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을 저버린 권력적 탐욕의 비극

원제 : 6년간 6차례 임신후 요절…“깜찍한 공주”라 불리웠던 소녀의 비극

              이원율 2026. 4. 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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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리타 테레사_Margarita Teresa 1651~1673

 

합스부르크 왕가_王家의 작은 천사
불행했던 출생사례 틈에서 비교적 건강히 태어난 공주
왕가의 대_代 이을 책임 드리워지고, 계속 출산해야 할 운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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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삶과 여러 초상화를 통해 스부르크家의 복잡한 비극을 탐구.

 

디에고 벨라스케스, 흰색과 은색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일부 확대), 1656, 캔버스에 유채, 128.5x100cm, 빈 미술사 박물관
 
 

 
 
 
 
 
 
 
 

나의 기쁨/ 작은 천사, 귀엽고도 매력적인 공주

디에고 벨라스케스, 흰색과 은색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1656, 캔버스에 유채, 128.5x100cm, 빈 미술사 박물관

 

 

 

 

 

 

 

 

아버지는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나의 기쁨’으로 불렀다.

어머니는 아이를 ‘작은 천사’, 가까운 친인척은 ‘반짝이는 보석’이라고 칭했다.

 

다섯 살 공주 테레사는 그럴 때면 배시시 웃었다.

얼굴에는 동그란 눈과 앙증맞은 코가 있었다.

바로 아래에는 과일 절임을 바쁘게 오물거리는 입이 보였다.

 

몸은 또래와 견줬을 때 약간 작았지만, 움직임은 늘 크고 활기찼다.

설탕이 묻은 손을 옷 위로 팡팡 털어내는가 하면, 조이는 신발 따위도 언제든 휙휙 던져버리곤 했다.

머리칼을 만져주는 하녀 곁에서 꾸벅 졸다가도,

좋아하는 이만 보이면 쪼르르 달려가 안기는 귀여운 버릇도 있었다.

 

물론 잘 웃는 만큼 잘 울고, 가끔은 심술도 부렸다.

특히나 그 나이대 아이가 그렇듯 지루함을 참지 못했기에, 시종들은 많은 순간 고민에 빠져야 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소녀를 “깜찍한 아이” 내지 “매력적인 말괄량이” 정도로 기억하곤 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가운데 있는 공주가 마르가리타 테레사), 1656, 캔버스에 유채, 318x276cm, 프라도 미술관

 

 

 

 

 

당시 궁정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테레사를 종종 화폭에 옮겨 담았다.

 

눈부신 금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테레사가 가만히 서 있다.

붉은 장식, 검은색 테두리가 특징인 드레스는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럽다.

다만, 옷 자체가 편하지는 않은 듯 자세는 뻣뻣하다.

당장은 잘 참고 있지만, 곧 성질을 부릴 수도 있는 상황.

시녀가 달콤한 음료로 그녀를 달랜다.

광대와 강아지 또한 그녀의 따분함을 잊게 할 존재로 함께 한다.

벨라스케스의 1656년작, <시녀들>이다.

 

 

이 순간 테레사, 붓을 든 화가, 황급히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또 다른 시녀가 보는 건…

국왕 펠리페 4세와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Mariana de Austria).

 

그림 배경에 걸린 거울 속 국왕 부부의 표정은 흐릿하지만,

이들은 ‘나의 기쁨’인 딸 앞에서 또 한 번 흐뭇한 기색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부디 바라건대, 지금 이대로만 자라다오.

이러한 마음도 간절히 품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테레사가 편하게 웃고 울고, 마음껏 아양을 떨고 성질도 부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곧 칙칙하게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가까운 미래,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신체적 혹사를 당하고 끝내 요절까지 하고 만다.

 

 

 

 

 

 

 

최고 명문가의 공주, 하지만…근친 사이 복잡한 결합

디에고 벨라스케스, 갈색과 은색의 펠리페 4세, 1631~1632, 캔버스에 유채, 199.5x113cm, 내셔널 갤러리
 
 
디에고 벨라스케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1652~1653, 캔버스에 유채, 234.2x132cm, 프라도 미술관

 

 

 

테레사는 귀하고도 묘한 존재였다.

 

그녀는

유럽 최고 명문 합스부르크가(家)의 자손이자 스페인 공주라는 점에서 고귀했다.

한편으로는 가깝고도 비슷한 피와 피가 섞인,

소위 근친 간의 복잡한 결합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기묘한 부분이 있었다.

 

 

테레사의 아버지 스페인 펠리페 4세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그러니까 테레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이기 앞서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펠리페 4세의 여동생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Maria Anna of Spain)가 낳은 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였기 때문이었다.

 

즉, 펠리페 4세는 본인의 친여동생이 낳은 딸과 결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원래는 펠리페 4세가 첫 번째 부인(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가 혼인하기로 입을 맞췄었다.

 

하지만

그(펠리페 4세)의 첫 부인(엘리자베트 드 프랑스)이 마흔한살로 죽게 되고,

또한 곧이어 아들 카를로스도 고작 열일곱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펠리페 4세는 갑작스럽게 부인도, 대를 이을 아들도 잃었다.

그런 불운한 상황에서 식을 물리기에는 상황이 복잡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홀몸이 된 본인이 죽은 아들 대신 나서게 되었다.

그러니까 애초 며느리가 돼야 했을 조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와 결혼식을 올려버렸다.

그렇게 둘은 외삼촌과 조카에서, 남편과 아내로 기상천외한 짝이 되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펠리페 4세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와 결혼하기 전 연을 맺었던 첫 번째 아내), 1632, 캔버스에 유채, 207x119cm, 개인소장

 

 

 

 

 

놀라운 건,

당시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족보를 무시한 결혼이 거리낌없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합스부르크가는 어떤 가문인가.

이들은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쥔 세력이었다.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사실상 세습하는 특권을 누렸던 공동체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길 바라지만,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합스부르크가의 초기 생존 전략은 이랬다.

타국 또는 타 세력과의 ‘결혼 동맹’을 통한 세력 팽창이었다.

 

그런데 !, 이 낭만적인 구상이 운이 좋았던 건지 지나치게 잘 통했다.

운과 때가 맞물려 영향력과 권세를 기막히게 넓힐 수 있었다.

 

가령

16세기 합스부르크가의 수장

카를 5세(Karl V·1500~1558)는 국경을 넘나들며 수많은 직함을 달고 다녔다.

스페인 국왕, 이탈리아 군주,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등

오죽하면 그는 지금도 중근세 유럽인 중 가장 많은 왕관을 썼던 인물로 불릴 정도다.

 

 

하지만, 한 인간이 통치할 수 있는 땅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카를 5세 이후

합스부르크가스페인계오스트리아계로 갈라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과거 유럽 전역으로 팔을 뻗은 고대 로마제국 또한 결국 동서로 쪼개졌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안이다.

 

 

 

 

 

 

 

합스부르크가의 영광과 모순/ 공주의 부모도 자유롭지 못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마르가리타 테레사, 1653~1654, 캔버스에 유채, 128.5x100cm, 빈 미술사 박물관

 

 

 

 

이쯤 부터(물론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

또는 분파 안 내 ‘자기들끼리’근친혼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한 뿌리에서 갈라진 양측은 차츰 각자의 길을 걸었다.

통치 철학에도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혈연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더 서로를 견제하고 의식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어쩌면 거의 남남, 언젠가 최악 상황에선 아예 남보다도 못할 관계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파 사이 결혼은 이를 예방하는 수단이었다.

물론, 근친혼의 성행에는 순수한 우리 혈통을 지켜가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 문제, 혼수와 지참금으로 유출될 수 있는 금은보화를

자신들의 혈연세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단속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터였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1659, 캔버스에 유채, 1270x107cm, 빈 미술사 박물관

 

 

 

 

 

오죽하면

공주 테레사의 부모, 펠리페 4세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또한 근친혼으로 탄생한 인물이었겠는가.

 

 

테레사의 아버지 펠리페 4세?

그의 부모(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도 복잡하게 얽힌,

그나마 단순화하자면 육촌지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테레사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그녀의 부모(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에게도 같은 피가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딸 공주 테레사에게는 한두 줄로는 설명하기에도 힘든,

겹겹이 쌓이고 포개진 혈족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는 셈이었다.

 
 
 
 
 

 

유전병 피하지 못한 남동생 그래서 더 귀하고 묘해진 운명

디에고 벨라스케스, 펠리페 프로스페로(3세로 사망), 1659, 캔버스에 유채, 128.5x99.5ccm, 빈 미술사 박물관

 

 

 

테레사는 그런 점에서 볼 때 더욱더 귀하고도 묘한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이 소녀에게는 근친혼에 따른 유전병을 크게 안고 있지 않은 듯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재차 볼 수 있듯 어릴 적엔 그저 천진하고,

시간이 더 흐르니 나름대로 요조숙녀 티도 낼 수 있는, 그런 왕족으로 무난히 자랄 듯했다.

나이가 들수록 합스부르크가 특유의 긴 턱이 나오기는 했다.

다만, 단지 그뿐인 것 같았다.

 

 

 

 

세바스티안 에레라 바르누에보(추정), 카를로스 2세(카를로스 왕자), 1670, 캔버스에 유채, 161.3x109cm

 

 

 

부모 입장에선 이 자체가 엄청난 축복이었다.

이쯤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사산아의 비율이 상당했다.

겨우 세상 빛을 본다 한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질환을 앓고 있을 때도 많았다.

 

가령 테레사남동생 펠리페 프로스페로는 고작 세 살에 죽었다.

이 또한 누적된 근친혼에 따른 면역체계 약화로 추정되고 있다.

두 번째 남동생 카를로스 왕자(훗날 카를로스 2세)의 몸도 성치 않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여섯 살이 돼서야 겨우 젖을 뗄 수 있었다.

그만큼 몸이 약하고 성장도 느렸다.

턱뼈가 너무 커 음식을 바로 씹지 못했으며, 다리가 짧아 평생 올바로 걷지도 못했다.

왕실은 그의 장례가 언제든 이뤄질 수 있도록 판을 깔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모로 서글프고, 안쓰러운 일이었다.

 
 
 
 
 
 
 

공주의 결혼 상대 /그 또한 ‘같은 피’ 흘렀다

벤자민 블록, 레오폴트 1세, 1672년경, 캔버스에 유채, 139x110cm, 빈 미술사 박물관

 

 

 

 

공주 테레사의 결혼 상대는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그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계의 수장 격 인물이었다.

다만 여기까지 피력한 설명에 의하면 이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둘 또한 혈연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열한 살이었다.

 

 

 

얀 토마스, 연극 의상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1667, 33.3x24.2cm, 빈 미술사 박물관

 

 

 

이들은 1666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열다섯의 테레사는 즉시 신성로마제국 황후로 관을 썼다.

그리고, 그 이후로 테레사는 더이상 천진난만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1673년, 생을 다할 때까지 근 7년간 계속해 임신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온 후부터,

‘임신 중’이거나 ‘출산 직후’가 아닌 적이 거의 없었다.

출산 후 몸을 돌볼 틈도 없이 가문의 또 다른 미래를 잉태하기를 거듭 강요받은 격이다.

이는 혹사라는 말로도 부족한 일이었다.

 

여전히 꽃다운 나이.

예쁜 옷을 좋아하고, 귀여운 것을 곁에 두고 싶은 시기.

그러한 테레사는 왜 갑자기 생을 갉아 먹으면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을까.

 
 
 
 
 
 
 

무겁고도 묵직했던 책임 /건강이 외려 저주가 되고 있었다

이야생트 리고, 루이 14세, 1701, 캔버스에 유채, 277x194cm, 루브르 박물관

 

 

 

 

 

 

“아들을 낳으세요.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아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어른 중 누군가는 테레사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지.

그것이 타세력로부터 집안을, 나아가 조국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당부 하에 말이다.

 

테레사가 감당해야 하는 미래는 무겁고, 묵직했다.

가장 큰 위협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프랑스였다.

 

루이 14세의 아내는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María Teresa de España).

그녀는 펠리페 4세그의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나온 딸이었다.

테레사에게는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열세살 연상의 배다른 언니 격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루이 14세의 반려이자 프랑스의 왕비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나라의 정치적 도구 취급을 받고 있었다.

루이 14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언젠가 자기 부인,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를 앞세워 스페인 자체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루이 14세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가 죽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그의 직계 아들인 허약한 카를로스 2세(여섯 살까지 젖을 떼지 못했던)도 후사 없이 요절하기를 기대했다.

 

그렇게만 되면

다음 스페인 왕위 계승의 1순위가 본인 옆자리에 있는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라고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샤를 보브룬 등,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루이 14세의 아내), 1665년경, 캔버스에 유채, 139.5x105.7cm, 베르사유 궁전

 

 

 

 

 

물론 펠리페 4세루이 14세속마음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한 나름의 수도 썼다.

자기 딸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루이 14세에게 보내기 전,

일종의 ‘왕위 계승권 포기’ 각서를 쓰게 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 문서를 남기게 한 대신 함께 부치기로 한 막대한 지참금.

그 지참금을 돈이 부족해 펠리페 4세는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다.

 

루이 14세는 사안을 넘어가지 않았다.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만큼, 당시의 포기 서약서 자체도 무효라는 입장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스페인 침략의 명분으로도 삼을 기세였다.

 

 

스페인은 난감해졌고 받아칠 대안이 필요했다.

이런 가운데 1665년 펠리페 4세가 죽고,

언제 죽을지 모를 카를로스 2세가 일단은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다.

 

가장 깔끔한 시나리오는 카를로스 2세가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카를로스 2세는 고작 네 살.

이러니 마지막 희망은 공주 테레사뿐이었다.

테레사가 빨리 합스부르크가의 아들을 낳아야 했다.

 

그렇게만 되면 “이 아이야말로 합스부르크가의 진정한 순수 혈통”이라는 명분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의 맨 위로 끌어올릴 마음이었다.

루이 14세에게 맞설 논리는 이것말곤 없어보였다.

 

테레사가 어린 나이에 외삼촌(레오폴트 1세)과 결혼해 끊임없이 임신을 해야만 했던 일.

 

그 이면에는 그토록 잔혹하고도 복잡한 탐욕에 기인한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테레사는 이제 국가를 위한 ‘큰 기쁨’이자, 조국을 수호하는 ‘커다란 천사’가 돼야 했다.

건강하게 태어난 어린 시절은, 언젠가부터 축복이 아닌 저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간의 일그러진 탐욕속에서 파멸해 가는 참혹한 아이러니였다.

 
 
 
 
 
 
 

6년간 일곱 번의 임신 /닳아 없어질 만큼의 혹사

후안 바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조, 상복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1665~1666, 캔버스에 유채, 205x144cm, 프라도 미술관

 

 

 

 

테레사는 목이 쉴 만큼 울었다.

1667년 9월에 출생한 테레사레오폴트 1세의 첫아들 페르디난트 벤첼.

아이는 그다음 해 1월에 열병 속에서 눈을 감았다.

고작 3개월여만이었다.

 

테레사는 곧이어 두 번째 임신을 했다.

허전해진 요람을 어루만질 틈 따위는 없었다.

1669년 1월에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이름은 ‘사랑받는 귀중한 존재’, 마리아 안토니아로 지었다.

썩 튼튼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다만 여자아이였던 만큼 아직 숨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곧장 세 번째 임신에 들어가야 했다.

1670년 2월, 밖으로 나온 셋째는 또 한 번 아들이었다.

하지만 요한 레오폴트라고 부른 이 아이는, 첫째처럼 일찍 하늘에 올랐다.

세상 빛을 본 그날 숨이 넘어가 죽고 만 것이다.

어린 어미였던 테레사는 또한 함께 숨이 넘어갈 만큼 땅을 친 날이었다.

 

이어 1672년 2월, 을 재차 낳았지만 생후 20일 만에 사망.

아울러 두 번의 유산과 1673년 3월, 임신 4개월차에서사산….

 

 

얀 토마스(추정),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딸 마리아 안토니아, 1670년경, 캔버스에 유채, 125x162cm, 빈 미술사 박물관

 

 

 

 

이 모든 건, 테레사열여섯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 겪어야 했던 일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테레사는 6년간 6~7번의 임신을 한 것이 된다.

이 가운데 실제로 아이를 낳은 경험도 네 차례나 있었던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두 차례 유산의 경우 아직 추정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의견도 나오긴 한다.

그사이 반짝이던 테레사도 빛을 잃었다.

눈에는 총기가 없었다.

한때 자랑이었던 금발 곳곳에는 벌써 흰머리가 내려앉고 있었다.

출산과 유산을 거듭할수록

혀가 입에 다 담기지 못할 만큼 부풀었고, 치아는 대책 없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돌아보니, 테레사도 합스부르크가의 다른 이들만큼 턱이 길게 빠져 나와있었다.

테레사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상과 등졌다.

마지막 사산을 겪은 후 따라온 합병증에 몸이 짓눌리고 말았다.

그때가 1673년, 3월12일이었다.

 

합스부르크가를 위한 그녀의 헌신은 이처럼 허망한 것이었다.

돌아보니 이 가문에서는 건강하게 태어난 것 또한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에 더 많이 짊어지고, 더 자주 희생해야 하는 저주의 삶이었다.

 

루카 조르다노, 말을 탄 카를로스 2세,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81x61cm, 프라도 미술관

 

 

 

 

그나마

펠리페 4세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카를로스 2세가 1700년, 마흔 살 나이까지 비교적 길게 생존했다.

곧 죽을 듯 갖은 병을 다 달고 다녔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남는 한편 비교적 온전하게 국가를 통치하는 면도 보였다.

 

하지만 그뿐.

병약한 카를로스 2세는 자식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끝내 돌고 돌아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왕관을 물려받는다.

이는 합스부르크가가 그렇게나 경계했던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뜻했다.

결국은..., 신의 저주를 받아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돌아보면 이 가문의 불행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늘의 섭리를 배반한 이유로 예고돼 있었다.

서글프게도, 극도로 탐욕적인 그들만 몰랐거나 모르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참고 자료

마틴 래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까치

레이몬드 카 등, 스페인사, 까치

Ingrao, Charles W., The Habsburg Monarchy, 1618–18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Kann, Robert A., A History of the Habsburg Empire, 1526–1918,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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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적절한 리터칭 작업을 했습니다.

문장은 가독성과 문맥의 의미를 용이하게 하려고 분절 줄바꿈 처리 했음을 또한 밝힙니다. Sin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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