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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출처 : https://www.youtube.com/

watch?v=tGN0f17dv2I&pp=ygUW7YG066CI66mY7YOA7J24IOuFuOuemA%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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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백인 여성을 납치해 성노예로 만든 집단

만화  ‘원피스’에 등장한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어떤 책일까요.?

답은 50억권의 성경입니다.

 

만화책으로 범위를 좁혀봅니다.

왕좌는 ‘원피스’가 차지합니다.

1997년 첫 권 이후 무려 올해까지 5억권이나 팔렸기 때문입니다.

원피스가 ‘만화계’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원피스라는 만화의 내용은

해적 루피보물 ‘원피스’를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27년간 연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모릅니다.

넷플릭스에 실화 영화가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고무고무~”, “너 내 동료가 돼라.” 등 등

수많은 명대사가 여전히 남녀노소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지요.

 

 

1866 년 장 레온 제롬의 ‘슬레이브 마켓’.

이슬람 해적단에 의해 납치된 백인 여성들은 주로 오스만 제국에 끌려갔다.

 

 

 

‘원피스’는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그 기반에는 실화가 적절히 녹아 있습니다.

수많은 캐릭터 중 실존한 ‘바다 사나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 여성을 납치해 오스만제국에 팔아넘긴 해적들도 캐릭터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역사 덕후들이 원피스에 빠져드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피스에 녹아 있는 역사 이야기를 전합니다.

윤슬이 가득한 봄 바다가 그리운 시기여서입니다.

 

* 윤슬 :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만화 '원피스' 표지. [사진출저=shueisha]

 

 

 

 

 

 

태초에 ‘해적’이 있었다

해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등장합니다.

로마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지요.

해적들은 부유한 국가의 부를 무력으로 빼앗는 걸 즐겼습니다.

무역이 활발할수록 약탈품은 늘어갔지요.

포도주, 올리브유, 밀, 노예가 이들의 먹잇감이었습니다.

로마는 제국의 전 거점에서 물류를 운송합니다.

이런 양질의 보물들을 해적들이 놓칠 리 없었지요.

로마의 군사들은 육지에선 무적이었지만,

해적의 홈그라운드인 바다에선 예외였습니다.

 

 

 

중세 지중해를 주름잡은 바르바리 해적.

 
 
 

11세기 중세 지중해는 해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무역의 핵심지역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이슬람 해적들이 명성을 떨칩니다.

바로 바르바리 해적이었습니다.

 

1530년부터 약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150만~200만 명 이상이 이들에게 노예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해적, 권력과 손을 맞잡다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 제국

바르바리 해적을 ‘전략’적으로 육성했습니다.

스페인이 ‘레콩키스타(재정복)’로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을 때입니다.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동유럽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서유럽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지요.

바르바리 해적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서유럽이 해안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바르바리는 이슬람 해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집단이었다.

그림은 피에르 프란체스코 몰라의 작품 (1650년).

 

 

바르바리 해적들은

오스만의 ‘사략선’(국가에 의해 공인된 해적)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지중해와 북해에 면한 국가들을 약탈해 기독교 여성들을 납치하곤 했었지요.

오스만 제국 ‘하렘’의 노예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금발, 흰 피부를 가진 여인들이

오스만제국의 군주들의 후궁으로 이름을 알린 배경입니다.

백인 여성들은 ‘화이트 골드’라고 통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지요.

 

오스만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통하는 술레이만 대제황후

우크라이나 출신의 록셀리나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노예로 끌려와 황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요.

술레이만이 그녀를 어찌나 사랑했던지,

그 세레나데가 지금도 전해집니다.

 

“나의 동반자, 나의 사랑, 빛나는 나의 달빛이여.”

 

 

 

 

오스만제국의 명군 ‘술레이만’ 대제.

 

술레이만의 소울메이트는 백인 노예인 우크라이나 출신의 록셀리나였다.

 

 
 

해적에서 영웅이 된 하이르 앗 딘

술레이만에게 가장 인정받던 해적은 하이르 앗딘이었습니다.

스페인에 공격받은 알제를 구원해 지도자로 오르면서였습니다.

빨간 턱수염으로 기독교 세력에 맞섰기에

그는 ‘붉은 수염’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중해의 주인 ‘하이르 앗딘’이라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삼지창은 바다의 주인을 상징한다.

 

 

술레이만 대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바르바리 해적인 그를 오스만 제국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명성에 걸맞게 그는 카를 5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대활약을 펼쳤지요.

 

만화 ‘원피스’에서

밀짚모자 루피의 산하 해적단이 된 ‘거인’ 하이 루딘

이 사내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입니다.

 

지금도 튀르키예에서 하이르 앗딘은 ‘해군의 아버지’로 통하지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 드라마까지 있을 정도입니다(바르바로사: 지중해의 검).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의 그림. [사진출저=Fine Art Museum - Algiers]

 

 

오스만의 사략선 전략을 배운 잉글랜드

“우리도 해적을 육성하자.”

해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오스만의 전략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잉글랜드였습니다.

제국을 일군 스페인의 강력한 해군과 싸우기에는

잉글랜드는 아직 미약한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강 대 강’으로 맞붙으면 참패했을 게 자명했지요.

엘리자베스 역시 오스만제국의 지혜를 빌렸습니다.

해적을 육성해 스페인의 상선과 무적함대를 교묘히 괴롭히는 전략이었습니다.

 

“스페인과 정면승부하기엔 우리나라는 너무 약한데...”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그때 등장한 인물이 ‘프랜시스 드레이크’였습니다.

제법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한 집안의 인물.

그는 어려서부터 사략선에 올라 아메리카 대륙까지 섭렵한 인물이었지요.

그때부터 스페인들의 상선을 무자비하게 털어 명성이 높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임무는 비밀리에 또 은밀하게 수행됐습니다.

 

“우리 가문의 과거는 묻지 마시게.” 가운데가 프랜시스 드레이크.

 
 
 
 

해적 드레이크 잉글랜드를 부유하게 하다

1570년 드레이크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합니다.

(잉글랜드 왕실이 지원한)원정대를 이끌고 스페인 앞바다로 항해해 왕실의 재물을 훔쳐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바친 재화는 3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왕실의 1년 국고 수입보다 많은 액수였습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까지 제집 드나들듯 하는 그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요.

마젤란 다음으로 세계 일주를 완수한 것도 드레이크였습니다.

 

 

“드레이크를 당장 처벌하라.”

스페인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 해적에 대한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스페인은 잉글랜드 왕실에 요청합니다. 잉글랜드의 해적들을 소탕할 것을.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침묵을 지켰지요.

두 나라 사이에 전운이 감돕니다.

카톨릭의 무적함대 스페인과, 개신교의 신성 잉글랜드의 대결이었습니다.

잉글랜드를 구한 것도 ‘해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습니다.

1581년 드레이크를 불렀습니다.

신하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에게 기사작위를 내리지요.

해적 드레이크에서, 서(Sir) 드레이크가 된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함대를 지휘하라는 무거운 책임이 그에게 지워집니다.

 

 

 

칼레 해전은 양국의 역사를 뒤바꾼 전투다.

 

 

도버해협에 141척 함선이 출몰합니다.

무적함대였습니다.

잉글랜드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분기가 담겨있었습니다.

이름도 유명한 ‘칼레 해전’입니다. 1588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드레이크는 완벽한 바닷사람이었습니다.

해류를 읽고 빠른 기동성을 보여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해적처럼 치고 빠지는 ‘아웃복서’ 스타일에 스페인 함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요.

안달루시아 함대를 포박해 항복을 받아낸 것 역시 드레이크였습니다.

 

 

화공으로 박살나는 스페인 무적함대.

 
 

잉글랜드는 8척의 함선에 불을 붙여 바람에 흘려보냅니다.

‘화공법’이었습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처럼

그 함선이 스페인 무적함대의 전열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이 해전의 승리로 바다의 지배자는 잉글랜드로 그 지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시작을 알린 영웅이 ‘해적’이었던 셈입니다.

1596년 그가 열병으로 사망하기 직전 남긴 말입니다.

“미래에 잉글랜드가 큰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면 자신이 전쟁을 지휘할 때 사용한 북을 울려 미리 알리겠다”

1914년 세계 1차대전 때도 이 북이 잉글랜드 함대에서 울렸다고 전해집니다.

 

 

“항복합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오른쪽 흰 갑옷)에게 항복하는 안달루시아 함대 사령관.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드레이크를 꼽는 배경입니다.

‘원피스’에서 루피와 함께 최악의 세대로 나오는 인물 X 드레이크가 그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X드레이크 역시 프랜시스 드레이크처럼 해적이면서 동시에 해군이지요.

 

 

“스페인을 잡을 수 있다면, 해적이면 어떻고, 해군이면 어떠랴.”

무적함대를 무찌른 후 그려진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지구본 위에 손을 대고 있는 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징한다.

 

 

신대륙까지 뻗어나간 ‘대항해 시대’

드레이크가 보여주듯,

해적의 주요 앞마당은

이제 지중해를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까지 뻗어갑니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모든 무역의 중심지가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도둑이 있기 마련이지요.

 

해적들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캐리비언 해역을 본거지로 삼고

약탈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18세기 캐리비언은 그야말로 ‘대해적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해적의 세상이었습니다.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는 원피스의 흰수염과 검은수염 두 캐릭터의 모티브가 됐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악당은

에드워드 티치였습니다.

1713년부터 캐리비언에서 활동한 그는

가장 강력한 해적 중 하나로 통합니다.

4년의 해적질 동안 그가 약탈한 금액은 150억원에 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큰 키와 덩치로 엄청난 중압감을 보였다고 전해지지요.

영국 함대에 승선한 적이 있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본격 해적으로 ‘전업’을 결정합니다.

40척이 넘는 배를 약탈할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이 되었지요.

캐리비안에서 프랑스 국적 노예 운반선인 콩코드를 나포한 것도 그였습니다.

 

 

검은수염의 ‘해적기’.

 

 

영국 해군은

에드워드 티치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상업 활동에 방해를 주는 그를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718년 11월 영국 해군이 포위에 성공합니다.

그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영국 해군을 당해낼 순 없었습니다.

25곳에 상처를 입은 뒤 그의 거대한 몸뚱이가 쓰러집니다.

 

‘원피스’의 대해적 흰수염 에드워드게이트끝판왕 악당 검은수염 마샬 디 티치

이 한사람으로부터 탄생한 캐릭터지요.

‘피터팬’후크 선장 역시 그의 외모를 기반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포획되는 검은수염. 장 레옹 제롬 페리스의 1920년 작품.

 

검은수염의 함선인 ‘앤 여왕의 복수’의 모형. 거대한 크기가 해적단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해적왕 골드로저...진짜 해적왕은 따로 있었다

망망대해 어딘가에 숨어있을 ‘보물’의 존재는

모든 뱃사람의 로망이었습니다.

‘원피스’ 역시 해적왕 골D. 로저가 남긴 ‘원피스’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지요.

이 이야기 역시 모티브가 존재합니다.

 

한 해적이 엄청난 보물을 숨겨놓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영국 해적 ‘윌리엄 키드’가 그 주인공입니다

(또 다른 별명은 캡틴 키드. ‘원피스’의 유스타스 키드).

 

키드가 보물을 묻는 상상화. 후대 화가 하워드 파일의 1921년 그림.

 

 

 

스코틀랜드 출신 윌리엄 키드는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프랑스 선박을 공격하는 임무를 받은 ‘사략선’의 선장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공격에도 성공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착오로 인해 인도 무굴제국의 선박을 포획한 것이었지요.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자 집권당인 휘그당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집니다.

야당인 토리당이 지속해서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이지요.

휘그당은 궁여지책으로 ‘꼬리 자르기’를 결심합니다.

키드를 해적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자신들과 연관성을 끊어버리자는 것이었지요.

 

* 교토사( 狡兎死) 하면 양구팽(良狗烹) 이라 (토사구팽 兎死狗烹)

 

 

 

“제 보물은 여기 어디에 있소, 부인.” 뉴욕 항구의 키드선장. 장 레옹 제롬 페리스의 1920년 작품.

 

 

사형이 결정된 후

키드는 자신이 숨겨 놓은 보물에 대해 털어놓습니다.

실제로 그 장소에서 일부 귀중품이 발견되기도 했었지요.

뉴욕 인근 가디너스 섬(Gardiners Island)도 그 후보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전설은 살을 더해갑니다.

세상 모든 진귀한 보물을 그가 특정 장소에 숨겨뒀다는 내용.

보물섬과 원피스 등 각종 보물찾기 콘텐츠의 시작이었습니다.

 

실제로 발견된 보물은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그는 ‘이야기’라는 엄청난 보물을 남긴 셈입니다.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의 재산은 수천억원으로 추산됩니다(진정한 해적왕!!).

 

해적에 의해 공격받는 프랑스 선박. 1615년.

 

 
 
 

P.S.

2008년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재밌는 기사를 출고합니다.

역대 최고의 ‘해적왕’을 뽑는 기사였습니다.

약탈 금액을 기준으로 선정한 것이었지요.

2위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1억 1500만달러를 턴 것으로 산정합니다.

우리 돈으로 1500억원이지요.

그가 조국에 이바지한 승리까지 고려하면 그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입니다.

 

1위는 ‘블랙샘’으로 불린 새뮤얼 벨라미였습니다.

그는 50척이 넘는 배를 털어 1억 2000만달러를 손에 쥐었습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가까스로 넘어선 수준이지요.

역사 속 진짜 해적왕인 벨라미지만, ‘원피스’에서 그의 비중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네줄요약>

ㅇ고대부터 해적은 존재해왔다. 바다까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해서다.

ㅇ정치 권력은 해적과 손을 잡기도 했다.

ㅇ오스만 제국은 해적 하이르 앗딘을 이용해 기독교를 견제하고, 잉글랜드는 해적을 활용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찔렀다.

ㅇ두 사람은 모두 원피스에 나온다. 그래서 원피스가 재밌다.

 

 

<참고문헌>

ㅇ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2년

 

 

이글은 아래 강영운 기자님이 쓴 기사의 글을 옮겨온 글이며

글 제목을 수정하고,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글을 요소요소 수정 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또한 가독성과 명확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구절에 색상처리와 문장을 분절, 행으로 분리했음도 밝힙니다.

매일신문의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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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쇠뜨기 이슬' 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sigolgilmaum/222328559217

 

 

 

양희은 아침이슬 노래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qLg0erjLd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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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난봉꾼으로 성병 달고 산 ‘이 남자’···

악몽같은 결혼 후 ‘대왕’으로 불렸다

 

 

 

 

세기의 결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공주와,

이웃 나라 잘생긴 미남 왕자의 혼례가 치러지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8월의 말,

프랑스는 풍요롭기 그지없었지요.

만록의 푸르름처럼,

시민들의 표정도 밝기만 했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향한 축하의 박수가 프랑스의 영화를 상징하는 듯 보였지요.

마침 이날은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

모두가 외칩니다. “신의 가호가 이 아름다운 부부와 함께하기를.”

 

 

“결혼이 악몽으로 변했어” ‘여왕 마고’에서 마르가리트를 연기한 이사벨 아자니. [사진출처=IMDB]

 


 
그런데 !!!
어째서인지 신부 가족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증오가 가득한 표정으로 신랑을 바라보고 있어서였습니다.
새 가족이 아니라 원수 중의 원수를 보듯 했지요.
식장에 불길한 기운이 스밀 때쯤,
누군가의 외침이 들립니다.
 
“신랑의 하객을 모두 죽여라.”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이던 결혼식장이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갑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신랑.

신부와 관계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부인을 냅두고 여자란 여자는 모두 건드리고 다닌 탓에

성병으로 죽을 위기까지 몰렸었지요.

역사는 새옹지마라고 했던가요.

결국 이 사건이 한 위대한 왕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됩니다.

프랑스의 역사를 뒤흔든 이날의 현장을 함께 걸어 보시지요.

 

 

프랑수아 뒤부아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커지는 종교갈등...결혼으로 봉합을 시도한 프랑스
 
“이 결혼이 프랑스를 하나로 뭉칠 것이네.”

 

때는 1572년 8월 24일.

결혼식의 주인공은 프랑스 왕 샤를9세의 여동생 마르가리트 드 발루아

이웃나라 나바르의 왕 앙리4세였습니다.

왕족끼리의 결혼식은 중세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이 혼례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합이 종교 분쟁의 봉합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정확히 10년 전,

프랑스는 종교적 내란에 빠졌습니다.

프랑스의 성직자였던 장 칼뱅이 개신교 혁명을 이끌고 있어서였습니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내세운 루터교보다 더욱 급진적인 교리였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분은 오직 예수뿐이시다.”

교황청의 역할을 완벽히 부정합니다.

 

 

 

“가톨릭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종교일세.” 장 칼뱅의 초상화.

 


 
프랑스라는 나라는 가톨릭의 맏딸이었습니다.
장 칼뱅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지요.
 
“하나님 아래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산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
 
전위적인 메시지도 불손하기 짝이 없었지요.
가톨릭의 교리와는 완전 배치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그를 스위스 제네바로 추방하지만,

칼뱅을 추종하는 세력은

비 온 뒤에 솟아나는 죽순과 같이 늘어갑니다.

가장 독실한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위그노’(칼뱅주의 개신교)라는 불안 요소가 싸게 트고 있었던 셈입니다.

 

 

 

 

“딸아, 너는 개신교 총각에게 시집가거라.” 엄마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네 자녀 들. 남자 셋은 모두 왕위에 올랐다. 딸 마르가리트는 나바르 왕비로서 삶이 결정됐다.
 
 
 
 
그 중 이웃 나라 나바르가 가장 골칫거리였습니다.
대표적인 개신교 국가로서
프랑스 위그노(칼뱅주의 개신교)들을 물밑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로서는 어떻게든 나바르 왕국과 연을 맺고
위그노 확장을 막을 필요성이 있던 셈입니다.

 

프랑스의 실세인 샤를 9세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마르가리트나바르의 왕 앙리4세에게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한 이유입니다.

 
프랑스 드디어 봉합되나 했더니...
 
“가톨릭이든, 개신교도든 우리 모두 프랑스가 되자.”

나바르 왕국으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대국’ 프랑스의 사위로 들어간다는 건,

왕위계승도 엿볼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식이 일어난 8월 24일.

그들의 믿음은 금세 산산이 조각납니다.

프랑스이 학살군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신랑 하객과 위그노들을 모두 죽여라.”

특히 개신교의 대표 주자였던 콜리니 제독도 표적이 됐습니다.

 

 

 

“죽여라, 위그노를, 한놈도 빠짐없이.”

 

 
 
 

파리 궁정에서의 학살 소식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폭력은 본질적으로 전염성이 짙습니다.
보르도, 툴르주, 오를레앙.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든 도시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이날 결혼식 날 사망한 사람만 전국적으로 적어도 3000명, 최대 3만명으로 추정됩니다.

위그노들은 모두 개신교 국가로 도망갔지요.

망인의 숫자도 충격적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건 이제 분열하는 국론이었습니다.

위그노들은 피의 보복을 부르짖었고,

프랑스 진압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다시 내란의 위기에 선 프랑스였습니다.

 
 
 
대학살의 범인은 친정엄마 카트린?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그림은 아니었네.”
 

이 학살을 주도한 건

프랑스 가톨릭 대표 신자이자 왕 샤를9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 추정됩니다.

이름에서 보듯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여성.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배출한 만큼 가톨릭에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당연히 신교도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던 위치였습니다.

 

 

 

“이제 다시 가톨릭의 시대인가.”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 학살된 위그노를 둘러보는 모습.

 


카트린이 아무리 광신적 가톨릭 신자여도,
결혼식을 학살의 현장으로 만들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습니다.
결혼을 추진할 때만 해도 그녀는 진심으로 두 종교의 화해를 염원한 것으로 전해졌지요.
 

카트린은 그러나 몰랐습니다.

프랑스 가톨릭교도가 얼마나 위그노를 증오하는지를.

가톨릭 세력은 지난 10년간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일으킨 반란의 폐해를 곱씹었습니다.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미워하고,

전쟁을 하고 칼부림까지 벌이던 그 일을요.

세 차례나 일어난 내전 속에서 초토화가 된 프랑스였습니다.

그 원흉은 바로 위그노여야만 했습니다.

 

 

 

칼뱅주의 위그노들이 가톨릭 성당을 약탈하는 장면. 두 사람의 결혼 10년 전부터 이같은 폭력적 갈등이 지속돼 왔다.

 


프랑스 왕실에 반감을 가진 가톨릭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인 법원·종교 등 주요 집단이
이 결혼을 보이콧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파리의 민심도 점점 흉흉해집니다.
“프랑스 왕실이 개신교로 넘어갔다”는 유언비가 퍼져가지요.
두 사람의 결혼이 정치적 위기를 야기한 상황이 되었던 거였습니다.
 
 
 
 
“프랑스는 가톨릭, 가톨릭은 프랑스여야 한다.” 기즈 공작 ‘앙리’. 프랑스의 보수적 가톨릭 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때였습니다.
모후 카트린과 샤를 9세에게
가톨릭 세력의 수장 기즈공작 앙리(너무 많은 앙리)가 찾아왔지요.
 
“축하연에 빠져들었을 때,
위그노를 모두 쓸어버려야 합니다.
안 그럼 또 반란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긍정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이 프랑스에서 대학살이 일어난 배경이었습니다.

리옹 지역에서는 강에 위그노 시체들로 가득차 석 달동안 물을 마시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 위그노 확실히 죽은 거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현장을 살펴보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

 


개신교의 수장 격인 콜리니 제독은 그 목이 잘렸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를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을 정도입니다.
로마에서는 사흘 동안 파티가 열렸지요.
대학살을 기념하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프랑스가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다”면서요.
 
개신교도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지요.
죽거나 떠나거나.
 
신랑의 목숨을 구한 마르가리트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하세요, 우선 살고 봐야합니다.”
 

새 신부 마르가리트는 편집증적 가톨릭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새신랑을 죽게 놔두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요.

앙리 4세가 임시 방편으로 개종을 약속하고 일단 후일을 도모하도록 설득합니다.

샤를9세와 카트린으로서도 그를 죽이는 건 정치적으로 위험했기에,

일단 가두는 것으로 정리하지요.

갇힌 앙리4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준 것 역시 새신부 마르가리트였습니다.

 

 

 

“이 결혼식 뭔가 수상해.” 나바르의 왕 앙리 4세와 마르가리트.

 


죽음의 위기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실하진 않았습니다.
우선 종교적으로 양극단에 있었던 데다가,
 
두 사람 모두 ‘자유연애’를 매우 즐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가리트는 후대에 의해

‘색정광’으로 묘사될 정도로 뭇 남성과 성관계를 즐깁니다.

추문이 워낙 잦아 궁정에서 추방당할 정도였지요.

앙리4세 역시 결혼 직후 부터 궁정 귀족부인들을 꼬셔 자기 침대로 데리고 가곤 했습니다.

성병을 달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네 이 놈들, 이 사람은 프랑스 공주의 남편이다.” 학살의 현장에서 남편을 구하는 마르가리트를 묘사한 그림.

 


샤를9세의 죽음...정치적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
 
“샤를9세 폐하가 승하하셨도다.”

 

프랑스 정치적 환경이 다시 격변합니다.

왕 샤를 9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왕좌는 동생 앙리3세(프랑스엔 앙리가 너무 많습니다)에게 돌아갑니다.

정치적 혼란으로 감시가 느슨한 틈을 기회로

새신랑이자 나바르의 왕 앙리4세가 탈출에 성공했지요.

 

 

 

“프랑스가 언제 다시 평화로워질까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들. 19세기 영국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이다.

 


이제 곧 개신교와 가톨릭의 진검승부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가톨릭의 또 다른 수장인 기즈공작 앙리를 포함해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

프랑스의 새 왕 앙리3세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언제까지 종교분쟁을 좌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점점 부를 늘려가는 상황에서

종교적이면서 정치색을 띤 내전은 결국 제살 깎아먹기 처럼 느껴졌지요.

 

 

“칼뱅주의 개신교는 위대하다.” 쿠트라 전투에서 나바르의 왕 앙리4세의 승리로 개신교도들이 힘을 얻었다.

 

마침 1587년 개신교도를 이끈 나바르 앙리
프랑스 가톨릭 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개신교와 타협이 불가피한 정치적 순간.
이를 가로막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극단적인 가톨릭교도였던 기즈 공작 앙리였습니다.

 

평화의 방해꾼 기즈공작을 제거하라
“기즈 공작을 궁에 들라 하라.”

 

왕 앙리 3세가 꾀를 냈습니다.

기즈 공작을 입궁시킨 뒤,

와인과 고기, 여인을 대접하지요.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였습니다.

술에 취한 기즈 공작이 앙리3세를 알현했을 때,

맞이한 건 중무장한 경비병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살해당하지요.

왕 앙리가 신하 앙리를 죽인 셈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평화를 위해 암살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큰 권력은 언제나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기즈 공작, 진작에 왕명을 따랐어야지.” 앙리 3세가 죽은 기즈공작을 쳐다보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복수는 복수를 불렀습니다.
가톨릭 광신도들은 왕 앙리3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자크 클레망이라는 22살의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프랑스 왕을 암살합니다.
기즈공작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앙리3세 역시 아들이 없이 떠났습니다.
발루아 왕조의 종말이었습니다.

 

두 앙리의 죽음으로 프랑스는 깊은 시름에 빠집니다.

왕위 계승자는 ‘개신교도’ 나바르의 왕 앙리4세 뿐이어서였습니다.

프랑스 위그노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환영했습니다만

가톨릭은 반란을 꾀하고 있었지요.

프랑스의 정치적 환경은 그야말로 ‘시계 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왕 앙리3세는 왕실 혈통이 흐르는 나바르의 왕 앙리4세를 자신의 후계로 인정했다. 본인에게 자식도 없어서였다.

 

 


가톨릭 국가(프랑스)의 왕좌에 앉은 개신교 왕
 
“우리는 칼뱅주의 개신교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

 

앙리4세는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 역시 프랑스의 왕족 혈통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589년의 일입니다.

그 유명한 ‘부르봉’왕가의 시작이었습니다.

 

 

헤라클레스로 묘사된 앙리4세. 강력한 가톨릭 동맹을 무찌른 데 대한 찬사를 보내는 그림이다. 화가 투생 뒤브뢰이 그림.

 

 

프랑스는 점입가경으로 더욱 분열합니다.
교황 식스투스 5세부터 “그는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스페인은 가톨릭 연맹을 결성해 프랑스를 공격할 태세를 갖췄지요.
대관식도 차일피일 미뤄집니다.

 

위대한 선택은 가장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앙리4세가 신하들을 모아놓고 선언합니다.

 

“짐은 오늘 가톨릭으로 개종하노라.

이와 동시에 프랑스 내에 위그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다.”

 

그 유명한 ‘낭트 칙령’입니다.

왕이 종교를 카톨릭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개신교 위그노 교도들의 안전까지 보장하는 놀라운 정치력이었지요.

(그의 내연녀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조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Paris vaut bien une messe”(파리는 가톨릭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앙리 4세가 무릎을 꿇자, 프랑스가 다시 일어납니다.

 

 

 

“파리는 미사를 드릴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입니다. 저 앙리 4세는 오늘부터 가톨릭교도입니다.”

 

 

낭트 칙령 문서. 이 문서 하나로 프랑스에서 종교적 자유가 인정됐다.

 


부국의 길로 달려 나가는 프랑스
 
통합된 프랑스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국가 재정을 통합하고 다리와 운하를 건설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름 난 퐁네프 다리를 건설한 것도 앙리 4세였습니다.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건설도 속도가 붙습니다.

현재 캐나다 퀘백이 불어를 쓰는 것도 앙리4세의 지원 덕분이었지요.

그의 치세 하 왕정이 탄탄히 자리 잡은 덕분에

루이 14세와 같은 부르봉 절대왕정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학자들이 앙리4세를 Henri le Grand(앙리 대왕)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의 후손인 루이14세가 종교적 자유를 명시한 낭트칙령을 폐기하는 건 또 다른 아이러니지만요.

 

 

현대 프랑스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 앙리 대왕. 뒤쪽으로 파리 시내가 보인다.

 


‘새 신부’ 마르가리트는 어떻게 지냈을까요.
앙리4세와 마르가리트의 혼인은 무효가 됩니다.
마르가리트가 불임임이 밝혀지면서 교황청이 두 사람의 혼인무효를 승인합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쿨한 관계.

궁정에 머물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요.

마르가리트가 자기 상속재산을 받을 사람으로 ‘루이13세’를 지명합니다.

루이13세는 앙리4세가 새 부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낳은 아이입니다.

전 남편의 아이에게 상속재산을 남긴 셈입니다.

두 사람 관계가 얼마나 남다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여왕 마고’의 한 장면. 마르가리트는 전 남편 앙리4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후로 프랑스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동화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610년, 또 다른 가톨릭 신자들이 광장에서 앙리 4세를 암살합니다.
프랑스는 그렇게 명군을 잃었지요.
 
광신자들 혹은 통치자에게 맹종하는 자들이
국가를 좀먹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지금 어떤 도그마에 빠진 것은 아닌지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프랑스 파리 도심에 앙리 4세가 암살된 장소에 새겨진 현판.

 


퐁네프 다리 위 앙리 4세의 동상.

 


[네줄요약]

ㅇ프랑스 앙리 4세는 ‘앙리 대왕’(Le Grand)으로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임금이다.

ㅇ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해결한 존재여서다.

ㅇ개신교도였던 그는 자신이 개종하는 대신, 개신교도들의 종교 자유를 보장(낭트 칙령)했다.

ㅇ그는 와이프인 마르가리트를 두고 수 없이 바람을 피워 성병을 달고 살기도 했다.

[참고문헌]

ㅇ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2016년

ㅇ김충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종교정책, 종교적 자유의 길을 만들다,인문예술학회,2023년

ㅇ박효근, 위그노 정체성의 역사적 변화 - 16세기 종교내전에서 18세기 이민공동체의 형성까지

 

 

 

 

이글은 아래 강영운 기자님이 쓴 기사의 글을 옮겨온 글이며

글 제목을 수정하고, 가독성을 위해 사진과 글을 요소요소 수정 했음을 아울러 밝힙니다.

또한 가독성과 명확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구절에 색상처리와 문장을 분절, 행으로 분리했음도 밝힙니다.

매일신문의 강영운 기자 penkang@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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