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최고의 재능, 최악의 마마보이… 맥아더, ‘위대한 명장’인가 ‘*용렬한 *졸장’인가

           이영창 2026. 2. 5. 04:32
 
 
 
 
 

편집자 註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2월 출고되는 첫 파트(상편)는 한국전쟁에 관여하기 전까지의 맥아더를 탐구하는 ‘맥아더 개론’입니다.

인간 맥아더를 설명할 수 있는 12가지 특징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달리로 만들어 본 맥아더의 초상화. 다면적 인간인 맥아더를 표현하기 위해 파블로 피카소*입체파 화법으로 맥아더의 얼굴을 나타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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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_肖像 : 그림 따위에 나타낸 사람의 얼굴과 모습.

                    여기서는 맥아더라는 인간의 정체성적 상징을 의미함.

용렬_庸劣 : 됨됨이가 변변하지 못하고 생각이 좀스럽다는 의미.

졸장_卒將 : 기개가 담대한 장군다운 면이 없이 졸장부같은 리더(장수)를 은유적으로 일컫음.

입체파_立體派 : 20세기 초기에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운동.

                          기존의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의 사용 등을 지양하고,

                          대상을 여러 방향에서 본 뒤에 부분 부분의 모양을 분석하고

                          그 구조를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다시 구성하여 새로운 미를 나타내려 추구하였던 회화파.

                          피카소_Picasso, 브라크_Braque, G.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후의 회화, 조각, 디자인, 건축 따위에 많은 영향을 끼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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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는 역설적인 인간이었다.

고상하며 비열하고, 오만하면서 수줍고,

가장 좋은 인간인 동시 가장 나쁜 인간이며, 매우 우스꽝스럽고 매우 숭고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전기

‘아메리칸 시저’(윌리엄 맨체스터 저)는 이렇게 시작한다.

 

맥아더는 극과 극을 오간 인간이었다.

후대 평가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당대 맥아더와 직접 얼굴을 맞댔던 이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맥아더를 오랫동안 통찰력 있게 바라본 이들의 평가는 거의 일치한다.

맥아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

 

실제 맥아더를 만난 사람들의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백인백상(百人百想)이다.

100명이 만났다면, 그 100명이 느낀 생각이 다 제각각이었다.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만났는지,

그를 가까이서 봤는지 멀리서 목격했는지에 따라 맥아더에 대한 경험담은 천차만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휘하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던

호주 장군 토머스 블레이미(호주군 첫 원수였던 전쟁영웅)의 평가를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입체적 인간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블레이미는 이렇게 단언했다.

 

 

“맥아더에 대해 당신이 들은 최고의 말과 최악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맥아더는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이자 최고로 논쟁적인 장군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 장군”(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이란 찬사,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라는 악평,

“멍청한 개자식”(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라는 욕설이 모두 공존하고,

이 모든 평가가 다 사실에 근거한다.

 

심지어 한 사람이 최고-최악 평가를 동시에 했던 경우도 있다.

오랜 기간 맥아더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대통령)는 맥아더를 두고

“최고의 지성인”이라고도 했다가 “어떻게 저런 바보가 장군이 됐는지 궁금하다”고 혹평했다.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

 

 

 

 

 

*호오(好惡 : 좋고 나쁨)가 나뉘는 역사적 인물은 많지만,

맥아더처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함께 존재하기 어려워 보이는 ‘양극단 자질’

맥아더라는 한 인간 안에서 동시에 구현됐기 때문일 것이다.

 

맥아더는 언제나 똑같이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했음에도,

워낙 다면적이었던 그의 ‘프리즘 같은 성격’은 보는 이마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맥아더라는 인간을 선악이나 흑백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보다는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여러 특성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모아 병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맥아더가 직접 남긴 기록

△맥아더의 생애를 평가한 대표 전기

△당시 미군 기록

△당대와 후대의 언론 기사와 인터뷰 등을 종합해, 맥아더의 12개 범주로 분류해 보았다.

 

 

 

 

맥아더의 6·25 활약을 살피기 전 그의 성격을 먼저 파악하는 이유가 있다.

맥아더는 그의 동갑내기 라이벌 조지 마셜처럼 ‘시스템’을 통해 일하는 합리적 리더가 아니라,

지성·직감·권위 등 개인적 요소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가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은(적어도 전쟁 초반부는) 미국 역사가 스탠리 웨인트라웁의 책 이름처럼

‘맥아더의 전쟁(MacArthur’s War)'이었다.

 

 

6·25 전쟁 초반 유엔군 측에 있었던 모든 공과가 사실 맥아더와 관련이 있다.

미군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알아채지 못한 것맥아더 사령부의 정보 판단 실수 때문이었고,

미국 정부가 그렇게 한반도에 빨리 미 전투부대를 파병할 수 있었던 것도

맥아더의 신속한 지상군 투입 요청 덕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사실상 맥아더의 개인기로 달성한 전공이고,

유엔군이 중공군 개입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적을 얕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 하는 맥아더의 나쁜 버릇 때문이었다.

 

그래서 6·25 전쟁을 제대로 알려면 맥아더란 인간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육사 생도 시절의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트루먼 도서관

 

 
 
 
 
 

“용감한 자 중에 가장 용감한 자(Le Brave des braves)”

(맥아더 부하들이 라이터에 새겨준 문구. 나폴레옹이 미셸 네 원수에게 붙인 별명이다.)

 

 

 

 

 

군대경력 : 명예와 오만이 누적된 48년

‘12면체 인간’ 맥아더가 가진 다채로운 특성을 파악하려면,

48년(1903~1951년)에 걸친 그의 긴 군경력을 짧게나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북전쟁 영웅인 군인 아버지,

부유한 면화 중개상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때부터 ‘거의 모든 에이스 카드를 쥐고’(미 전사가 리처드 프랭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육군 주둔지를 따라 다니며 군대에 익숙했던 맥아더는

19세 때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로 진학했다.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한 아더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7년 소령 맥아더는 대령(임시 전시계급)으로 승진해

유럽 파병을 위해 신설된 무지개사단(전국 주방위군을 모은 부대)의 참모장에 취임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며 1918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 전쟁에서만 수훈십자장 2개, 은성훈장 7개를 받았다.

전쟁 후엔 다시 소령 계급으로 복귀해야 했으나,

육사 교장(준장 보직)으로 발탁되면서 계속 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다.

 

 

군의 엘리트로 떠오른 맥아더가 다시 빛을 발한 시기는

1930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소장→대장)하면서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아버지(1912년 뇌졸중 급사)가 끝내 오르지 못한 자리였기 때문에,

맥아더 본인과 어머니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진급이었다.

 

후버(공화당)와 루스벨트(민주당) 두 대통령을 모시며 5년 가까이 참모총장으로 재임한 맥아더는

이 시기 워싱턴 보수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동시,

민주당 진보 정권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참모총장 재직 시 맥아더는 1932년 대공황 당시 추가 수당(보너스)을 달라며

수도 워싱턴에 모인 1차대전 참전용사(보너스 아미)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오명을 얻었고,

대공황으로 인한 예산 삭감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결국 1935년엔 필리핀 자치정부(1946년 정식 독립 예정) 대통령 마누엘 케손의 군사고문으로 전보되며,

사실상 ‘뒷방’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계급은 다시 소장으로 내려왔고, 1937년엔 현역에서 물러나며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변방 필리핀에서 군경력을 마무리하는 듯했던 맥아더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41년 미국과 일본 사이 긴장이 고조됐고,

루스벨트는 그해 7월 필리핀 지역 방어를 위해 맥아더를 다시 현역으로 소환한 뒤

미 극동육군사령관에 임명(소장 복귀 하루 만에 중장 진급)했다.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일본군 기습을 받고 필리핀을 내준 뒤 호주까지 후퇴했으나,

치열한 전투를 통해 뉴기니섬을 확보한 뒤 이를 발판으로 필리핀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1945년 9월

도쿄만에 정박된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은 장본인이 바로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연합군최고사령관(연합국 11개국 대표)과

미국 극동군사령관(극동 지역 미 육해군 통합사령부)을 겸임하며 일본을 직접 통치했다.

 

 

일본 통치기 맥아더는 ‘푸른 눈의 쇼군’으로 불릴 만큼 일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인생이 네 번째로 빛나던 시기다.

일본제국 전쟁범죄자 처단(극동군사재판)을 주도했고, 민주주의 제도 도입, 시장경제 개혁,

평화헌법(전쟁 포기) 도입 등 일본 재설계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

 

 

1950년 6월

만 70세 맥아더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일본에서 마무리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열도 바다 건너에서 불의의 전쟁이 발발했고,

한반도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병력이 바로 맥아더 손 안에 있었다.

군생활 48년 차를 맞이한 노장군은 이제 인생에서 다섯 번째로 마지막 빛을 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이력

 
 
 

“그에게는 항상 군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너무나 유능하고 확신에 차 있고,

재능이 넘쳐, 직업적인 기능과 책임의 한계 속에 한정돼 있기 어려웠다.”

-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



 

 

 

 

 

 

제1면 *낭중지추 : 남을 찌르는 송곳

맥아더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점을 부인하는 평론가는 찾기 어렵다.

군인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자질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갖춘 특별한 인재였다.

일단 문무를 겸비했다.

웨스트포인트 야구팀 대표로 활약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뛰어났고,

타고난 분석력과 꾸준한 독서를 통해 빼어난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다.

특히나 역사와 법률에 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말년에 5,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그를 만난 이들이 한결같이 놀라워했던 것은 비상한 기억력이다.

47년 전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옛날에 함께 봤던 복싱 경기에서 어떤 펀치가 오갔는지를 정확히 기억했다.

12년 만에 만난 지인과는 과거 얘기를 나누다가 끊어졌던 바로 그 지점에서 대화를 재개했다.

40년 전에 우연히 들었던 일본 해안 조류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해 참모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전선 가장 앞에서 부하들을 직접 이끈 용장이었다.

1차대전 프랑스 전선에선 철모도 쓰지 않고 개인화기도 없이 승마용 채찍 하나만 든 채

기관총탄이 쏟아지는 참호를 가로질러 돌격부대 선봉에 서곤 했다.

그 용기는 나이가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6·25 전쟁 발발 후 첫 한국 시찰에 나선 1950년 6월 29일,

북한군 전투기가 전용기 주변을 날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고,

활주로에서 아직 전투기가 불타고 있던 수원비행장에 착륙을 강행했으며,

이미 함락된 서울 방향으로 북상해 한강 남안 최전방 진지에서 장시간 강 북쪽을 직접 시찰했다.

나중엔 비무장 수송기에 탑승해 압록강 근처를 날며 중공군 진영 위를 직접 정찰했다.

군생활을 통틀어 맥아더가 받은 훈장은 모두 22개로 미국 역사상 최다인데,

그저 그런 군인이었다면 절대 달성할 수 없었을 진기록이다.

 

 

낭중지추_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됨을 이르는 말

                                  : 주머니 , : 송곳  

 

제1차대전 참전 시기의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준장. 미국립문서기록관리

 

 

 

“저 사람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야.

저 양반 전사만 하지 않으면 출세 좀 할 거야.

자기가 영생을 누릴 줄 아는 모양이지.

우리처럼 철모 쓰는 일이 없어. 참호전에서도 저 모자 그대로라고.”

- 1차대전 때 맥아더를 멀리서 마주친 대위의 말 -

 

 

 

 

 

 

그럼에도 맥아더는

모든 영역에서 고루 완벽한 ‘정육각형 인재’는 결코 아니었다.

지성, 용기, 직관, 판단력, 리더십에서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지만,

주변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인화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공평무사한 태도로 부하들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했고,

동료 장군들의 능력을 얕보고 무시했다.

그래서 항상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었다.

 

군사작가 마크 페리

“맥아더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력자를 공격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존 퍼싱이 아끼는 조지 마셜을 일부러 좌천시키고

퍼싱이 싫어하는 페이턴 마치를 일부러 밀어주는 바람에,

결국 퍼싱은 맥아더의 적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1차대전 유럽 파병 미군 사령관인 퍼싱은

6성장군(대원수) 자리까지 오른 미 육군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결국 맥아더는 극도로 낮은 인화력 때문에 꼭지점 한쪽이 푹 꺼져

유독 예각이 도드라져 보이는 ‘뾰족한 육각형’ 인재에 머물렀다.

그래서 맥아더 사례에서 낭중지추

‘워낙 다재다능해서 언제 어디서도 그 재능이 특출나게 도드라졌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성정이 둥글지 못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어느 조직에서도 파열음을 내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갈등 유발자’로서의 특성도 설명해 준다.

 

 

성정_性情 : 사람의 성품(성질)과 마음씨

 

 

맥아더의 모친 핑키 맥아더. 미 공영방송 PB

 

 

 

 

 

“맥아더의 어머니는 진정한 *헬리콥터맘이었다.

헬리콥터라는 장치가 발명되기 수십 년 전부터 그랬다.”

- 맥아더 전기 작가 제임스 엘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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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맘_Helicopter Mom : 자녀 주변을 헬리콥터처럼 맴돌며

                                                   과도하게 간섭하고 통제하는 부모를 뜻하는 은유적 표현.

핵심 의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 확인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두기보다 대신 해결해줌

학업, 인간관계, 진로까지 세세하게 개입함

예를 들어보면

숙제나 과제를 부모가 대신 챙기거나 수정해줌

친구 문제에 직접 개입해서 해결하려 함

성인이 된 자녀의 선택까지 강하게 통제하는 것 등이 있음.

왜 문제로 보일까?

                           이런 양육 방식은 아이가

                           자율성책임감을 배우기 어렵고

                           실패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놓칠 수 있어서 비판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음.

[참고] 헬리콥터 맘 은 보통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지만,
                           그만큼 자녀를 걱정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애정적인 표현이라는 점도

                           함께 거론되기도 함.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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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면 마마보이 : 거인을 지배한 치맛바람

 

맥아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모친인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애칭 ‘핑키’)는 요즘 식으로 보자면 지독한 헬리콥터맘이었다.

자녀의 머리 위를 끊임없이 뱅뱅 맴돌며 모든 일에 간섭하는 극성 엄마였다.

 

아들의 육사 합격을 위해 시아버지 지인이 연방 하원의원으로 있는 지역으로

주소를 옮겼고(미 사관학교 지원엔 연방의원 추천서 필요),

하원의원 추천 경쟁 시험 준비를 위해 밀워키 학교 교장(감독관 중 한 사람)을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핑키는 맥아더가 성인이 되어서도 통제를 멈추지 않았다.

맥아더가 육사에 합격하자 아들 기숙사 건물이 바라보이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아들 방 불빛이 언제 꺼지는지 매일 감시했다.

 

나중에 아들이 장교로 임관한 후 아들 상관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남편(육군 중장 예편)과의 인연을 일깨우거나,

자기 아들이 군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췄는지를 강조했다.

 

 

맥아더가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치맛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1차대전 기간 중 핑키는 전쟁부 장관 뉴턴 베이커,

유럽 파병군 총사령관 퍼싱에게 청탁 편지 폭탄을 퍼부어 댔다.

아들을 대령에서 준장으로 속히 승진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맥아더는 청탁 없이도 충분히 진급할 만큼 전공이 넘쳐 났기 때문에 준장이 될 수 있었다.

 

 

전쟁 후 퍼싱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르자

핑키는 다시 편지를 보내 아들의 소장 승진을 요청했다.

퍼싱이 핑키의 줄기찬 요청에 두 손을 들었는지,

청탁과 상관없이 맥아더가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실제로 퍼싱의 참모총장 임기 말에 맥아더는 두 번째 별을 달았다.

 

사적으론 맥아더에게 연인(맥아더의 첫 부인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을 빼앗겼던 ‘연적’ 퍼싱은

공적으론 맥아더를 승진시키며 대인의 풍모를 보였다.

 

이와 달리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맥아더는 퍼싱이 아끼는 수제자(마셜)에게 인사로 물을 먹이거나

퍼싱이 가장 싫어하는 퇴역장군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등 쓸데없이 퍼싱을 자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유럽 파병 미군총사령관 존 퍼싱 장군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수훈십자장을 수여하고 있다. 미 육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

제1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2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3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 -

 

 

 

 

아들 상관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승진을 요구할 정도였으니,

핑키가 아들 연애 문제를 통제하려고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착실한 아들이 딱 한 번 어머니 뜻을 거스른 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맥아더의 첫 결혼이다.

 

 

핑키는 아들이 배필로 선택한 브룩스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혼녀 브룩스는 워싱턴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브룩스는 홀아비(퍼싱), 기혼남(영국 제독), 총각(미군 대령)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퍼싱의 안주인 행세를 하며 ‘미시즈 퍼싱’이 될 것 같았으나,

결국 1922년 퍼싱(62세) 대신 젊은 장군 맥아더(42세)를 택했다.

 

 

핑키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아들 부부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어머니 축복을 받지 못했던 맥아더의 첫 결혼은 7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혼 후에 모자는 화해했다.

 

 

1930년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되자,

핑키는 아들을 따라 총장 공관(알링턴 국립묘지 옆 포트 마이어)에 입주했다.

1935년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지명됐을 때도,

83세 핑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을 따라 마닐라로 이사했다.

그리고 도착 5주 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맥아더가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은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위대한 장군의 생애를 살피면서 굳이 그 어머니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맥아더를 조롱하거나 폄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맥아더의 이중적 성격이 바로 어머니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맨체스터의 묘사를 보면 맥아더의 성격은 핑키의 복사판이었다.

맨체스터는

“온화하면서 모질고, 성마르면서 감성적이고, 매력적이면서 감정적이었다”

핑키의 성품을 기록했다.

핑키는 아들에게 복합적인 성격만 물려준 게 아니었다.

 

현대의 심리학 연구들을 참조하면

맥아더의 여러 성격적 결함은 어머니의 끊임없는 간섭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부모의 지나친 통제를 받는 자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대인 관계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비판에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실패의 책임을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맥아더의 성격적 특성들과 거의 일치하는 증상이다.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아서 맥아더(맥아더 부친)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단 그의 아들 더글러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 미 육군 법무감을 지낸 에녹 크라우더 소장 -

 

 

 

 

 

 

 

제3면 유아독존 : 통제받지 않은 제왕

복잡한 인간 맥아더의 성격을 감싼 열두 개 면 중에서도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그의 드높은 자존감이다.

출신·능력·성과·평판 등을 보면

그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로버트 E. 리(남군 명장) 이후 최고의 육사 졸업 점수, 38세 장성 진급,

30대 육사 교장, 역대 두 번째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취임(최연소 레너드 우드) 등

육군의 온갖 기록을 독차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자신과 자존이 지나쳐 오만과 자만의 영역으로 너무나 깊게 들어가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성향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발현되었는지,

육사 시절 동기 생도 중 한 사람은 “맥아더는 여덟 살 때부터 오만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의 자만은 화법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맥아더는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화법을 *일리이즘_Illeism이라고 하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스스로를 ‘카이사르’라고 적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맥아더의 이 버릇은 이미 30대 때 시작됐다.

오랫동안 부관으로 맥아더를 보좌한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참조하면,

맥아더가 자신을 일컫는 방식은 이랬다.

 

 

참모총장 시절 의사당을 다녀온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보더니

“맥아더가 그 상원의원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지”라며

마치 남 얘기를 하듯 스스로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패션이다.

그는 애초 육군의 복장 규정 따위는 지킬 생각이 없었다.

1차대전 참전 당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참호전에서도 절대 철모를 쓰는 일이 없었고,

총 대신 채찍 하나만 들고 최전선을 누볐다.

보급 외투 대신 화려한 모피 코트를 입었고,

그 모피 코트 위에 어머니가 직접 짜 준 대형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철모 대신 찌그러진 군모를 썼고, 허벅지가 잔뜩 부푼 승마바지를 입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복장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날씨가 추울 때 그는 보급 외투를 입지 않고 모피 코트를 입고 어머니가 짜 준 목도리를 둘렀다. 맥아더기념관

 

 

 

 

“맥아더가 연극무대에 섰더라면

존 배리모어(초기 할리우드 최고 배우)는 그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 인천상륙작전에 관여한 미 해군 제독 제임스 도일 -

 

 

 

맥아더를 보통 ‘원수(5성장군)'라는 계급으로 부르는데,

그는 미국과 필리핀 양국에서 원수 계급을 받은 특이한 이력을 자랑한다.

미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된 것은 1944년,

필리핀군 원수(Field Marshal)가 된 것은 1936년으로 오히려 필리핀 쪽이 8년 빠르다.

 

 

미군 현역 소장의 신분(1937년 1차 예편)으로 필리핀 장군 계급을 받은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맥아더에게 자국군 계급을 수여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당시 참모장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맥아더가 케손에게 먼저 원수직을 요청했다고 한다.

필리핀 원수로 임명될 때 스스로 모자를 디자인했는데,

이게 바로 맥아더가 계속 쓰고 다녔던 그 화려한 금테 군모다.

 

 

맥아더의 못 말리는 허영심을 보여주는 ‘필리핀 원수’ 일화는

훗날 아이젠하워를 통해 알려졌다.

이것 말고도 아이젠하워가 꽤나 많은 맥아더의 치부를 공개한 것을 보면,

맥아더는 가까운 부하들 사이에서 별로 인망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맥아더는 자만에 눈이 멀어,

정무감각이 남달랐던 아이젠하워의 충언을 여러 차례 무시하다가 곤경에 빠지곤 했다.

 

참모총장 재직 시 보너스 아미 사건에서 맥아더는

“몸소 나서지 마시라”는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하고

현장에서 참전 용사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다 뒤집어 썼다.

 

 

나중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재직할 때는

“워싱턴으로 가서 정부·의회 사람들을 만나 자금과 무기를 받아 오셔야 한다”

아이젠하워의 조언을 무시했다.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 부탁이란 걸 할 줄 몰랐던 맥아더는

결국 필리핀에서 일본군 기습에 밀려 호주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발발 후엔 필리핀 대신 워싱턴 근무를 자원했고,

맥아더 그늘을 벗어난 뒤부터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며 쾌속 승진 끝에

1944년 맥아더와 같은 계급(원수)까지 올랐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맥아더는 종군기자들을 상대로 철저한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전쟁 중 언론 기사를 통제하거나 종군기자의 동선에 간섭한 것은 다른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맥아더 사령부의 언론 통제는 작전상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주로 맥아더 개인의 이익에 따라 이뤄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종군기자들은 모든 전투에 다 따라갈 수 없으니

사령부가 내는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맥아더 공보참모들은 사실을 조작해

‘맥아더가 현장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한 것처럼 보이도록’ 문장을 다듬었다.

 

 

 

 

 

승마바지를 입은 더글러스 맥아더. 1930년대초 육군참모총장 시절의 사진으로 보인다. 허벅지 쪽이 펑퍼짐한 조드퍼스(Jodhpurs) 스타일의 승마바지를 입고 잔뜩 멋을 부린 모습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는 대부분

‘장군이 적보다 한 수 앞선 지략으로 적의 의표를 찔러 승리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젠하워가 총사령관이었던 유럽 전선에선

오마 브래들리, 조지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등 다양한 장군들의 활약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맥아더의 남서태평양 전선에선 오직 맥아더 혼자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라도 언론이 자신의 부하 장군을 조명하면,

그 장군에겐 맥아더의 철저한 견제가 뒤따랐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무찌른 로버트 아이첼버거 소장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를 불러 “자네를 당장 대령으로 강등시켜 집으로 보낼 수 있다”고 협박했다.

 

 

이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자기 외의 그 누구도 전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리처드 로베르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아서 슐레진저

이를 두고 “맥아더는 전쟁의 환상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맥아더가 평시에도 자신과 관련한 비판 보도를 원천적으로 막았던 사례가 있다.

일본 패망 후

맥아더의 연합군 사령부가 1945년 9월 19일 포고한 10개 항의 언론 규정(press code) 중에는

‘연합군 주둔에 관한 치명적인 비판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일본에선 ‘연합군’‘맥아더’와 동의어였기 때문에,

이것은 맥아더 체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대통령의 가벼운 지적도 맥아더는 참지 못했다.

1944년 7월 일본 본토 공략을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태평양 전선 고위 지휘관을 모두 하와이로 소집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루스벨트가 맥아더에게 “뉴기니에서 미군 피해가 너무 많았던 것 아니오”라고 말하자,

맥아더는 곧장 대통령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누가 그런 정보를 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누구든 그는 대통령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이 말을 할 때

맥아더는 강조의 의미로 손가락을 펴 대통령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행동까지 했다고 한다.

위스콘신 주지사를 역임한 후 군에 입대해 2차대전 중

맥아더 사령부 공보장교로 일한 필립 라폴레트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미 맥아더의 자아는

임명권자의 작은 비판조차 수용하지 못할 만큼 완고하고 경직돼 있었다. 대

통령 몸에 손을 대는 일조차 서슴지 않을 정도로, 독선은 가득찼고 심각했다.

 

 

 

 

 

맥아더가 보여 준 12가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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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대통령을 이겨 먹으려던 맥아더… 후버-루스벨트-트루먼에 ‘3연속 불충’

            이영창 2026. 2. 5. 04:32

 

 

시각물_다면체인간 맥아더

 

 

 

 

 

 

 

“나는 맥아더가 멍청한 개자식(sob)이라서 해고한 게 아니다.

그가 대통령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자식인 건 사실이지만.”

-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

 

 

 

제4면 명령불복 : 대통령을 거스른 장군

1차대전 때

맥아더는 규정을 지키지 않는 정도의 ‘일탈 군인’이었지만,

점점 중책을 맡으면서

군인이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위험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처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기인 1932년 보너스 아미 사건에서다.

 

배고픔(대공황)에 지쳐 워싱턴에 모인 제대군인들이 행진을 시작했을 때,

사태 악화를 막으려던 후버 대통령은 현장에 있던 맥아더에게 전령을 보내

“다리 너머로는 진압 병력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전령이 전달한 명령을 바쁘다고 못 들은 척하면서,

진압군을 다리 너머로 보내 강제 해산을 실시했다.

진압군은 제대군인과 그 가족들이 살던 캠프촌에 불을 지르고 최루가스를 뿌렸다.

최루가스를 맡은 어린이 한 명이 목숨을 잃고,

애완토끼를 지키려던 소년 한 명이 군인들 대검에 찔리는 등 사태는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번졌다.

 

이 잔혹한 진압은

나중에 후버가 재선에 실패하고 루스벨트가 32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도화선이 됐다.

 

 

후버의 다음 대통령 루스벨트에게도 불충을 저질렀다.

경제대공황 와중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국방예산을 깎아 다른 분야로 돌리려고 했는데,

지나친 예산 삭감에 반대한 참모총장 맥아더는

대통령 앞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가 다음 전쟁에서 패하여

미국 청년의 배에 총검이 꽂히고 적의 군홧발이 목을 누를 때,

그가 저주하며 내뱉는 이름이 맥아더가 아니라 루스벨트이길 바랍니다.”

 

부하에게 이런 저주를 들었음에도,

루스벨트는 사표를 내려던 맥아더를 막아세우며

“예산도 그대로, 귀관도 그대로 두겠네”라며 맥아더의 항변을 받아들였다.

 

이게 1934년의 일이다.

실제 루스벨트는 이 일이 있고 나서도

맥아더에게 1년이나 더 육군참모총장 직을 맡겼다.

맥아더도 대통령에게 이런 악담을 퍼부었던 게 심리적으로 부담은 됐는지,

나중에 회고록에선 “백악관을 나오자마자 현관에서 구토를 했다”고 돌이켰다.

 

 

다만

이 당시 루스벨트가 맥아더를 용서했던 것은

그의 능력이나 자질을 높게 평가했던 부분도 있겠지만,

군복을 벗은 뒤 자신의 대선 맞상대가 될 수도 있는 맥아더를 가까이에 두고 관리하려 했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능수능란한 ‘정치 9단’ 루스벨트는

큰 이익을 위해 자기의 개인적 감정을 꾹 누르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왼쪽부터) 미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대장, 체스터 니미츠 해군 제독이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친구는 가까이, 그러나 적은 더 가까이에.”

- 영화 대부 '돈 콜레오네' -

 

 

 

 

그러나

재임 기간이 5년에 이른 맥아더를 언제까지 참모총장에 둘 수는 없었다.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보냈다.

 

 

마닐라로 이동해 워싱턴 통제에서 멀어진 뒤부터,

맥아더의 명령 무시는 그 정도를 더해 갔다.

 

특히 일본 점령기(1945~1951년) 때는

미국 정부 소속 공무원이 아니라

마치 일본을 직접 다스리는 절대군주 내지는 총독처럼 굴었다.

 

 

당시 맥아더의 위상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1945년 9월 27일 맥아더와 히로히토 일왕(텐노)의 만남이다.

그때까지 일본인들에게 텐노는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온 현신(現神)과 같은 존재였으나,

짝다리를 짚은 장신의 맥아더와

차렷 자세로 경직된 히로히토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맥아더는 이 사진으로 자신이 텐노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점을 한 방에 각인시켰다.

 

 

이 기간 대통령 트루먼이 맥아더 도쿄사령부에 많은 재량권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맥아더는 그 재량권을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한 뒤

워싱턴의 재가 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곤 했다.

 

당시 맥아더와 합을 맞춘 주일 미 대사 윌리엄 시볼드

 

“미국 역사상 그렇게 거대하고 절대적인 권력이 한 개인 수중이 맡겨진 사례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맥아더의 유아독존 성격에 더해 본국 행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맥아더의 ‘자율’은 결국 대통령 및 합동참모본부의 지시마저 무시하는 ‘항명’의 단계에 이른다.

6·25 전쟁 내내 트루먼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맥아더의 독선적 모습은

도쿄 시절 ‘쇼군’ 생활 동안 잉태된 측면이 크다.

 

 

결국 맥아더는 후버-루스벨트-트루먼 등 세 명 대통령의 명령,

그리고 문민통제의 대원칙을 연속으로 거스른 희대의 ‘불충장군’으로 남게 됐다.

 

 

맥아더 하면 인천상륙작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인 입장에서야

6·25 전쟁 중 맥아더를 해임한 것이 매우 뼈아프고 아쉬운 결정일 수 있겠으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1951년 4월 트루먼의 유엔군사령관 해임은

10년 이상 여러 사건을 통해 누적된 맥아더의 고질적 명령 불복종에서 비롯된 사필귀정이었다.

오히려 너무 늦은 조치였다.

 

 

 

더글러스 맥아더(가운데)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조지 마셜(오른쪽) 미 육군참모총장이 1943년 작전 지역을 함께 둘러보고 있다. 왼쪽의 중장은 당시 맥아더 휘하의 6군사령관 월터 크루거. 미 해군

 

 

 

 

“맥아더가 편집증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실했다.

아시아는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워싱턴의 유럽 편향을 병적으로 질투했다.

결국 유럽 전체, 특히 영국인들이 자신을 향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확신하게 됐다.”

-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 -

 

 

 

제5면 피해의식 : 이게 다 마셜 때문이다

자기애_自己愛 강한 *나르시시스트(자기도취자)들은

자기 모습과 성취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즘도 일종의 심리적 왜곡 현상인데,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지 못할 때 이들은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기보다

‘저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책임을 밖으로 돌린다.

 

 

시기, 질투, 열등감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맥아더처럼 걸출한 능력을 갖춘 야심가일수록

‘내가 잘못해서 실패했을 리 없다’며 자신만의 희생양을 찾는 경향이 있다.

맥아더의 위대함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피해의식도

이런 심리적 *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맥아더가 평생 ‘나를 공격하는 집단’이라고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대상은

워싱턴의 ‘유럽 우선주의자’들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호주 필리핀 일본 한국) 임무를 많이 담당했던 맥아더는

미국의 핵심 국가 이익이 아시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유럽을 우선하던 미국 외교 정책 결정자들은

맥아더의 이런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2차대전 중 미국의 병력·무기·자원이 유럽에 집중될 때마다,

맥아더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주변 참모들에게 대통령 루스벨트에 대한 증오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가 루스벨트만큼 증오한 대상이 있으니 바로 마셜(당시 육군참모총장)이다.

맥아더의 눈에 마셜은 ‘영국인들에게 포섭된 유럽 우선주의자’ 그 자체였다.

 

 

마셜에 대한 반감은 1차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맥아더는 무지개사단 참모장·여단장이었고,

마셜은 유럽원정군 최고사령관 퍼싱의 참모로 일했다.

맥아더는 ‘장교들을 전출시키라’거나 ‘병력을 지원하라’

총사령부의 정상적인 지시를 부당한 간섭으로 간주했고,

책상머리에 앉은 퍼싱 사령부 장교들이 전투장교인 자신을 질투한다고 믿었다.

 

 

이때 형성된 마셜에 대한 반감은 수십 년간 이어지는데,

맥아더가 참모총장 시절 끝내 마셜의 장성 승진을 거부하거나

2차대전 때 참모총장 마셜의 명령을 경시한 것은 이런 개인적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사 구분이 철저했던 마셜은

1942년 필리핀 전선 패장 맥아더를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 수훈자로 추천했고,

한국전쟁에서도 맥아더를 해임하려는 트루먼에게 신중한 대응을 건의했다.

 

 

맥아더가 워싱턴의 상관들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은 거의 맹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초 맥아더를 만난 미국 극작가 로버트 셔우드(루스벨트의 연설 원고를 쓰기도 했음)의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매우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와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워싱턴 정책 형성을 좌우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결국 셔우드는 맥아더 사령부가 “극심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론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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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트_ Narcissist :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훌륭하다고 여기는 사람. 정식표기는 ‘나르시시스트’이다.

                                         자아도취자, 자기도취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독선적인 사람.

                                         과대비유적으로 : 내로남불.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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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와 체스터 니미츠 사령부의 공세 경로. 맥아더는 필리핀 섬을 차례차례 수복하며 일본으로 북상하고자 했지만, 니미츠는 태평양 일부 섬만 확보한 뒤 일본 본토로 곧장 진격하려고 했다. 프리츠커 군사박물관

 

 

 

 

그런 맥아더가 보기에

‘유럽파’ 말고도 자신의 다리를 잡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해군이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태평양 전력은 크게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가 지휘하는 태평양지역(POA) 사령부

△육군 원수 맥아더의 남서태평양지역(SWPA) 사령부로 양분돼 있었다.

 

 

해군·해병대 위주의 니미츠 사령부는

마리아나 제도와 이오지마 등 태평양 주요 섬들을 거쳐 일본을 직접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고,

육군 위주 맥아더 사령부는

뉴기니섬과 필리핀 제도를 차례차례 회복한 뒤 대만과 일본 본토로 북상하는 루트를 택했다.

 

 

맥아더가 굳이 어려운 길을 고집했던 이면에는,

맥아더 자신이 필리핀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나

필리핀 정치인들과 맺었던 개인적 인연이 반영된 것이 분명하다.

 

 

누가 봐도 니미츠의 접근법이 효율적이었지만,

맥아더의 위상이나 육군의 체면 등을 고려해

루스벨트는 양쪽을 모두 공략하는 것으로 어정쩡한 합의를 유도했다.

 

 

이 양면 접근법은 당시엔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나중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전력을 분산시켜 오히려 일본의 패망을 앞당긴 전략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든 맥아더 입장에선

자기보다 많은 병력을 받고 더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니미츠 사령부가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그 어떤 지휘관도 나처럼 지원을 받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맥아더의 자기변호는 사실과 달랐다.

태평양전쟁 당시 맥아더의 전투 성과를 연구한 역사학자 스탠리 포크는

“(맥아더의 말과 달리)

맥아더는 자신이 벌인 대부분 전투에서 적군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동원했다”고 결론 냈다.

니미츠에 비해 낮았던 자신의 위상,

막대한 자원 투입에 대비해 신통치 않았던 전과를 능숙한 ‘언론 플레이’로 보충했던 셈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체스터 니미츠 태평양 사령관이 지도를 보며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맥아더는 자신이 겪는 곤란들을 아이젠하워(유럽 전선 총사령관) 탓으로 돌렸다.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에 반하는 자료를 백악관에 넘기며 자기 지위를 높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중에서 -

 

 

 

맥아더의 근거 없는 ‘피해의식’은 자연스럽게 ‘책임 전가’로 이어졌다.

자신이 총사령관으로 책임져야 할 패배·졸전의 원인을

부하장군 혹은 워싱턴 탓으로 돌리는 일이 잦았다.

책임 전가는 부하·동맹·동료·상관·대통령을 가리지 않고 반복됐다.

 

 

 

대표적 사례가

2차대전 미군의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였던 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 때다.

12월 8일(하와이 시간 7일) 맥아더는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고서도

10시간 이상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일본군에게 루손섬 전략 요충지였던 클라크 필드 비행장 폭격을 허용하고 만다.

 

 

이 공습 한 방으로

미군은 일본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략자산인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를

대부분 잃었다.

 

그래서

일본의 필리핀 침공은 교전 첫날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자신의 준비 부족과 늑장 대응 때문에 입은 손실을

워싱턴 정부 책임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맥아더는 부하를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을 준비가 항상 돼 있었다.

거의 여론의 제단 위에 바쳐질 뻔하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장군이

바로 초대 미8군사령관(태평양 전선) 아이첼버거다.

 

 

유럽 전선에서 태평양으로 차출된 아이첼버거는 1942년 말 부나-고나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맥아더는 아이첼버거를 전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밥, 부나를 차지하게, 아니면 살아 돌아오지 말게”라며 협박에 가까운 지시를 내렸다.

정작 아이첼버거가 긴 혈투 끝에 승리를 따내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에게 즉각 포상을 하지 않고 1주일이 지나서야 훈장을 수여했다.

 

아이첼버거는 이를 두고

“뉴기니의 첫 승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아이첼버거가 아니라 맥아더를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아이첼버거의 생각이 맞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졌더라면,

맥아더 사령부는 종군기자들에게 현장 지휘관 아이첼버거의 이름을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 해전으로 꼽히는 1944년 레이테만 해전(니미츠·맥아더 합동작전)에서,

맥아더는 사마르 전투에서 발생한 병력 손실

단일 지휘권 부재 탓으로 돌리며 워싱턴을 겨냥했다.

다른 연합국에 책임을 넘긴 사례도 있는데,

1942년 뉴기니 지역 작전 실패를 호주군의 잘못으로 왜곡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맹에 책임을 넘긴 수준으로 그친 게 아니라,

동맹국의 전공을 가로채려 했다는 의심을 산 사례도 발견된다.

맥아더는 언론에 제공한 보도자료를 통해 미군의 공적을 언급할 때는

부대 이름을 정확하게 표시한 반면,

호주·뉴질랜드군 덕분에 승리했을 때는 그냥 뭉뚱그려서 ‘연합군’이라고 언급했다.

 

경제대공황의 굶주림을 참다 못해 정부에 추가수당(보너스)을 요구하러 모인 제대군인 및 가족들이 1932년 여름 워싱턴 의회의사당 잔디밭에서 쉬고 있다. 이들의 수도 시위와 정부의 강제 진압을 '보너스 아미' 사건이라고 부른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범죄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한국전쟁 내내 한국 땅에서 단 하룻밤도 자지 않았고,

가끔 일본에서 날아와 사진 촬영이나 공중 정찰을 하는 게 전부였다.”

- 미 역사저술가 햄프턴 사이즈 -

 

 

 

제6면 확증편향 :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맥아더의 자만감과 피해의식은 자연히 그의 머리를 굳게 만들었다.

광범위한 지역의 방어를 책임진 전구사령관이라면 응당 부지런히 첩보를 수집하고,

날것의 첩보를 편견 없이 분석·가공해 풍부한 정보를 생산하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확하고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렸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맥아더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고,

자기 생각을 거스르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뒷전으로 돌렸다.

그가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은 지극히 자의적이었고 자신의 선입견에만 의존했다.

 

 

 

그의 위험한 확증편향이 처음으로 국가적 문제가 된 것은

1932년 보너스 아미 사건(대공황 기간 제대군인들의 수당 요구 시위)이다.

퇴역 군인들은 배가 고파 수도 워싱턴에 모였지만,

육군참모총장 맥아더는

이들이 제대군인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한 중범죄 전과자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인 군중 97%가 제대군인이라는 정부부처(재향군인관리국) 실증조사가 있었음에도,

맥아더는 믿지 않았다.

반면 ‘시위대가 참모총장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는 뜬소문을,

맥아더는 믿었다.

그래서 무자비한 진압을 강행했다.

그러나 모두 맥아더의 오판이었다.

맥아더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전기작가 맨체스터도 이 장면에선

“오직 굶주린 미국인들이 있었을 뿐”이라며 맥아더를 비판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을 준비하지 못한 것도

확증편향 때문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적어도 일본이 1942년 4월까지는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에 반하는 첩보가 계속 들어왔음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공격이 시작되기 한 달 전 일본 해군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포착되고,

11월 27일 육군부에서 전쟁 경보를 받았음에도,

일본이 벌써 공격할 리는 없다고 믿었다.

심지어 일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 상황에서도

‘하와이와 달리 필리핀은 중립지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증언(당시 필리핀 대통령 케손)이 있다.

눈앞의 사실과 부하들의 첩보보다, 자신의 직감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1944년 태평양 전선 펠렐리우 전투 장면. 미 해군 전투기 F6F 헬캣이 일본군 지역을 폭격하고 있다. 미 해군

 

 

 

 

편견으로 인한 잘못된 추론 탓에 큰 실패를 맛봤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했으나, 맥아더는 같은 실수를 또 반복했다.

 

1944년 9~11월 남태평양 팔라우 인근에서 벌어진 펠렐리우 전투가 바로 그 예다.

뉴기니를 점령한 맥아더는 펠렐리우섬을 필리핀 상륙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지만,

니미츠와 윌리엄 홀시 등 해군 제독들은

“굳이 이 섬을 차지하지 않고도 일본 본토를 바로 공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작전을 반대했다.

 

결국 필리핀 없이는 일본으로 못 간다는 맥아더의 고집 때문에 펠렐리우 공략은 시작됐는데,

두 달간 전투에서 일본군의 처절한 항전 때문에 미군은 무려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지나치게 희생이 컸던 전투였음에도,

정작 이 전투 후 필리핀 공략이 너무 쉽게 성공하는 바람에

미군은 펠렐리우를 써먹지도 못하고 서둘러 일본 본토 쪽으로 북상해야 했다.

 

 

여기서

전구사령관의 반복되는 옹고집을 제어하지 못한 임명권자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확증편향과 전략적 식견 부재가 이 정도로 심각하다면 해임하는 게 옳았겠지만,

루스벨트‘맥아더를 순교자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생각에서

끝내 맥아더를 워싱턴으로 소환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맥아더 문제를 순수하게 군사적 입장에서 본 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맥아더의 다른 장점과 대중적 인기가 결국 그의 군 경력을 연장시켜 준 셈이다.

 

결국 기고만장한 맥아더는

그 뒤로도 자기 생각대로 전쟁을 지휘했고,

그 폐해는 6년 후 한반도에서 극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5490003090

 

 

 

 

 

 

 

 

.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눈·귀 대신 ‘머리’를 믿었던 빗나간 천재… 맥아더는 그래서 실패했다

           이영창 2026. 2. 12. 04:32

 
 
 
 

 

 

 

 

1944년 10월 레이테만 해전 직후 더글러스 맥아더의 모습. 이때 맥아더의 계급은 대장이었고 두 달 후 원수로 진급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1918년의 그가 아니었다.

부하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는데, 핵심 요직조차 잘 보지 않았다.

그는 참호나 야전사령부가 아니라 요새 같은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 사무실을 지키는 것은 리처드 서덜랜드라는

비밀스럽고 우월감으로 가득 찬 인물로 대표되는 참모진이었다.”

- 필리핀 시절 맥아더를 묘사한 미국 역사가 앨런 숌 -
 
 
 

제7면 人의 장막 : 충신을 내친 군주

나이가 들수록, 계급이 올라갈수록, 참모들과의 연령 차가 벌어질수록,

맥아더의 생각은 무뎌졌고 태도는 경직됐다.

2차대전(61~65세)과 한국전쟁(70~71세)의 맥아더는

1차대전 때 병사들과 함께 쏟아지는 포화 속을 누비던 그 용맹한 열혈 장군이 아니었다.

 

최고급 호텔 숙소의 안락함, 후방 사령부의 평온함에 길들여져,

전투 현장 순시도 잘 나가지 않았다.

바탄 전투(1942년 일본 필리핀 침공)에서

희생된 부하들을 기리고자 전용기에 ‘바탄’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바탄 전투 77일 동안 맥아더가 현장을 방문한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유엔군사령관 재직 9개월 동안 한국에서는 1박도 한 적이 없다.

전용기를 타고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해 잠시 한국을 들렀다가,

언제나 밤이 되면 도쿄로 되돌아갔다.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

눈과 귀 대신 자기의 머리를 더 신뢰하는 그 성품 때문에,

맥아더 곁에는 최고사령관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따르려는 추종자들만 남았다.

그나마 7년 동안(1932~1939년)

옆에서 바른 말을 하던 아이젠하워가 워싱턴으로 돌아가 마셜을 보좌하게 되자,

맥아더 참모진의 ‘간신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국으로 돌아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는 부하들이 자기 명성을 가로챌까 봐 전전긍긍하는 정신병자”라고 악담을 퍼부었고,

맥아더 역시 아이젠하워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놈의 배신자”라고 폄훼했다.

 

 

어쨌든 참모장 아이젠하워가 ‘탈출’하면서 맥아더를 둘러싼 ‘인의 장막’은 더 두꺼워졌다.

맥아더가 완고해질수록 참모들은 맥아더 입맛에 맞는 보고·정보만 올리게 됐고,

그 편향된 정보 때문에 맥아더는 더 현실과 멀어졌다.

악순환이었다.

1차대전 때 퍼싱의 ‘쇼몽 사령부’를 욕하던 맥아더가

그보다 훨씬 더 폐쇄적인 ‘예스맨 집단’을 자기 근처에 꾸린 것이었다.

 

 

필리핀 시절 맥아더를 보좌하다가

1942년 바탄 전투 도중에 함께 탈출한 이 참모진들을 ‘바탄 갱’ 또는 ‘바탄 보이즈’라고 부른다.

‘바탄 갱’은 맥아더의 이너서클 엘리트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와도 같았는데,

나중에 한국전쟁 당시

도쿄 유엔군사령부에서 맥아더를 보좌하던 장교 상당수가 이 ‘바탄 갱’ 출신이다.

 

 

 

 

 

“맥아더는 다방면에 걸쳐 비범한 재능을 지녔지만 인물에 대한 판단력은 형편없었다.”

- 전기작가 윌리엄 맨체스터 -

 

 

 

 

 

2차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장이었던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 참모 중 가장 횡포가 심했고 문제가 많았던 장군을 꼽자면

세 명 정도의 이름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문고리 권력자’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이다.

중국에서 대대장을 하던 소령 서덜랜드는

1938년 필리핀 군사고문 맥아더의 참모부에 들어가면서 쾌속 승진을 시작했다.

1939년 아이젠하워로부터 참모장(중령) 자리를 물려받고,

1941년에 준장·소장,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연대·여단·사단장도 거치지 않고 참모로서만 3성장군이 된 특이한 경우였는데,

맥아더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덜랜드는 부하들과 동료 장군들에게 폭언을 일삼았고,

자신이 맥아더 대신 보고의 중요성을 판단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면담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문고리 권력’으로 악명 높았다.

 

일본의 필리핀 침공 당일인 1941년 12월 8일에도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들은 항공대장 루이스 브레러튼(소장)이 맥아더를 찾아갔지만,

서덜랜드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장군님 바쁘시다”며 브레러튼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일분 일초가 급하던 순간 서덜랜드가 이상한 고집을 부리면서,

브레러튼은 B-17 폭격기들을 출격시킬 수 없었고 미군은 이른 반격의 기회를 놓치게 됐다.

 

 

나중에 서덜랜드는

호주군 장교의 부인을 연인으로 삼아 사령부에 두고

‘대위’ 계급으로 데리고 있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거듭했다.

전쟁 후 서덜랜드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맥아더 휘하에서 6군사령관을 지냈던 월터 크루거 장군

“인류에게 좋은 일”이라는 촌평을 남겼다.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참모였던 찰스 윌로비.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두 번째는

‘눈 감고 귀 막은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이다.

1940년 필리핀 주둔군 군수참모로 배치된 윌로비는

1941년 맥아더가 현역으로 복귀하자마자 정보참모로 발탁된다.

정보통도 아니었지만 맥아더에게 남다른 충성심을 보여 준 덕분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그는 숱한 정보 실패를 저질렀다.

일본의 공격 시점을 1942년 6월로 예측하는 바람에,

1941년 12월 시작된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950년 6월 미국이 북한의 기습 남침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

맥아더 사령부 정보 책임자는 여전히 윌로비였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미 육군

 

 

 

세 번째는

‘맹목적 충성파’ 에드워드 알몬드다.

알몬드는 ‘바탄 갱’ 출신이 아니라 맥아더가 도쿄에 부임한 뒤에 뒤늦게 합류한 참모였다.

그는 원조 바탄 갱들을 능가하는 아부와 충성심을 과시하며 맥아더의 눈에 들더니,

급기야 참모장 자리를 꿰차고 인천상륙작전 때는 군단장으로까지 진급했다.

 

 

6·25 전쟁 초반 8군사령관 월튼 워커가 맥아더에게 했던 건의를

중간에서 묵살하거나 가로막았던 장본인이 바로 알몬드다.

 

맥아더의 참모 수준이 이 정도였다.

그나마 맥아더 휘하 전투부대 사령관에는 상당히 능력 있는 장군들이 배치됐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월터 크루거(6군사령관)와 로버트 아이첼버거(8군사령관),

한국전쟁에서의 월튼 워커(8군사령관)와 매슈 리지웨이(8군사령관) 등은

맥아더 참모들의 결점을 채울 만큼 장점이 많은 지휘관들이었다.

 

그 이유는 야전군사령관 인사는 맥아더가 직접 할 수 없었고,

대통령이나 합참의 의견이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8월 31일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미 육군 원수가 조너선 웨인라이트 육군 중장을 반갑게 얼싸안고 있다. 웨인라이트는 1942년 5월 필리핀 바탄-코레히도르 저항전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3년 3개월 만에 풀려났다.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만약 일본이 침공한다면 연합군 병력 절반만으로도 일본을 가지고 놀 수 있다.”

- 1941년 일본의 필리핀 침공 전 맥아더의 인터뷰 -

 

 

 

제8면 과소평가 : 적을 얕보는 버릇

맥아더의 자만은 적에 대한 감시와 연구를 게을리하는 버릇을 낳았다.

장수가 적을 과하게 두려워했더라면 전쟁·전투에 대한 대비 태세라도 단단하게 할 수 있었겠지만,

맥아더는 항상 적을 얕보다가 큰코다치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인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에서 맥아더는 거듭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후퇴해야 했다.

 

 

 

1941년 중반,

일본이 진주만과 필리핀을 기습(12월 8일)하기 몇 달 전.

이때 맥아더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본과의 전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27세의 열혈 기자 존 허시(나중에 퓰리처상 수상)와 했던 인터뷰를 보면

맥아더가 취했던 대비 태세가 잘 드러나 있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중국에서 장기전(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힘이 빠졌다”면서

“절반가량 병력의 효율이 1등급에서 3등급으로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또 일본 정부가 서양의 강대국을 두려워하고 있고,

이미 유럽에서 전쟁을 시작한 독일(1940년 일본과 삼국동맹 체결)이

같은 추축국 일본의 개전을 말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틀린 내용이었다.

효율이 떨어진 군대는 일본군이 아니라 미군이었고,

일본 정부의 개전 의지는 맥아더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됐을 때도

이 과소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미군의 최대 군사기지 진주만을 공격했다면 분명히 큰 손실을 봤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일본이 필리핀 쪽에서는 곧장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공격하더라도 그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딱히 없었다.

자신의 지레짐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들은 지 10시간 채 안되어 일본군의 대규모 공습을 당해,

클라크 비행장에 세워 뒀던 알토란 같은 전투기·폭격기들을 대부분 잃는 수모를 당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 출범 기념식에서 이승만과 더글러스 맥아더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한국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과소평가로 적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개전 직후부터 북한군의 전력과 전투력을 무시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마침 공화당 정치인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가 도쿄에 있었는데,

맥아더는 덜레스 보좌관에게 “한 손을 뒤로 묶고서도 북한군을 처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9년 전 병력 절반만으로도 일본군을 가지고 놀 수 있다”(언론 인터뷰)고 했던 *방약무인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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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약무인_傍若無人곁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마치 제 세상인 것처럼 거리낌없이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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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미군 1개 대대만 투입해도 북한군이 미군 출현에 깜짝 놀라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견대로 나섰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1개 보병대대+1개 포병포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벌어진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다.

 

 

 

인천상륙작전북한 땅으로 진격하면서는 중공군의 전력과 참전 가능성을 또 무시했다.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내기 정확히 열흘 전인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는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이 보낼 수 있는 병력은 고작해야 5만, 6만 정도이고,

그들이 평양으로 내려온다면

사상 최대의 살육전(the 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이라고 의기양양해했다.

 

 

그러나 단 한 달 만에 상황은 뒤바뀌었다.

북한에 웅크리고 있던 중공군은 총 30만 명이었고,

해병1사단의 분전이 아니었다면 미군은 장진호에서 사상 최대 살육전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

 

 

1950년 9월 인천에서 노르망디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군사적 성과를 달성한 맥아더는

딱 두 달 만에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중공군 2차공세)를 조국에 안겼다.

맥아더 전기를 쓴 작가 제임스 엘먼

“제트기·전차·중포·전략폭격기를 가진 고도로 기계화된 군대가,

보급도 덜 받고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덜 무장된 군대에 패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중공군 2차공세는 맥아더의 과소평가에서 시작된 대형 참사였고,

맥아더에 대한 과대평가를 보여준 증거다.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고 있다. 이 사진은 1958년 북한에서 발간된 기념 책자에 실린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위키미디어 커먼

 

 

 

 

“(한국전쟁 발발 직전) 맥아더의 활동은,

가끔 하네다 공항에 VIP를 보러 가는 것을 빼면, 식사 모임이나 식후 대화 정도가 전부였다.

혁명기념일에 소련 대사관, 국왕 생일에 영국 대사관,

바스티유 기념일에 프랑스 대사관을 갔지만, 현장 부대는 가지 않았다.

맥아더의 참모장은 당시 미군 준비 태세 부족의 이유를 ‘훈련 부족’이 아니라

‘평화기 징병을 하지 않은 점’으로 돌렸다.”

 

- 스탠리 웨인트라웁 '맥아더의 전쟁' 중에서-

 

 

 

 

 

 

 

제9면 임기응변 : 노력하지 않았던 게으른 천재

공자는 나이 쉰에 천명을 알았다(知天命).

예순에 귀가 순해졌으며(耳順),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50세(참모총장)에 천명과 같은 국가지도자의 명령을 어겼고,

60세(필리핀 총사령관)에 편한 얘기만 듣고자 참모들의 심기경호 속으로 숨었으며,

70세(한국전쟁 유엔군사령관)가 돼선 민주주의 법도인 문민통제 원칙을 수시로 무시했다.

 

 

맥아더는 분명 군인으로서 절륜한 재능을 갖춘 ‘역대급 장군’임에 분명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노력을 포기하면서부터 점점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변모해 갔다.

 

 

나이가 들수록 일선 병사들과 멀어졌고,

현장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걸러 들었으며,

자기 욕심과 실제 성과 사이의 괴리를 자꾸 언론 플레이로 메우려 했다.

 

 

평시에 맥아더는 적국 동태를 살피는 일에 소홀했고

앞으로 닥쳐올 분쟁이 어떤 모습일지를 예측하는 연구를 게을리했다.

일이 닥치면, 적이 쳐들어오면,

그제야 허둥지둥 대책을 마련하고 임기응변식 해법을 내놓았다.

그 임기응변이 범장(凡將)의 오랜 준비보다 분명 나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빠른 학습 능력 덕분에 전투를 거듭할수록

다른 장군들의 특기를 흡수해 자신만의 군사 전술을 계속 다듬어 나갔다.

 

 

태평양전쟁 전문가 리처드 프랭크

레너드 우드(전 필리핀 총독)에게 필리핀 방어체계 구축을 빌렸고,

부하 조지 케니(당시 5공군사령관)에게서 항공전,

대니얼 바비(남서태평양사령부 상륙군사령관)로부터 상륙전을 배워 항공·상륙전의 달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높은 지적 능력이나 군사적 천재성 등을 감안했을 때,

맥아더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사전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아

적에게 먼저 승기를 먼저 내줬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게 맥아더만의 책임은 아니다.

전쟁 전 국방력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국방장관·합참의 책임이었고,

적의 선제공격을 몰랐던 것은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예하부대 준비 부족만큼은 전적으로 맥아더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전구사령관(theater commander)이라면,

담당 지역 정세를 예민하게 파악하면서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예하부대 훈련 수준을 높여 두었어야 했다.

맥아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태평양전쟁 직전 필리핀에선 ‘워싱턴이 장비를 주지 않는다’는 불평만 했을 뿐

자기 휘하 필리핀군에 대한 훈련을 소홀히 했다.

실전 훈련을 하지 않은 결과,

1941년 12월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필리핀 병사들이

전투 시작부터 소총을 버리고 전장을 이탈하는 일이 속출했다.

 

 

한국전쟁 직전,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 소속 4개 사단 훈련 수준도 이와 다를 게 없었다.

장교들은 그나마 2차대전 경력자들이 많아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했으나,

대부분 2차대전 종전 후 입대한 병사들이 문제였다.

훈련을 통해 계속 실전 감각을 키우지 못한 결과,

한국전쟁 초반 북한군 포격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미군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맥아더의 임기응변이 통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윌리엄 딘의 24사단이 오산-금강-대전에서 결사 방어로 시간을 버는 사이,

일본에 있던 3개 사단(2·25·1기병사단)을 긴급 투입해 낙동강 교두보를 만들고,

미 본토에서 급파된 사단으로 반격을 하는 구상이었다.

이런 방어 계획은 예전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맥아더가 부랴부랴 만든 것이었는데,

실제 6·25 전쟁 초반부(1950년 9월 말까지) 전황은 맥아더 계획대로 흘러갔다.

 

 

 

 

1945~1948년 군정사령관을 지낸 존 리드 하지 중장.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군사작전만 임기응변으로 이끈 게 아니었다.

중요 보직에 사람을 쓸 때도 ‘즉흥적 용인술’이 잦았다.

6·25 전쟁 발발 후 딘의 24사단을 한반도에 선발 부대로 보낸 이유도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4사단은 당시 일본 주둔 4개 미 육군 사단 중 전투력이 가장 약했고,

한국에서 보여 준 전투 지휘의 수준을 볼 때 딘 역시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 두고두고 아쉬운 점은

맥아더가 1945년 8월 존 리드 하지 중장을 38선 이남 군정사령관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맥아더가 하지를 선택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하지의 24군단이 한반도에서 가까운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군인으로선 능력 있고 용맹한 지휘관이었지만,

높은 정무감각이 요구되는 군정사령관으로선 최악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들을 상대로 강압적인 포고령을 발령하더니,

국내 정치 세력과의 협조나 공조를 아예 거부했다.

인구 1,600만 명 나라를 함부로 예하부대 다루듯이 관리한 인물이 바로 하지다.

 

 

당시 군정통치에 어려움을 겪던 하지는

맥아더에게 “조언을 달라”거나

“한국 내 정치적 내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며 SOS를 보냈다.

 

 

그러나 맥아더는 “나는 지금 바쁘고 일본의 일을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답신했다.

하지의 군정통치는 한국 입장에선 참사였다.

맥아더의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다.

 

더 나아가

하지에 대한 부분은

맥아더가 정치와 행정을 군사의 하위 개념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뒤이어 나올

정치군인 맥아더의 실체,

민주적 통제를 거부했던 맥아더의 위험한 정치관도

결국 이러한 군사 우월론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https://v.daum.net/v/20260212043219197

 

 

 

 

 

 

 

.  12면체의 초상_肖像 맥아더

 

 

원제 : 권력욕 눈먼 맥아더... '밀애 스캔들' 무마해 준 아이젠하워에 뒤통수까지

            2026.02.19 04:30  이영창 논설위원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미 육군 원수와 히로히토 일왕이 1946년 7월 일본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서 만났다. '사람의 모습을 한 신'으로 여겨졌던 일왕을 옆에 두고, 뒷짐을 진 채로 삐딱하게 서 있는 맥아더의 모습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내가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는 단 하나야. 그놈의 자식 루스벨트를 이기기 위해서라네.”

- 맥아더가 휘하 장군 아이첼버거에게 했던 말 -

 

 

 

 

제10면 정치군인 : 대선 추대받은 현역 장군

여기서 제시하는

맥아더의 12면체 특성 중

가장 신랄한 비판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그의 정치적 행보다.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선출 지도자(민간인)가 장군을 지휘하며

군의 통수권을 독점하는 문민통제(문민우위) 원칙을 일찌감치 정립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군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기회를 아예 제공하지 않고,

장교단을 정치적으로 중립인 전문가 집단으로만 활용하는 전통이다.

 

 

정치지도자와 군사지도자 권한에 큰 차등을 둔 것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장군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면 되지만,

정치지도자는 자신에게 표를 준 국민 전체를 향해 무한대의 책임을 진다.

 

 

특히

왕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공화정 체제로 건국한 미국의 경우,

독립 과정에서 영국군과 대립한 경험 때문에 상비군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이 컸다.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군권을 쥐면서도

토론을 통해 민간을 설득하는 등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문민통제 원칙은 역사적으로도 굳어졌다.

 

 

다만 250년 미국 역사에 실병력 통제권을 쥔 장군이 대통령 명령에 항명하거나

항명에 가깝게 저항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는데,

미국 언론에 언급되는 두 가지 주요 사례가 바로

△남북전쟁 당시의 조지 매클렐런(vs 에이브러햄 링컨)

△한국전쟁의 맥아더(vs 트루먼)다.

 

 

 

두 사람 모두 오만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나중에 직접 대선에 출마까지 했던 ‘정치군인’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매클렐런의 사례가 링컨의 공세 명령을 거부한 ‘소극적 반항’이었다면,

맥아더는 워싱턴 지침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하거나

언론을 통해 대통령 외교정책을 명시적으로 비판했던 ‘적극적 항명’이었다.

 

 

또 매클렐런은 ‘노예를 해방해 나라를 어지럽힌 군사 문외한 링컨

개인에게 저항한 것에 가까웠지만,

맥아더의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자아_自我

유럽 우선 외교정책을 상정했던 행정부와 의회 시스템을 부정하려고 했다.

 

 

결국

매클렐런의 저항은 링컨을 향한 것이었고,

맥아더의 항명은 워싱턴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맥아더의 불충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하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훌륭한 자질도 많이 갖췄지만,

민주주의 국가 군사지휘관으로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선출 권력에 대한 복종심’은 현저하게 결여된 상태였다.

대규모 부대를 호령하고 화려한 전공을 자랑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더 능력이 떨어지는 민간인’의 말을 따라야 하는 일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맥아더는

후버, 루스벨트, 트루먼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면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항명을 저질렀다.

 

 

 

 

 

해리 트루먼에게 해임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더글러스 맥아더가 1951년 4월 시카고 솔저필드 경기장에 모인 5만 명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전쟁은 군인에게 일임하기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다.”

- 문민통제를 강조한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

 

 

 

 

그(맥아더)의 거대한 자아는

최고위 장군(general in chief)에 만족할 수 없었다.

군통수권자_commander in chief 가 되어야만 치유될 수 있었던 결핍이었다.

 

그래서 결국 직접 대통령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맥아더는 현역 육군 대장(당시 미군 최고 계급) 신분이던 1944년

미 대선 공화당 예비선거에 ‘사실상’ 출마했다.

 

 

자신이 직접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지지자가 공화당 일각에서 자기 이름을 투표 용지에 올리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4월 공화당의 위스콘신 예비선거에서 실제 득표를 했고

일리노이 예비선거에선 1위를 기록했다.

 

그 스스로 정치인 활동을 한 적은 없었지만,

자기 후원자인 아서 반덴버그(미시간) 상원의원이 운영하는 캠프에 참모들을 보내

선거운동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있다.

1943년 한 해에만 맥아더 대선 출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참모장 서덜랜드(봄)와 정보참모 윌로비(여름)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보수 언론인들을 자기 대선 출마에 필요한 ‘바람잡이’로 활용하려 했던 증거도 있다.

맥아더는 유명 라디오 진행자 겸 작가인 프레이저 헌트에게

‘대선 출마용 전기’를 준비하도록 했는데,

이를 위해 헌트는 전쟁 기간 동안 맥아더사령부를 자유롭게 취재하는 특권을 가졌다.

나중에 이 전기(실제 출판되지는 않음)를 맥아더가 직접 수정한 사실도 있다.

 

 

맥아더의 대통령 욕심은

68세 때인 1948년 대선에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는 도쿄사령부에서 일본을 통치하고 있으면서

본국 정치무대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맥아더 입장에서 1948년 대선은 4년 전 선거보다 더 가능성이 있었다.

‘전시 출마’에 따른 부담을 덜 수 있었고 상대는 ‘거물’ 루스벨트가 아니라

‘어쩌다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풋내기 트루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의 항복을 직접 받은 맥아더는 4년 전보다 훨씬 유명해져 있었다.

1945년 갤럽이 미국인들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인가’를 물은 설문조사에서,

맥아더는 루스벨트-링컨-예수-워싱턴에 이어 5위에 올랐다.

1946년 설문에선 ‘생존 미국인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혔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직접 정치에 발을 담그는 대신 부하를 ‘메신저’로 이용했다.

당시 일본 주둔 8군사령관으로서 맥아더 대신 워싱턴을 방문했던 아이첼버거의 일기를 보면,

맥아더는

당시 미국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와의 연합전선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젠하워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을 밀어주면,

1952년엔 자신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아이젠하워를 밀어준다는 거래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워싱턴에 한 번 가지도 않고 사과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기다린 맥아더의 고고한 선거전략은 끝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지지자들은 그가 직접 미국으로 와서 유권자들에게 얼굴을 보여주길 바랐지만,

맥아더는 계속 일본에만 머물렀다.

결국 텃밭인 위스콘신의 예비선거에서도 승리하지 못했고,

네브래스카에선 5위를 기록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후보에서 빼줄 것을 요청했으나,

일부 지지자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 맥아더는

1차 투표에서 8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공화당 최종 후보는 434표를 얻은 토머스 듀이로 확정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운데) 대통령이 1944년 7월 남서태평양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왼쪽)와 태평양사령관 체스터 니미츠를 하와이에 불러 담소를 나누고 있다 뒤에 보이는 장군은 합찹의장 윌리엄 리히 장군이다. 미 해군

 

 

 

 

“나 아스피린 하나 더 먹어야겠네.

내 인생에 나한테 이런 식으로 얘기한 사람은 맥아더가 처음이야.”

-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맥아더에게 보고 받은 루스벨트의 말 -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던 맥아더는 대통령들을 상관으로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직 대통령을 자신의 경쟁자로 삼거나

군통수권자와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며 워싱턴의 반감을 샀다.

 

2차대전 중엔 루스벨트의 권위를 여러 차례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4년 7월 루스벨트가 태평양 전선 주요 지휘관들을 하와이에 소집했을 때,

맥아더는 먼저 와서 대통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 있는 이벤트를 통해 군중의 관심을 유도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루스벨트의 연설문비서관 새뮤얼 로즌먼

“굉장한 자동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끽 소리를 내며 멈추는 오토바이 호위와 함께,

내가 이제껏 본 가장 긴 컨버터블 차량(오픈카)이 부두에 나타났다”

“그 뒷자리에 앉은 맥아더가 훌쩍 내리더니 배다리를 단숨에 건넜다”고 회상했다.

자신을 루스벨트의 회담 카운터파트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도착 장면을 왁자지껄하게 연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영소 3국 정상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얄타회담(1945년 2월 4~11일)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맥아더가 루스벨트 쪽으로 쏠린 여론의 관심을 돌리려고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의혹도 있다.

 

당시 맥아더는

겨우 루손섬(필리핀 최대 섬)에 상륙해 수도 마닐라 방면에서 전투를 시작했을 뿐이었지만,

이 상황을 과장해 “적군의 괴멸이 임박했다”고 공표했다.

 

맥아더의 한 참모는 나중에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인 동안 자기 이름을 드높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돌이켰다.

그러나 실제로 마닐라 전투는 3월 초까지 한 달 이상 이어졌고,

루손 지역에선 일본이 패망하는 8월까지 전투가 계속됐다.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위키미디어 커먼즈)

 

 

 

 

 

대통령을 무시하는 이런 특성은

루스벨트 후임 트루먼 집권기에도 바뀌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 펜타곤은

한반도 후속 대책 논의를 위해 맥아더에게 본국에 일시적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계속 거부했다.

 

결국

대통령 트루먼이 몇 차례나 중간 기착지를 거쳐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 외딴 섬 웨이크섬까지 이동해야 했다.

당시 군 통수권자를 만난 맥아더는 거수경례 대신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당시 웨이크섬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모습은 절대 상하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회담을 하는 두 나라 대통령처럼 동등한 관계처럼 보였다.

 

 

 

1930년대 초 더글러스 맥아더의 연인이었던 필리핀 여성 이사벨 로사리오 쿠퍼의 1942년 모습. 쿠퍼는 맥아더와 헤어진 후 할리우드로 가 배우가 됐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마닐라에서 근무하던 1930년 4월,

맥아더이사벨 로사리오 쿠퍼에게 푹 빠졌다.

당시 50세 맥아더는 16세 애인을 ‘우리 아가’라고 불렀다.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자 이사벨을 데려와 워싱턴 가까운 지역에 정착시켰다.”

- 리처드 프랭크의 '맥아더' 중에서 -

 

 

 

 

 

제11면 내로남불 : 난 되지만 넌 안 돼

맥아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특성은

바로 남에게 엄격하며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한 ‘내로남불’ 태도다.

남에 대한 비난을 삼가지 않았던 맥아더는 자기가 비판받는 상황을 결코 참지 못했다.

 

그는 자기 공적을 알리거나

대통령 외교 정책을 깎아내리기 위해 언론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면서도,

언론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소송까지 불사하며 강력하게 대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군참모총장 시절 드루 피어슨로버트 앨런 등 두 언론인과 벌인 명예훼손 소송이다.

 

 

1934년

두 기자는 칼럼을 통해 맥아더의 독재자 성향을 비판했는데,

맥아더는 이들을 상대로 “175만 달러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으로 치면 4,200만 달러(약 6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배상 요구인데,

실제 이 돈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단

두 기자와 다른 기자들의 추가 비판을 막기 위한 ‘재갈 물리기’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날 위기에 몰리자,

곧바로 소송을 취하해 버렸다.

피어슨이 맥아더의 전처와 맥아더의 정적을 취재한 결과,

맥아더가 필리핀 근무 시절부터 사귀던 34세 연하 여성을 워싱턴으로 데려와

집을 얻어주며 밀애 관계를 지속해 왔던 것이 밝혀졌다.

 

 

당시 맥아더는 이혼 후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자면 불륜은 아니었지만,

이 밀월 관계에 공직을 이용한 정황이 있고

어린 애인과의 대화에서 루스벨트의 장애를 언급하며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가 매우 곤경에 몰릴 수 있었던 스캔들이었다.

 

 

이 여성은 당시 16세(21세였다는 설도 있다)인 이사벨 로사리오 쿠퍼.

어릴 때부터 배우로 일했던 쿠퍼는

12세 때 필리핀 영화 역사상 최고의 키스 장면을 소화한 이력이 있었다.

 

 

1930년 이혼한 지 1년 정도 지난 상태였던 맥아더는

마닐라에서 어린 배우 이사벨을 만났고,

미국으로 발령(참모총장)을 받자 이사벨을 데리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피어슨이 맥아더와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사벨을 증인으로 부르려는 시도를 하자,

황급히 놀란 맥아더는 기자들과의 소송비용 일체를 부담하고

이사벨에게 거액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했다.

이사벨은 맥아더와 헤어진 후 할리우드로 가서 배우가 됐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육군 원수의 1947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맥아더는

자기 부관(소령) 한 사람에게

기자들과의 소송전, 이사벨의 폭로 대응 등 사적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이사벨이 자기 치부를 공개할 것이란 소식을 듣자,

맥아더는 부관을 보내 워싱턴 곳곳을 수색해 이사벨의 행방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나중엔 이 부하를 시켜 이사벨 측에 1만5,000달러의 합의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상관의 젊은 애인을 찾아 워싱턴 거리를 헤매고

돈으로 상관의 사고를 입막음했던 이 불쌍한 소령은 누구였을까.

바로 연합군총사령관과 미국 재선 대통령까지 오르게 되는 아이젠하워다.

 

 

맥아더는 나중에 이 고마운 부하에게 당시 뒤치다꺼리를 보답하긴커녕,

아이젠하워의 사생활을 꼬투리잡아

충성스럽던 부하의 정치 경력에 큰 상처를 내려고 했다.

 

1948년 대선 당시 아이젠하워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와의 연합전선을 구축(정부통령 후보)하는 동시

아이젠하워가 2차대전 때 비서(케이 서버스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워싱턴 내 아이젠하워의 친구들은

‘그렇게 되면 이사벨과의 스캔들을 폭로할 것’이라며 역공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쿄사령부 당시 맥아더의 사자로 워싱턴에 갔던 아이첼버거의 일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케손의 1942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맥아더가 남긴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은 바로 돈 문제였다.

1942년 1월 미군이 일본군 기습을 받고 바탄반도를 힘겹게 지켜내고 있을 때,

필리핀 대통령 케손으로부터

비밀리에 50만 달러(지금 가치로 987만 달러)의 거액을 받은 것이다.

 

 

이 돈은 케손이 미국 은행에 예치 중이던

과도정부 자금 64만 달러를 꺼내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에게 준 것이다.

참모장 서덜랜드(7만5,000달러), 부참모장 리처드 마셜(4만5,000달러),

전속부관 시드니 허프(2만 5,000달러) 등 맥아더를 추종하던 ‘바탄 갱’들도 거액을 수령했다.

 

 

명목상으로 이 돈은

필리핀 정부가 군사고문으로 일했던 맥아더에게 주는 ‘특별급여’였지만,

하필 일본 침공으로 패망 위기에 몰린 필리핀 정부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왜 맥아더 예전 급여를 챙겨줘야 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케손 입장에선 미국의 군사 지원이 시급했고,

맥아더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리 급하게 돈을 줬을 것이다.

한가하게 옛날 일(군사고문 시절)이나 챙길 때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현안(일본 침공)과 관련한 뇌물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의심된다.

액수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1년 급여가 7만5,000달러였으니,

맥아더가 받은 50만 달러는 거의 대통령의 7년치 연봉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케손을 필리핀 밖으로 탈출시켜 주는 대가로 받은 돈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당시는 미군과 필리핀군 연합부대가

바탄반도에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 방어작전을 하고 있을 때다.

그런 상황에서 바탄 남쪽 코레히도르섬 요새에서 머물던 총사령관이

주둔국 정부으로 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받았다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떠나

매우 파렴치한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다.

 

 

오랜 기간 필리핀 정부에게 도움을 줬던 아이젠하워의 상반된 행동을 봐도

이 돈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나중에 케손은 워싱턴에서 만난 아이젠하워에게도 특별급여 명목으로 돈을 주려고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감사장만 써 주시면 그걸로 족하다”면서 돈을 거절했다.

진짜로 순전한 급여 성격이었다면 아이젠하워가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 수상한 돈 거래는 당대에는 미국 정부 내 소수 인사만 알고 있던 비밀이었지만,

맥아더 사후인 1979년 캐럴 페틸로 보스턴대 교수가

미국 정부 측 송금 확인 자료를 찾아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온갖 훈장과 포상을 전부 자기 자서전에 기록했던 맥아더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받은 ‘특별급여’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가운데) 연합군 남서태평양 사령관과 조지 마셜(오른쪽) 미 육군참모총장이 1943년 작전 지역을 함께 둘러보고 있다. 왼쪽의 중장은 당시 맥아더 휘하의 6군사령관 월터 크루거. 미 해군

 

 

 

 

 

“맥아더는 (자신의 라이벌) 마셜이 가라앉기만 한다면

국가라는 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도 좋아할 인간이다.”

- 맥아더 부하 아이첼버서의 일기 중에서 -

 

 

 

 

제12면 선사후공 : 언제나 내 일이 먼저

마지막으로 살펴볼 맥아더의 특성은 선사후공_先私後公이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 군의 이해나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의 명예·인연·체면을 앞세웠다.

 

이 특징은 그가 필리핀을 보는 관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맥아더는 아버지가 총독을 지내고 자신도 군사고문(원수)를 역임한 필리핀을

‘개인 영지’ 정도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정부가 볼 때 필리핀은

일본의 태평양 팽창을 막을 교두보 성격의 지정학적 요충지였지만,

맥아더 입장에선 그저 ‘내 세력권’이니 지켜야 한다는 당위적 인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정부로부터 뇌물 성격의 자금 50만 달러를 받으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맥아더가 필리핀 문제에서 자각하고 있던 특별한 우월감을 짐작할 수 있다.

 

 

필리핀을 향한 맥아더의 개인적 집착은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 본토를 공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미 해군은 굳이 필리핀에 상륙해 치열한 지상전을 치를 필요 없이

태평양 주요 섬만 차례차례 점령해 일본 본토를 폭격 사정권에 둔 다음,

일본 열도를 곧바로 공략하자는 접근법을 주장했다.

 

 

미군이 전쟁 중반 이후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제해·제공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 항구와 비행장만 점령하는 식으로도 전쟁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온 전략이다.

팔라우(필리핀 민다나오섬 동쪽)와 마리아나제도(괌·사이판 등)만 차지하면

필리핀 없이도 일본을 사정권에 둘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굳이 뉴기니섬과 필리핀 제도를 거쳐 일본으로 올라가는 길을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필리핀을 우회한다면,

미군 포로와 충성스러운 필리핀인들을 적의 수중에 내버려둔다면,

더없이 엄중한 심리적 반발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미츠와 다른 전략가들이

‘어떻게 하면 가장 희생을 줄이면서 단기간 내에 전쟁을 끝낼 것인가’를 놓고

철저히 군사적 고민을 했다면,

맥아더는 미국의 위신과 자신의 체면을 고려한 정치적 접근을 했던 것이다.

맥아더가 주장한 필리핀 탈환전을 두고

다른 군사전략가들은 “도쿄로 가는 가장 느린 길”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육군 소속의 마셜(참모총장)마저 필리핀 루트에 회의적이었다.

 

 

맥아더가 필리핀 탈환전을 미국의 전쟁 전략이 아니라

‘개인적 과업’ 차원에서 인식했다는 단서는 또 있다.

그는 1942년 필리핀을 탈출해 호주 애들레이드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을 만나

“나는 돌아갈 것입니다(I shall return)”라고 강조했는데,

 

이 발언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연설에 이어

맥아더가 남긴 말 중 두 번째로 유명한 말로 꼽힌다.

 

그 당시 맥아더의 메시지를 사전에 파악한 미 전쟁정보국(OWI·전시 선전 및 검열 담당 기관)에서

‘나(I)’를 ‘우리(We)’로 바꿔달라는 부탁했지만,

맥아더는 끝내 거부하고 필리핀 탈환은 ‘나의 일’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맥아더는 끝내 필리핀 탈환전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루스벨트는 1944년 7월 육군과 해군 주요 사령관들을 하와이에 모은 뒤

양쪽 의견을 다 반영하는 쪽으로 어정쩡한 합의를 이끌었다.

 

그래서 미군은 전체 병력을

니미츠 사령부와 맥아더 사령부 둘로 나누어 양쪽으로 도쿄를 향해 밀고 올라가야만 했다.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개인 감정, 필리핀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쟁 조기 종결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훼손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 조지 마셜 당시 육군참모총장 -

 

 

 

맥아더의 필리핀 집착은

1945년 3월 마닐라를 수복하고서도 계속됐다.

해군과 힘을 합쳐 일본 본토 공략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었지만,

맥아더는 돌연 ‘필리핀 제도의 완전 회복’을 전략 목표로 제시하며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다른 섬 장악 작전을 시작했다.

 

 

이때 맥아더는 거짓 보고로 합참을 속였다는 의혹을 받는데,

합참에는 “필리핀군이 미수복 지역을 되찾을 것”이라고 보고한 다음

정작 필리핀 7개 섬 수복 작전에 미군을 동원했다.

 

맥아더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전기를 쓴 클레이턴 제임스

“맥아더는 그저 개인적으로 필리핀의 해방자가 되고자 했을 뿐”이라고

이 군사작전을 평가했다.

합참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승장을 해임할 수는 없어 하는 수 없이 맥아더 작전을 사후 승인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워싱턴이 왜 이렇게까지 일선 장군의 허위보고와 항명을

그대로 참고만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현장 사령관이 대통령과 합참을 농락한 사실이 확인됐을 때

곧바로 해임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5년 후 6·25 전쟁에서 맥아더의 독단과 오만으로 인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대독 전쟁)과 태평양(대일 전쟁) 양쪽에서

국력을 갈아넣어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던 미국 정부(민주당 루스벨트) 입장에선,

공화당과 보수 진영의 지원을 등에 업은 맥아더를 해임했을 경우

국론 분열로 이어지는 상황만은 피하려고 했다.

 

 

맥아더도 루스벨트가 자신을 쉽게 자르지 못할 것이란 점을 알고서

항명과 복종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 나갔다.

맥아더가 계속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익을 공익처럼 보이게 하는’ 그의 특출한 포장 능력 덕분이다.

 

맥아더는 자신의 욕망을 ‘미국의 이익’이나 ‘미국의 자부심’

그럴듯한 외피로 숨기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자신의 개인적 열망이 투영된 필리핀 탈환전을 앞두고는

“우리에겐 (1941년 일본군에게 습격을 당한) 빚을 갚아야 할 국가적인 책임이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1941년 3월

필리핀 군사고문보다 한 단계 높은 고등판무관(과거의 총독 지위)이 되려는 마음에서

루스벨트 측근에게 스스로를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맥아더는 자신이 증오하는 루스벨트를 치켜세우며

“필리핀과 아시아 문제에 정통한 저의 자산을 대통령께서 활용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자신의 자리 욕심을 정권에 필요한 자질로 절묘하게 치환한 것이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나열했던 맥아더의 열 두 가지 특징을 잘 기억해 두자.

앞으로 두 편에 걸쳐 서술할 맥아더의 한국전쟁 행보(1950년 6월~1951년 4월)에는,

우리가 12면체 탐구를 통해 파악한 이 특징들이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방식으로 맥아더의 사고행동에 반영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희대의 전쟁영웅이 그렇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는지,

누가 봐도 질 게 뻔했던 대통령과의 싸움을 왜 계속 이어나가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회에선 맥아더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다룬다.

성공의 절정이었으나 몰락의 시작이었던 사건.

역사상 최고로 모험적이었고, 가장 독단적이었으며,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썼으나,

손꼽히게 성공적이었던 상륙작전. 바로 1950년 9월 인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참모, 휘하 사령관들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며 함께 웃고 있다. 왼쪽부터 제임스 도일 해군 소장(TF90 사령관), 에드윈 라이트 육군 준장(극동사령부 작전참모), 맥아더,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맥아더 참모장).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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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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