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한국전쟁_인천, 그리고 서울 1

원제 : 인천 상륙에 7만 명 목숨 걸고... 맥아더, 사상 최대 도박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미 육군

 

 

 

 

 

 

 

“자네, 언제까지 그 참호 속에 있을 겐가?”

 

 

 

 

매캐한 포연 속 최전방에 최고사령관이 나타났다.

이곳은 영등포 동양맥주 공장 옆 야트막한 언덕.

여의도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북한군의 120㎜ 박격포탄이 수시로 내리 꽂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언덕을 오르던 미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참호 속 한국군 일등중사(하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맥아더가 보기에 일등중사 운명은 매우 위태로웠다.

맥아더는 저 일등중사의 목숨,

더 나아가 한국군 전체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 건너 서울 북쪽은 이미 전날 북한군 손에 떨어졌고,

폭격과 포격 여파로 도시 이곳저곳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개전 직전 10만 명에 달했던 한국군단 나흘 만에 2만5,0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한 파죽지세 북한군은 한강 *남안으로 *도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시흥전투사령부가 부랴부랴 낙오병을 재편성해 남안에 진을 쳤지만,

이렇게 얇은 방어선으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여기가 한국군 최전방인 동시 유일한 방어선이었다.

그러니까 김홍일 부대마저 뚫리면 한국은 끝이었다.

 

 

 

걱정스럽게,

그리고 한국군의 임전 태세가 어느 정도일지를 가늠해 보고자,

맥아더는 일등중사에게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돌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당시 맥아더의 통역을 담당했던

김종갑 대령(당시 시흥사령부 참모장·이후 중장 예편)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의 질문을 받은 일등중사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르는 법입니다.

상관의 철수 명령이 있던가, 아니면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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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안_南岸 : 남쪽 방향의 언덕. 여기서의 의미는 강남쪽  방향의 한강 이남 언덕을 뜻함.       : 남쪽 남 ,  : 언덕

도강_渡江 : 강을 건넘(도하_渡河와 같은 의미), 군대의 작전용어로는 '도하작전'이라고 함.  : 건널 도 , : 강 , 河: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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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앞좌석)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맥아더 뒤) 미8군사령관,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인 도일 히키 소장(운전석 뒤)이 1951년 4월 3일 강원 양양 지역을 순시하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① 영등포 6월 29일: ‘통찰’의 힘

 

답을 들은 맥아더는 일등중사 어깨를 두드리며 통역관 김종갑을 통해 약속했다.

“그에게 말해 주게. 내가 곧 도쿄로 돌아가 지원 병력을 보낼 테니, 안심하고 싸우라고.”

맥아더는 진짜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 일등중사도 틀림없이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이날은 1950년 6월 29일, 6·25 전쟁 다섯 번째 날이다.

당시 동양맥주 공장영등포역 바로 옆에 있었는데, 지금 영등포공원 자리다.

이곳엔 시흥전투사령부 산하 수도사단 8연대 3대대참호를 파고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군 기록을 보면

이날 맥아더는 맥주 공장 옆 언덕에 올라

약 20분(맥아더 회고록엔 1시간) 동안 강 건너편을 유심히 바라봤다고 한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 ‘회상(reminiscence)’에서

“한강에서 본 한국군은 이미 방어 능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서울에서 시작해 한반도 끝 부산까지, 공산군의 전차를 막아설 것이 전혀 없었다”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맥아더의 이 전선 시찰은

6·25 전쟁 초반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이미 1949년 철수했고,

한국군 자문을 위해 479명(장교 176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운영하고 있었다.

북한군을 막을 미군 전투 병력은 한반도에 없었고,

가장 가까운 일본에 맥아더 휘하 4개 사단이 있었다.

맥아더가 일등중사에게 약속한 이 ‘지원 병력’은 주일미군(미8군)을 말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한국군이 직접 싸우는 것을 봐야만

미 지상군 투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례적으로 최전방을 방문하는 위험을 무릅썼다.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이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연 미국 해공군으로만 충분할 것인가?

미군 지원을 받는 한국군이 북으로부터 밀려오는 전쟁 기계에 맞서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군 지상군이 전면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인가?

이걸 판단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가서 보는 것이었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맥아더의 한강 방문

미국 정부가 기존 방침을 뒤집고

한반도에 지상군을 전쟁 초기부터 신속하게 파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맥아더는 서울에서 도쿄로 돌아가자마자

“한국군 방어 능력이 사라져 미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전문을 본국에 타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리 트루먼 행정부“해·공군만으로 한국을 지원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맥아더 보고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6월 30일 1개 연대전투단(정규 보병연대+포병·방공포·공병 등 소규모 부대) 투입을 곧바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쟁 7일째 7월 1일 미군 선견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나중에 노획된 문서 등에 따르면

전쟁 직전 북한과 소련은 미군 전투병력 증원까지 최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고,

미군 투입 전에 이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적시에 최전선을 방문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미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면서,

북한의 속전속결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군은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해 경무장한 군대일 뿐,

기갑이나 공군 공격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한국군은 반격할 능력이 전혀 없다.

적이 계속 전진해 온다면 이 공화국은 심각한 몰락의 위기에 빠질 것이다.”

- 1950년 6월 29일 한강 시찰 후 맥아더가 기자에게 한 말 -

 

 

 

 

 

1944년 10월 20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대장이 휘하 장병들을 이끌고 필리핀 레이테섬에 상륙하고 있다. 맥아더가 2년 반 만에 필리핀을 수복한 모습을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맥아더는 극도로 오만한 인간이었고 뼛속까지 정치군인이었으나,

군사적 천재성과 감각만큼은 ‘역대급’이라고 할 정도로 탁월했다.

 

천재성은 20분 짧은 시찰 동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6월 29일 한강 남쪽에서 서울 시내 쪽을 바라보던 동안,

맥아더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 스쳐갔다.

한국군이 한강 남안에서 버티는 동안 미군 2개 사단을 신속하게 증원해

서울 남쪽에 견고한 방어선을 펼쳐 전선을 고착한 다음,

상륙작전 훈련을 받은 미군 1개 사단(1기병사단)으로 서해안을 우회 상륙해

북한군 배후를 치는 반격이었다.

 

 

맥아더가 그때 이미 ‘인천’을 염두에 뒀는지,

아니면 ‘서울 근처’를 상륙지로 고려했는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두 달 반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현실화되는 대규모 반격 작전의 원형을

전쟁 5일 차에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맥아더가 돋보였던 점은 남들보다 훨씬 멀리까지 내다보는 통찰력이다.

모두들 ‘어떻게 이걸 막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하던 최악의 상황에서,

맥아더 혼자서만 몇 수 앞을 예측하고 언젠가 미래에 있을 ‘반격 작전’을 떠올린 것이다.

기약 없는 후퇴의 순간 난데없이 승리를 상상한 맥아더 특유의 낙관주의가 빛을 발했다.

 

 

맥아더에게 상륙작전은 매우 친숙한 역공법이다.

그가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결이 바로 이 상륙작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호주→뉴기니→필리핀 축선의 모든 섬을 점령하는 대신,

방어가 잘 된 섬을 피하고 준비 태세가 비교적 허술한 섬에 상륙하는

개구리 뛰기(leap frogging·섬 건너뛰기라고도 한다) 작전을 쓰며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

적의 배후를 단숨에 쳐 보급선을 끊은 뒤,

사기가 떨어지고 장비·물자가 부실한 적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게 맥아더의 장기였다.

대양에서 성공을 거둔 이 작전 개념을 대륙인 한반도에서 응용해 보려 했던 것이다.

 

 

머리를 스친 맥아더의 ‘한강 구상’은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가 상륙작전에 진심이었다는 점은 그의 이후 행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쿄로 돌아온 다음 맥아더는

참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상륙작전 검토를 지시했고,

7월 2일 맥아더 사령부는

‘블루하트(Blueheart)’라는 작전명으로 한반도 상륙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7월 22일 상륙작전 실행을 목표로 7월 4일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블루하트 작전을 그대로 끌고 가기엔 전황이 너무 빠르게 나빠졌다.

처음으로 투입된 미 지상군 부대인 24사단은 오산, 금강(지금의 세종), 대전에서 차례로 무너졌고,

미군과 한국군은 끝내 소백산맥 동쪽으로 밀려났다.

상륙은커녕, 뚫린 방어선을 메우기에도 병력이 모자랐다.

전선 고착 부대 중 하나였던 미24사단은 사단장(윌리엄 딘 소장)까지 포로로 잡히며 와해됐고,

상륙부대로 지정됐던 미1기병사단은 낙동강 방어에 투입됐다.

상륙을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라 블루하트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인천 상륙 후 서울 타격’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50년 7월 5일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24사단 소속 케네스 셰드릭(오른쪽) 일병이 경기 오산 인근에서 로켓 발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셰드릭 일병은 이 사진 촬영 수 초 후에 사망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인천 장악은 서울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이다.

낙동강에 몰린 북한군의 후방을 끊고, 병력 강화와 재보급을 막을 수 있다.

그때 월튼 워커의 8군이 앞으로 튀어나오면 된다.

인천 상륙 구상은 그 단순함, 우아함, 명료함에서 숨이 막힐 듯 훌륭했다.”

- 미국 전쟁사학자 스티븐 타페 -

 

 

 

② 도쿄 8월 23일: ‘웅변’의 가치

 

알고 보니 맥아더는 블루하트보다 훨씬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1950년 8월로 접어들며 낙동강 방어선에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야 했지만,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계속 염두에 두고 참모들에게 구체적 계획 수립을 독려했다.

새로운 상륙작전에 ‘크로마이트’(크롬철광)라는 이름을 붙이고,

오히려 상륙군 규모를 ‘사단급’에서 ‘군단급’(2개 사단 이상)으로 확대했다.

1기병사단 대신 상륙 전문 부대인 미해병대 1개 사단을 넣고,

후속 부대로 미육군 1개 사단을 상륙시키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상륙 후보지는

서해안에선 인천 군산 진남포(북한 남포시), 동해안에선 주문진이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상호에 따르면,

크로마이트 작전은 총 네 개의 시나리오로 구성돼 있었다.

100-A 계획군산에 상륙하는 작전이다.

 

미 상륙군단이 군산을 점령한 후 대전까지 동진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워커의 8군이 대구에서 출발해 추풍령을 넘어 대전에서 상륙군과 합류한다.

그러면 북한군을 한반도 남쪽에서 포위하고 격멸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다음 100-B 계획실제 역사로 구현된 인천 상륙이다.

미군 2개 사단이 인천으로 들어가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의 북한군 증원을 막는 사이(모루 역할),

망치 역할을 맡은 워커의 8군이 모루에 고착된 북한군을 내려치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100-C 계획은 인천 상륙 후 필요시 군산에 추가 상륙을 하는 것,

100-D 계획인천과 주문진을 통해 동서해안으로 동시 상륙을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100-C와 100-D는 인천 상륙의 보조 작전에 불과한 셈이어서,

결국 상륙 후보지는 인천 아니면 군산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당시 8군사령관 워커,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가 군산을 밀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어려웠던 7가지 이유

 

 

 

 

 

 

 

“상륙작전에서 피해야 할 환경을 모두 모아 리스트를 만든다면,

그게 바로 인천의 모습이 될 것이다.”

- 당시 상륙 계획에 참여한 어느 해군 장교의 촌평 -

 

 

 

 

 

 

 

맥아더가 인천으로 가려면 ‘전문가의 벽’부터 넘어야 했다.

2차 대전 내내 이골이 나도록 상륙작전을 반복했던 해군·해병대 장교들이 볼 때,

인천은 절대로 상륙작전만은 피해야 할 최악의 후보지였다.

 

인천항은

① 지형상 좁은 수로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수로가 포격 사정권에 들어오거나 기뢰로 방해받으면

    제아무리 최강 미해군이라도 손쉽게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다.

 

② 또 최대 9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공격군 입장에선 하루 2회 밀물이 들어왔을 때만 상륙이 가능하고

 

③ 방어군 입장에선

     인천항을 가로막은 천연 성벽 월미도(당시는 완전한 섬이었음)에서

     철벽 방어를 할 수 있었다.

 

④ 또한 당시 인천 해안에는

     높이 4m가 넘는 콘트리크 구조물(안벽)이 길게 깔려 있어

     상륙정이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⑤ 해안 바로 옆 인구 25만 명의 도심지가 이어지기 때문에 상륙 직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러야 했다.

 

⑥ 게다가 어렵게 인천을 차지하더라도

     최종 목표인 서울을 점령하려면

     한강에서 다시 한번 상륙작전과 유사한 도하작전을 해야 했다.

 

⑦ 마지막으로 9월 중순은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태풍이 빈발하는 시기여서,

     대규모 함대가 일본에서 출발해 한반도에 상륙하는 과정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맥아더는 상륙 전문가들의 반대 말고도

합동참모본부(당시 구성원은 합참의장+3군참모총장)의 회의적 시각도 함께 극복해야 했다.

우선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부터가 상륙작전 회의론자였다.

 

브래들리는 6·25 전쟁 발발 8개월 전인 1949년 10월

미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2차 대전 때와 같은) 대규모 상륙작전은 앞으로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압도적 핵무기와 가공할 공군력을 보유한 이상,

인명 피해가 큰 상륙작전을 굳이 시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전략폭격을 통한 공군 만능주의를 추구하던 공군참모총장 호이트 반덴버그도 같은 의견이었다.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은 상륙 자체엔 동의했지만

맥아더의 극동사령부(육군 위주)가 주도하는 작전에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맥아더의 직속 상관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인천 대신 군산에 상륙해야 병력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워싱턴 정책 결정자와 해군의 상륙작전 실무자가 모두 ‘인천’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튼 워커 장군의 군산상륙작전 계획

 

 

 

 

 

 

 

 

반면에

맥아더는 처음부터 인천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인천은 여러 가지 지형적 단점을 안고 있었지만,

일단 상륙에 성공하기만 하면 곧바로 서울을 노릴 수 있는 서해안 최고 요충지였다.

 

당시 북한은 서울을 헌법상 수도로 명시해 두고 있었고,

전쟁 중엔 낙동강 전선 공략을 위한 병력 집결지 및 장비 보급처로 서울을 활용하고 있었다.

서울을 단시간 안에 수복할 수 있다면,

유엔군은 북한에 정치적·심리적 타격과 군사적 손실을 동시에 가할 수 있었다.

 

 

남들은 다 안 된다고 했지만,

맥아더는 큰 승리를 위해선 하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국가적 자존심, 막대한 전비,

수만 명 유엔군 장병의 목숨을 담보로 내건 지상 최대의 도박이었다.

도박판으로 가려면 워싱턴의 상관들과 도쿄의 부하들을 동시에 설득해야 했다.

“인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반대 의견을 단숨에 반전시키기 위해,

맥아더는 화려한 뒤집기 쇼를 준비했다.

1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위치한 도쿄 중심가 다이이치(第一) 빌딩이 맥아더의 무대였다.

1950년 8월 23일이다.

 

 

 

“당시 우리는 맥아더가 부산 교두보를 지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지금 당장 부산이 위험한데,

상륙에 그렇게 많은 공을 들이는 게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천 상륙은 너무나도 위험한 기동이어서,

실패했을 때 한 나라의 재앙을 넘어 국제적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 당시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회고록 중에서 -

 

 

 

 

 

 

1950년 8월 21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가 상륙작전 회의를 위해 도쿄에 도착한 로턴 콜린스(왼쪽) 육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오른쪽) 해군참모총장의 팔짱을 낀 채 반가워하고 있다. 미 해군

 

 

 

 

 

미 합참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맥아더가 “9월 중순 인천에 군단급 병력을 상륙하겠다”고 계속 고집했지만,

합참이 볼 땐 성공 가능성이 낮은 도박임에 분명했다.

 

그렇다고

당시 미군 내 최고 전쟁영웅의 요구를 명령서 한 장으로 물리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육해공 지휘부를 현지에 보내 맥아더 얘기를 직접 듣고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해군참모총장 셔먼,

공군참모부장 이드월 에드워즈 중장 등 11개의 별이 워싱턴에서 도쿄로 날아갔다.

태평양사령관 아서 래드포드 제독(대장),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제독(중장),

7함대사령관 아서 스트러블 제독(중장),

극동공군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

8군사령관 워커 중장,

상륙전 전문가 제임스 도일 제독(소장) 등도 도쿄에 모였다.

2차 대전 이후 이렇게나 많은 별이 한 회의실에 모인 적은 없었다.

 

 

 

회의는 8월 23일 오후 5시 30분 시작됐다.

8명의 해군 장교가 각 분야에서 8분씩 브리핑을 이어갔다.

작전 개요, 상륙 환경, 피아 전력 비교, 위험 요소,

작전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 등을 상세히 평가했다.

역시나 인천에 대해선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특히 해군의 반대가 심했다.

썰물 때 뻘밭이 3㎞ 이상 펼쳐져 함정이 고립될 수 있는 바닷가,

상륙지 바로 옆에 시가지가 위치해 있어서

어디로 부터 어떤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해안에 함대를 밀어 넣고 싶어 하는 제독은 없었다.

 

해군은 조수의 간만의 차가 상대적으로 덜하고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포승면(평택)을 대체지로 꼽았다.

 

발언을 이어간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의 선택은 여전히 ‘군산’이었다.

2차 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양쪽 전선에서 맹활약했던 명장 콜린스도 상륙작전엔 일가견이 있었다.

6년 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선봉 7군단의 군단장이었던 콜린스는

인천이 상륙 지점으론 낙동강 방어선에서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출발하는 8군, 인천에 내린 상륙군단이 경기나 충청 어딘가에서 만나기 전에

북한군이 포위망을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

군산에 상륙하면 워커 8군과 상륙군단 사이 거리를 좁힐 수 있어,

모루(상륙군단)에 망치(8군)로 후려치는 시점을 훨씬 앞당길 수 있다.

서울 수복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인천 상륙보다 더 신속하게 북한군 잔당을 섬멸할 수 있는 상륙지가 바로 군산이었다.

 

 

당시 워커를 수행한 전용기 조종사 마이크 린치 대위의 회고에 따르면,

콜린스는 이 회의 직전 한국 전선을 시찰했을 때 워커와 상륙 후보지를 논의하면서

‘군산이 가장 적합하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본 상태였다.

 

 

 

 

오픈AI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달리로 만들어 본 맥아더의 초상화. 다면적 인간인 맥아더를 나타내기 위해 피카소의 입체파 화법으로 맥아더의 얼굴을 표현했다.

 

 

 

 

 

“군산 상륙은 위험이 적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가치도 적다.

거기를 때려봐야 적의 보급선이 끊기지 않을 것이다.”

- 육해공군 지휘부에 인천 상륙을 역설하는 맥아더 -

 

 

 

 

맥아더는 해군 장교들과 콜린스의 말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맥아더의 발언만 남겨두고 있었다.

모두가 맥아더를 지켜보고 있었다.

맥아더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느긋하게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쏟아지는 좌중의 시선을 좀 더 즐겼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판단한 순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는 화려한 언변을 무기로,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전설적 전쟁 영웅의 아우라를 방패 삼아,

맥아더의 ‘쇼타임’이 시작됐다.

 

 

그는 인천 상륙을 걱정하는 워싱턴과 해군의 지적은 이해가 가지만,

가장 효과적인 상륙 목표가 인천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군산이나 포승면에 상륙해선 북한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자신은 해군이 이번에도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작전 성공을 확신한다면서,

가장 반대가 심했던 해군 제독들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원맨쇼는 45분 동안 이어졌고,

처음에 나직하고 온화하던 맥아더의 목소리는 결론을 향해 갈수록 점점 웅변조로 커지고 있었다.

 

 

“서울을 장악함으로써 나는 적의 보급 체계를 완전히 마비시키려고 하오.

작전 당일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상륙작전을 현지에서 중단시키겠소이다.

그러면 잃게 되는 것은 내 평판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천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오.

인천은 성공할 것이고, 이 작전은 10만 명의 목숨을 구할 것이외다.”

맥아더의 발언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발언이 시작될 때처럼,

말이 끝나고서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맥아더의 역전승으로 끝난 게임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장교는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다”

“역사에 남을 일을 직접 목격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워커파일럿 린치 대위

“워커 장군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맥아더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혼자서 인천을 고집하던 맥아더가 결국 인천을 관철시킨 뒤집기 한판승이었다.

합참이 크로마이트 작전을 최종 승인한 것은 9월 8일이었지만,

이날 맥아더의 원맨쇼 이후 인천 이외 상륙지를 언급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결국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기로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두 번째) 유엔군사령관이 1950년 9월 15일 상륙지휘함 마운트 맥킨리호에서 인천상륙작전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맥아더 왼쪽에서 망원경으로 전방 상황을 확인하는 사람이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맥아더한국전쟁_인천, 그리고 서울 2

원제 : 인천에서 '전쟁의 신' 반열 오른 맥아더... 자만 못 참고 '벌거벗은 임금님' 되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참모, 휘하 사령관들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며 함께 웃고 있다. 왼쪽부터 제임스 도일 해군 소장(TF90 사령관), 에드윈 라이트 육군 준장(극동사령부 작전참모), 맥아더,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맥아더 참모장).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맥아더의 계획이 합참에 올라왔을 때 의구심을 품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상륙이 성공하는 순간까지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단순한 군사적 천재가 아니었다.

반대자까지 열광적으로 지지하게 만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당시 미 육군참모부장 매슈 리지웨이 중장 -

 

 

 

 

 

 

③ 인천 9월 15일: ‘도박’의 승리

상륙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천상륙작전은 260여 척의 함정을 이용해 7만5,000명의 상륙부대(미 10군단)를

한 지점에 단시간 밀어 넣어야 하는 초대형 고난도 군사작전이었다.

 

 

이런 대규모 상륙작전은

최소 수개월에서 최대 1년 이상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미군 매뉴얼상으로 이런 정도의 상륙작전을 하려면

160일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인천상륙작전

8월 12일 맥아더로부터 작전 수행 지시를 받고 9월 15일 실제 작전을 실시했다.

불과 34일 만에 합참과 해군 제독들을 설득하고,

1개 군단(10군단)을 완전히 새로 창설했으며,

이 대병력이 쓸 무기·장비·물자·선박을 준비하는 데 성공했다.

 

 

부족한 미군 병력을 채우기 위해

한국군 8,600여 명을 일본으로 데려와 긴급하게 훈련시킨 뒤

미7사단에 편제(카투사의 시초)했다.

그 와중에 인천 상륙을 숨기기 위해

진남포, 군산, 동해안에 상륙할 것처럼 기만작전을 벌이는 작업도 병행했다.

 

 

2차대전 때

최대 1,200만 명의 대병력을 굴리던 미군의 인사·정보·작전·군수 역량이 최대한으로 발휘되기도 했지만,

맥아더가 위로는 워싱턴을 설득하고

아래로는 참모들에게 신속한 계획 수립을 독려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2차대전에서도 맥아더가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맥아더의 창의성, 뚝심, 임기응변 능력 등의 장점이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면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희대의 천재가 노력과 준비성까지 갖추면

단시간 안에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었다.

상륙작전 준비의 마지막 순간,

맥아더는 ‘합참이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면 어쩌나’하는 조급한 마음에

해서는 안 될 큰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인천 상륙부터 서울 탈환까지.

 

 

 

 

 

 

“인천은 해군을 싫어하는 사악한 천재들이 만들어낸 도시였다.

항구였지만 안벽과 부두만 있고 해변이 없었다.

월미도는 수비대를 주둔하기에 적합했고, 이 섬 때문에 상륙 병력이 둘로 나뉘었다.

물살은 빠르고 거셌다.

더 큰 어려움은 최대 9m에 이르는 조수였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중에서 -

 

 

 

 

맥아더의 실수

합참을 철저히 무시하고 합참의장과 3군참모총장을 모두 적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상륙작전 장소를 숨기기 위해 적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동시에 아군 최고지휘부를 배제하고 혼란에 빠트리며 선을 한참이나 넘어 버렸다.

 

이것은 군의 지휘 체계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맥아더가 합참 구성원보다 계급이 높았고 군 경력도 선배였지만,

전구사령관으로서 합참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애초 합참이 ‘인천 상륙’에 반대하긴 했지만,

맥아더가 상륙 준비에서 본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합참 구성원들이 어쨌든 승리를 위해 맥아더를 믿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런 합참의 은공을 무시하고,

합참을 인천상륙작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세력으로만 간주했다.

 

 

합참이 상륙 작전의 구체적 계획을 보고하라고 여러 차례 도쿄사령부에 통보했음에도,

맥아더는 이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

상륙 당일(D-데이)인 9월 15일이 가까워지는데도 세부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다.

결정적인 잘못은 D-데이 당일까지도 합참을 고의적으로 속이려고 했다는 점이다.

 

 

작전 계획을 알려 달라는 합참 요구가 계속되자,

도쿄사령부는 불과 며칠 전에야

“고위 장교(senior officer)를 워싱턴에 직접 보내 작전 계획을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이때

맥아더는 작전 계획을 들고 워싱턴으로 가는 린 스미스 중령에게

최대한 천천히 펜타곤에 도착할 것을 주문했다.

합참이 세부 작전 계획을 보고 수정 명령을 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사보타주 전술을 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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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타쥐_Sabotage : 조직, 시스템, 장비, 또는 활동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를 의미(거의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행해짐)

                어원(프랑스어)

                                    흔히 나무 신발을 뜻하는 'sabot(사보)'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으며,

                                    과거 노동자들이 기계를 망가뜨리기 위해 신발을 던졌다는 이야기와 연결되기도 함.

                의미와 특징

                                   고의성 :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행함.

                                   은밀성 : 드러나지 않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음.

                                   피해 유발 : 생산성 저하, 시스템 오류, 경제적 손실 등 발생.

                다양한 유형

                                   산업 사보타쥐 : 공장, 회사 내부에서 기계나 작업을 방해.

                                                             (예) 장비 고의 파손, 작업 지연.

                                   정치적 사보타쥐 : 정부, 조직, 정책 등을 약화시키려는 행동.

                                   군사적 사보타쥐 : 전쟁 중 적의 시설이나 보급을 파괴.

                                   사이버 사보타쥐 : 해킹, 데이터 삭제, 시스템 장애 유발.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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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 구성원. 왼쪽부터 포레스트 셔먼 해군참모총장,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호이트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자서전 'War in Peacetime'.

 

 

 

 

 

 

 

스미스 중령이 펜타곤에 도착한 것은 상륙작전 개시 불과 8시간 전이었다.

합참 장군들은 맥아더가 보낸다던 ‘고위 장교’

참모장(소장)이나 작전부장(준장)이 아닌 ‘중령’이었다는 것에 놀랐지만,

일단 스미스를 향해 질문을 이어갔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오늘이 D-데이 아닌가”라며

“상륙시간(H-아워)은 언제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합참은 그제야 6시간 후 인천에서 상륙작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인지했다.

 

 

합참은 어쩔 수 없이 맥아더의 작전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인천 상륙이 대성공으로 끝났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징계나 문책을 하기도 어려웠다.

합참은 맥아더의 기만 작전을 흐지부지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합참의장과 3군참모총장 입장에서

맥아더의 ‘고의적 합참 배제’는 매우 모욕적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맥아더가 자존심이 강하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합참 구성원들은

맥아더가 국가안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일하는 ‘동료’일 것이란 점은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맥아더는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동료 장군들을 바보로 만들 수 있는 냉혈한이었던 것이다.

 

 

브래들리(합참의장),

콜린스(육군총장),

셔먼(해군총장),

반덴버그(공군총장)는 이 치욕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7개월 후 복수했다.

 

1951년 4월 트루먼이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해임하려고 했을 때,

합참 구성원 중 누구도 맥아더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저마다 2차대전 전쟁영웅이었던 합참 구성원들의 만장일치 해임 의견은 트루먼에게 큰 힘이 됐다.

 

 

 

 

“상륙 전날 밤, 지휘함 선실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두 시간 동안 맥아더는 욕실 가운을 입은 채 혼자서 토론하는 것처럼 독백을 했다.

인천 상륙과 자신의 2차대전 경험을 비교하며 인천 상륙의 장점과 단점을 세세하게 읊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군사적 실패로 기록될 수도 있다고 하다가,

그래도 이걸 하지 않으면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속 사람이 죽어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맥아더는 혼자 결론을 냈다.

인천 상륙은 정상적 판단이고, 위험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 클레이 블레어 'The Forgotten War' 중에서 발췌 -

 

 

 

 

 

 

1950년 9월 15일 미 5해병연대 A중대 3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가 사다리를 타고 인천항 안벽을 최선두에서 넘고 있다. 로페즈 중위는 저 사진이 촬영된 지 몇 분 후 전사했다. 미해군 역사유산사령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주사위는 던져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맥아더마저 극심한 부담감을 느꼈던 상륙 전야가 지나고,

1950년 9월 15일 D-데이 날이 밝았다.

 

미군 등 유엔군 소속 함정 19척이 야음을 타고 들어와

이미 인천 인근 바다에 포진해 있었다.

이 중 순양함 6척, 구축함 6척이 인천항 가까이 들어왔다.

덩치가 큰 순양함들은 해안에서 약 4㎞ 지점에서,

기동성이 좋은 구축함들은 바닷가 240m 지점에서 대기 중이었다.

 

 

상륙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월미도.

지금은 월미도가 간척사업 덕분에 인천역과 육지로 연결돼 있지만,

당시는 완전한 섬이었고 가느다란 방파제를 통해서만 인천 본토로 이어져 있었다.

 

월미도는 인천항을 외곽에서 거의 완벽하게 방어해 주는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무조건 월미도를 차지한 다음 인천 시가지 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전 밀물 두 시간 동안 월미도를 장악하고,

다음 썰물인 늦은 오후에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이중 상륙 작전’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작전의 성패는 월미도를 얼마나 빨리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미 미군은 상륙 이틀 전인 13일부터 월미도 북한군 기지를 맹폭했는데,

13일엔 해병대의 커세어 전투기가 월미도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고,

14일엔 해군기가 그 섬을 유린했다.

 

함포와 전투기를 통한 포격·폭격이 월미도에 집중되다 보니,

섬 지형이 달라져 조종사들이 목표 지점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월미도 작전에 참가한 해군 파일럿 에드워드 올브라이트 소위

“어제까지만 해도 풀과 관목으로 덮여 있던 곳이었는데,

오늘 가 보니 풀은 다 사라지고 나무 몇 그루만 남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오와급 전함 위스콘신호가 1952년 한국 해안에서 함포사격을 하고 있다. 미 해군

 

 

 

 

 

 

상륙 당일에도 함포사격은 월미도에 집중됐다.

마지막 포탄이 떨어진 시간이 오전 6시 29분.

거짓말처럼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진 4분이 지난 뒤,

오전 6시 33분 미해병1사단 선봉인 5해병연대 3대대가 월미도 녹색해안에 도착했다.

 

 

해병들은 긴장한 채로 상륙했지만 섬에선 큰 저항이 없었다.

함포 포격과 전투기 폭격 때문에 북한군 방어 병력이 아예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해병1사단 작전참모 알파 바우저 대령

“북한군은 포격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면서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아니면 충격을 받은 상태로 주변을 휘청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상황을 묘사했다.

 

 

 

상륙 1단계 월미도 제압 작전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첫 상륙 22분 후인 6시 55분 월미도 언덕에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제야 맥아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륙지휘함 마운트 매킨리호에서 월미도 쪽을 망원경으로 살펴보던 맥아더는

성조기 게양을 확인하자 “됐네, 이제 커피나 한 잔 하세”라며 부하들을 치하했다.

 

그 이후 작전은 잔당을 정리하는 수준이었고,

오전 8시에 이르러선 섬에서 북한군의 저항이 완전히 사라졌다.

 

유엔군은 1시간 27분 만에 인천 상륙 최대의 장애물 월미도를 손에 넣었다.

유엔군 측 전사자는 없었고 부상자만 17명이었다.

반면 북한군은 108명이 사살되고, 136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와 별도로

미군 불도저가 밀어버린 참호 안에서 150명 이상의 인민군이 매몰돼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월미도를 점령한 직후 정찰 작전을 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상륙 2단계는 초저녁 밀물을 타고 인천 본토로 들어가는 작전이었다.

월미도 점령 후 다시 바닷물이 들어오길 9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오후 5시 30분부터 1해병연대와 5해병연대의 인천 본토 상륙전이 시작됐다.

 

인천 시내 작전도 순조로웠다.

5해병연대는 오후 6시 45분쯤 일대에서 가장 높은 응봉산(지금의 자유공원)을 점령했고,

1해병연대는 밤 10시쯤

경인선 철도를 감시할 수 있는 117고지(현재 주안동 수봉산)를 차지했다.

 

 

인천 시가지 전투도 사실상 D-데이 당일 유엔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돌아갔다.

인천을 모두 점령하는 동안 유엔군의 인명피해는 사상 174명(사망 21명).

맥아더는 “미국 대도시에서 매일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적은 숫자”라고 촌평했다.

맥아더조차 이렇게나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맥아더의 개인기로

여기까지 끌고 온 인천상륙작전의 D-데이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해병대 선봉부대들이 속속 인천의 요충지를 점령하는 동안,

미 해군 함정들은 야간에도 환하게 불을 밝힌 채

후속부대와 장비를 계속 인천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날 밤 12시까지 총 1만3,000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륙했다.

날이 밝으면 곧 동진이 시작될 터였다.

이제 다음 목표는 서울이었다.

 

 

 

 

 

“북한 같은 전체주의의 문제점은 나쁜 소식이 지도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쁜 소식은 위로 올라갈 때마다 살균기에 넣은 것처럼 변해 버린다.

(상륙 징조가 있었음에도) 인민군은 경계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낙동강 방어선의 교착상태를 깨뜨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

 

 

 

 

1950년 9월 17일 미 해병대 선두 병력이 인천에서 서울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미 해병대

 

 

 

 

 

 

④ 서울 9월 28일: ‘구국’의 영웅

 

서울 입구까지도 쾌속 행진이 이어졌다.

 

미 해병대

9월 16일 부평 일대까지 진출했고,

9월 17일엔 서울-인천 사이 최대 요충지 김포비행장을 점령했다.

9월 18일 5해병연대의 김포반도 점령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9월 19일엔 해병사단 수색중대를 중심으로 한 정예 정찰반

(여기서 연세대 언더우드 3세 원일한 박사가 통역장교로 활약)이 서울 함락 후 최초로 한강을 건넜다.

5해병연대 우측방 1해병연대도 영등포-노량진 방향으로 신속하게 진격했다.

9월 19일 소사(부천),

9월 20일 안양천을 거쳐,

9월 22일에 영등포를 장악하고,

9월 23일엔 노량진을 거쳐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까지 진출했다.

 

미해병1사단 후속으로 상륙한 미7사단(카투사 포함)은

안양과 수원으로 남하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7사단 예하 31연대가 9월 22일 수원비행장을 점령했다.

한미 연합군으로 구성된 유엔군 지상군 병력이 상륙 불과 일주일 만에

서쪽과 남쪽에서 서울을 에워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수도 서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1950년 9월 20일 미해병1사단과 함께 싸우는 한국 해병대 장병들이 김포비행장에서 한강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 육군

 

 

 

 

 

그러나

서울 서쪽(지금의 마포·서대문구)에서 뒤늦게 북한군의 치열한 저항이 시작됐다.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수색-신촌-광화문 방면으로 진격하던 미해병5연대와 한국해병1대대를

북한군 보병연대와 서울치안연대가 막아섰다.

이 병력이 인민군 방어군의 주력이었다.

 

한국 해병대가 9월 21일 두 시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모래내 104고지(현 서연중학교 뒷산)를 장악했고,

다음날 북한군의 역습이 있었지만 고지를 사수했다.

당시 미 해병대를 종군한 외국 기자들이

104고지 점령·사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봤기 때문에 한국 해병대의 역량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북한군이 촘촘한 방어선을 형성한 연희고지(연세대 인근)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이틀간 발목이 잡혔으나,

전투기와 포병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은 미해병대가

9월 24일 안산(296고지) 인근의 능선을 뚫어내면서

4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같은 날 노량진에서는 미해병1연대가 용산 쪽으로 도하를 시작했다.

 

 

 

 

 

 

“맥아더는 9월 25일까지 서울을 수복하기를 원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정확히 3개월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 조지프 굴든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중에서 -

 

 

 

 

 

1950년 9월 미 해병사단 소속 해병들이 서울 시내에서 인민군 소탕 작전을 하고 있다. 미 해군

 

 

 

 

서울 탈환의 최종 단계는 시가지 전투였다.

서울 도심 전투는 전쟁이 발발한 지 딱 3개월 되던 9월 25일 시작됐다.

이때는 뒤늦게 상륙한 미해병1사단 7해병연대도 서울 공격에 투입되어,

해병사단은 전쟁 후 처음으로 3개 연대를 완전 편성한 상태에서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다.

5해병연대는 연희고지를 출발해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방면으로 직진했고,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넌 1해병연대는 마포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7해병연대는 북악산을 거쳐 미아리고개 방면으로 진출하며 북한군 퇴로를 차단했다.

미7사단은 남산으로,

국군17연대는 왕십리로 전진하며 한미 연합군이 사실상 서울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시가지 전투 이틀째인 9월 26일까지

한미해병대와 양국 육군은 서울 도심 절반 정도를 장악한 상태였다.

아직도 골목 골목마다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던 그날 오후 2시 10분,

맥아더는 갑자기 서울을 탈환했다는 공식 성명(코뮈니케)을 발표했다.

 

“한국의 수도 서울이 다시 아군의 손에 들어왔다.

한국군17연대, 미7사단, 미해병1사단으로 구성된 유엔군은

서울을 완전히 포위하고 도시를 장악했다.”

 

그러나

실제론 맥아더 코뮈니케가 발표된 다음날인 9월 27일에도

서울 도심에서는 북한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놓고 맹렬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맥아더가 조급하게 승리 선언을 해 버린 것은

‘전쟁 3개월 만에 수도 탈환’이라는 최상의 홍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처럼

싸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대뜸 승리를 선언하는 것은

2차대전 때도 계속된 맥아더의 나쁜 버릇이었다.

 

1945년 2월과 3월 계속된 필리핀 마닐라 탈환전에서도

“적의 괴멸이 임박했다”고 성명을 발표했으나 실제 전투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부하들이 여전히 피를 흘리는 순간에도

자기 명예를 앞세우는 맥아더의 이기심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사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서울 탈환전에선 맥아더 성명 발표 이틀 만에 실제로 수도 수복이 성공했다는 점이다.

9월 27일 새벽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기는 했으나

이날 오후 늦게까지도 인근 부분 지역에서 전투가 간간이 이어졌다.

이날 밤 12시까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잔당 섬멸 작전이 계속됐고,

9월 28일 국군17연대가 왕십리 방향에서 서울 시내로 진입하며

15일에 걸친 인천-서울 전투가 최종적으로 완료됐다.

 

 

서울 수복 바로 다음날인 9월 29일

중앙청에선 수도 탈환 경축행사(환도식)가 열렸다.

대통령 이승만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돌아왔고,

맥아더도 행사 참석을 위해 도쿄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맥아더는 환도식 연설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유엔 깃발 아래서 싸우는 우리 군대가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선언하며,

이승만을 향해

“귀국 정부 소재지를 회복하고 각하께서 헌법상 책임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축하했다.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환도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연설에 앞서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다. 미 육군

 

 

 

 

 

 

 

 

 

“나 자신이나 한국 국민의 끝없는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 이승만의 환도식 연설 첫 구절 중에서 -

 

 

 

 

이때가 맥아더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모두가 망할 거라고 걱정하던 군사작전,

맥아더 혼자서만 성공 쪽에 운명을 걸었던 위험천만한 도박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잭팟을 터뜨렸다.

 

상륙 작전 역사에서도

인천상륙작전만큼 적은 피해로 신속하게 작전 목표를 달성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주요국 수도 탈환을 위해 펼쳤던 여러 상륙작전

(1944년 노르망디, 1944년 안치오, 1945년 필리핀 루손섬)과 비교해도

인천은 속도나 전과 측면에서 월등한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상륙 후 수도 탈환까지 13일이 걸렸다.

노르망디에서 파리까지 가는 데(훨씬 멀기는 했지만)는 두 달 반,

이탈리아 안치오 상륙이 로마 해방으로 이어지는 데는 4개월 이상이 소요됐다.

필리핀 루손 섬 상륙작전에선 수도 마닐라에서만 1개월 이상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맥아더가 10군단 병력 7만5,000명을 인천에 상륙시키지 않고 낙동강 전선에 증강 배치했더라면,

방어선을 훨씬 빨리 뚫고 더 효율적으로 북진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육군대학이 미군 전투 교범을 통해서 산출한 시나리오를 보면,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지 않고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 작전만 했더라면

서울 수복에 1개월 정도가 걸렸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군 사상자도 14만 명 정도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맥아더가 낙동강 전선에 적 주력을 고착시키고 상륙군을 돌려서 적의 뒤를 친 덕분에,

실제 역사에선 13일 만에 서울을 되찾고 유엔군 사상자도 8,000명 선에 머물렀다.

매우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역습이었던 셈이다.

 

 

맥아더를 인간적으로 싫어했던 당대 장군들도

훗날 인천상륙작전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맥아더에게 상관 대접도 못 받았던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인천은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 중 한 명이 인생의 절정을 찍은 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나중에 8군사령관을 할 때

맥아더의 공 가로채기에 여러 번 마음고생을 했던 리지웨이도 회고록에서

“대담한 작전 개념, 전문적인 작전 기획 역량, 용기와 과감성, 작전 시행 기술 측면에서

군사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극찬했다.

그나마 당시 합참의장 브래들리가 ‘실력’보다는 ‘행운’ 요소가 강했음을 강조하며

“역사상 가장 운이 좋았던 작전”이라고 살짝 비꼬듯이 떨떠름하게 칭찬한 기록이 남아 있다.

 

 

 

미 육군 장병들이 1950년 서울 전투에서 생포한 인민군 소년병들을 심문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울을 되찾은 맥아더의 다음 목표는 명백했다.

북한군 섬멸과 북진이었다.

누가 봐도 맥아더가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북한군은 낙동강 전투와 인천-서울 전투에서 대패하고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군을 신속하게 포위하고 잔당을 섬멸해야 할 이 중요한 시점에,

엉뚱하게도 맥아더는 동해안 원산으로 제2의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그냥 전력의 절대적 우위를 이용해 신속하게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면 그만이었던 상황에서,

또다시

고난도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려는 공명심이 발동한 것이다.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상륙군을 이동시키려면 긴 시간이 걸렸다.

또 원산행 상륙군(알몬드의 10군단)이 인천항을 우선적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육로로 북진해야 할 워커 8군이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당시 맥아더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도 되는 장군이었다.

인천 상륙으로 그는

‘공산주의 침략에서 자유세계를 구해낸 위대한 구세주’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대통령도, 합참도, 의회도, 전 국민이 칭송하는 전쟁 영웅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누구도 맥아더에게 반대 의견을 내거나 토를 달기 어려웠다.

인천 상륙 때와 달리, 이젠 맥아더를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밥 호프(가운데)가 1950년 10월 원산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을 위문하고 있다. 미 해병대는 이미 국군이 확보한 원산항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항구 주변 기뢰 제거 작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장시간 동해를 맴돌며 입항을 기다려야 했다. 미 해병대

 

 

 

“인천은 단순히 한국전쟁 균형을 바꾼 전투의 이름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 행정부와 맥아더 사이의 관계를 바꾼 대담한 군사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사실상 맥아더 개인의 승리였다.

그가 예측했던 것은 다 들어맞았다.”

- 미국 국제정치학자 존 스패니어 -

 

 

 

 

⑤ 남태평양 10월 15일: ‘몰락’의 전조

 

대통령 트루먼마저 맥아더 눈치를 봐야 했다.

역대 미 대통령 중에서 트루먼은 여론 반대를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은 우직하게 밀고 나갔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지만,

하필 1950년 11월 중간선거

(미 대통령 임기 중반 짝수 해에 하원 전체와 상원 1/3 선출)를 앞두고 있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국민 영웅 맥아더와 갈등을 노출하는 것은

선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에 이기려면 맥아더의 인기를 이용할 필요도 있었다.

이미 그때 맥아더 해임을 내심 고민하고 있었던 트루먼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백악관 참모들은

‘대통령과 유엔군사령관이 환한 얼굴로 악수 나누는 사진’이 선거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언론 홍보 목적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도 필요한 회의였다.

 

 

38선 이북으로 북진하기로 한 유엔군의 향후 전략

(한반도 완전 통일, 중·소의 참전 가능성 검토, 전후 계획 등)을 의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싫어했던 두 사람은 결국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다.

트루먼도 선거를 위해서 맥아더를 만나야 했고,

트루먼과 민주당을 뼛속부터 증오하던 맥아더도

대통령이 보자고 하는데 계속 만남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그 전엔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어디서 만날 것인가였다.

당시 도쿄에서 미 동부로 가려면 태평양에서 한두 번,

미 본토에서 한두 번 등 총 세 번 정도 중간 기착을 해야 했다.

나중에 1950년 12월 말 리지웨이

워커 사후 워싱턴에서 도쿄를 거쳐 한국으로 급파될 때를 기준으로 보면,

꼬박 사흘 정도가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유엔군 북진 상황을 계속 챙겨야 해서 그가 워싱턴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도쿄와 워싱턴 사이 어딘가 중간에서 만나야만 했다.

하와이 정도에서 보는 게 적당해 보였다.

도쿄에서 오기도 그리 멀지 않고,

과거 2차대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맥아더와 니미츠 등 태평양 지역 사령관들을 호놀룰루로 불러 일본 본토 진공 작전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백악관은 그래서 처음에 하와이를 회담 장소로 제안했다.

장소를 두고 잠시 밀고 당기기가 오가는 동안

백악관은 대통령이 남태평양 웨이크섬까지는 갈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섰다.

맥아더사령부에선 ‘웨이크섬보다 멀리 갈 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웨이크섬은 하와이와 괌 사이에 있는 환초섬이다.

도쿄에서 직선 거리로 약 3,000㎞, 워싱턴에선 약 1만1,000㎞ 떨어져 있었다.

회의 장소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군통수권자와 휘하 사령관의 만남이 아니라,

마치 국력이 비슷한 두 나라 정상의 회담 장소를 정하는 것과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백악관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맥아더가 오라는 곳으로 트루먼이 가야 했다.

결국 트루먼은 워싱턴에서 출발해 세인트루이스, 샌프란시스코, 하와이에서 세 번 기착을 하면서

사흘 만에 웨이크섬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8시간 비행으로 한 번에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잔뜩 뿔이 나 있었다.

공화당 쪽에 선이 닿아 있던 그는

민주당 대통령의 ‘정치쇼’에 들러리를 서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맥아더가 열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그는 대통령과의 만남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도쿄에서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과 특파원들을 잔뜩 대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악관 대변인실에선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모든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을 것’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군통수권자와의 만남에서까지

자신에게 우호적인 언론을 이용하려고 했던 맥아더의 태도를 보면,

그가 분명 이 만남을 ‘상급자와의 회의’가 아니라

일종의 ‘정상회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을 무시하는 맥아더의 이런 태도는 이때부터 본격화했는데,

그해 11월 압록강 폭격(본국 보고 없이 교량 파괴 명령),

12월 만주 폭격 당위성 인터뷰(미국 정부의 ‘만주 공격 금지’ 비판),

이듬해 3월 야당 지도자와의 내통 사건(공화당 의원에게 정부 비판 서신 발송) 등의

항명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트루먼을 만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맥아더는 전선사령관이 정치적 행사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에 매우 구역질 난다는 반응이었다.”

- 맥아더와 같은 비행기에 탔던 주한 미대사 존 무초의 회고 -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

 

 

 

 

 

트루먼과 맥아더는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만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상회담에서 일부러 지각을 해 상대 정상을 초장부터 길들이는 것처럼,

트루먼-맥아더 만남에서도 누가 먼저 도착해 상대를 기다릴 것인가를 두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맥아더는 이미 1944년 7월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전선 전략 회의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다리게 했던 ‘전과’가 있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만나러 사흘을 걸려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대통령이 장군을 기다리는 수모까지는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 전용기는 일부러 천천히 이동했고,

6시 30분 트루먼이 웨이크섬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맥아더가 활주로에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는 불과 30분 전에 섬에 착륙했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을 지켜봤던 워싱턴포스트 기자에 따르면,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대신 대뜸

“대통령 각하(Mr. President)!”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표정 관리를 했음에 분명하다.

웃으면서 “잘 지내셨소 장군, 여기서 보니 반갑구려”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트루먼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나중에 트루먼은 이 당시를 떠올리며

“군복 상의 단추도 채우지 않았고,

20년은 족히 썼을 법한 모자엔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맥아더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또 저술가 멀 밀러(트루먼 전기 작가)에게

“맥아더는 방금 전쟁터에서 온 것처럼 보이도록 모자를 매만지기 위해

상병 한 명을 모자 관리병으로 두고 있다”고 험담하기도 했다.

 

 

트루먼 앞에서 맥아더는 전쟁을 금방 끝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북한군의 저항은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 전에 끝날 것이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8군 병력을 일본으로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루먼을 수행한 합참의장 브래들리에겐

“극동에서 남는 1개 사단을 1월까지 유럽 전선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뻥뻥거렸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개입하겠다”고 했던 중국공산당 경고를,

맥아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날 만남에서 트루먼과 맥아더는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회의에서 다른 얘기를 다 하고 난 뒤 후반부에서야

트루먼이 “한 가지 더 질문이 있다”면서 중공군 참전 가능성을 물었을 뿐이다.

 

 

그러자

맥아더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렇게 답했다.

 

“제 생각엔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중공군은 만주에 30만의 병력이 있고,

그중 10만에서 12만5,000명이 압록강 근처에 있습니다.

그들의 보급 능력으로 볼 때 5만 명 이상을 한반도로 보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이 평양으로 내려온다면 사상 최대의 살육전(the 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얼마 후 미군은 운산, 군우리에서 역사에 기록될 만큼 참패를 당했고,

장진호에선 오히려 사상 최대 살육전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고 있다. 이 사진은 1958년 북한에서 발간된 기념 책자에 실린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인천의 승리가 가져온 또 하나의 결과는

맥아더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에 대한 맹신이 널리 퍼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맥아더의 상관들조차도

맥아더 결정에 반론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게 옳은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 당시 미 육군참모부장 매슈 리지웨이 중장 -

 

 

 

 

맥아더의 큰소리는 트루먼과 합참의 경계심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천재적인 군사전략가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개입하더라도 초전박살을 내겠다고 자신하고 있는데,

굳이 워싱턴이 맥아더의 분석을 의심해 별도로 치밀한 정보 검증을 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나라 정부의 ‘전쟁 의도’를 분석하는 것은

국무부, 합참, 중앙정보국(CIA)의 임무였기 때문에

중공군 대비 실패의 모든 책임이 맥아더에게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보 분석도 맥아더의 낙관적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인천 상륙 이후 맥아더에게 한반도 문제에서 전권을 위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맥아더의 당시 위상이 단순한 전구사령관이 아니라

극동의 군벌 내지는 총독에 가까운 위상이었다는 점에서,

워싱턴 입장에서 일부 불만은 있었을 것이지만

굳이 맥아더의 뜻을 거슬러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10월 15일 웨이크섬 회의가 끝난 직후,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맥아더의 예언은 착착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고,

10월 26일 국군6사단이 유엔군 최초로 압록강(초산)에 도달했다.

 

 

맥아더는 예하 전부대에 “한만 국경을 향해 전속력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끝이 신기루였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맥아더'전쟁의 신'처럼 보였다.

맥아더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이 전쟁을 이기고 공산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천의 눈부신 *아우라가 여전히 맥아더를 휘감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도 그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검은 기운이 맥아더를 서서히 포위하고 있었지만,

승리에 취한 그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다면체 인간 맥아더의 12가지 특성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30315280001732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맥아더를 언급한 다른 인물들의 전기·자서전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Dwight Eisenhower ‘At ease: stories I tell to friends’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Richard Rovere and Arthur Schlesinger ‘The MacArthur Controversy and American Foreign Poli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기사, 기고문, 게시물
-Hampton Sides ‘Dougla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New York Times ‘Data Show MacArthur Got $500,000 Gift From Filipino Leader in 1942; Executive Order Signed by Quezon Complaint Recorded by Ickes’
-PBS ‘The Secret Payment’
-U.S, National Archives ‘The Beginning of the End: MacArthur in Korea’
-Winston Groom ‘A father's legacy drove WWII general MacArthur's ambition’

논문
-김남균 ‘더글러스 맥아더 재평가: 미국의 세기와 맥아더’
-송승종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의 민군관계: 조지 워싱턴의 역할을 중심으로’
-Robert Gilbert ‘Douglas MacArthur: Disordered Narcissist’

헬리콥터 부모가 미치는 영향
-Gene Beresin ‘How Helicopter Parents Affect Their Children’
-Laurence van Hanswijck de Jonge ‘Helicopter Parenting: The Consequences’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이 포스팅 글은 위에 표시한 링크에서 옮겨온 글이며, 제목을 바꾸었고

가독성을 위해 위 링크글 원문을 약간 편집 수정(오자,탈자,삭제 및 약간의 첨언)

보조 설명을 추가했으며, 글꼴색을 자의적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밝힙니다.

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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