

자신이 ‘진보’라고 응답한 312명 가운데 97.1%,

‘중도’라고 밝힌 513명 가운데 85.6%는 정부의 대언론 소통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보수’ 성향 기자들(169)의 부정 평가는

평균치보다 20%포인트 낮은 61.5%로 집계됐다.

 

 

연령대별 부정 평가는 20대와 50대가 각각 88%로 가장 높았고

40대는 86.8%,

30대는 84.3%로 집계됐다.

60대 이상의 부정 평가는 평균치를 크게 밑돈 67.3%였다.

 

 

윤석열 정부 들어 기자들이 체감하는 언론 활동 자유 정도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임 문재인 정부와 비교해

윤석열 정부에서 취재·보도·편집 등 언론 활동이 자유롭다고 평가하십니까라는 질문

‘자유롭지 않다’는 응답이 63.2%를 차지했다.

 

해당 응답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28.3%,

‘별로 자유롭지 않다’34.9%였다.

 

이와 다르게 ‘대체로 자유롭다’는 평가는 20.9%,

‘매우 자유롭다’4.9%25.8%가 언론 활동이 자유롭다고 응답했다.

 

 

언론사 유형별로 보면

지역소재 지상파방송사(78%)

서울소재 지상파방송사(76.2%),

뉴스통신사(75.9%)에서 ‘언론 활동이 자유롭지 않다’는 응답률이 높았다.

 

뒤이어 종편/보도채널(65.6%), 경제방송사/케이블채널(64.3%), 경제일간지(63.7%),

인터넷언론사(61.2%), 라디오방송사(61.1%), 지역종합일간지(59.6%),

전국종합일간지(54.3%) 등 순이었다.

 

 

부서별로는

국방/통일/북한부 소속 응답자의 100%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평가했고,

소셜미디어/디지털뉴스부(75.5%), 사진/영상부(72.2%), 편집/편성/교열부(68.5%),

문화/스포츠/생활/레저부(68.5%), 국제부(66.7%), 논설/해설/여론/독자/심의부(65%),

경제/산업부(62.2%), 정치/사회/전국부(59.4%) 등에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앞섰다.

 

 

윤석열 정부에서 언론 활동이 자유롭지 않다고 응답한 628명에게 그 이유(복수응답)를 물었더니

‘언론사에 대한 압박(감사원 감사, 방통위의 검사·감독 추진 등)’이 가장 많은 선택(68.5%)을 받았다.

 

다음으로 ‘기자에 대한 유무형의 압박(고소, 고발, 출입 배제 등)’ 64.5%,

‘언론과의 소통 부족 64.2%,

‘무리한 언론 정책 추진(KBS·EBS 수신료 분리징수, YTN 민영화, TBS 예산 삭감 등)’ 59.6%,

‘언론 유관기관(방통위, 언론재단 등)에 대한 압박과 업무 자율성 침해 45.7%,

‘부적절한 인사 임명 강행 43.5%,

‘포털에 대한 지나친 개입 25% 등이 꼽혔다.

 

 

 

어떻게 조사했나

 

이번 조사는 기자협회보가 여론조사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에 의뢰해

한국기자협회 소속 회원 11136명 가운데 문자 발송에 성공한 1777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7일까지 모바일 설문조사 방식으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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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참여자는 994명으로 응답률은 9.2%이며

신뢰수준 95%에 오차범위는 ±3.11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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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사에선 회원들이 속한 언론사 유형과

지역별 비중을 반영해 응답자가 고르게 분포됐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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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지중해 바다에서 그의 마음은 파도처럼 무너졌습니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온화했으며 파도 소리는 평화롭기 그지없었지요.

하지만 그의 눈가는 슬픔과 연민에 젖습니다.

한 장면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10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은 소년들이 나체로 바닷가에 줄지어 있었습니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닷속을 유영하는 아이들,

그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목발을 짚은 장애인이었기에 부러워만 하고 있던 것이지요.

 

 

호아킨 소로야의 ‘해변의 아이들’. 1910년 작품. 프라도 미술관 소장품. [ 대표작 ]

 
 
 
한 수도사가 소년 한명한명 바다 속으로 안내합니다.
치료를 위한 해수욕이었습니다.
장애인인 아이들은 잠시나마 물결의 일렁임을 느낍니다.
고된 일이었지만, 땡볕에서도 수도사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도사의 검은 옷 사이로 땀줄기가 비 오듯 흘렀습니다.
먼발치서 지켜보던 사내는 연민과 동정, 숭고와 같은 감정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제가 당신의 모습을 그려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이들을 자신의 캔버스에 담아내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유희의 장소인 이 바닷가에,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를 돕는 한 조력자가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습니다.

수도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러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발렌시아의 바다에서 치료차 해수욕하는 장애 아이들을 그린 ‘슬픈 유산’ [ 대표작 ]. 1899년.

 
 
화가였던 사내는 빠르게 붓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완성하지요.
제목은 ‘슬픈 유산’(Sad Inheritance).
매독에 걸린 부모로부터 장애를 물려받은 아이들을 의미했습니다.
화려한 지중해 바다와 대비되는 아이들의 슬픈 운명에 전 세계는 찬사를 보냈지요.

 

화가는 스페인의 대표 예술가로 떠오릅니다.

그의 이름은 호아킨 소로야.

스페인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 그를 사색합니다.

올해 8월 10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호아킨 소로야. 1909년.

 
 
 
 
 
 
 
부모 없는 아이로 자란 호아킨 소로야
 
호아킨 소로야는 1863년 2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언제나 화창한 날씨가 인간을 포근하게 품어주는 아름다운 도시였지요.
하지만 내면의 날씨는 늘 우중충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가 콜레라 대유행으로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작 2살에 고아가 되었던 것이지요.
 

소로야와 그의 여동생 콘차는 외삼촌에게 맡겨집니다.

자물쇠 제조공인 외삼촌 부부는 그들을 제법 잘 보살폈지만,

부모의 빈자리를 완전히 메워줄 수는 없었지요.

소로야는 슬픔을 그림으로 소화했습니다.

외삼촌은 그에게 자물쇠 제조를 가르쳐 주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소로야의 눈은 언제나 캔버스를 향해 있었지요.

재능을 보인 그에게 외삼촌 부부도 결국 지지를 보냈지요.

수도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찾아 명화를 습작하기도 했습니다.

 

 

 

 

호아킨 소로야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작품 ‘몬텔레온 공원을 방어하는 포병들. 1884년 작품.

 
꽤 재능있는 화가였습니다.
22세가 되던 해에는 이탈리아 로마와 파리에서 유학할 기회도 얻었지요.
마드리드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2등을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몬텔레온 공원을 방어하는 포병들’(1884년)이란 작품이었습니다.
침략자 나폴레옹에 저항하는 스페인 군대를 묘사한 그림이지요.
화가로서 첫발을 디딘 소로야의 그림에서는 다소 진중함이 엿보입니다.
가족사의 비애가 그림에 녹아든 것일 수도 있었겠지요.
 

 

 

 

소로야가 로마에서 머물 당시 그린 ‘미친 사람을 변호하는 호프레 신부’. 1887년 작품이다.

 
 
로마에서의 공부는 그를 한층 더 성숙한 화가로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르네상스 화가의 작품을 직접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디테일은 정교해졌고, 붓의 놀림은 더욱 거침없어졌습니다.
그의 그림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랑을 찾아 발렌시아로 돌아온 소로야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녀가 있는 발렌시아로요.”

약 4년의 공부를 마친 후 그는 스페인으로 귀국을 준비합니다.

예정보다 빠른 귀환이었지요.

17살 때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이 그리워서였습니다.

사진관에서 조수로 일하던 당시 알게 된 클로틸데 가르시아 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홀로 사는 삶’을 견디지 못했지요.

 

 

 

 

 1886년 클로틸데 가르시아의 사진.

 

 

 

2년 후 그는 소로야와 결혼한다.

‘가족’이란 이름은 언제나 소로야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의 부재는 또 다른 욕망을 낳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예쁜 아이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꿈을 그는 자주 꾸곤 했습니다.
1888년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 클로틸데와 결혼에 성공합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도 셋이나 낳았지요.
 

 

검은 옷을 입은 아내 클로틸데.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화폭에 옮기다
 
 
결혼 후에도 그는 제법 괜찮은 경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림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연민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 노예’(Trata de blanca)로 불리는 작품이 대표적이지요.
 
 
 

기차로 끌려가는 매춘 여성의 현실을 그린 소로야의 ‘백인 노예’. 1894년 작품.

 
좁은 기차 칸에 두건을 머리에 쓴 젊은 여성이 잠들어있는 그림입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나이 든 여성은 포주이지요.
숙녀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그들은 도시 뒷골목에서 돈을 받고 남성을 상대해야 할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소로야는 날카롭게 그려낸 것이었지요.
물론 팔려 갈 소녀들에 대한 연민도 잊지 않았습니다.
 
 
 
 

두 노년의 어부가 젊은 어부의 상처를 보살피는 모습을 그린 ‘그들은 여전히 물고기가 비싸다고 말했다’. 1894년 작품. 시대상을 잘 묘사한 화가의 사실주의를 느낄 수 있는 작품.

 
 
 
 
소로야를 스페인의 대표 화가로 만든 작품은 앞서 언급한 ‘슬픈유산’(1899년)이었습니다.
바닷가에서 해수욕 치료를 받는 장애 소년들을 그린 그림이었지요.
그는 바닷가에서 아이들을 발견할 때의 감정을 그대로 적어났지요.

 

 

 

‘슬픈 유산’ 소묘.

 

 

“어느 날 아침 어부들의 스케치를 하고 있을 때,
저 멀리 한명의 사제와 가까운 거리에 벌거벗은 아이들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산 후안 데 디오스 병원의 아이들이었다.
장애인, 정신병자, 나병 환자가 찾는 곳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불행한 사람들의 존재는 나에게 고통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투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자신과,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의 처지는 닮아 있었습니다.
해수욕으로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의지에서
어린 시절 그림으로 슬픔을 달래보려 했던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 테지요.

 

그림에 담긴 아련함을 당대의 사람들도 느꼈습니다.
1900 년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대상을 타게 된 배경이지요.

이듬해에는 마드리드 국립 미술 전시회에서 명예 훈장 (medalla de honor)을 수상합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조감도.

 

 

 

 

가족을 예술의 영감으로 삼은 호아킨 소로야
 
예술은 도덕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하지요.
다양한 여성을 만나고, 또 쉽게 질려하면서 그 감성을 미적 감각으로 표현하는 예술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예술감각을 가지고도 방탕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부인에게는 끊임없는 사랑을, 세 아이들에게는 깊은 애정을 표현했지요.

그의 작품에는 가족이 모델로 서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1895년 호아킨 소로야의 ‘엄마’. 아내 클로틸데가 셋째 엘레나를 낳고 요양하는 모습을 그렸다. 엘레나는 후에 그의 아버지처럼 화가가 됐다.

 
그의 그림 ‘엄마’(마드레)를 보시지요.
새하얀 침대 위에서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사랑스레 쳐다봅니다.
아이는 쌔근쌔근 자고, 산모는 따뜻한 눈길로 아이를 보듬습니다.
아내 클로틸데와 셋째 딸 엘레나가 모델인 작품입니다.
그가 얼마나 가족을 사랑했는지 느껴지시는지요.
 

아버지의 무한 사랑을 받은 엘레나가 화가의 길을 택한 배경입니다.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 중 가족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았지요.

‘바닷가 산책’, ‘목욕,하베아’도 대표적입니다.

 

 

“자기야 예쁘게 그려줘. 늘 그랬듯이” 아내 클로틸데를 모델로 한 ‘바닷가 산책’. 1909년 작품.

 

 

“아빠, 또 그림 그려요?” 가족들이 해수욕 하는 장면을 묘사한 ‘목욕, 하베아’.

 
 
 
 
 
 
스페인식 루미니즘을 구현한 거장
 
 
“발렌시아의 빛으로 다가간 화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는 거장의 자리로 올라갑니다.

1900년에 파리 만국박람회를 다녀온 뒤, 그는 후기 인상주의의 화법을 체화하기 시작했지요.

자연의 빛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는 ‘외광회화’를 스페인식으로 소화해낸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지중해의 태양이 그의 캔버스에서 다시 빛났습니다.

스페인식 루미니즘이 꽃피기 시작합니다.

 

 

 

 

 

소로야의 1903년 작품인 ‘해변의 아이들’. 빛을 유려하게 구현한 작품으로 평판이 높다

 

 

 

 

‘소녀’. 1904년 작품.

 

 

 

‘말의 목욕’.(1909년)

 

 

그의 대표작 ‘해변의 아이들’ 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발렌시아 앞바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마치 지금이라도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은 느낌을 자아냅니다.
아이들 위로 내리쬐는 태양 빛은 또 얼마나 생생한지요.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였으니까요.
 
 

                                             소로야가 그린 미국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초상화.

 
 
 
 
 
 
그림 속에서 살다가 그림으로 죽다
 
모든 예술가에겐 자신까지 집어삼키고 마는 ‘역작’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소로야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지요.
1911년 미국 히스패닉 협회가 그에게 작품을 의뢰합니다.
본토 스페인을 그리워할 이민자를 위한 그림이었지요.
‘스페인의 비전’이었습니다.
어느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지역의 풍경을 그려달라는 쉽지 않은 소명.
소로야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서울 아니 마드리드에서 온 화가 양반이래.” 토속적인 장면을 자신의 색감으로 구현한 ‘스페인의 비전’ 중 하나인 ‘카탈루냐의 물고기’.

 

 

 

소로야는 엉덩이가 무거운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려냈지요.
고관대작과 귀족들의 풍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장과 어물전에서 땀내 나는 서민들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전통 의상을 입고 서로의 풍속을 즐기는 남정네들과 여인들이 대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냄새 나는 그림입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아야 몬테’. 이 역시 ‘스페인의 비전’ 중 일부다.

 

 

 

위대한 작품은 때론 예술가를 무너뜨리곤 한다지요.
이 경우도 그렇습니다. 첫 의뢰를 받은 지 8년 만에 완성한 그 작품을 그린 뒤로 소로야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지요.
그 와중에도 그는 가족들의 그림을 그리며 이따금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가족이란 삶의 근원이자, 행복의 기원이었던 셈입니다.
 
 

“화가 양반, 그림 그만 그리고 여기서 춤이나 한판 추세.” 아라곤 지방 민속 무용을 묘사한 ‘라 호타’.

 

 

 

스페인의 비전 중 하나인 ‘카스티야 빵의 향연’.

 

 

 

 

‘스페인의 비전’을 완성한 다음 해인 1920년.
그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것이었지요.
3년 뒤인 그는 마지막 숨을 거뒀습니다.
물론 그의 옆에는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가족들이 함께였지요.
 
 
눈부신 태양만큼이나 빛났던 소로야
 
육신은 스러졌으나, 이름은 영원히 남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이름이 평생 스페인 사람들에게 기억되도록 애썼습니다.
소로야의 집과 작품들을 스페인 정부에 기증한 것이었지요.
1932년 소로야 박물관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소로야의 시원한 색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즐비하지요.
 
 
 

“사랑하오, 내 생이 다할 때까지.” 호아킨 소로야와 아내 클로틸데는 소울메이트 그 자체였다.
1922년 사진을 찍은 뒤 다음 해 소로야는 눈을 감았다. 아내 클로틸데의 품속이었다.

 

 

 

올해 8월 10일은 호아킨 소로야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그를 기리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곳에 직접 가긴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 푸른 바다의 윤슬에서 그의 조각을 발견합니다.
 
 
 

마드리드 소로야 박물관. 생전 소로야가 가족들과 함께 머물던 곳이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햇살을 담아냈던 그의 솜씨가 떠오르는 뜨거운 여름입니다.
그의 그림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가족을 향한 사랑, 인간을 향한 연민도 함께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호아킨 소로야의 자화상. 1909년.

 

 

 

 

<네줄요약>

ㅇ호아킨 소로야는 스페인식 인상주의 화가로 명성을 높였다

ㅇ그의 작품에는 약자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매독 후유증을 앓는 아이들, 매춘 여성이 대상이었다.

ㅇ2살 때 부모를 잃었던 그는 가족을 향한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ㅇ난봉과 방종을 예술의 동력으로 삼았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랐던 셈이다.

 

 

<참고문헌>

ㅇ호아킨 소로야, 바다, 바닷가에서, 에이치비프레스, 2020년.

 

 

 

이 포스팅은 매일경제의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님의 기사글을 옮겨온 것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내용의 글은 가독성을 위해 미미하게 수정했으며, 사진은 좀 더 크고 선명하게

리터칭 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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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_千字文  (1) 2023.05.30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한곳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한 소녀가 서 있습니다.
꽃을 보면서 까르르 웃는 한 소녀에게서 그는 눈을 떼지 못했지요.
17살이 갓 지난 소녀는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인 역시 그를 사랑스럽게 여겼지요.

 

          프랑스 화가 마리 드니즈 발레의 A woman‘s study from life.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지만 노인의 나이는 벌써 72세.
둘의 나이 차이는 50살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어이 그녀에게 ‘청혼’의 뜻을 전하지요.
노욕에 가득 찬 범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기의 대문호 괴테의 일화입니다.
사랑을 문학의 동력으로 삼은 그를 사색합니다.


          “사랑은 숫자에 불과하다네 하하.” 독일화가 요제프 칼 슈틸러가 1828년 그린 노년의 괴테.
 
 
 
사랑을 문학의 원동력으로 삼은 남자, 괴테

노년의 사랑에서 보듯, 괴테의 삶은 꽤 욕망에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삶의 주기마다 불같은 사랑이 찾아왔고, 열정이 불탄 자리엔 문학이 자랐습니다.
첫사랑부터 끝사랑까지, 빠짐없이 명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는 타고난 작가였지요.
괴테를 알기 위해서는 괴테의 연인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독일 화가 게오르크 멜키오르 크라우스가 1775년 즈음 그린 괴테.


괴테는 젊은시절부터 꽤나 많은 사랑을 한 정열의 사나이였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줄여 괴테로 통용되는 이 사내는 174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시민 계급의 아들이었지요.
독일 북부 지역 법률가인 아버지로부터는 근면한 생활태도를 배웠고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는 이야기를 짓는 능력을 물려받았지요.
서민 집안에서도 유복했고 그 덕에 마음껏 고등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우연히 빠진 삼각관계...대작의 씨앗

16살 때 라이프치히에 입학하면서 그는 몇몇 풋사랑을 경험하지요.
보다 강렬한 사랑의 경험은 그가 23살이던 해 찾아옵니다.
인구 5000명의 작은 도시 베츨라르에서였습니다.
변호사 경력을 시작하려고 이곳을 찾았습니다.





                                          괴테가 근무한 독일 베츨라르 사무실. <사진=Andreas Praefcke>



새 도시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도시는 유서 깊었지만, 인습이 켜켜이 쌓여있는 느낌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낯선 법원에서 변호사로서의 경력 시작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앞섰지요.

“혹시 연인 있으세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보다는 불안이 가득한 나날이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불현히 찾아왔지요.
무도회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만난 ‘그녀’ 때문이었습니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아침이슬처럼 영롱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을 소재로 가벼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샬럿 버프라는 것까지 알게 됐지요.



샬럿 버프 초상




샬럿 버프와 그녀의 약혼자 캐스트너와의 삼각관계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이어졌다.
기대는 언제나 실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무도회장에서 그녀가 어떤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몸이지요.
잠깐이나마 두 사람 사이에서 서성이던 괴테.
샬럿테의 약혼자였던 캐스트너와도 우정을 잠시 쌓았지만, 공허함은 커집니다.
결국 샬럿테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지요.
 
 
 
반(半)자전적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문학이 나를 구원하리...”

괴테는 사랑으로부터 저주받았고, 문학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사랑의 생채기를 자신만의 미문(美文)으로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랑에 아파하는 유럽의 시민들 역시 그의 문학에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두 번째 사랑이 끝났을 때 만든 작품이 그랬지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년 초판본. <저작권자=H.-P.Haack>



주인공 베르테르는 삼각관계에 괴로워하다
사랑하는 여인 로테가 자신의 라이벌과 결혼하자 죽음을 결심합니다.
마치 젊은 괴테가 샬롯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괴로워하듯이요.
괴테의 친구인 칼 빌헬름 예루살렘 역시 약혼자가 있는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후
고뇌하다가 죽음을 택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두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지요.
 
 
 
유럽의 스타작가가 된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유럽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20대 중반의 작가 괴테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요.
유럽의 모든 귀부인과 고관대작들이 그와의 만남을 기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베르테르 열병’이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었지요.
젊은이들은 작품 속 베르테르처럼 옷을 입었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소설을 읽고 따라 자살하는 일까지 생겼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지요.
기독교 국가에서는 ‘자살’은 죄악과 같았기에, 덴마크와 이탈리아에서 이 소설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자살한 베르테르의 무덤을 찾은 샬롯을 묘사한 그림. 작자미상 1790년대 작품.
 
 
 
 
이 작품이 당시 유럽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건 전형적인 격식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주제와 표현방식에서 보더라도 틀에서 벗어났지요.
사랑에 아파하고, 정열이 불러온 격정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그는 고스란히 담아 냈습니다.
베르테르는 세상과 조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열 떄문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낭만적인 ‘영웅’의 원형이었습니다.
 
 
 
           베르테르와 샬롯을 묘사한 그림.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진 것을 상상해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그저 ‘치정극’으로만 해석되지 않는 깊이를 보여줍니다.
작품 속에서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봉건 귀족 계급에 의해 좌절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을 묘사하면서입니다.
사회의 위선을 베르테르의 눈을 빌려 고발했던 것이지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귀족은 될 수 없었던 괴테 본인의 문제의식을 작품으로 녹여냈던 셈입니다.
이전 문학이 전설·역사를 주제로 현실과 괴리된 것과는 명확히 달랐지요.
괴테는 그만의 독창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가였습니다.
 
 
 
 
‘질풍노도’ 문예사조를 이끈 괴테
 
모든 대문호가 그러하듯, 괴테의 이전과 이후의 문학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 개인적 체험을 담아낸 작품들이 많아지면서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질풍노도’라고 불리는 ‘슈트룸 운트 드랑’ 운동이었습니다.
독일문학은 이제 유럽의 중심으로 발돋움하지요.
영국에서는 문화적인 유행이었고, 나폴레옹은 이를 7번이나 정독한 걸로 유명합니다.
문학사가들은 이 시기를 ‘괴테의 시대(Goethezeit·괴테자이트)’라고도 불렀지요.
 
 
 
           “괴테, 나도 당신의 책을 보고 울었다오.”
           괴테의 후원자가 되어준 작센-바이마르대공 샤를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1757-1828). 독일 화가 하인리히 콜베의 작품.
 
 
 
 
그는 더 이상 ’서민‘ 괴테가 아니었습니다.
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칼 아우구스트가 그를 직접 궁전에 초빙한 뒤였습니다.
공작은 괴테를 직접 궁전의 수석 고문으로 임명하지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름에 귀족에게만 붙는 ’Von‘이 붙는 이유입니다.
전폭적인 후원 아래 여러 인사들과 우정을 쌓았지요.
’빌헬름 텔‘로 유명한 독일의 대표작가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실러도 그 중 한명이었습니다.
 
 
 
 

 

           독일의 또 다른 대문호인 [ 프리드리히 쉴러 ] 는 괴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금지된 사랑을 즐긴 괴테
 
“부인, 사랑합니다. 당신이 남편이 있더라도요.”

성적 욕망을 그는 문학의 불쏘시개로 삼았습니다.
바이마르 공국에서 머물 때에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7살 연상의 샬로테 폰 슈타인이라는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면서 이를 작품으로 소화했지요.
그녀가 유부녀였던 탓에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런데도 편지를 1800통이나 주고받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이어 나갔지요.
’쉴 사이 없는 사랑‘, ’달에게‘ 등 그녀와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사랑이여, 너는 삶의 왕관이다. 쉴 사이 없는 행복이다.” -쉴 사이 없는 사랑 中-

 

 

           7살 연상의 유부녀였음에도 괴테와 정신적 사랑을 나눈 샬럿 폰 슈타인
 
 
 
괴테의 문학 인생에서 “최고로 정열적인 상태의 산물”은 ’마리엔바트 비가‘였습니다.
그의 나이 74살인 1823년에 쓴 작품이었지요. 19살 소녀와의 결혼이 물거품 된 뒤의 감정을 담았습니다.

괴테는 2년 전 만난 울리케 본 레베초브에게 끌렸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나이를 되뇌면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의 애착을 보여주곤 했었지요.
그런데 어느새 그 마음은 사랑과 정열로 변했습니다.
침대에 누운 노인은 밤마다 소녀와의 사랑을 상상하면서 잠들곤 했었지요.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요.
15년 전에 울리케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기억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괴테의 마지막 사랑으로 통하는 울리케 폰 레베초브.
 
 
 
 
둘의 나이 차이는 55살이었다.
오랜 기간 마음을 키워 온 괴테였습니다.
삶이 끝나기 전에 그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었지요.
그는 자신의 주군이자 친구이기도 한 바이마르 공작에게 ’청혼‘의 의사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완곡한 거절로 전해집니다.
시의 제목이 ’마리엔바트의 비가‘인 이유이지요.

슬픔과 비애로 가득했지만,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았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승마냥, 시구(詩句)와 시어(詩語)를 모아 자신의 마음을 써 내려갔지요.

 

 

 

           요한 티슈바인이 그린 이탈리아 여행 중인 괴테

 
괴테는 어릴 적부터 노년까지 끊임없이 사랑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를 자신의 작품에 녹였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 침묵할 때, 신은 내게 고통받음을 말할 재능을 주셨네.
···떨칠 수 없는 그리움만이 나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네,
끝없는 눈물만이 남아있네.” -마리엔바트 비가 中-

황혼에 접어든 노인의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격정이 묻어납니다.
사랑의 정열을 온전히 품을 수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괴테가 펜을 쥘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 뒤에는 실연의 상처 있었다
 
마지막 사랑이 끝난 뒤엔, 마지막 정리도 함께 시작됩니다.
그가 미처 쓰다만 여러 작품이 토막 나 있었고,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려 60년 동안이나 완결을 짓지 못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파우스트‘였습니다.
악마 메피스토로부터 세상의 온갖 명예·부를 가질 수 있다는 유혹을 받는 현자 파우스트의 이야기지요.
 
 
           프랑스 화가 장 폴 로렌스가 그린 파우스트 박사.
 
 
 
 
괴테의 작품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예술계에서 파우스트는 단골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현자 파우스트가 악마로부터 힘을 받은 후 한 첫 번째 행동은
10대 소녀이자 순수하고 순결한 그레트헨을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레트헨은 실제로 괴테의 첫사랑 이름이었지요.
실패한 첫사랑을 모델로 삼아 문학으로 구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93년 그린 모젤강 인근.
 
 
 
 
 
프랑스 국경을 표시하는 기둥에는 ‘Cette terre est libre’(이 땅은 자유다)고 적혀있다.
그는 문학과 그림에도 소질이 있는 팔방미인이었다.
현자 파우스트는 물론 괴테 본인이었지요.
문학이 그리는 허구세계에서라도 그는 사랑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었을까요.
괴테의 첫사랑인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의 첫 문장을 쓰게 했고
그의 마지막 사랑 울리케는 파우스트를 매조짓게 했습니다.
70대 노인의 노욕이 시대를 정의하는 명작의 동력이었던 셈이지요.
 
 
 
 
 
죽음 뒤에도 이어진 괴테의 시대
 
죽음 이후에도 ’괴테자이트‘(괴테의시대)는 계속됐습니다.
후대의 음악가와 철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추앙‘했기 때문이었지요.
베토벤은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계획도 세웠을 정도입니다.
베토벤은 공공연히 “파우스트 교향곡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이마르에 마련된 두 사람의 동상

 
 
괴테와 실러는 독일 문학을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영국의 작가 토머스 칼라일은 괴테와 연관된 수많은 작품으로 그를 기렸습니다.
1919년 독일의 제헌의회가 헌법을 작성하고
승인한 장소로 수도 베를린이 아닌 바이마르를 선택한 것 역시 괴테의 영향으로 알려졌지요.
 

“예술가에게 자유를
그러면 그들은 더 큰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는 격언
괴테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반면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빈약한 상상력의 예술가들이 이 땅에는 너무 많습니다.

 

 

1999년 발행된 괴테 기념 우표.

 
 

ㅇ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사랑을 문학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ㅇ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한 뒤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ㅇ74세에 19살 소녀에게 청혼한 뒤 거절당했다. 이 아쉬움으로 ‘파우스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ㅇ우리는 괴테가 아니다. 사랑에도 선을 지키자.

 

<참고 문헌>

ㅇ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민음사, 2008년

ㅇ이상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타 사실성과 허구성, 한국외대 외국문화연구소, 2000년

ㅇ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자작나무, 1996년

 

 

 

이글은 아래 강영운 기자님이 쓴 기사의 글을 옮겨온 글이며

글 제목을 수정하고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글을 미미하게 수정을 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매일신문의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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