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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출처 : https://www.youtube.com/

watch?v=tGN0f17dv2I&pp=ygUW7YG066CI66mY7YOA7J24IOuFuOuemA%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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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백인 여성을 납치해 성노예로 만든 집단

만화  ‘원피스’에 등장한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어떤 책일까요.?

답은 50억권의 성경입니다.

 

만화책으로 범위를 좁혀봅니다.

왕좌는 ‘원피스’가 차지합니다.

1997년 첫 권 이후 무려 올해까지 5억권이나 팔렸기 때문입니다.

원피스가 ‘만화계’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원피스라는 만화의 내용은

해적 루피보물 ‘원피스’를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27년간 연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모릅니다.

넷플릭스에 실화 영화가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고무고무~”, “너 내 동료가 돼라.” 등 등

수많은 명대사가 여전히 남녀노소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지요.

 

 

1866 년 장 레온 제롬의 ‘슬레이브 마켓’.

이슬람 해적단에 의해 납치된 백인 여성들은 주로 오스만 제국에 끌려갔다.

 

 

 

‘원피스’는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그 기반에는 실화가 적절히 녹아 있습니다.

수많은 캐릭터 중 실존한 ‘바다 사나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 여성을 납치해 오스만제국에 팔아넘긴 해적들도 캐릭터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역사 덕후들이 원피스에 빠져드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피스에 녹아 있는 역사 이야기를 전합니다.

윤슬이 가득한 봄 바다가 그리운 시기여서입니다.

 

* 윤슬 :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만화 '원피스' 표지. [사진출저=shueisha]

 

 

 

 

 

 

태초에 ‘해적’이 있었다

해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등장합니다.

로마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지요.

해적들은 부유한 국가의 부를 무력으로 빼앗는 걸 즐겼습니다.

무역이 활발할수록 약탈품은 늘어갔지요.

포도주, 올리브유, 밀, 노예가 이들의 먹잇감이었습니다.

로마는 제국의 전 거점에서 물류를 운송합니다.

이런 양질의 보물들을 해적들이 놓칠 리 없었지요.

로마의 군사들은 육지에선 무적이었지만,

해적의 홈그라운드인 바다에선 예외였습니다.

 

 

 

중세 지중해를 주름잡은 바르바리 해적.

 
 
 

11세기 중세 지중해는 해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무역의 핵심지역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이슬람 해적들이 명성을 떨칩니다.

바로 바르바리 해적이었습니다.

 

1530년부터 약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150만~200만 명 이상이 이들에게 노예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해적, 권력과 손을 맞잡다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 제국

바르바리 해적을 ‘전략’적으로 육성했습니다.

스페인이 ‘레콩키스타(재정복)’로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을 때입니다.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동유럽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서유럽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지요.

바르바리 해적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서유럽이 해안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바르바리는 이슬람 해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집단이었다.

그림은 피에르 프란체스코 몰라의 작품 (1650년).

 

 

바르바리 해적들은

오스만의 ‘사략선’(국가에 의해 공인된 해적)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지중해와 북해에 면한 국가들을 약탈해 기독교 여성들을 납치하곤 했었지요.

오스만 제국 ‘하렘’의 노예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금발, 흰 피부를 가진 여인들이

오스만제국의 군주들의 후궁으로 이름을 알린 배경입니다.

백인 여성들은 ‘화이트 골드’라고 통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지요.

 

오스만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통하는 술레이만 대제황후

우크라이나 출신의 록셀리나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노예로 끌려와 황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요.

술레이만이 그녀를 어찌나 사랑했던지,

그 세레나데가 지금도 전해집니다.

 

“나의 동반자, 나의 사랑, 빛나는 나의 달빛이여.”

 

 

 

 

오스만제국의 명군 ‘술레이만’ 대제.

 

술레이만의 소울메이트는 백인 노예인 우크라이나 출신의 록셀리나였다.

 

 
 

해적에서 영웅이 된 하이르 앗 딘

술레이만에게 가장 인정받던 해적은 하이르 앗딘이었습니다.

스페인에 공격받은 알제를 구원해 지도자로 오르면서였습니다.

빨간 턱수염으로 기독교 세력에 맞섰기에

그는 ‘붉은 수염’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중해의 주인 ‘하이르 앗딘’이라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삼지창은 바다의 주인을 상징한다.

 

 

술레이만 대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바르바리 해적인 그를 오스만 제국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명성에 걸맞게 그는 카를 5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대활약을 펼쳤지요.

 

만화 ‘원피스’에서

밀짚모자 루피의 산하 해적단이 된 ‘거인’ 하이 루딘

이 사내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입니다.

 

지금도 튀르키예에서 하이르 앗딘은 ‘해군의 아버지’로 통하지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 드라마까지 있을 정도입니다(바르바로사: 지중해의 검).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의 그림. [사진출저=Fine Art Museum - Algiers]

 

 

오스만의 사략선 전략을 배운 잉글랜드

“우리도 해적을 육성하자.”

해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오스만의 전략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잉글랜드였습니다.

제국을 일군 스페인의 강력한 해군과 싸우기에는

잉글랜드는 아직 미약한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강 대 강’으로 맞붙으면 참패했을 게 자명했지요.

엘리자베스 역시 오스만제국의 지혜를 빌렸습니다.

해적을 육성해 스페인의 상선과 무적함대를 교묘히 괴롭히는 전략이었습니다.

 

“스페인과 정면승부하기엔 우리나라는 너무 약한데...”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그때 등장한 인물이 ‘프랜시스 드레이크’였습니다.

제법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한 집안의 인물.

그는 어려서부터 사략선에 올라 아메리카 대륙까지 섭렵한 인물이었지요.

그때부터 스페인들의 상선을 무자비하게 털어 명성이 높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임무는 비밀리에 또 은밀하게 수행됐습니다.

 

“우리 가문의 과거는 묻지 마시게.” 가운데가 프랜시스 드레이크.

 
 
 
 

해적 드레이크 잉글랜드를 부유하게 하다

1570년 드레이크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합니다.

(잉글랜드 왕실이 지원한)원정대를 이끌고 스페인 앞바다로 항해해 왕실의 재물을 훔쳐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바친 재화는 3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왕실의 1년 국고 수입보다 많은 액수였습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까지 제집 드나들듯 하는 그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요.

마젤란 다음으로 세계 일주를 완수한 것도 드레이크였습니다.

 

 

“드레이크를 당장 처벌하라.”

스페인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 해적에 대한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스페인은 잉글랜드 왕실에 요청합니다. 잉글랜드의 해적들을 소탕할 것을.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침묵을 지켰지요.

두 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돕니다.

카톨릭의 무적함대 스페인과, 개신교의 신성 잉글랜드의 대결이었습니다.

잉글랜드를 구한 것도 ‘해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습니다.

1581년 드레이크를 불렀습니다.

신하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에게 기사작위를 내리지요.

해적 드레이크에서, 서(Sir) 드레이크가 된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함대를 지휘하라는 무거운 책임이 그에게 지워집니다.

 

 

 

칼레 해전은 양국의 역사를 뒤바꾼 전투다.

 

 

도버해협에 141척 함선이 출몰합니다.

무적함대였습니다.

잉글랜드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분기가 담겨있었습니다.

이름도 유명한 ‘칼레 해전’입니다. 1588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드레이크는 완벽한 바닷사람이었습니다.

해류를 읽고 빠른 기동성을 보여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해적처럼 치고 빠지는 ‘아웃복서’ 스타일에 스페인 함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요.

안달루시아 함대를 포박해 항복을 받아낸 것 역시 드레이크였습니다.

 

 

화공으로 박살나는 스페인 무적함대.

 
 

잉글랜드는 8척의 함선에 불을 붙여 바람에 흘려보냅니다.

‘화공법’이었습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처럼

그 함선이 스페인 무적함대의 전열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이 해전의 승리로 바다의 지배자는 잉글랜드로 그 지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시작을 알린 영웅이 ‘해적’이었던 셈입니다.

1596년 그가 열병으로 사망하기 직전 남긴 말입니다.

“미래에 잉글랜드가 큰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면 자신이 전쟁을 지휘할 때 사용한 북을 울려 미리 알리겠다”

1914년 세계 1차대전 때도 이 북이 잉글랜드 함대에서 울렸다고 전해집니다.

 

 

“항복합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오른쪽 흰 갑옷)에게 항복하는 안달루시아 함대 사령관.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드레이크를 꼽는 배경입니다.

‘원피스’에서 루피와 함께 최악의 세대로 나오는 인물 X 드레이크가 그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X드레이크 역시 프랜시스 드레이크처럼 해적이면서 동시에 해군이지요.

 

 

“스페인을 잡을 수 있다면, 해적이면 어떻고, 해군이면 어떠랴.”

무적함대를 무찌른 후 그려진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지구본 위에 손을 대고 있는 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징한다.

 

 

신대륙까지 뻗어나간 ‘대항해 시대’

드레이크가 보여주듯,

해적의 주요 앞마당은

이제 지중해를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까지 뻗어갑니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모든 무역의 중심지가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도둑이 있기 마련이지요.

 

해적들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캐리비언 해역을 본거지로 삼고

약탈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18세기 캐리비언은 그야말로 ‘대해적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해적의 세상이었습니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는 원피스의 흰수염과 검은수염 두 캐릭터의 모티브가 됐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악당은

에드워드 티치였습니다.

1713년부터 캐리비언에서 활동한 그는

가장 강력한 해적 중 하나로 통합니다.

4년의 해적질 동안 그가 약탈한 금액은 150억원에 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큰 키와 덩치로 엄청난 중압감을 보였다고 전해지지요.

영국 함대에 승선한 적이 있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본격 해적으로 ‘전업’을 결정합니다.

40척이 넘는 배를 약탈할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이 되었지요.

캐리비안에서 프랑스 국적 노예 운반선인 콩코드를 나포한 것도 그였습니다.

 

 

검은수염의 ‘해적기’.

 

 

영국 해군은

에드워드 티치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상업 활동에 방해를 주는 그를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718년 11월 영국 해군이 포위에 성공합니다.

그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영국 해군을 당해낼 순 없었습니다.

25곳에 상처를 입은 뒤 그의 거대한 몸뚱이가 쓰러집니다.

 

‘원피스’의 대해적 흰수염 에드워드게이트끝판왕 악당 검은수염 마샬 디 티치

이 한사람으로부터 탄생한 캐릭터지요.

‘피터팬’후크 선장 역시 그의 외모를 기반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포획되는 검은수염. 장 레옹 제롬 페리스의 1920년 작품.

 

검은수염의 함선인 ‘앤 여왕의 복수’의 모형. 거대한 크기가 해적단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해적왕 골드로저...진짜 해적왕은 따로 있었다

망망대해 어딘가에 숨어있을 ‘보물’의 존재는

모든 뱃사람의 로망이었습니다.

‘원피스’ 역시 해적왕 골D. 로저가 남긴 ‘원피스’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지요.

이 이야기 역시 모티브가 존재합니다.

 

한 해적이 엄청난 보물을 숨겨놓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영국 해적 ‘윌리엄 키드’가 그 주인공입니다

(또 다른 별명은 캡틴 키드. ‘원피스’의 유스타스 키드).

 

키드가 보물을 묻는 상상화. 후대 화가 하워드 파일의 1921년 그림.

 

 

 

스코틀랜드 출신 윌리엄 키드는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프랑스 선박을 공격하는 임무를 받은 ‘사략선’의 선장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공격에도 성공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착오로 인해 인도 무굴제국의 선박을 포획한 것이었지요.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자 집권당인 휘그당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집니다.

야당인 토리당이 지속해서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이지요.

휘그당은 궁여지책으로 ‘꼬리 자르기’를 결심합니다.

키드를 해적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자신들과 연관성을 끊어버리자는 것이었지요.

 

* 교토사( 狡兎死) 하면 양구팽(良狗烹) 이라 (토사구팽 兎死狗烹)

 

 

 

“제 보물은 여기 어디에 있소, 부인.” 뉴욕 항구의 키드선장. 장 레옹 제롬 페리스의 1920년 작품.

 

 

사형이 결정된 후

키드는 자신이 숨겨 놓은 보물에 대해 털어놓습니다.

실제로 그 장소에서 일부 귀중품이 발견되기도 했었지요.

뉴욕 인근 가디너스 섬(Gardiners Island)도 그 후보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전설은 살을 더해갑니다.

세상 모든 진귀한 보물을 그가 특정 장소에 숨겨뒀다는 내용.

보물섬과 원피스 등 각종 보물찾기 콘텐츠의 시작이었습니다.

 

실제로 발견된 보물은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그는 ‘이야기’라는 엄청난 보물을 남긴 셈입니다.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의 재산은 수천억원으로 추산됩니다(진정한 해적왕!!).

 

해적에 의해 공격받는 프랑스 선박. 1615년.

 

 
 
 

P.S.

2008년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재밌는 기사를 출고합니다.

역대 최고의 ‘해적왕’을 뽑는 기사였습니다.

약탈 금액을 기준으로 선정한 것이었지요.

2위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1억 1500만달러를 턴 것으로 산정합니다.

우리 돈으로 1500억원이지요.

그가 조국에 이바지한 승리까지 고려하면 그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입니다.

 

1위는 ‘블랙샘’으로 불린 새뮤얼 벨라미였습니다.

그는 50척이 넘는 배를 털어 1억 2000만달러를 손에 쥐었습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가까스로 넘어선 수준이지요.

역사 속 진짜 해적왕인 벨라미지만, ‘원피스’에서 그의 비중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네줄요약>

ㅇ고대부터 해적은 존재해왔다. 바다까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해서다.

ㅇ정치 권력은 해적과 손을 잡기도 했다.

ㅇ오스만 제국은 해적 하이르 앗딘을 이용해 기독교를 견제하고, 잉글랜드는 해적을 활용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찔렀다.

ㅇ두 사람은 모두 원피스에 나온다. 그래서 원피스가 재밌다.

 

 

<참고문헌>

ㅇ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2년

 

 

이글은 아래 강영운 기자님이 쓴 기사의 글을 옮겨온 글이며

글 제목을 수정하고,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글을 요소요소 수정 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또한 가독성과 명확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구절에 색상처리와 문장을 분절, 행으로 분리했음도 밝힙니다.

매일신문의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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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쇠뜨기 이슬' 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sigolgilmaum/222328559217

 

 

 

양희은 아침이슬 노래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qLg0erjLd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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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난봉꾼으로 성병 달고 산 ‘이 남자’···

악몽같은 결혼 후 ‘대왕’으로 불렸다

 

 

 

 

세기의 결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공주와,

이웃 나라 잘생긴 미남 왕자의 혼례가 치러지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8월의 말,

프랑스는 풍요롭기 그지없었지요.

만록의 푸르름처럼,

시민들의 표정도 밝기만 했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향한 축하의 박수가 프랑스의 영화를 상징하는 듯 보였지요.

마침 이날은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

모두가 외칩니다. “신의 가호가 이 아름다운 부부와 함께하기를.”

 

 

“결혼이 악몽으로 변했어” ‘여왕 마고’에서 마르가리트를 연기한 이사벨 아자니. [사진출처=IMDB]

 


 
그런데 !!!
어째서인지 신부 가족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증오가 가득한 표정으로 신랑을 바라보고 있어서였습니다.
새 가족이 아니라 원수 중의 원수를 보듯 했지요.
식장에 불길한 기운이 스밀 때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립니다.
 
“신랑의 하객을 모두 죽여라.”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이던 결혼식장이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갑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신랑.

신부와 관계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부인을 냅두고 여자란 여자는 모두 건드리고 다닌 탓에

성병으로 죽을 위기까지 몰렸었지요.

역사는 새옹지마라고 했던가요.

결국 이 사건이 한 위대한 왕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됩니다.

프랑스의 역사를 뒤흔든 이날의 현장을 함께 걸어 보시지요.

 

 

프랑수아 뒤부아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커지는 종교갈등...결혼으로 봉합을 시도한 프랑스
 
“이 결혼이 프랑스를 하나로 뭉칠 것이네.”

 

때는 1572년 8월 24일.

결혼식의 주인공은 프랑스 왕 샤를9세의 여동생 마르가리트 드 발루아

이웃나라 나바르의 왕 앙리4세였습니다.

왕족끼리의 결혼식은 중세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이 혼례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합이 종교 분쟁의 봉합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정확히 10년 전,

프랑스는 종교적 내란에 빠졌습니다.

프랑스의 성직자였던 장 칼뱅이 개신교 혁명을 이끌고 있어서였습니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내세운 루터교보다 더욱 급진적인 교리였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분은 오직 예수뿐이시다.”

교황청의 역할을 완벽히 부정합니다.

 

 

 

“가톨릭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종교일세.” 장 칼뱅의 초상화.

 


 
프랑스라는 나라는 가톨릭의 맏딸이었습니다.
장 칼뱅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지요.
 
“하나님 아래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산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
 
전위적인 메시지도 불손하기 짝이 없었지요.
가톨릭의 교리와는 완전 배치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그를 스위스 제네바로 추방하지만,

칼뱅을 추종하는 세력은

비 온 뒤에 솟아나는 죽순과 같이 늘어갑니다.

가장 독실한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위그노’(칼뱅주의 개신교)라는 불안 요소가 싸게 트고 있었던 셈입니다.

 

 

 

 

“딸아, 너는 개신교 총각에게 시집가거라.” 엄마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네 자녀 들. 남자 셋은 모두 왕위에 올랐다. 딸 마르가리트는 나바르 왕비로서 삶이 결정됐다.
 
 
 
 
그 중 이웃 나라 나바르가 가장 골칫거리였습니다.
대표적인 개신교 국가로서
프랑스 위그노(칼뱅주의 개신교)들을 물밑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로서는 어떻게든 나바르 왕국과 연을 맺고
위그노 확장을 막을 필요성이 있던 셈입니다.

 

프랑스의 실세인 샤를 9세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마르가리트나바르의 왕 앙리4세에게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한 이유입니다.

 
프랑스 드디어 봉합되나 했더니...
 
“가톨릭이든, 개신교도든 우리 모두 프랑스가 되자.”

나바르 왕국으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대국’ 프랑스의 사위로 들어간다는 건,

왕위계승도 엿볼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식이 일어난 8월 24일.

그들의 믿음은 금세 산산이 조각납니다.

프랑스이 학살군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신랑 하객과 위그노들을 모두 죽여라.”

특히 개신교의 대표 주자였던 콜리니 제독도 표적이 됐습니다.

 

 

 

“죽여라, 위그노를, 한놈도 빠짐없이.”

 

 
 
 

파리 궁정에서의 학살 소식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폭력은 본질적으로 전염성이 짙습니다.
보르도, 툴르주, 오를레앙.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든 도시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이날 결혼식 날 사망한 사람만 전국적으로 적어도 3000명, 최대 3만명으로 추정됩니다.

위그노들은 모두 개신교 국가로 도망갔지요.

망인의 숫자도 충격적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이제 분열하는 국론이었습니다.

위그노들은 피의 보복을 부르짖었고,

프랑스 진압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다시 내란의 위기에 선 프랑스였습니다.

 
 
 
대학살의 범인은 친정엄마 카트린?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그림은 아니었네.”
 

이 학살을 주도한 건

프랑스 가톨릭 대표 신자이자 왕 샤를9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 추정됩니다.

이름에서 보듯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여성.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배출한 만큼 가톨릭에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당연히 신교도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던 위치였습니다.

 

 

 

“이제 다시 가톨릭의 시대인가.”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 학살된 위그노를 둘러보는 모습.

 


카트린이 아무리 광신적 가톨릭 신자여도,
결혼식을 학살의 현장으로 만들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습니다.
결혼을 추진할 때만 해도 그녀는 진심으로 두 종교의 화해를 염원한 것으로 전해졌지요.
 

카트린은 그러나 몰랐습니다.

프랑스 가톨릭교도가 얼마나 위그노를 증오하는지를.

가톨릭 세력은 지난 10년간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일으킨 반란의 폐해를 곱씹었습니다.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미워하고,

전쟁을 하고 칼부림까지 벌이던 그 일을요.

세 차례나 일어난 내전 속에서 초토화가 된 프랑스였습니다.

그 원흉은 바로 위그노여야만 했습니다.

 

 

 

칼뱅주의 위그노들이 가톨릭 성당을 약탈하는 장면. 두 사람의 결혼 10년 전부터 이같은 폭력적 갈등이 지속돼 왔다.

 


프랑스 왕실에 반감을 가진 가톨릭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인 법원·종교 등 주요 집단이
이 결혼을 보이콧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파리의 민심도 점점 흉흉해집니다.
“프랑스 왕실이 개신교로 넘어갔다”는 유언비가 퍼져가지요.
두 사람의 결혼이 정치적 위기를 야기한 상황이 되었던 거였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 가톨릭은 프랑스여야 한다.” 기즈 공작 ‘앙리’. 프랑스의 보수적 가톨릭 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때였습니다.
모후 카트린과 샤를 9세에게
가톨릭 세력의 수장 기즈공작 앙리(너무 많은 앙리)가 찾아왔지요.
 
“축하연에 빠져들었을 때,
위그노를 모두 쓸어버려야 합니다.
안 그럼 또 반란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긍정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이 프랑스에서 대학살이 일어난 배경이었습니다.

리옹 지역에서는 강에 위그노 시체들로 가득차 석 달동안 물을 마시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 위그노 확실히 죽은 거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현장을 살펴보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

 


개신교의 수장 격인 콜리니 제독은 그 목이 잘렸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를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을 정도입니다.
로마에서는 사흘 동안 파티가 열렸지요.
대학살을 기념하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프랑스가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다”면서요.
 
개신교도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지요.
죽거나 떠나거나.
 
신랑의 목숨을 구한 마르가리트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하세요, 우선 살고 봐야합니다.”
 

새 신부 마르가리트는 편집증적 가톨릭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새신랑을 죽게 놔두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요.

앙리 4세가 임시 방편으로 개종을 약속하고 일단 후일을 도모하도록 설득합니다.

샤를9세와 카트린으로서도 그를 죽이는 건 정치적으로 위험했기에,

일단 가두는 것으로 정리하지요.

갇힌 앙리4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준 것 역시 새신부 마르가리트였습니다.

 

 

 

“이 결혼식 뭔가 수상해.” 나바르의 왕 앙리 4세와 마르가리트.

 


죽음의 위기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실하진 않았습니다.
우선 종교적으로 양극단에 있었던 데다가,
 
두 사람 모두 ‘자유연애’를 매우 즐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가리트는 후대에 의해

‘색정광’으로 묘사될 정도로 뭇 남성과 성관계를 즐깁니다.

추문이 워낙 잦아 궁정에서 추방당할 정도였지요.

앙리4세 역시 결혼 직후 부터 궁정 귀족부인들을 꼬셔 자기 침대로 데리고 가곤 했습니다.

성병을 달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네 이 놈들, 이 사람은 프랑스 공주의 남편이다.” 학살의 현장에서 남편을 구하는 마르가리트를 묘사한 그림.

 


샤를9세의 죽음...정치적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
 
“샤를9세 폐하가 승하하셨도다.”

 

프랑스 정치적 환경이 다시 격변합니다.

왕 샤를 9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왕좌는 동생 앙리3세(프랑스엔 앙리가 너무 많습니다)에게 돌아갑니다.

정치적 혼란으로 감시가 느슨한 틈을 기회로

새신랑이자 나바르의 왕 앙리4세가 탈출에 성공했지요.

 

 

 

“프랑스가 언제 다시 평화로워질까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들. 19세기 영국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이다.

 


이제 곧 개신교와 가톨릭의 진검승부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가톨릭의 또 다른 수장인 기즈공작 앙리를 포함해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

프랑스의 새 왕 앙리3세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언제까지 종교분쟁을 좌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점점 부를 늘려가는 상황에서

종교적이면서 정치색을 띤 내전은 결국 제살 깎아먹기 처럼 느껴졌지요.

 

 

“칼뱅주의 개신교는 위대하다.” 쿠트라 전투에서 나바르의 왕 앙리4세의 승리로 개신교도들이 힘을 얻었다.

 

마침 1587년 개신교도를 이끈 나바르 앙리
프랑스 가톨릭 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개신교와 타협이 불가피한 정치적 순간.
이를 가로막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극단적인 가톨릭교도였던 기즈 공작 앙리였습니다.

 

평화의 방해꾼 기즈공작을 제거하라
“기즈 공작을 궁에 들라 하라.”

 

왕 앙리 3세가 꾀를 냈습니다.

기즈 공작을 입궁시킨 뒤,

와인과 고기, 여인을 대접하지요.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였습니다.

술에 취한 기즈 공작이 앙리3세를 알현했을 때,

맞이한 건 중무장한 경비병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살해당하지요.

왕 앙리가 신하 앙리를 죽인 셈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평화를 위해 암살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큰 권력은 언제나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기즈 공작, 진작에 왕명을 따랐어야지.” 앙리 3세가 죽은 기즈공작을 쳐다보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복수는 복수를 불렀습니다.
가톨릭 광신도들은 왕 앙리3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자크 클레망이라는 22살의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프랑스 왕을 암살합니다.
기즈공작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앙리3세 역시 아들이 없이 떠났습니다.
발루아 왕조의 종말이었습니다.

 

두 앙리의 죽음으로 프랑스는 깊은 시름에 빠집니다.

왕위 계승자는 ‘개신교도’ 나바르의 왕 앙리4세 뿐이어서였습니다.

프랑스 위그노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환영했습니다만

가톨릭은 반란을 꾀하고 있었지요.

프랑스의 정치적 환경은 그야말로 ‘시계 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왕 앙리3세는 왕실 혈통이 흐르는 나바르의 왕 앙리4세를 자신의 후계로 인정했다. 본인에게 자식도 없어서였다.

 

 


가톨릭 국가(프랑스)의 왕좌에 앉은 개신교 왕
 
“우리는 칼뱅주의 개신교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

 

앙리4세는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 역시 프랑스의 왕족 혈통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589년의 일입니다.

그 유명한 ‘부르봉’왕가의 시작이었습니다.

 

 

헤라클레스로 묘사된 앙리4세. 강력한 가톨릭 동맹을 무찌른 데 대한 찬사를 보내는 그림이다. 화가 투생 뒤브뢰이 그림.

 

 

프랑스는 점입가경으로 더욱 분열합니다.
교황 식스투스 5세부터 “그는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스페인은 가톨릭 연맹을 결성해 프랑스를 공격할 태세를 갖췄지요.
대관식도 차일피일 미뤄집니다.

 

위대한 선택은 가장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앙리4세가 신하들을 모아놓고 선언합니다.

 

“짐은 오늘 가톨릭으로 개종하노라.

이와 동시에 프랑스 내에 위그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다.”

 

그 유명한 ‘낭트 칙령’입니다.

왕이 종교를 카톨릭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개신교 위그노 교도들의 안전까지 보장하는 놀라운 정치력이었지요.

(그의 내연녀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조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Paris vaut bien une messe”(파리는 가톨릭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앙리 4세가 무릎을 꿇자, 프랑스가 다시 일어납니다.

 

 

 

“파리는 미사를 드릴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입니다. 저 앙리 4세는 오늘부터 가톨릭교도입니다.”

 

 

낭트 칙령 문서. 이 문서 하나로 프랑스에서 종교적 자유가 인정됐다.

 


부국의 길로 달려 나가는 프랑스
 
통합된 프랑스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국가 재정을 통합하고 다리와 운하를 건설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름 난 퐁네프 다리를 건설한 것도 앙리 4세였습니다.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건설도 속도가 붙습니다.

현재 캐나다 퀘백이 불어를 쓰는 것도 앙리4세의 지원 덕분이었지요.

그의 치세 하 왕정이 탄탄히 자리 잡은 덕분에

루이 14세와 같은 부르봉 절대왕정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학자들이 앙리4세를 Henri le Grand(앙리 대왕)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의 후손인 루이14세가 종교적 자유를 명시한 낭트칙령을 폐기하는 건 또 다른 아이러니지만요.

 

 

현대 프랑스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 앙리 대왕. 뒤쪽으로 파리 시내가 보인다.

 


‘새 신부’ 마르가리트는 어떻게 지냈을까요.
앙리4세와 마르가리트의 혼인은 무효가 됩니다.
마르가리트가 불임임이 밝혀지면서 교황청이 두 사람의 혼인무효를 승인합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쿨한 관계.

궁정에 머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요.

마르가리트가 자기 상속재산을 받을 사람으로 ‘루이13세’를 지명합니다.

루이13세는 앙리4세가 새 부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낳은 아이입니다.

전 남편의 아이에게 상속재산을 남긴 셈입니다.

두 사람 관계가 얼마나 남다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여왕 마고’의 한 장면. 마르가리트는 전 남편 앙리4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후로 프랑스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동화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610년, 또 다른 가톨릭 신자들이 광장에서 앙리 4세를 암살합니다.
프랑스는 그렇게 명군을 잃었지요.
 
광신자들 혹은 통치자에게 맹종하는 자들이
국가를 좀먹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지금 어떤 도그마에 빠진 것은 아닌지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프랑스 파리 도심에 앙리 4세가 암살된 장소에 새겨진 현판.

 


퐁네프 다리 위 앙리 4세의 동상.

 


[네줄요약]

ㅇ프랑스 앙리 4세는 ‘앙리 대왕’(Le Grand)으로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임금이다.

ㅇ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해결한 존재여서다.

ㅇ개신교도였던 그는 자신이 개종하는 대신, 개신교도들의 종교 자유를 보장(낭트 칙령)했다.

ㅇ그는 와이프인 마르가리트를 두고 수 없이 바람을 피워 성병을 달고 살기도 했다.

[참고문헌]

ㅇ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2016년

ㅇ김충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종교정책, 종교적 자유의 길을 만들다,인문예술학회,2023년

ㅇ박효근, 위그노 정체성의 역사적 변화 - 16세기 종교내전에서 18세기 이민공동체의 형성까지

 

 

 

 

이글은 아래 강영운 기자님이 쓴 기사의 글을 옮겨온 글이며

글 제목을 수정하고,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글을 요소요소 수정 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또한 가독성과 명확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구절에 색상처리와 문장을 분절, 행으로 분리했음도 밝힙니다.

매일신문의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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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사건 뭐길래, 대통령 격노설, 진실은 ?

 

 
 

 

 
실종자 수색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20살 해병대원 故 채○○ 상병.
 
 
국민 모두가 안타까워했었던 이 사건이
 
어쩌다 정치권 최대 이슈가 된 걸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한 방에 풀어드립니다.
 
함께 공부할까요?

 

 

 

 

 

▶‘채 상병 특검법’ 밀어붙이는 野 6당, 무슨 사건?

 

안녕하세요.

‘채 상병 사건’이 정국을 강타했습니다.

특검법안이 국회에서 통과가 됐습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다시 국회로 돌아올 거고
그러면 재의결로 통과시키겠다는 게 민주당 전략이죠.

 

 

야당이 다 모였습니다.

여기 보면,

조국 대표가 있고

이준석 대표가 있고요.

장혜영 정의당 의원,

박주민 민주당 의원 있고,

새로운미래 김종민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까지.

 

이러다 보니까 저희에게 질문 주셨어요.

채 상병 사건 팩트 정리 부탁드립니다.

너무 복잡하다 이거예요.

뭐가 문제인지. <동앵과 뉴스터디>는 팩트만 전해드리잖아요.

보십시오,

아주 난리입니다.

 

민주당 “특검법 거부하면 아주 큰일 날 걸?”
조국혁신당 “그러면 국민은 대통령을 거부할걸?”
진보당“거부하면 윤 대통령 탄핵의 문이 열릴 것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정권 내놔야 할 것이다”
새로운미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대통령을 특검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세게 나온 상황입니다.

 

국민의힘나 홀로 지금 막고 있죠.

“수사를 일단 해보고”

“공수처 수사가 진행 중이니까”

“그 이후에 특검을 해야 한다”.

 

그런데 또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채 상병 특검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체

이 사건 무엇이 논란이기에

이렇게 시끄러운 건지 지금부터 한 방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

 

 

 

▶폭우 쏟아진 작년 여름, 해병대에 무슨 일이?

작년 여름 기억나십니까?

아주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는데

경북 예천에도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집니다.

산사태 나고 도로 유실되고,

주택 붕괴되고 난리가 났습니다.

무려 15명이 사망하고 실종자가 9명, 2명은 끝내 찾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실종자를 수색하는 작업이 진행된 거죠.

거기에 해병대 1사단 신속기동부대가 투입이 됩니다

 

해병대 신속기동부대는 재난이 발생했을 때

24시간 내에 투입 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부대예요.

해병대 1사단이 경북 포항에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경북 예천으로 지원을 나간 거죠.

 

이것도 사실은 논란이 있죠.

이런 일, 재해가 발생했을 때마다

뭔가 국가에서는 빨리 인력 동원해서 실종자를 찾으라고 하는데

보통 동원되는 게 군 장병들입니다.

 

그런데 군 장병들이

그렇다고 전문적으로 수색 교육을 받거나 훈련을 받은 건 아니다 보니까

과연 손쉽게 동원하는 게 맞느냐 논란도 있습니다.

어쨌건 해병대 1사단이 투입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렇게 ‘인간 띠’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탐침봉을 들고 띠를 이루어서 가면서

실종자들을  찾는 작업을 진행한 거죠.

거기에 故 채 상병이 함께 참여한 겁니다.

 

채 상병은 해병대 1사단 제7포병대대 소속이었는데

여기에 투입이 돼서 갔어요.

사실 채 상병 이름 많이들 알고 계시죠?

그렇지만, ‘채○○’으로 한 것은

유족들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해서

이제는 ‘故 채 상병’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원래는 일병이었는데,

사망 후에 1계급 추서가 되면서 지금 ‘상병’으로 불리고 있죠.

 

여기가 어디냐면 경북 예천군의 내성천이라는 천이에요.

채 상병도 여기에 투입이 됐는데

내성천 22.9km를 이렇게 다니면서

실종자가 여기 어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색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7월 19일 오전 9시 10분경

이 내성천에 있는 보문교 주변 하천 지반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가 많이 내렸으니까

상당히 물이 불어난 상황에서 지반이 침하하면서

아주 그냥 빠른 속도로 급류가 휘몰아 내리치면서

탐색을 하던 이 장병들을 순식간에 휩쓸고 간 거죠.

 

그러면서

3명이 떠내려갔는데

채 상병 외에 다른 2명도 함께 휘말렸습니다.

2명은 본인이 직접 헤엄을 쳐서 빠져나왔고

채 상병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급류로 휘말려 갑니다.

 

그리고

14시간 만인 그날 오후 11시 8분경

떠내려간 지점에서부터 한 6.5km 떨어진 곳에서 사망한 채 발견이 됩니다.

 

그 다음 날

바로 윤석열 대통령은

故 채 일병에 대해 “국가유공자로 최대한 예우를 하라”고 하면서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하죠.

 

왜냐하면

당시에 왜 구명조끼를 입히지 않았느냐부터

여러 논란이 이미 발생을 했었거든요.

 

유족의 뜻에 따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이 됐고요.

보국훈장 광복장도 서훈이 됩니다.

 

 

대통령이 지시를 했죠.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라.

그 조사를 해병대수사단이 시작한 거죠.

해병대수사단이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할지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한 겁니다.

 

 

군 지휘 체계는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군 통수권자 누구죠?

당연히 대통령이죠.

그 밑에 국방부 장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합참의장이 있어요.

별 4개 대장입니다.

그리고 해군참모총장이 있고요.

왜냐하면 해병대에서 수색을 나갔기 때문에

그 부분을 조사하다 보니까 해병대 지휘 체계를 살펴보고 있는 거예요.

 

왜 살펴봐야 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해병대사령관 중장이 있고요.

해병대 1사단장인 임성근 소장,

7여단장 대령, 제7보병대대장

그리고 그 밑에 중대장부터 해서 쭉 현장 간부들이 있죠.

 

해병대수사단은요.

이렇게 보면, 여기 해병대사령관 직속으로 딱 떨어진 독립적인 이제 수사 기구입니다.

열흘 동안 조사를 합니다.

누가? 박정훈 대령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이 열흘 동안 조사한 결과는 이렇습니다.

어디까지?

여기까지는 책임을 물어야겠다.

그래서 임성근 사단장부터, 7여단장, 중대장, 현장간부, 대대장 2명, 중위, 상사까지요.

이하 8명에 대해서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을 해야겠다고 보고합니다.

 

 

과실치사라는 건,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잘못이 있었다는 거예요.

업무를 잘못 이행했다는 거죠.

(사망 사고) 책임이 있었다고 박정훈 수사단장이 보고를 합니다.

그 결과예요.

 

 

여기서부터 바로 이 논란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채 상병 사건’의 1차적인 핵심 논란여기서 벌어집니다.

박정훈 수사단장의 항명

임성근 1사단장의 과실치사 논란 이 논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채 상병 사건조사한 해병대수사단항명?

이제 본의 아니게 워낙 유명하신 분이 됐죠.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은 해병대에 들어와서

군사경찰 병과로 해서 쭉 이쪽 업무를 하다가

해병대수사단을 이끄는 수사단장이 됩니다.

2023년 7월 20일부터 대통령 지시에 따라서 조사를 시작했죠.

 

7월 28일, 결론을 내서 보고를 합니다.

누구에게?

아까 수사단 직속상관이 해병대사령관이라고 했죠?

김계환 사령관에게.

곧 공수처에서 수사를 받게 될 텐데

어쨌든 해병대사령관에게 보고를 합니다.

아까 보여드린 것처럼 임성근 사단장 이하 8명을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넘기겠다고요.

 

여기서 조금 설명을 드려야 되는데,

해병대수사단이 수사를 해서

그 결과로 바로 검찰 거쳐서 재판으로 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법이 개정이 되면서

군대 내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할 경우

군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경찰로 넘기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에서 은폐할 수 있다 내부 조사를 하게 되면.

그러다 보니까 제3기관인 경찰에서 사망 사건의 경우엔 무조건 수사를 해라,

그래서 해병대수사단이 조사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공식 수사는 경찰로 조사 내용 넘겨서 경찰이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단 이 구조를 아셔야 이걸 이해하실 수 있어요.

 

 

어쨌든 (수사단장_박정훈 대령이) 위에 보고를 한 겁니다.

8명에 대해서 과실치사 혐의로 넘기겠다.

김계환 사령관, 그때까지 아무 말 없습니다.

 

그리고 28일에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혀요.

그리고 이날 오후에

박정훈 수사단장은 채 상병 유가족들을 만납니다.

만나서 “조사 결과 8명에 대해서 과실치사 혐의로 이첩할 겁니다”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이렇게 8명이 뭔가 책임을 질 것처럼 알고 계셨던 거죠.

 

 

그리고 이틀 뒤인 7월 30일에

박정훈 대령은 직접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이 내용 그대로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이종섭 장관은 결재를 합니다.

이대로 진행하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장관 결재까지 났으니까

다음 날 바로 오후 2시 언론에 이런 내용을 브리핑을 하고

국회 국방위에 가서 이 내용을 보고하기로 약속을 잡아요.

그리고 나서 이제 소관 경찰청인 경북경찰청에 이 내용을 이첩해야겠다고 결정을 다 합니다.

언제?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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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직전,

여기서부터 이제 문제가 생긴 건데 (2시 발표) 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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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섭 국방장관

“보고 취소하라”

“경찰에 이첩 보류하라” 지시를 내립니다.

 

박정훈 대령은 이렇게 하루 만에 바뀐 이유

“대통령실 외압 때문이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죠.

 

이건 제가 내일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릴 건데

이종섭 장관은 그게 아니고

“결재 후에 여러 의견을 들어봤더니

이게 이렇게 다 경찰에 넘길 건이 아니더라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지시를 바꾼 것”이라고 얘기를 해요.

 

 

결과적으로

그런데 ‘보류하라’고 그랬잖아요.

넘기지 말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틀 뒤인 8월 2일 박정훈 대령이 넘기지 말라고 한 내용을 넘깁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경북경찰청으로 넘겨요.

그랬더니 그 사실을 알고 국방부 검찰단

넘기지 말라는데 넘겼다며 경찰로부터 다시 이 자료를 회수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바로 그다음 날

박정훈 수사단장에 대해서 “이건 항명이다” 넘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걸 마음대로 넘겼다,

이거는 군 지휘 체계를 무시한 항명이다.

그래서 그 혐의로 해병대수사단을 압수수색하고요.

해병대사령부 보직해임심의위원회

박정훈 수사단장을 “사령관 지시 사항 불이행한 중대한 기강 문란”이라며 보직해임 시키죠.

 

 

박정훈 대령은 이렇게 얘기를 해요.

내가 구두로 넘기지 말라는 지시는 받았지만 문서상 나는 이미 결재를 받았다.

근데 문서상으로 명확하게 수정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항명이 아니다라고요.

나는 결재를 받았고 보류하라는 구두 지시 받았지만

문서상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예정대로) 넘긴 거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박정훈 수사단장 항명 논란’인데

그러면 장관은 왜 이 8명을 넘기는 걸 보류하라고 했을까요?

 

 

 

 

▶‘8명→2명’ 줄어든 혐의자, 왜?

당시 박정훈 해병대수사단장은

8명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국방부 검찰단이 (이첩 자료) 회수했죠.

그러고 나서는 2023년 8월 21일에 8월 2일에 (이첩 자료) 회수했잖아요.

8월 21일에 다시 경찰에 이첩을 하는데

그때는 2명만,

여기 보시면 아까 박정훈 단장이 말한 8명 중에 여기 위에 4명 빼고,

밑에 중위‧상사 빼고 중간에 있는 대대장 2명만 과실치사 혐의로 경북경찰청에 이첩합니다.

 

그러면 왜 둘의 판단이 달랐을까요?

그것의 발단을 좀 알 수 있는,

아까 처음에 박정훈 수사단장이 8명을 경찰에 넘기겠다고 해서 이종섭 장관에게 보고했고,

결재 받았잖아요.

그 내용이 일부 언론에 공개가 됐는데

 

그러면 8월 21일에는 빠진 이 임성근 1사단장

왜 경찰에 과실치사 혐의로 이첩해야 한다고 그 당시에 판단했는지 볼게요.

 

 

첫 번째

‘호우피해 복구 작전의 주요 임무가 실종자 수색임을 알고도 출동 당일 뒤늦게 여단장에게 수색 임무를 전파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2023년 7월 15일 경북 예천에 비가 많이 왔잖아요.

7월 15일 경북 재난상황실에서 임성근 사단장에게 “실종자 수색해 달라”고 요청이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임성근 사단장은

그 내용을 자신의 밑인 박상현 7여단장에게 이틀이 지난 7월 17일에야 넘겨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 임무는 실종자 수색이다”라는 걸 이틀 지나서야 알려줬다는 거예요.

 

이게 왜 문제냐면

그러다 보니까 이틀 동안 제대로 준비를 못 하고 해병대원들이 현장에 나갔다는 거예요.

당시 현장에서는 실종자 수색이 업무가 아니라

그냥 수해 복구인 줄 알고 삽‧곡괭이 이런 걸 준비해서 나갔다,

이게 이제 해병대수사단(박정훈 대령)의 조사 결과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못해서

밑에서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못했다,

이런 것에 책임을 물은 거고요.

 

 

두 번째

‘외적 자세 등에 대해 지적만 하면 ‘구명조끼 이런 것과 안전로프 구비 등 안전대책에 대해서는

오히려 세부 지침을 하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잘해.

똑바로 해,

홍보 잘해 이런 것만 지시를 내렸지

수색 나간 장병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지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MBC 보도에 따르면

당시 부사관

“임성근 사단장이 화상회의에서 각 부대장들에게 복장을 통일해라. 빨간 체육복 착용 이런 걸 강조했다”고 말해요.

해병대의 옷이 빨간색이잖아요.

빨간색 체육복 입고 이렇게 수해 복구하고 실종자 수색하니까 되게 홍보가 잘된다.

보기 좋다.

이런 것들이 보도가 되니까 “적극적인 홍보 아주 좋다” 뭐 이런 얘기도 주변에 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포인트가 어떻게 하면 잘 홍보하고, 많이 알려질까 이런 것만 신경을 썼지

정작 안전에는 신경을 안 썼다.

사망 사고 책임임성근 사단장에게 있다,

이게 해병대수사단(박정훈 대령)의 결과입니다.

 

간부 얘기에 따르면

당시 “장화를 신고 물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해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원래는 물속으로 들어가라는 게 아니라 수변(물가)

그러니까 물 주변에 있는 곳을 수색하는데 거기는 질퍽질퍽 하잖아요.

그래서 장화를 신고 가잖아요.

근데 이제 물에 들어가야 할 때도 장화를 신어버리면

만약에 물에 빠졌을 경우, 장화 신고 헤엄치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군화를 신겨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이 7포병대대장 “지금 분위기 모르나? 복장 통일해”라고.

지금 빨간 옷에 장화 신는 복장인데 이걸 통일해야지 무슨 군화냐고.

이제 윗선의 눈치만 봤다는 보도들이 나오고 있어요.

 

2023년 7월 18일,

실제로 7여단장은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수변, 그러니까 물에 들어가지 말고 주변만 다녀라.

입수는 금지다.

그런데 혹시라도 의심지역 있으면 수색할 때 장화 높이까지만 들어가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거예요.

박상현 7여단장이 그랬더니,

포병대장이 그 지시를 듣지 않고 “우리는 내일 허리까지 들어간다”고.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탐침봉을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이 사진만 봐도 장화보다 조금 높은 수준까지 들어간 것 같네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허리까지 들어가라고 (7포병대대장이) 지시를 내렸다는 거죠.

 

해병대수사단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냐면

“사단장이 복장과 업무 브리핑만 챙기다 보니까 이 성과에 부담을 느껴서 무리하게 입수 지시했고 장화를 신지만 않았어도, 군화만 신었어도 물에 휩쓸렸을 때 스스로 빠져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단장이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국방부 판단은 여단장은 제대로 지시를 내렸잖느냐.

여기 보면 “장화 높이까지만 들어가라”

그런데 그 지침을 위반하고 허리 높이까지 입수 지시한 이 대대장은 범죄 혐의 인정되니까,

여기는 과실치사.

그 위에는 솔직히 직접적인 사망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혐의를 특정할 수 없다.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고 해서 대대장 2명만 넘기라고 지시를 한 겁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국회에 나와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잘못을 엄중히 처벌을 해야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범죄인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당시에는 죄 없는 사람으로 봤다는 거예요.

 

 

 

▶ ‘채 상병 사건’ 뒤 대통령실 외압 의혹?

 

결과적으로,

박정훈 수사단장과

임성근 1사단장은 둘 다 수사선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박정훈 전 수사단장은 국방부 검찰단에서

항명죄 및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청구했지만 기각되고,

대신 불구속으로 기소를 하면서

지금 현재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임성근 사단장도 공수처 수사를 받고 있는데요.

 

 

아까 국방부 조사단에서 경찰청에 이첩할 때 임성근 사단장 빼고 넘겼잖아요.

하지만 채 상병과 함께 급류에 휩쓸려 갔다가 살아 돌아온 동료 장병이

전역 바로 다음 날 임성근 사단장을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고소를 했고

이 때문에 공수처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원래 ‘채 상병 사건’ 핵심 논란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 정국을 강타하는 정치권 이슈로 떠오른 건

바로 이 이유 때문이죠.

 

2023년 7월 30일,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박정훈 수사단장이 “8명 넘겨야 한다” 보고를 했고

이종섭 장관도 결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

7월 31일, 갑자기 이종섭 장관이

“넘기지 마, 브리핑도 취소해” 보류를 지시했고,

8월 2일 박정훈 수사단장은 이 8명을 경찰에 넘겼고.

그랬더니 바로 국방부 검찰단이 다시 경찰청으로부터 이걸 회수하는데

이 과정 뒤에 누가 있다는 의혹이 벌어진 거예요.

 

즉, 대통령실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겁니다.

 

 

 

 

 

구성: 동정민 기자·김정연 작가
연출: 황진선PD
편집: 허수연‧박현아PD

동정민 기자 ditto@ichannela.com

Copyright © 채널A.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아래 동영상은 여기까지 공부하며 읽어 온 전부에 대해서

알기쉽게 차근차근 영상과 함께 설명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출처 : https://scrap.kakaocdn.net/dn/gZ8Yq/hyV2srmH0i/9fEa1NJy0uHw4AAxjRyUTk/img.jpg?width=1280&height=720&face=106_162_258_532

 

 

 

 

 

*****

그야말로 콩가루집안 같은 군체제 조직의 엉성한 단면을 그대로 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하고 불행한 이슈만 양산하는 국군통수권자(대통령)도 개입 되어있다는

의혹입니다.

정황으로 보아 의혹은 의혹이 아니라 '사실'로 밖에 안보입니다.

하물려 이럴진대 진짜 전쟁같은 긴급 유사가 발생한 다면, 이처럼 어정쩡 시스템 체제가

국가방위에 제대로 대응이나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글은 위 '채널 A'의 동정민 기자가 게시한 인터넷 기사를 채록· 옮겨온 것입니다.

장문인데다가 빡빡한 글이 난독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읽고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과 이해를 조금은 쉽게 하기 위하여

문장을 주부와 술부로 가급적 분절해 행을 바꾸었으며,

어색한 문장은 쉽게 수정했고,

그로 인하여, 첨언, 삭제, 어휘 교체 등의 편집을 했음을 밝힙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한 나라의 수장(대통령)으로 인하여 큰 불행과 어마어마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그들이 옳게 나라를 다스리고 국민의 행복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하게끔

충언과 째찍을 날려야 할것이라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치자들의 옳지 못한 행위와 현상 들로 인하여

나라가 뒤흔들리고 있는 큰 이슈만큼은 너도나도 관심을 갖고 통렬히 지켜봐야 하리라고 봅니다.

 

*****  SinEun

 

 

 

 

 

 

 

 

 

이 포스팅 말미 아래에 추가한 채상병 관련 글은

위 글 포스팅 후 한달 10여일 지난 오늘자(2024. 06. 17) 대외에 발표된 기사글입니다.

 

대통령의 수사에 대한 외압 정황과 참모들과의 모의적 연결고리가 구체적이고 명확해 보입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국민에게 말 못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책임의식이 쥐꼬리만큼도 없는 권력의 수뇌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뻔뻔함과 두터운 가식으로 치장한 채 번지르르한 모습에는 정말 치가 떨립니다.

 

제발 ! 스치듯 지나치다가라도 한 번 쯤은 세밀하게 눈 부릅뜨고 진실을 가슴에 담기 위해서

하릴없이 그저 소설책이라도 읽듯이 살펴봤으면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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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채워지는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 연결고리

이은기·주하은 기자 2024. 6. 17. 06:31

지난해 9월12일 국무회의에 함께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오른쪽).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 회수’ 전후로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수차례 전화를 건 사실이 확인됐다.
박정훈 대령 측은 ‘수사 외압’이 이 통화에서 비롯된 거라고 의심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채 상병 사건’ 주요 국면마다 직접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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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기록을 이첩한 지난해 8월2일에는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세 차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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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순직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은

현재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재판과 관련해 6월3일까지

중앙지역군사법원에 제출된 통신사실조회 회신 결과(이종섭 전 장관 통화 기록)에 따르면,

 

이종섭 전 장관은

지난해 7월31일부터 8월9일까지

대통령실·정부 고위 관계자, 국민의힘 의원과 광범위하게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아래 그림〉 참조).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한 대통령실·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결과 회수’ 전후로 이종섭 전 장관에게 수차례 전화를 건 사실이 확인되면서,

박정훈 대령 측이 주장했던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연결고리가 채워지고 있다.

 

박 대령 측은

경찰 이첩 보류·과실치사 혐의자 제외 지시(7월31일)와

국방부 검찰단의 조사기록 회수 조치(8월2일),

이 전 장관의 국방부 조사본부 이관 지시(8월9일) 등이

윤석열 대통령의 통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함과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채 상병 사건에 대한 대통령실 관여 정황은

지난해 7월31일부터 두드러진다.

이날 오전 11시께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안보실 회의가 열렸다.

박정훈 대령은 이때 윤석열 대통령이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격노한 뒤부터 수사 외압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국가안보실 회의가 끝날 즈음인 같은 날 오전 11시54분,

이 전 장관은 대통령실이 사용하는 ‘02-800-’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아 2분48초 동안 통화했다.

이 통화 직후인 오전 11시57분 이 전 장관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게 채 상병 순직사건 경찰 이첩을 보류하고,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된 언론 브리핑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오후 2시20분께 이종섭 전 장관은

정종범 당시 해병대 부사령관을 국방부 집무실로 불렀다.

그때 정 전 부사령관이 기록한 장관 지시사항에는

“누구누구 수사 언급하면 안 됨”

“사람에 대해서 조치·혐의는 안 됨”

“경찰이 필요한 수사자료만 주면 됨”

“법무관리관이 수사단장(박정훈)에게 전화 검토” 등의 내용이 담겼다.

회의를 마치고 우즈베키스탄 출장을 가기 위해 이동하던 오후 2시56분,

이 전 장관은 임기훈 당시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의 전화를 받았다.

11분15초간 통화가 이어졌다.

이날 임 전 국방비서관은 김계환 사령관과도 두 차례 통화했다.

7월31일 정종범 당시 해병대 부사령관이 기록한 장관 지시 사항을 토대로 만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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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수사단(박정훈 대령)은

예정대로 지난해 8월2일 오전 10시30분쯤,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한 8명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시해

채 상병 순직사건을 경북경찰청으로 이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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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 축소와 왜곡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박정훈 대령은 법에 따라

빨리 “경찰에 이첩하는 것만이 정직한 해병대를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이첩을 마칠 무렵인 이날 오전 11시45분께 조태용 당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이종섭 전 장관에게 문자를 보냈다.

4분 후인 오전 11시49분부터 2분40초 동안 두 사람의 통화가 이뤄졌다.

김계환 사령관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조사기록 이첩을 마친 직후

오후 12시4분, 이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3분간 통화했음이 확인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여름휴가 첫날 한 일?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본격 등장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 휴가 첫날인 8월2일 오후 12시7분부터

자신이 검사 시절부터 사용하던 번호로

이종섭 전 장관에게 세 차례 전화를 걸었다.

발신 기지국은 대통령 관저가 있는 한남동이었다.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은

오후 12시 7분부터 12시11분까지 약   4분 동안,

오후 12시43분부터 12시56분까지 약 13분 동안,

오후 12시57분부터 12시58분까지 1분간 세차례 통화했다.

 

박정훈 대령은 이날 오후 12시45분께

김계환 사령관으로 부터 “현 시간부로 보직해임이다.

앞으로 많이 힘들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2023년 8월27일 군검찰 제출 진술서).

이 전 장관이 윤 대통령과 첫 통화를 마치고 30여 분이 지난 시점이다.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이첩한 사건도 당일 회수됐다.

같은 날 오후 1시50분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경북경찰청에 회수 의사를 밝혔고,

오후 7시20분 국방부 검찰단이 조사기록 일체를 되찾아갔다.

 

 

엿새 후

이종섭 전 장관의 통화 내역에

윤석열 대통령 번호가 한 차례 더 등장했다.

이 전 장관이 경북경찰청에서 회수한 사건을 국방부 조사본부로 이관하기로 결정하기 하루 전인

지난해 8월8일 아침 7시55분,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이 33초가량 통화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다음 날인 8월9일부터 사건 재검토를 시작해

8월24일 경북경찰청에 사건을 다시 넘겼다.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와 달리

국방부 조사본부 재검토 결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대상자는 8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혐의 대상자에서 임성근 전 사단장은 제외됐다.

이종섭 전 장관의 변호인 김재훈 변호사

“국방부 장관이 안보 위협, 외교 현안, 잼버리 파행 해결 등과 관련해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들과 수시로 소통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통화 여부나 통화 내용에 대해선 밝힐 수 없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이 전 장관 사이 통화에서 채 상병 순직사건 관련 언급은 없었다고 밝혔다.

 

 

6월4일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종섭 전 장관은

지난해 7월31일부터 8월9일까지

신원식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와도

13차례 통화를 나눴다(7월28일부터 7월30일 사이에도 전화 세 번, 문자 다섯 번이 오갔다).

 

두 사람 사이 통화는

해병대 수사단 압수수색 다음 날인 지난해 8월4일(5회)과 8월7일(5회)에 집중됐다.

이 통화 기록은

8월21일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신 전 의원이 아래 한 말과 정면배치(모순)된다.

 

당시 신 전 의원은 이 전 장관에게

“장관의 판단이나 엄정한 수사에 혹시라도 여당 간사가 전화하는 것이,

아는 척하는 것이 방해될까 봐 안 했다.

한 번도 전화를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관련해 국방부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장관이 당시 국방위 여당 간사로서 다양한 국방 현안에 대해 평소처럼 통화했다.

채 상병 관련 사안은 통화한 바 없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신 전 의원은 이 전 장관에 이어 윤석열 정부 두 번째 국방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

 

 

이은기·주하은 기자 yieun@sisain.co.kr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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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전방위 전화, 채 상병 사건 흐름 바꿨나

문상현 기자 2024. 7. 2. 06:27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흐름과
최근 공개된 통화 기록을 맞춰보면
일종의 패턴이 발견된다.
윤 대통령이 움직이면 용산이 일사불란하게 따랐다.
그때마다 결정적 장면이 나왔다.

 

6월21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가 열렸다. 앞서 공개된 통신 기록 속 전화통화 내용을 설명한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과 유재은 법무관리관(앞줄 가운데)의 증언이 주목받았다. ⓒ시사IN 신선영

 

 

 

채 상병 순직사건 수사 외압 의혹이 불거진 직후(2023년 8월)

대통령실과 국방부 관계자들은 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이들의 말과 주장을 간추리면,

이 수사 외압 의혹의 불씨라고 의심받은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는 없었다.

대통령실도 관여하지 않았다.

외압 의혹은

상관의 명령을 어긴 군 간부(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대령)의 거짓말로 시작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 닭 잡아먹고 오리밤 내미는 형국의 기가막힌 주장

 

 

1년여 뒤인 2024년 6월,

법원(박정훈 대령 항명 사건 재판)을 통해

외부에 공개된 이들의 통신 기록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통화도, 대통령 보고도 없었다던 이들의 주장과 달리

통신 기록에는 전화통화와 문자를 수십 차례 주고받은 사실이 관찰된다.

 

단순히 통화를 했거나 그 횟수가 많았기 때문에 ‘수사 외압 의혹’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사건 흐름과 통화 기록을 맞춰보면,

이들의 통화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날이면 어김없이 채 상병 순직사건의 주요 국면이 크게 뒤바뀌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윤석열 대통령이 있었다.

 

 

2023년 7월19일 발생한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를 마친 박정훈 대령은

그 사고 책임자로 당시 해병대 지휘부 8명을 지목했다.

 

2023년 7월28~30일,

박 대령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에게

이들 8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하겠다고 보고한 뒤 결재를 받았다.

7월31일 국회에 채 상병 사망 경위를 보고하고,

조사 결과 발표 뒤 경찰에 사건을 이첩해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박 대령은 ‘집단 항명 수괴’ 혐의로 국방부 검찰단에 입건됐다.

국방부 검찰단은

채 상병 사건을 조사한 해병대 수사단 관계자들이

모두 상관의 명령을 어겼다고(항명) 판단했고, 그 우두머리(수괴)로 박정훈 대령을 지목했다.

 

경찰에

채 상병 사건 조사 결과를 이미 장관 결재까지 나서 이첩이 완료된 것에 대해

후에 장관이 구두로 다른 참모들을 통해 보류하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게

박정훈 대령과 해병대 수사단이 받는 혐의의 골자였다.

 

박 대령은 군검찰 수사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7월31일) 김계환 사령관이 ‘VIP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후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정말 VIP 맞습니까?’라고 묻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2023년 8월28일 진술서)."

 

국방부 장관과 해병대 사령관에게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 보고를 마친 박 대령이 경찰에 이첩하려고 하자,

김 사령관이 ‘VIP 격노’를 언급하며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는 취지다.

 

박정훈 대령이 주장한 ‘VIP 격노’는 ‘전언의 전언’이다.

그의 군검찰 진술서에 따르면 VIP 격노는 김계환 사령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이고,

김계환 사령관 역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에게 들은 이야기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다.

대통령실과 국방부 관계자들이 이를 근거로 박 대령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그러나 박정훈 대령이

‘VIP 격노’에 대해 들은 날인 2023년 7월31일,

대통령실과 군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통신 기록과 당시 수사 외압 사건 흐름을 연결하면,

그가 들은 전언에 확연한 힘이 실린다.

 

〈시사IN〉이 확보한 통신 기록을 보면,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은 7월31일 오전 11시54분 ‘02-800’으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았다.

이 번호는 일반 전화라 사용자는 특정되지 않았지만, 대통령실 내선 전화로 알려졌다.

 

 

 

정식 절차 없이 회수된 사건기록

임성근 해병대 전 1사단장(오른쪽)이 6월21일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에서 질의에 답하고 있다. 이날 임 전 1사단장은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왼쪽은 박정훈 대령. ⓒ시사IN 박미소

 

 

이종섭 전 장관은

이 통화 직후

김계환 사령관에게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 이첩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는 박진희 전 국방부 장관 군사보좌관을 통해 이뤄졌는데,

이날 박진희 전 군사보좌관과

김계환 사령관 사이 통화 내역이 확인된다(오전 11시57분).

같은 날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박정훈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이첩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박 대령은 “유 법무관리관과 통화하면서 ‘외압’이라고 느껴졌다”라고 주장한다.

 

 

〈시사IN〉 취재에 따르면

 

수사 외압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해병대 고위 간부들로부터

“김계환 사령관에게 ‘VIP가 격노했다’는 말을 들었다”라는 진술과

이를 뒷받침할 녹취를 확보했다.

 

해병대에 퍼진 ‘VIP 격노설’은

이종섭 전 장관 또는 임기훈 전 대통령실 국방비서관에서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종섭 전 장관의 이첩 보류 지시

박진희 전 군사보좌관 휴대전화로 전달됐다.

 

박 전 군사보좌관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이날 수차례 전화통화를 한 사실이 통신 기록으로 확인된다.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은

7월31일 이종섭 전 장관, 김 사령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임 전 비서관은 이날 오전, 윤 대통령이 ‘격노’한 것으로 알려진 회의에 참석했다.

 

통신 기록으로 확인되는 주요 국면은 2023년 8월2일이다.

박정훈 대령은

이날 오전 이종섭 전 장관의 지시를 어기고 경찰에 사건을 인계했다.

같은 날 저녁,

국방부는 경찰로부터 사건기록을 다시 회수해 왔다.

이후 박 대령은 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됐다.

 

압수수색 영장 등 정식 절차도, 전례도 없이

사건기록이 회수된 것은 이번 수사 외압 의혹한 축이다.

 

8월2일 군 수뇌부와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통신 기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등장한다.

박정훈 대령이 경찰에 사건기록을 넘긴 시점은 이날 오전 11시.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정오(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이종섭 전 장관과 통화했다.

오후 1시25분에는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과 통화했다.

임 전 비서관은 윤 대통령과 통화 이후

이시원 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등과 여러 차례 전화를 주고받았다.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과 통화한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8월2일 오후 1시51분 경북경찰청 수사부장과 통화했다.

이날 저녁(7시20분께) 국방부 검찰단은 경찰에서 사건기록을 회수해 왔다.

하루종일 수차례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은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 이시원 전 공직기강비서관, 유재은 법무관리관

국방부 검찰단의 사건기록 회수를 기점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통신 기록 속

윤석열 대통령의 전화번호는

2023년 8월8일에도 확인된다.

국방부 조사본부의 채 상병 순직사건 재검토 착수 전날이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재검토 이후

해병대 수사본부의 최초 조사 결과와 달리

혐의자를 원래 8명이었는데 두 명만을 특정하는 것으로 바꿔 경찰에 사건을 이첩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8일 오전 7시55분 이종섭 전 장관과 통화했다.

 

이후 임기훈 전 대통령실 국방비서관은

이시원 전 공직기강비서관 및 박진희 전 국방부 군사보좌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이들은 8월2일 이후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가 이날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

 

 

임기훈 전 대통령실 국방비서관(오른쪽)과 박진희 전 국방부 장관 군사보좌관이 6월21일 오전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가 열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통신 기록을 보면,

수사 외압 의혹의 주요 장면(사건기록 회수, 국방부 조사본부 재검토 등)에서

항상 윤석열 대통령의 전화번호가 등장한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나 전화가 뜨면,

이후 군 수뇌부와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집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직후 채 상병 순직사건과 관련한 흐름이 크게 변화했다.

 

대통령실 관계자와 국방부 수뇌부의 관여 여부를 넘어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다만 통화 기록은 ‘정황 증거’다.

각 전화통화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그 내용이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사 외압 의혹의 흐름과 통신 기록은 ‘의심의 끈’으로 연결될 뿐이다.

 

실제 연락을 주고받은 당사자들은

당시 전화통화가

“당시 현안(이종섭 전 장관의 우즈베키스탄 출장, 잼버리 등) 관련 통화였다”

“수사 외압 의혹과는 관련 없는 업무 전화였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6월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채 상병 특검법 입법 청문회에서 통신 기록 내용과 관련한 증언이 나왔다.

대통령 또는 대통령실 개입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드는 말이었다.

2023년 8월2일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한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은,

통화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당시 해병대 수사단이 경북경찰청에 이첩한 채 상병 사망사건 변사사건 기록을 회수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건기록 회수와 관련한 내용으로 국방부 차관과 직접 통화를 했다는 뜻이다.

 

 

 

 

대통령실의 ‘임성근 전 1사단장 구하기’

유재은 법무관리관 대통령실 관여 정황을 증언했다.

그는 청문회에서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이 ‘경북경찰청에서 저에게 전화 올 것’이라고 말해줬다”라고 말했다.

 

실제 2023년 8월2일 임 전 비서관은

오후 1시42분 유 법무관리관과 통화했고,

그 직후 유 법무관리관은 경북경찰청 관계자와 전화를 했다.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청문회에서

“경북청과 통화 내용은 사건기록 회수와 관련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임 전 비서관도 유 법무관리관과 통화하기 직전인 오후 1시25분에

윤 대통령과 통화했다.

 

〈시사IN〉 취재에 따르면

 

경북경찰청 관계자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 관계자를 통해

‘유재은 법무관리관으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당시 국수본 관계자는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 소속 전 행정관과 통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범철 전 차관과 유재은 법무관리관의 증언은,

통신 기록으로 확인되는 대통령실 개입 정황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측면이 있다.

특히 신 전 차관의 증언은

대통령실뿐만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직접 개입 정황으로도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직접’ 기록 회수를 지시했거나

적어도 사전에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왼쪽)이시원 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이 ‘채상병 특검법’을 위한 입법청문회에 참석해 있다. ⓒ시사IN 신선영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은

대통령실의 ‘임성근 해병대 전 1사단장 구하기’라는 측면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

 

 

앞서의 모든 과정이

임 전 1사단장 구명을 위해 이뤄졌다는 의혹이다.

특히 특정 루트를 통해 대통령실로 ‘임 전 1사단장 구명 민원’이 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심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JTBC는 6월25일,

지난해 5월 해병대 1사단 골프 모임 추진 계획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를 입수해 보도했다.

 

JTBC 보도에 따르면

이 대화방에서 임성근 전 1사단장과의 골프 모임 등을 계획하는 대화가 오갔다.

대화방에는 해병대 출신인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 이 아무개씨

전직 청와대 경호처 직원 A씨, 현직 경찰 B씨, 변호사 C씨 등이 있었다.

 

모임을 주도한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 이 아무개씨는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조작 사건컨트롤타워로 지목된 인물이다.

법원은 이씨에 대해

“김 여사와 가족 계좌를 직접 관리하며 시세조종에 깊이 관여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앞서 임성근 전 1사단장은

6월21일 국회 청문회에서

“이 아무개씨를 아느냐”라는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모른다”라고 답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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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권' 37일 만에

7월 5일 제 22대 국회에서 보안 수정된 '채상병 특검법'이  다시 통과되어 대통령 재가에 들어갑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손원제 기자 2024. 7. 5. 20:35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안녕하세요. 논썰의 손원제입니다.

최근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한 전화번호가 하나 있죠.

바로 02-800-7070번입니다.

용산 대통령실 유선 번호라는 것만 확인됐을 뿐,

어느 사무실에서 누가 쓰는 전화인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게 뭐라고 대통령 비서실장도

“대통령실의 전화번호 일체는 기밀 보안사항입니다. 지금 이 회의를 실시간으로 북한에서도 시청하고 있을 것입니다.”(정진석 비서실장, 1일 국회 운영위)

국가안보실 1차장도

“누가 어떻게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제가 모르는 얘기지만…”(김태효 1차장, 1일 국회 운영위)

대통령실 총무비서관도

“그거는 국가안보와 대통령실의 보안 관리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에 그거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윤재순 총무비서관, 1일 국회 운영위)

 

누구 전화인지 말할 수 없다.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그러나 대통령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 할수록

국민의 의혹은 더욱 커질 뿐입니다.

아니, 이미 국민 대다수는 그간 드러난 몇가지 사실을 반추하며

이 번호가 누구의 어떤 번호인지에 대한 대략적 추정과 판단을 내리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대통령실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겠다고 저러고 있지만, 통하지 않을 겁니다.

 

이 번호 전체가 처음 공개된 건

지난 6월21일, 국회 법사위의 채 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가 열린 날이었죠.

 

박지원 “이종섭 장관.”

이종섭 “예.”

박지원 “800-7070 전화를 누구한테서 받았어요?”

이종섭 “그…. 어떤 내용의 전화냐, 누구와의 전화냐 이것은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지원 “이건 또 밝히는게 적절하지 않다? 이시원 비서관한테 받은 거 아니에요?”

이종섭 “어…. 제가 뭐 그 대상, 그 다음 내용은 밝히기가 적절하지 않지만.”

박지원 “국방비서관한테 받은 것 아니에요?”

이종섭 “이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지침이나 이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문답)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어떻습니까.

이 번호로 걸어온 전화를 받은 당사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도

누가 걸었는지에 대해선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전화를 건 대통령실과 전화를 받은 국방부가 모두 철통 방어에 나선 모양새입니다.

 

 

 

이종섭, 대통령실과 통화 후  14초만에 외압 지시

800-7070 번호가

이 전 장관 휴대폰에 뜬 건

아시다시피 지난해 7월31일이었죠.

 

대통령실에서 열린

안보 분야 수석·보좌관 회의가 끝난 직후인

오전 11시54분이었습니다.

 

이 전 장관은 168초간 이어진 이 통화를 마치고,

곧바로 14초 만에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게 참모 휴대폰으로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해병대 수사단의 채 상병 순직 관련 수사 결과 언론브리핑을 취소하라’지시합니다.

자신이 바로 전날 “수사가 잘 됐다”며 결재한 내용을 뒤집은 겁니다.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의 시발점인

이 통화의 존재를 최초로 제기한 건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입니다.

박 전 단장은 ‘사단장 혐의를 빼라’는 부당한 외압을 거부하고

법 규정대로 조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했다가 항명죄로 되레 기소 당하게  됩니다.

그가 군 검찰에 낸 진술서에 김계환 사령관으로부터 들은 이 통화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수사단장 “도대체 국방부에서 왜 그러는 것입니까?”

해병대 사령관 “(오늘) 오전 대통령실에서 VIP(대통령) 주재 회의 도중
1사단 수사결과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VIP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후 이렇게 되었다.”


수사단장 “정말 VIP가 맞습니까?”

해병대 사령관 “맞다.”(고개를 끄덕이며)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대통령실 회의에서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격노한 윤 대통령이 이 전 장관을 연결하라고 한 뒤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하느냐’며

질책했다는 ‘VIP 격노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이후

대통령실국방부 모두 대통령 격노도,

통화도 없었다며 극력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공수처 수사를 통해

대통령실 내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온 뒤

이 전 장관의 외압성 개입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어 국회 입법청문회에서 전체 번호가 특정됐고,

운영위에서 누가 어디서 건 전화인지를 규명하려는 질의가 쏟아진 것입니다.

 

 

 

 

대통령 부부 집무실 또는 부속실 전화 가능성 커져

대통령실이 운영위에서 계속 철벽을 쳤지만,

결과적으로 이 번호로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범위는 크게 좁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실 조직크게 비서실국가안보실, 정책실, 부속실, 경호처 등으로 구분됩니다.

이 가운데 정책실과 경호처는 채 상병 수사와 직접 관련성이 없습니다.

남은 건 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부속실입니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 부부의 집무실에도 유선 전화가 설치돼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안보실과 비서실은

운영위에서 800-7070 번호는 자신들의 번호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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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안보실장님 계시죠? 800에 7070이 안보실장 번호라는데 맞습니까?”

장호진 “제 번호 아닙니다.”

고민정 “그러면 안보실 보좌관실 번호입니까?”

장호진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 저희는 4자로 시작하는데요.”

고민정 “그러면 비서실장님께 여쭐까요? 비서실장님 800의 7070 번호이십니까?”

정진석 “처음 듣습니다.”

고민정 “비서실장님 번호도 아니고 안보실장님 번호도 아니고 그러면 대통령인가요?”

정진석 “대통령실의 전화번호는 기밀상 외부로 유출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고민정 민주당 의원, 1일 국회 운영위)

 

 

어떻습니까.

비서실장도 안보실장도 안쓰는 번호라면,

남는 건 윤 대통령 부부 집무실이거나

대통령 부부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부속실 밖에 없습니다.

여기로 치고 올라가자, 보안을 이유로 확인을 거절한 겁니다.

고 의원은 대통령실이 이미

증거인멸 차원에서 7070 번호 회선을 재배치했을 가능성도 제기했죠.

 

고민정 “올 초에 회선이 재배치됐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만약에 재배치한 게 확인이 되면 이건 증거 인멸입니다.”

윤재순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민정 “아, 회선 재배치가 확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증거인멸에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쓰던 핸드폰을 중요한 시기에 교체를 할 경우에 증거인멸에 (해당합니다).”

윤재순 “대통령 비서실은 수시로 인원이 늘어나고
사무실이 늘어났다 줄었다 합니다.
그때마다 전화기가 설치가 되기도 하고 철거하기도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무슨 증거인멸이라고 하시면 그건 동의할 수 없다,
그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고민정 “사람 바뀐다고 전화 바꾸지 않습니다.
사건이 있어야 번호가 재배치되는 거 아닙니까?”

윤재순 ”그건 의원님 생각이시고요.”

 

 

집무실 번호 재배치 했다면 증거인멸 가능성

뭔가 번호에 재배치가 있었음을 자인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답변입니다.

그런데 윤 총무비서관 답변의 진위를 따져보려면,

7070 번호가 애초 누가 쓰던 번호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부처나 기업에서 전화번호가 재배치되는 경우가 잦지는 않죠.

다만 만약 통상적 업무를 하는 일반 직원이 쓰던 번호였다면,

직제 개편 등으로 재배치됐다고 볼 여지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집무실이나 부속실장 등 주요 부서장에 배속된 번호였다면 사정이 다릅니다.

대통령이나 핵심 측근이 쓰는 번호를

갑자기 다른 사람이 쓰도록 재배치하는 일은 상식적으로 벌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뉴스진행자 “800에 7070 이게 만약에 대통령의 번호였다면,
이건 가설입니다,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쓰는 번호였다,
대통령이 직접 쓰는 번호를 여러가지 라인 배치하면서 확확 바꾸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죠.
혹시라도 대통령이 일반적으로 쓰는 번호였는데
그 이후에 바꿨다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 되고 법적으로 논란이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증거 인멸을 둘러싸고…”(1일 MBC ‘권순표의 뉴스하이킥’)

 

 

이처럼

대통령실이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확인하길 거부하면서,

오히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전화번호의 주인이 윤 대통령 본인이거나

가장 가까운 인물일 가능성은 더욱 짙어졌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그러면 저희가 궁금한 것이
이렇게 끝까지 못 알려주겠다라는 거는 한 두 가지 정도 가능성 아니냐.
첫번째는 대통령 본인 내지는
대통령이 관장하는 부속실 같은 대통령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인물의 번호거나.
(…) 아니라면 혹시 김건희 여사나
김건희 여사의 지휘를 받는 인물이 사용하는 번호는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결사적으로 절대 못알려주겠다,
여야에서 합의하는 한명씩만 보자 그래도 못 보여주겠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 2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저 개인적으로는 전화가 설치된 장소가

윤 대통령 집무실일지,

부속실일지,

아니면 김건희 여사가 쓰는 5층의 소집무실일지는 앞으로 밝혀야 될 문제지만,

실제 그 번호로 이 전 장관과 통화한 당사자는 윤 대통령 본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첫째,

애초 해병대 사령관이

박 전 단장에게 전했다는 ‘격노설’의 당사자가 윤 대통령입니다.

사건 초기 의도적 왜곡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적은 시점에서 전달된 정황인만큼

당시 상황을 가장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국방부 장관이 통화 뒤 곧바로 지시 이행에 나선 점에 비춰봐도,

국방부 장관보다 상급자의 질책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통령실에서 국방부 장관보다 상급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부속실장이 대통령의 말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전 장관도 다른 경로를 통해 상황을 확인해보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 전 장관은 14초 만에,

사실상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해병대 사령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비공식 라인을 통해 내려온 지시일 경우에도 그렇게 즉각 움직일 가능성은

대통령 전화일 때가 아니었을 경우 그 가능성은 더 낮다고 봐야 할 겁니다.

대통령실도

대통령 통화 여부는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서도,

대통령이 직접 실무자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잦다며

은연중 밑자락을 까는 모양새입니다.

 

“누가 어떻게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제가 모르는 얘기지만,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궁금한 게 생기면
어떤 실무자에게 수시로 전화를 하시는데…”(김태효 1차장, 1일 국회 운영위)

 

 

어떻습니까.

설사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어도

통상적인 일일 수 있다는 인상을 심으려는 것 같다는 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이런 점들 때문에

윤 대통령 자신이 직접 이 전 장관에게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커보인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대통령실 “수사 보고 안해”, 그러면 누가? 의혹 자초

 

만약 대통령이 직접 통화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대통령은 왜 이런 전화를 걸게 된 걸까요.

그날 회의에서 채 상병 수사 관련 보고는 없었다고 대통령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사단장 혐의를 적시한 해병대 수사단 조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별도의 통로가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궁금한 게 생기면
어떤 실무자에게 수시로 전화를 하시는데,
그 전에 이뤄진 안보실 보고에서 이 사건이 보고되지는 않았습니다.”(김태효 1차장, 1일 국회 운영위)

 

 

채 상병 순직 수사 결과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는 겁니다.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면,

대통령이 공식 보고 아닌 별도 경로로 수사 결과에 대해 알게 된 건 아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야권 일각에선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주범 중 한명인 이아무개씨를 고리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김 여사 쪽에 구명 로비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수사 외압 시발점’ 168초 통화와 ‘김건희 로비’ 의혹의 재구성 [논썰] 한겨레TV

 

 

박균택 “민간인 이OO 모릅니까?”

임성근 “민간인 이OO 모릅니다.”

박균택 “해병대 출신이고, 본인하고 골프 모임 자주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릅니까?”

임성근 “한 번도 골프 친적도 없고 전혀 저 인원은 모릅니다.”

(박균택 민주당 의원,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과 문답. 6월21일 법사위 입법청문회)

 

 

그러나

이후 이씨가 속한 해병대 출신 모임 카톡방에

임 사단장과 골프 약속을 논의하는 메시지가 올라온 사실이 드러나는 등 의혹이 증폭됐습니다.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통령실의 대응이

오히려 김 여사 로비설까지 촉발하며 국민적 의혹을 더 키우고 있는 셈입니다.

 

대통령실이 기초적 사실관계 확인조차 거부하며

대통령 방탄에 열을 올리는 상황은

진실 규명을 위한 특검 수사의 필요성을 한층 더 일깨웁니다.

공수처가 일부 수사 성과를 내고 있지만,

이미 조직 역량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전 장관과 대통령실로 치고 올라가지 못한 채

해병대 사령관이 박 전 단장에게 격노설을 전한 게 사실이냐 아니냐 수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김건희 로비’ 사실이면 국정농단

 

‘김건희 로비설’까지 제기되는 지금

상황은 이번 의혹이 단순 외압 의혹을 넘어

권력형 비리이자 국정 농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합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처럼

상당한 수사 역량과 기소권까지 갖춘 특검을 통해 의혹 전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토록 감추고자 하는 ‘윤 대통령 격노설’과

800-7070 전화번호 미스터리도 강제 수사를 통해서라면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습니다.

 

 

윤건영 “기록물법에 의하면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는
특히 차관급 이상과 하는 회의는 다 기록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수석보좌관 회의에는 속기사가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속기록만 확보할 수 있으면 이건 금방 밝혀질 수 있겠네요.”

윤건영 “그래서 국회 운영위라든지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보다는
강제적 수단이 필요한 것 아니냐라는 고민이 드는 겁니다.”(윤건영 민주당 의원, 2일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

 

 

 

어떻습니까.

왜 윤 대통령이 그토록 특검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건지도 짐작해볼 수 있지 않나요.

4일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채 상병 특검법이 다시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21대 국회에 이어 또 거부권을 쓴다면,

자신과 부인에게 제기된 모든 의혹을 자인하는 것으로 많은 국민은 받아들일 겁니다.

특검을 피하려다 더 엄중한 국민의 분노와 심판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번만은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논썰에서 함께 계속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금 바로 영상으로 확인하시죠.

 

기획·출연 손원제 논설위원 wonje@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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